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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전설-144화 (144/194)

< 혼돈의 좌 >

“혼돈의... 유산이... 제법... 필요 하다.”

로만이 이를 갈며 말했다. 태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몇 개나?”

“대략... 네 개.”

네 개.

태호의 수중에 있는 것은 총 두 개였다. 혼돈의 유산이 필요해지는 날이 올 줄은 몰랐으니, 제물로 쓰는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흠...”

어찌 구한다, 라는 생각을 하던 태호는 문득 그런 고민이 무의미함을 깨달았다.

“야.”

“......”

흠칫! 하고 놀라는 것이 보였다. 태호는 로만의 어깨에 손을 얹고 토닥였다.

로만을 잠시 돌려보낸 뒤, 태호는 번거롭지만 다시 로키를 불러냈다.

[오호. 데페로라고?]

로키의 입가에 웃음이 짙어졌다.

[이건 의외로 더 수월해지겠군.]

“수월해지다니요?”

[데페로는 마침 둘째라면 서러운 돌대가리에 막무가내다. 그리고 어디 보자... 아자무스라면 딱이지.]

로키가 태호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해 주었다.

듣고 난 뒤, 태호가 물었다.

“정말 그 정도로 충분할까요?”

[암만. 하하하! 벌써부터 기대되는걸.]

......이곳은 대륙 남부, 대도시 안타라스 슬램이다.

과거 머더러들의 성지나 다름없던 대도시에는 제법 인구가 북적인다.

머더러들은 사실 딱히 갈 곳이 없다. 최근에는 언노운이 출몰하는 일도 거의 없어, 머더러들은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추세였다.

태호는 그곳으로 저벅저벅 걸어 들어갔다.

‘따지고 보면 당연한 일이었네.’

머더러들을 허용하는 무법 도시.

그곳에 혼돈의 유산이 잠들어 있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지도 모른다.

-유산은... 이 도시의 중앙... 조각상 속에 숨어 있다...

로만이 괴롭다는 듯, 짜내는 목소리로 꿍얼거렸다. 태호는 천천히 안타라스 슬램의 입구에서 문득 떠올렸다.

‘아, 그렇네.’

과거 이곳을 방문해 머더러들을 싹쓸이했던 이유는 바로 ‘군자의 지팡이’ 때문이었다.

군자의 지팡이는 사냥한 몬스터 수, 그리고 사냥한 인간 수에 따라 마법 공격력이 오른다. 그리고 그 최대치를 맞추게 되면, ‘군자의 시련’이라는 것을 클리어해서 최대치를 늘려야 했다.

그간 가야지 가야지 하면서도 영 짬 낼 겨를이 없었던 것 같았다.

태호는 그 점을 되새기며 도시의 전경을 돌아보았다.

여기저기 머더러들이 가득했다.

그들의 시선에 태호는 별종으로 보일 뿐일 테지만, 이제는 다르다.

“헉.”

“저거 언노운 아니야?”

“맞네...”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봐, 저 누더기 패션... 누가 봐도 언노운이다.”

누더기...

태호는 새삼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며 이마를 짚었다. 다시 고개를 들 무렵.

“시팔, 튀어! 걸리면 아작 난다!”

“싸워 보자! 우리가 사람은 더 많아!”

“미친놈아, 저거 예전에 혼자서 여기 다 털고 간 놈이잖아! 이젠 신이랑도 맞짱 뜨는데 어떻게 싸워?”

머더러들이 일사불란하게 도망치고 있었다. 누군가는 스크롤을 찢고, 누군가는 로그아웃을 하고 있었다.

태호는 피식 웃으며 그들 사이를 걸어 들어갔다.

“우아아악!”

머더러들이 혼비백산해 흩어지고, 빠르게 사라져 갔다. 태호가 그곳에 등장한 지 정확히 5분도 안 돼, 그곳은 조용해졌다.

태호는 안타라스 슬램 정 중앙의 석상에 섰다.

각 대도시마다 신들의 조각상이 서 있다. 예를 들어, 노펜시아는 풍요의 여신 헤페의 조각상이 서 있다.

그렇다면 이곳은?

태호는 서 있는 신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석상은 한 남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양팔과 다리가 지나칠 정도로 가늘고, 깡마른 얼굴이었다. 허나 날카롭게 찢어진 두 눈, 그리고 전신에 새겨진 기괴한 문신들이 눈에 띈다.

