< 눈 속이기 >
광휘의 궁전을 나서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란이었다.
마안 일족의 족장, 란은 별을 보는 이로 태호가 동료로 포섭한 바 있는 인물이었다.
란은 마치 태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광휘의 궁전 앞에 앉아 저편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그의 맑은 목소리에, 태호가 고개를 까닥였다.
“예.”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뉘엿뉘엿 해가 져 가는 하늘 저편, 총총히 별이 박히고 있었다.
“운명의 굴레가 점점 더 빠르게 돌고 있습니다. 저 하늘의 운명성좌(運命星座)가 얼마 전부터 빠르게 돌기 시작했죠. 동시에, 혼돈의 별은 빛을 점점 더 강하게 띠어 가니...”
그가 일어서서 태호를 보며 덧붙였다.
“조만간, 혼돈의 좌가 움직일 겁니다.”
“......!”
란은 뒷짐을 진 채 자박자박 걸음을 옮기며 재차 입을 열었다.
“헌데, 계기가 필요할 듯하군요. 특수한 계기가 있지 않는 한, 아직은 보류 단계라고 보여집니다. 아시는 바가 있으신지요?”
아는 바는 없다.
허나, 태호는 로만이라는 좋은 정보원이 있으니 큰 문제 될 것이 없어 보였다.
* * *
“아니 이것은...?”
드워프들의 수장 엑셀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머 슈트를 본 드워프들이 여기저기서 모여들었다. 엑셀은 태호를 보며 물었다.
“이건 아머 슈트가 아니던가?”
“아십니까?”
“알다마다? 이 아머 슈트도 드워프들의 역작 중 하나라 불리던걸.”
그런 설정이 숨어 있었다니.
태호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반문했다.
“그렇습니까?”
“내 알기론 이것들... 하늘성의 사대가문에서 의뢰를 받았던 것인데. 어찌 자네 손에 있는가?”
“흠... 어쩌다 보니요.”
엑셀은 태호를 빤히 보다 어깨를 으쓱였다.
“뭐, 알겠네. 그런데, 이것을 어찌해 달라는 말인가?”
“네 개의 아머 슈트가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네 개는 사대가문의 아머 슈트들이죠.”
“......그런데?”
“이것들을 합쳐 한 등급 높은 제작품으로 만들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호오.”
엑셀이 두 눈을 빛냈다. 엑셀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듯하다 입을 열었다.
“허나, 그렇다면 이 아머 슈트를 제작할 때 소모된 재료들이 필요할 걸세. 그 재료들은 하늘성에서도 고급 재료로...”
태호는 군말 없이 인벤토리를 열어 하늘성의 희귀 금속들을 쏟아냈다.
“히이이익!”
엑셀이 광석들을 살피다 기절해 버렸다.
“......”
“헉... 천공철이다.”
“부유원석이다!”
드워프들이 한 마디씩 던졌다. 태호는 그들을 보며 씩 웃었다.
잠시 후, 엑셀이 깨어나 태호를 보다 재료를 보기를 반복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노, 노, 노력은 해 봄세.”
“믿겠습니다.”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음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자, 다음은 이겁니다.”
태호가 꺼내 든 아이템은 ‘듄의 두 번째 목숨’ 이었다.
이 녀석은 상의를 담당하는 에픽으로, 옵션은 두 개의 목숨이다.
“이건...”
당황해하는 엑셀을 보며 태호가 입을 열었다.
“매우 불편한 상태입니다. 저는 이것이 상의가 아니라, 또 다른 영역의 장착 장비였으면 합니다. 예를 들어, 체내에 흡수되어 장착 부위를 차지하지 않게 된다거나요.”
태호의 말을 엑셀이 금세 알아들었다.
“요컨대, 장착 시 양도가 불가능한... 자네가 가진 데스나이트의 심장 같은 역할 말인가?”
“바로 그렇습니다.”
“흠...”
엑셀이 생각에 잠겼다. 이내 그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어쩌면... 순수의 강철과 하늘성의 재료들을 이용한다면 가능성 있을지도 모르겠군.”
이것도?
태호가 씩 웃었다.
“그럼.”
인벤토리창에서 보유한 모든 순수의 강철을 꺼냈다. 420개가 넘는 용량이 한 번에 나타나자, 엑셀이 이를 악물었다. 기절을 참는 듯했다.
태호는 고개를 숙였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드워프들의 공방을 나서자, 완성돼 가는 마을이 보였다.
저편의 언덕에 걸터앉은 카자토스가 태호를 보더니 살짝 고개를 까닥여 보였다.
태호 역시 고개를 까닥였다.
이제 볼카노스의 차례다.
로키의 신전에 용과를 하나 바치고 로키와 볼카노스를 동시에 소환했다.
