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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식전설-145화 (145/194)

< 돌대가리들 >

끼이이이-!

섬뜩한 굉음을 내며 추락하는 별이 점점 더 시야에 들어왔다. 어느새 섬 위로 그야말로 내리꽂히는 별.

싸아아아아-

허나, 폭발이나 요란한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다. 태호는 하늘의 그 현상을 과거 겪어 본 적 있다.

대낮이었던 무렵 일어난 그 현상은, 단 한 줄의 글자로 표현할 수 있었으니까.

‘확장팩, 혼돈의 좌!’

광휘와 함께 섬을 잠식하듯 쏟아지는 빛이 사그라지고, 그곳에는 수백의 인영과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태호는 그 선두의 남자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오렌.’

두 번째 확장팩 ‘혼돈의 좌’에서는 고대에 봉인되었던 혼돈의 별자리가 움직이며 시작된다.

악의 화신인 ‘오렌’이, 오랜 잠에서 깨어나 자신의 주인에게 이 세계를 바치기 위해 거대한 의식을 시행하는 스토리.

이제 와 스토리 따윈 망가질 대로 망가졌지만, 그가 가진 사명이 사라졌다는 얘기는 아니다. 지금의 이 흐름 또한, 또 하나의 스토리일 수 있다.

로만은 태호를 흘끔 바라보았다. 이내, 살짝 고개를 까닥여 보였다.

태호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긴다면 곧바로 쏟아부을 준비를 마쳤다.

[저장된 마법은 총 15개입니다.]

혹시 몰라 이미 ‘나락의 절대 구역’ 15연발을 준비해 두었다. 태호가 천천히 뒤로 물러서자, 로만이 저벅저벅 걸어 놈들에게 향했다.

선두에 선 오렌은 긴 롱코트를 입은 검은 머리의 남자였다. 나이는 20대 초중반 정도로 아주 젊었지만, 얼굴의 반쪽에는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 느껴지는 것은 사이한 혼돈의 힘이었다.

로만이 천천히 그에게 걸어갔다.

오렌은 그를 보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여 그를 맞았다.

“오랜만이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티로스 님.]

오렌의 목소리는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차갑다. 그가 살짝 고개를 들어 로만에게 물었다.

[헌데... 주박에 당하신 겁니까?]

로만이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천계 놈들과 마찰이 있었다.”

[저런...! 몸은 보전하신 겁니까?]

오렌은 로만을 뚫어지게 보았다. 볼카노스의 힘과 신비력이 섞여 있는 그 주박에서, 어떤 신력도 느낄 수가 없었다.

“간신히... 몸만 보전했다.”

[저쪽은?]

로만이 슬쩍 태호를 보며 손짓했다.

“저건 새로 얻은 내 몸종이다.”

태호는 천천히 그에게 걸어갔다.

“......”

몸종이란다.

[그렇군요. 상당히 깨끗한데...]

“이, 일부러 깨끗한 녀석으로 골랐다. 그편이 움직이기 편하니...”

[알겠습니다.]

그 역시 태호에게 신비력, 그리고 신들의 가호에 대해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우선... 빨리 데페로를 불러야겠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

오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두르겠습니다. 헌데, 누구에게 당하신 겁니까?]

“어...”

로만이 말을 흐렸다.

‘예상대로다.’

태호는 로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신력을 보는 놈들이라면 당연히 주박도 보인다. 근데, 주박에서 신력이 느껴지지 않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벌어져. 신비력은 탐지가 안 되니까 말이지. 그럼 당연히 물어보겠지? 그때 이렇게 떡밥을 던져 보는 거야.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자무스라는 신을 아십니까?”

오렌이 태호를 보며, 태도를 바꾸었다.

[아자무스? 섬광의 아자무스 말인가.]

그런 별칭이 있었다.

“예. 아자무스와 다툼을 벌이시다, 결국...”

오렌의 안색이 바뀌었다.

[사실입니까, 사티로스 님?]

로만은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태호를 보다가, 두 눈을 깜빡이더니 살짝 고개를 까닥였다.

다시 오렌을 보는 로만의 얼굴엔 침음이 가득했다.

뛰어난 연기다.

“그렇다... 아무래도 천계 놈들이...”

태호가 말을 이었다.

“기괴한 계략을 짜는 모양입니다. 현재, 등장했던 다른 대장군들과 장군들 역시 놈들 손에 사라졌죠. 아무래도 저희는 그것이.. ‘사도’들의 소행이 아닐지...”

[과연...]

오렌은 팔짱을 낀 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듯했다.

[주박을 걸었다는 것은 사티로스 님을 완전히 제압하겠다는 뜻. 이는 동맹의 결렬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무력행사입니다. 헌데 주박에서... 전혀 신력이 느껴지지 않는군요.]