-저건 메피스토펠레스다.

메피스토펠레스...

태호는 그 악신의 존재에 대해 떠올렸다. 과거의 리얼 포스에서는 등장한 바 없던 신이었다.

“옛날엔 나온 적 없었는데? 저것도 악신계냐?”

-큭... 저건 통제하기 힘들어 쉽게 부르지 않던 녀석이니까. 내가 아는 한 진정 미친놈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로만은 뒷말을 삼켰다.

이제 그가 아는 진짜 미친놈은 메피스토펠레스가 아니라, 태호였다.

“흠, 그렇다 이거지.”

태호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신을 상대할 힘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신들과의 싸움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안다.

혼돈의 결계를 통해 강림시킨 뒤, 결계를 해제해 역풍을 없앤다면 일단 악신 사냥에 무리는 없을 터. 허나 섣부른 행동은 자제할 생각이었다.

태호는 볼카노스를 소환해 의견을 물었다.

[메피스토라...]

볼카노스는 침음을 흘리다 대답했다.

[그는 마도사다. 악신 중에서도 상당한 고위 쪽에 속하지. 우선 지금은 확실한 쪽부터 해치우도록 하지.]

일리 있는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태호는 볼카노스를 돌려보내고, 그 메피스토펠레스의 석상 꼭대기로 올라섰다.

석상이라지만 꽤나 거대한 크기였기에 서너 명 설 자리가 있었다.

-후우... 날 보내 줘.

로만을 인간화했다.

로만은 그대로 메피스토펠레스의 석상 머리 위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구우우웅-!

전신에서 섬뜩한 혼돈의 힘이 주입되며, 석상이 진동하더니 혼돈의 유산 두 개가 나타났다.

태호는 그 두 개를 살펴보았다.

“훌륭하군.”

“칫...”

펑!

로만을 구슬로 바꾼 뒤, 유산 두 개를 챙겼다. 장착 귀속 등급은 아니었고, 보통 평범한 유산이었다.

그다음으로 향한 곳은 한 유니크급 던전이었다.

[던전 : -유니크- 심연의 복마전]

[해당 유니크 던전을 첫 개방한 유저입니다.]

[특별 던전 보너스!]

[축복!]

[3일 동안 던전 내의 경험치량과 아이템 드랍률이 50% 상승합니다.]

[던전이 오픈된 첫날 한정, 올 스텟 10 상승의 축복을 받습니다!]

이 던전은 태호도 기억에 없던 던전이었다.

“너, 잘도 이런 델 아는구나?”

-......

던전 자체는 크게 독특하지 않았다. 사방을 둘러 본다.

[Lv. 340]

[심연의 피조물]

주된 몬스터 라인은 340레벨~460레벨 사이의 몬스터들이었다. 몬스터 레벨 구간이 꽤 다양해, 여러 시도를 해 봄 직하겠단 생각이 든다.

‘다 나와.’

정령계의 문이 열리고, 아르카네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나 불렀지?]

“응. 이리 와.”

태호는 아르카네를 받아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르카네는 오늘 총명해 보이는 두 눈을 한 채, 예쁘게 꽃 핀을 했다.

뒤이어 나타난 막시무스 역시 기지개를 펴며 태호를 맞았다.

[나의 주군 카이저! 최근 나를 부르는 일이 매우 뜸해졌더군!]

“응. 미안하네... 그러니까, 오늘은 마음껏 놀아도 좋아.”

막시무스는 두 눈을 깜빡이다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여기서 말인가?]

“그럼 그럼.”

태호는 최근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 두 녀석을 빠르게 강화하기 위해서는, 역시 실전만 한 것이 없다는 결론이다.

아르카네가 두 눈을 반짝였다.

[나 싸워? 이제 싸워?]

“그래. 마음껏 싸워 봐.”

그리고 분신체 하나를 만들어 냈다. 태호의 화면에 듀얼 모니터처럼 작은 추가 화면이 만들어졌다.

“이 녀석은 서포트만 해 줄 거야. 최선을 다해, 이곳을 초토화하는 것이 너희의 임무다.”

[......]

[좋아!]

아르카네는 벌써부터 신이 난다는 듯 전투 의지를 불태웠다.

태호는 씩 웃으며 막시의 어깨를 두드렸다.