‘나오세요, 볼카노스.’
샤아아악-
볼카노스가 나타났다. 로키 역시 기다렸다는 듯 나타났다.
[금방 왔네?]
“아, 예.”
태호는 볼카노스에게 에픽 10개를 내밀었다. 하늘성에서 구한 10종의 에픽을 본 볼카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물로선 충분하다.]
[세상에, 저걸 다 어디서 구한 거래?]
“아, 하늘성을 털었습니다.”
[......]
로키는 이런 미친놈을 봤나, 라는 얼굴로 태호를 보다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태호는 멋쩍게 머리를 긁적였다.
볼카노스는 태호의 에픽 10개를 받아 들고,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자신의 다음 권능에 대한 고민을 하는 듯했다.
로키가 그런 볼카노스에게 말했다.
[야, 그거 줘.]
[그거?]
[그거 있잖아, 예전에 단일 공격으론 네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세다고 했던 거.]
로키의 말에 볼카노스는 침음을 흘렸다.
[흠... 아무래도 그쪽이 낫겠군.]
볼카노스가 이번엔 태호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네게... 이 권능을 하사하마.]
샤아아악-!
그의 어둠이 태호의 몸에 스며들었다.
[스킬 : ‘절멸의 화살’을 획득했습니다.]
[볼카노스의 상위 힘]
[등급 : ???급]
[쿨타임 : 1,000초][숙련도 : x[소모마력: 1,000]
[스킬명 : 절멸의 화살]
[절멸의 화살을 쏘아 낸다. 이 화살은 상대에게 직격한 뒤 2분간 지속되며 특수 상태이상 ‘절멸’을 가한다.]
[절멸에 당한 상대는 지속적으로 모든 상태이상이 리필되며 모든 감각이 정반대로 뒤바뀐다.]
[절멸에 당한 상대에게 전체 생명력의 10%에 달하는 생명력을 강제로 빼앗아, 일시적으로 자신의 생명력 최대치를 올립니다.]
[상태이상 ‘절멸’ 은 그 어떠한 상태이상 효과로도 중첩되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권능이 이 정도라면, 대체 볼카노스의 완전체는 얼마나 강한 걸까?
도통 감조차 잡히지 않는 막대한 신의 힘. 태호는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터무니없이 강한 신의 총애를 받는지 깨달아 버렸다.
[엄청나지?]
“......예.”
로키가 키득거리며 웃었다.
한편으론 의문이었다.
“그냥 신 아니셨습니까?”
[흠... 뭐, 그냥 신이 되었지.]
로키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덧붙였다.
[유배 가서 강등당해 버렸으니 말야.]
“.....”
태호는 두 눈을 깜빡이며 볼카노스를 보았다. 볼카노스는 별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
문득.
로키의 장난스러운 얼굴에, 씁쓸한 기운이 가득 들어찼다. 그렇게 볼카노스를 빤히 보던 로키는 어쩐지 조용한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일단. 로두스의 신변은 확보했다. 요즘 한창 바쁜 모양이더라.]
“아, 예.”
태호는 흘끔 볼카노스와 로키를 번갈아 살폈다. 그리고 인벤토리창에서 로만을 꺼냈다.
구슬이 된 로만이 불편한 기색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이런 젠장할 새끼들이... 억!
태호는 살짝 흔들어 준 뒤 물었다.
“야, 로두스도 부를 수 있지? 참고로 한번 거짓말 걸릴 때마다 1박 2일 쉼 없이 흔들어 줄 테니 신중하게 대답해.”
-......그렇다.
이미 거짓말은 통하지 않음을 깨달은 로만이 재깍 대답했다.
-진실.
진실이었다.
“어디 있냐?”
-휴우... 로두스는 본대륙에 있다.
태호는 이번엔 로키를 보았다.
[로두스 놈, 얼마 전부터 천상의 권좌에 들락거린다고 하더라. 그리고 사도들의 움직임이 영 심상찮다. 악신들 조질 거면 속전속결이 답일 듯해.]
로키의 말 중, 기묘한 것 하나가 있다.
“사도? 사도가 뭡니까?”
[흠...]
로키는 팔짱을 낀 채 고민하다 대답했다.
[특수 진압대, 정도일까?]
“특수 진압대요?”
[음... 지상에 큰 변고가 생길 것을 대비해 존재하는 상위 신들의 마지막 안전장치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군.]
로키는 영 불편한 얼굴이었다. 볼카노스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사도들은 세계의 맹약이 부분적으로 허용한 특수 타격대다. 그간 지상에 강림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들이 움직일 정도로 현 상황이 문제가 많다는 점일 거다.]
“세계의 맹약이 부분적으로 허용했다니요?”