태호는 기다렸다는 듯 덧붙였다.

“이는 주박이 온전히 걸리지 않았기 때문으로 추측됩니다.”

[흐음...]

로만이 포기한 얼굴로 태호의 말에 장단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들의 힘이 필요해 강림시켰으나, 오히려 나를 공격하더구나.”

[알겠습니다. 의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렌의 수하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의식을 치를 준비를 마쳤다.

콰아아아-

그들이 거대한 혼돈의 힘을 모아 갔다.

로만이 후다닥 태호에게 달려와 다급히, 낮은 목소리로 따졌다.

“야, 대체 어쩌려고 그런 거짓말을 한 거냐?”

태호가 말없이 씩 웃자, 로만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런 빌어먹을, 설마... 천상의 권좌와 혼돈의 권좌, 두 동맹을 이간질하기라도 할 셈이냐?”

“똑똑한걸.”

태호의 말에 그는 절망한 듯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헌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게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나... 나쁘지 않군. 구, 구체적인 계획은 어찌 되는 거냐?”

로키의 말을 떠올린다.

-그러니까, 그걸 이용해서.

“그러니까-”

-가장 다혈질에 말 안 통하는 머저리인... 게다가 데페로와 사이가 안 좋은, 아자무스를 조지게 하자.

“나는 지금부터 아자무스를 깨우러 갈 테니, 내가 말한 대로 전달해라.”

태호는 속닥거리며 로만에게 로키에게 들은 말을 전했다. 로만은 시시각각 얼굴 표정이 변하다가, 일리 있다는 듯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태호는 곧바로 몸을 움직였다. 아자무스의 제단 위치는 사전에 로만에게 알아 둔 바 있다.

스크롤을 찢고, 태호가 움직였다. 움직이기 전, 분신체 하나를 남겨 두었다.

이곳의 상황을 면밀히 살피기 위해서다.

* * *

그 사이.

콰아아아아-!

섬 전체에서 사이한 혼돈의 기운이 가득 모여들고 있었다.

오렌과 수하들이 손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우리의 힘과 지식, 그리고 기억을 제물로 바치노니-!]

콰아아아앗!

어느새 사방은 시커먼 먹구름으로 가득찼다. 그 먹구름 사이로 쩌억- 공간이 갈라졌다.

그 사이로 회색빛의 세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기형적인 건물, 그리고 회색 안개가 짙게 낀 그 세계를 움직이는 그림자들.

그 중.

거대한 두 인영이 비추어진다.

그림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나는 데페로, 다른 하나는 헤파이돈이었다.

회색빛 소용돌이가 몰아친다.

개중 데페로의 그림자가 일그러지며, 쑤우욱- 빠져나왔다.

고오오오-

뿜어져 나오는 혼돈의 힘이 더욱 가속화되었다.

오렌과 그 수하들의 몸이 점점 더 쪼그라든다. 놈들은 어느새, 회색 안개처럼 변해 완전히 사라졌다.

그리고.

쿠-웅!

권좌에서 빠져나와 지상에 착지한 거대한 존재 하나가 있었다.

[혼돈의 대장군]

[데페로]

그는 장신이 10미터에 달하는 거인이었다. 또한, 전신에는 눈알이 빼곡히 박혀 그야말로 끔찍한 외형을 자랑했다.

양팔은 촉수처럼 꿀렁이고, 점액질로 뒤덮여 있었다.

[크으으으으-]

사방으로 혼돈의 빛이 내리꽂히며, 네 명의 장군급 역시 등장했다.

놈들은 등장하자마자 데페로와 로만에게 충성을 맹세라도 하듯,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조아렸다.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이번 회차가 시작된 건가, 사티로스!]

“그렇다, 데페로!”

데페로는 오렌과 수하들의 기억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는지 별다른 설명 없이 상황을 온전히 이해한 듯했다.

[천상의 권좌... 이 개자식들이 먼저 동맹을 깨고자 했다는 말인가!]

그가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게다가 아자무스 이 건방진 개자식...! 내 당장 이것을 찢어 죽여...]

“그건 무리다 데페로!”

로만이 호통을 쳤다.

“진짜 죽이면 문제가 커진다! 게다가 넌 아직 아자무스를 상대하기가 힘들지도 모른다!”

[뭐라? 지금 나를 무엇으로 보는 건가! 사티로스! 아자무스 따위는 한 방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크르르르르! 감히 나를 뭐로 보고!]

그 험상궂은 얼굴에 분노가 가시질 않았다.

로만은 놈의 힘을 면밀히 살폈다.

‘저럴 수가?’

그의 힘은 샴 보다 훨씬 더 강하다.

‘헌데... 어찌?’

그의 비정상적인 힘 회복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위대한 혼돈의 주인께서 네게 새 힘을 하사하신 거냐?”