“믿는다.”

[나, 나만 믿어라!]

팟!

그리고 그 상태로 던전을 주파하기 시작했다. 던전 끝자락에 있는 것은 거대한 촉수를 일렁이는 보스였다.

-저 녀석은 과거, 혼돈의 권좌를 지키던 하수인 중 하나였다.

즉. 저 녀석이 가진 혼돈의 유산이 하나 있다는 말이다.

[누구... 너는...]

놈의 생김새는 문어와 비슷했는데, 몸통 부분이 마치 건물처럼 대지에 서 있고 땅을 뚫고 들어간 촉수들이 사방에서 일렁이는 형세였다.

[이곳은... 혼돈의... 억!]

콰지지지직!

태호는 그 말을 끝까지 들어 줄 생각이 없다. 사정없이 작렬한 강화된 어둠의 명령이 놈의 몸통을 찢어발겼다.

[쿠아아아악!]

놈의 몸이 좌우로 찢어지며 부산물들을 뱉어 냈다. 태호는 그 속에서 튀어나온 혼돈의 유산 하나를 챙겼다.

그것까지 챙긴 태호는 다시 스크롤을 찢어 던전을 나섰다.

흘끔, 분신체의 화면을 보니 태호의 분신체와 막시무스 그리고 아르카네가 고군분투하며 유니크 던전의 입구부터 나아가는 것이 보였다.

‘좋아.’

이대로 놔두기로 한다.

이제 혼돈의 유산은 총 다섯 개다. 하나만 더 모으고, 계획을 실현해 볼 생각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북대륙의 외진 섬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 역시 로만이 보유한 혼돈의 힘을 매개체로 찾을 수 있었던 물건이었다.

그 외 각종 복잡한 방법을 통해 두 개를 추가로 더 찾았다.

도합 여덟 개!

거침없이 움직이는 태호에게, 로만이 물었다.

-하나만 묻자.

“뭔데?”

-......너 정말 뒷감당할 자신이 있어서 이러는 거냐? 정말 고위 신들과 싸우기라도 할 생각이냐?

태호는 걸음을 멈춘 채 대답했다.

“그래.”

-대체 왜?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어차피 다섯 대장군들을 다 합쳐도 판타로스 님의 위세에는 새 발의 피도 안 된다. 그리고 천계의 상위 신들이 가진 힘은 생각 이상으로 엄청나다!

놈이 이 정도로 말할 정도라면, 그들의 힘을 알 만했다.

태호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물었다.

“그럼 얌전히 죽으면 되지 굳이 배신자가 된 이유는 뭔데?”

-......

놈의 속을 빤히 들여다보듯, 덤덤히 말을 이었다.

“죽기가 싫어서지? 영원한 죽음을 맞고 싶지가 않지? 아... 너 혹시.”

태호가 예리한 곳을 짚었다.

“로만의 몸을 차지했으니, 순환의 고리가 돌아 신들의 종말이 와도 살아남을 수 있는 거구나?”

-...... 무, 무, 무슨 말이냐 그게. 그, 그런 거 없다!

-거짓.

태호는 비릿하게 웃었다. 나쁜 놈들은 하나같이 하는 생각이 똑같았다.

“그리고 유사시에 주박에서 탈출해, 나름대로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을 강구하고 있는 거구나? 그러니까 지금은 어떻게든 살아남자, 이런 식인 거지?”

-미, 미, 미친놈이!

로만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닌 게 아니라, 태호의 말이 정확했던 것이다. 마치 온몸을 빤히 꿰뚫어 보는 듯한 그 목소리에 오한이 서릴 지경이었다.

태호는 말을 이었다.

“네놈의 의도가 이렇든 저렇든, 지금 당장은 봐준다. 얌전히 협조해라.”

-......

마침내 로만이 백기를 들었다.

-......알았다. 지금은 네가 이겼다.

그가 천천히 덧붙였다.

-허나, 약속 하나만 해라. 이건 진지하게 임해 다오.

“뭔데?”

-만약...

로만이 싸늘하게 뇌까렸다.

-너의 싸움이 패배로 끝나게 된다면, 네가 죽기 전 나를 즉사시켜다오. 배신자의 최후로 나는 영겁의 지옥을 헤매게 될 테니, 그 꼴이 되고 싶지 않다. 네 수호자의 힘으로 나를 영원히 죽여다오.