[상위 신들이 이 세계를 조작하며, 그들의 권능을 쏟아 내 만들어 낸 다섯 존재이다. 그들은 일정 기간 동안 지상에 강림할 수 있다.]
“균형에 위배되지는 않습니까?”
[역풍을 어찌 버티느냐는 상위 신들만이 알 것이다. 그들의 움직임이 포착됐다는 것은 아무래도...]
볼카노스가 로키를 보았다. 그 두 신이 고개를 살짝 까닥였다.
태호는 직감적으로 그 뜻을 깨달았다.
“혼돈의 힘이 마음 놓고 활개 칠 환경이 조성될 수 없음을 깨달은 거군요?”
[바로 그렇다.]
태호는 조금 아까 란에게 들은 이야기를 했다.
“사실 혼돈의 좌가...”
로키는 그 이야기를 듣더니 어쩐지 흥미진진해진 얼굴로 잠깐 생각하다 말했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우선 그놈들의 두 눈을 한번 속여 볼까?]
“......속이다니요?”
[잘 생각해 봐라. 굳이 최악 직전의 상황에 사도들이 투입된다는 건, 그만큼의 패널티가 있기 때문일 거야. 그럼, 이쪽에서 혼돈의 힘이 움직이는 것을 한번 보여 줘 두 눈을 속이는 거지.]
“......!”
[지금부터 조작질에 들어간다. 우선, 너는 내가 말 하는 대로 사전작업에 들어가라.]
로키의 계략이 이어졌다.
......태호는 얼마 전, 악신 조겐을 포박했던 그 자리에 도달했다.
무인도에 놓여 있던 그의 신전은 이미 흔적을 알아볼 수 없도록 아작이 났다. 허나, 자세히 본다면 미약하게나마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태호는 로만을 꺼냈다.
팡!
로만이 인간이 되었다. 그는 불신 가득한 두 눈으로 태호를 보았다.
“이런 젠장, 어쩌라는 거냐?”
태호는 코를 후벼 파며 로만에게 말했다.
“혼돈의 힘 개방.”
“.....?”
“빨리 새끼야.”
지이이잉-!
로만이 혼돈의 힘을 끌어 올렸다. 생각보다 보잘것없는 그 모습을 보면서 태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더 힘내 봐.”
“이, 이이익!”
놈이 몸부림을 쳐 봐도 허사였다. 태호는 혀를 끌끌 차며 로만에게 물었다.
“야. 대장군 둘 남았지?”
“......그, 그렇다만?”
“데페로랑 헤파이돈이었지? 걔들 중에 빨리 나오는 놈 누구야?”
“......”
로만이 우물쭈물했다. 태호는 한 대 두들겨 패려다, 로만이 입을 열자 손을 내렸다.
“이렇게 된 거 솔직히 말하마. 어차피 다 조져 버렸고, 거짓도 통하지 않을 테니...”
로만은 태호를 똑바로 보았다.
“가장 빨리 나오는 것은 데페로일 거다.”
-진실.
“어디서?”
“내 계획상, 샴이 패한 직후부터 데페로는 혼돈의 좌가 움직일 때 그곳에서 나타날 예정이었다.”
예정이었다?
태호는 팔짱을 꼈다.
“어째 원할 때 부를 수 있는 것처럼 말한다?”
“본래는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네놈이 깽판을 쳐 준 덕에 혼돈의 권좌가 조금 더 빨리 열리게 됐다. 운명이 점점 더 시간을 앞당긴 탓이겠지.”
놈이 투덜거렸다.
“그렇다 이거지...”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호 덕에 리얼 포스의 세계는 과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빠른 발전을 하고 있기는 했다.
“혼돈의 좌 부르자.”
“음?”
로만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무, 무, 무슨 꿍꿍이냐?”
“부르자. 데페로 부르자. 어차피 넌 배신자니까, 두 번 세 번 배신해도 아무도 뭐라 할 사람 없다. 그치?”
태호의 말에 로만이 두 눈을 찢어질 듯 크게 떴다. 태호는 로만에게 ‘협박’이 먹힌다는 것을 진작에 알아챈 바 있었기에, 그가 망설이자 바로 구슬로 변환했다.
펑!
-이이이익!
“어디 보자... 일단 펜삼이 코스부터 밟아 볼까.”
태호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펜삼이를 부르려 하자, 로만이 빽 소리쳤다.
-제, 제기라아아아알! 좋다! 부르자! 제발 흔드는 것 좀 적당히 해라아아아!
그제야 태호가 놈을 인간으로 변환시켰다. 그리고 그 앞에서 능글맞게 웃었다.
“너 진짜 나쁜 놈은 나쁜 놈이다. 동료보단 고통으로부터의 해방, 뭐 이런 게 더 중요하다 이거냐?”
“......”
로만이 분통 터진다는 듯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 눈 속이기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