[물론이다!]

데페로가 호탕하게 소리쳤다.

[그분께서는 이미 운명의 굴레를 눈치채신 지 오래! 내게! 운명의 굴레를 버텨 낼 힘을 더 하사하셨다! 또한 네게! 명하셨노라!]

“내게...?”

[그렇다!]

데페로의 말이 이어졌다.

[주인께서! 예정보다 조금 더 일찍 깨어나기로 하셨노라! 때문에! 너는 준비를 철저히 하여! 그분을 맞도록 하여라!]

“......!”

로만이 두 눈을 찢어질 듯 크게 떴다.

* * *

같은 시각.

“......!”

아자무스의 제단을 향해 달리던 태호 역시 두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이건 호재라고 봐야 할까, 절망이 더 빠르게 찾아올 거라고 봐야 할까.

태호는 복잡하게 머리를 굴렸다.

판타로스!

그 악몽의 존재가 예정보다 더 빠르게 강림한다는 말!

허나, 이것은 어찌 보면 기회일 수 있다.

태호는 분신체의 화면으로 장군급들을 살펴보았다.

‘넨, 케롬, 레드맥, 푸켓.’

하나하나 익숙한 얼굴들이다. 과연 장군급이 지닌 힘들도 여지껏 마주친 녀석들보다 월등히 잘 회복되어 있었다.

저 정도면 전성기의 2/3 정도는 이미 회복한 셈이다.

뿐만 아니라, 데페로 역시 대강 느껴지는 수준은 7/10 신노스 수준이었다.

‘오히려 다행이야.’

태호는 새삼 ‘이중 맹약’의 섬뜩함을 느꼈다.

그 강대한 판타로스조차 이곳의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기 힘들다.

그뿐인가?

그 고강하신 천계의 고위 신들도 이중 맹약을 뚫고 온전한 정보를 수집할 수 없다.

-애초에 리얼 포스의 이중 맹약 결계를 만든 이가 너무도 대단한 수호 일족의 대사제 데칼이었던지라, 그것을 모조리 무효화할 수 없으니 나름대로의 일시책이었다고 보면 된다.

카실론은 그리 말한 적이 있다.

‘수호 일족의 대사제 데칼.’

그는 대체 얼마나 대단한 힘을 가졌던 걸까?

우선.

그래서 자신의 사념체인 사티로스를 보낸 것인데, 그 사티로스가 배신을 했다.

보통의 상황이라면 자살하고 ‘멸망의 날’을 기다리면 됐을 테지만, 상황은 이미 멸종했던 수호자의 힘을 지닌 태호에 의해 바뀌어 버렸다.

그렇다면 사실상, 현재 상황을 좌우할 수 있는 것은 태호와 저 로만뿐이다.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작두 한번 타 보자.’

상황을 좌우할 수 있는 힘을 원했다. 상황에 휘둘리는 것은 이제 지쳤으니, 제대로 한번 휘둘러 볼 생각이었다.

유령 표범이 달리기에 박차를 가했다.

파파파파팟!

그대로 태호가 쏜살같이 움직였다. 바다로 근접한 태호가 유령선을 띄웠다.

잠시 후.

태호는 서쪽의 외딴, 아주 작은 섬에 놓여 있는 아자무스의 제단을 찾아낼 수 있었다.

지이잉-!

남은 혼돈의 유산 두 개를 꺼내, 그들을 소환하는 결계를 만들고 특수한 각인을 남겼다.

고오오오오-

결계가 활성화되고, 태호는 흘끔 분신체의 화면을 살펴보았다.

-아자무스를 소환해 두고, 너는 자리를 뜬다. 바로 로두스 제단으로 가서 그놈을 소환해 작살을 내 버려라.

머릿속에는 아직 로키의 말이 맴돌고 있었다.

-아자무스와 데페로가 서로 싸우리란 확신이 있으십니까?

-그럼! 걔들은 태고시절에 박 터지게 싸우던 놈들이거든. 여전히 사이가 더럽게 안 좋지. 살살 약 올려 주면, 알아서 넘어오는 돌대가리들일 테니까.

-...너무 주먹구구식인 것 같은데요.

-아자무스가 펄쩍 뛰면 뭐 어떠냐? 사티로스가 당했다고 주장하면, 데페로는 길길이 날뛸 게 뻔한데. 으하하하!

화면 속 데페로가 외쳤다.

[사티로스! 당장 가자! 내 네게 아자무스 잡는 것을 보여 주마!]

태호는 몸을 틀었다.

로두스의 제단으로 향해, 동시다발적으로 놈을 해치울 생각이었다.

-걱정 마라. 두 돌대가리들은 만나면 무조건 싸운다.

로키의 말을 떠올리며, 스크롤을 찢었다.

< 돌대가리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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