그 목소리에 비장함이 서렸다.

태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끝까지 비겁한 놈이군. 좋다. 그건 약속하지.”

-후... 좋다. 그럼... 일단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으니, 최선을 다해 협력하도록 하지.

로만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놈은 이제 일시적 아군으로 완전히 돌아선 셈이다.

-우선 그럼... 혼돈의 좌를 깨우도록 하겠다.

태호는 그대로 망설임 없이, 잊혀진 섬으로 향했다.

본대륙 서남부 잊혀진 섬.

과거 태호는 드래고니악의 로크나이엘에게 섬으로 향하는 포탈 스크롤을 만들어 달란 의뢰를 넣은 적이 있었다.

스크롤을 이용해 단숨에 도착한 뒤, 사방을 둘러본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섬.

그것이 첫인상, 허나 이곳에 숨겨진 비밀이 있을 것이다.

태호는 로만을 인간의 형태로 만들었다.

아홉 번째 확장팩, 운명의 데페로.

놈은 현 상황에서 등장했을 때 샴보다 약할 것이다. 확장팩도 거의 끝자락이었고, 샴을 상대할 때보다 태호가 훨씬 더 강해진 것도 있었다.

인간형이지만, 온몸에 눈알과 촉수가 일렁이는 대장군 데페로.

녀석의 공격은 사안(死眼)이라 불리는 광역 상태이상으로 시작된다. 놈은 촉수를 이용해 상대를 포박하고, 그들의 생체 에너지를 흡수해 강해진다.

그렇다고 소수정예로 상대하기도 난해한 녀석인지라 워낙 애를 먹었던 게 아직도 생생했다.

또한 놈이 장악한 필드 위의 땅속을 뚫고 등장하는 날카로운 촉수 공격은 피아 구분이 없이 모든 것을 찢어발긴다.

네 개의 혼돈의 유산을 잊혀진 섬의 곳곳에 내려두었다.

“그런데, 이 섬이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거냐?”

인간이 된 로만은 툴툴거리며 대답했다.

“당연하다.”

“무슨 의미?”

“이 섬의 형태 자체가 거대한 육망성진을 만들고 있다.”

섬 자체가.

그 정보는 꽤 신선했다. 태호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또한... 이 사방을 보면... 아니지, 봐도 모르겠군.”

로만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말을 이었다.

“사방의 나무, 돌의 위치, 파여 있는 지형 등. 그 모든 게 진을 만들기 위한 장치라고 보면 된다.”

-진실.

이러니 통상적으로 보면 알 수가 없었던 거다. 태호는 그 정보들을 머릿속에 저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일단 나는, 아니 젠장... 우리는... 이곳에 혼돈의 좌를 부를 거다. 그리고 그것을 제물로 바쳐... 대장군 데페로를 조금 더 빠르게 떨굴 것이다.”

“흐음... 그 논리대로라면 다른 대장군 헤파이돈도 부를 수 있는 거냐?”

로만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불가하다. 운명의 흐름이란 즉, 시간의 흐름. 시간을 거스르는 것은 불가하지... 데페로가 등장할 운명의 흐름에 근접했기에 이런 식으로 조금 앞당기는 것뿐.”

로만은 태호가 내민 혼돈의 유산들을 쥐고 섬 곳곳에 설치하듯 내려놓았다.

“힘을 써서 활성화해라.”

로만의 퉁명스러운 말에 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비력을 주입하자, 혼돈의 유산들이 저마다 빛을 내며 불길하게 떨렸다.

고오오오오-

네 개의 유산을 모조리 활성화하자, 섬 전체가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궁-

하늘은 어느새 어슴푸레한 새벽의 빛을 띠고 있었다. 별들이 사라져 갈 시간이었지만, 섬이 진동을 일으키며 하늘의 색이 바뀌었다.

쿠구구궁-

어느새.

시커먼 하늘로 바뀌었다. 마치 CG 효과가 일어나듯, 밤하늘 위에 별 하나가 선명하게 빛을 발했다. 지나칠 정도로 선명한 그 별의 모습이 섬뜩할 지경이었다.

그 별 주위로, 여러 작은 별들이 뭉쳐 든다.

그리고 어느 순간.

끼이이이이익-!

요란한 소리를 내며 별이 추락을 시작한다!

< 혼돈의 좌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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