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후왕 >
태호는 손오공을 바라보았다.
-혹시 당신께선 모르실 수 있으나, 눈앞의 그 원숭이는 평범한 녀석이 아닙니다.
모를 리가.
이 녀석의 친해지는 방법이 싸우며 서로의 힘을 확인하는 것이라면, 피할 생각이 없을 뿐이다.
태호는 천천히 뒤로 물러서며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도술인가? 술법을 쓰냐?”
“마법이라고 부릅니다.”
씩 웃으며 전신에서 신비력을 끌어 올렸다. 순도 높고 정밀한 신비력이 솟구쳐 나와, 태호의 전신을 감쌌다.
“오...”
손오공이 침을 꿀꺽 삼켰다. 장난스러운 얼굴은 온데간데없어지고 한없이 진지한 얼굴이 되었다.
“좋아, 역시 너 강하구나!”
휘리리릭!
여의봉이 움직이며 손오공이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그럼 이쪽도 전력으로 간다!”
팟!
눈 깜빡할 사이 손오공이 접근해 들어왔다.
‘2/4 신노스급.’
예전이라면 기겁할 정도로 강한, 터무니없는 강자라 여겼을 터다.
허나 지금의 태호 역시 많이 강해졌다. 태호는 당황하지 않고 녀석의 접근을 허용했다.
휘리릭, 휘리릭!
신묘한 봉술이었다. 마치 춤을 추듯 여의봉이 태호의 급소를 가격해 온다.
‘보인다.’
태호는 몸을 비틀며 봉이 옆구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을 확인했다. 그 상태로 손오공의 팔을 잡은 뒤 가볍게 넘겨 버렸다.
가해지는 힘을 이용해 저 멀리 날아간 손오공이 빙글빙글 공중제비를 돈 뒤 착지했다.
쾅!
그대로 땅을 치며 달려온다. 태호는 빙긋 웃으며 어둠의 발걸음을 이용해 도망친 뒤, 손오공을 겨누었다.
‘강화된 중독.’
“으하하하! 이까짓 거!”
손오공은 피하지 않고 머리털을 한 움큼 뽑더니, 사방으로 흩뿌렸다.
“흩어져라!”
팡! 팡! 팡! 팡! 팡!
삽시간에 머리카락들이 하나하나 손오공으로 변해, 수십 마리로 늘어났다.
우끽끽끽! 우끽!
끼끼끽!
여기저기서 늘어난 손오공들이 여의봉을 빙글빙글 돌리며 태호를 타겟으로 삼았다.
“으랏차!”
첫 번째 손오공이 여의봉으로 태호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두 번째가 왼쪽을, 세 번째가 오른쪽 옆구리를.
삽시간에 사방이 포위당했다. 허나 태호는 오히려 느긋하게 자신의 반경에 막대한 광역기들을 쏟아 냈다.
‘폭사.’
콰콰콰콰쾅!
분신체들이 큰 대미지를 받고 주춤하는 사이.
‘냉혹한 정의, 고통의 연쇄.’
간만에 사용해 보는 스킬들이 모든 상태이상을 리필하고, 그것을 전이시켰다.
‘강화된 어둠의 폭탄 비.’
폭탄 비까지 맞은 분신체들이.
‘폭사.’
터지자.
콰콰콰쾅!
콰지지직!
분신체들이 단숨에 일망타진됐다.
“으하하하! 너 대단하다!”
그리고 남은 하나의 손오공에게 날아든 것은 ‘절멸의 화살’이었다.
손오공이 그것을 쳐내려고 여의봉을 휘둘렀으나.
쑤욱-!
“어?”
허나 신력에 준하는 힘을 막아 내진 못했다. 화살이 그대로 손오공에게 틀어박혔다.
‘폭사.’
콰콰콰콰쾅!
‘폭사.’
콰콰콰쾅!
‘폭사.’
콰지직!
무시무시한 폭사 연계가 시작되었다. 이미 절멸의 화살을 허용한 이상, 무한 상태이상 리필이 적용된다.
게다가.
“어라라?”
휘리리릭!
손오공은 달리려다가 공중제비를 돌기도 하고, 갑자기 뒤 돌아 저편으로 달려 나무 밑동에 머리를 박기도 했다.
“뭐, 뭐야!”
녀석은 당황한 듯 몸의 감각을 확인하더니, 이내 감을 잡았다는 듯 다시 태호에게 달려들었다.
‘감이 좋은데.’
상태이상 ‘절멸’을 당하면 감각이 제멋대로 바뀐다. 오른팔을 움직이려고 하면 왼발이 움직일지도 모른다. 그 감각의 차이를 금세 인지하고 전투로 돌아오다니, 그 자체로 대단했다.
쐐애애액!
바람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손오공의 모습이 잔상을 남기듯 움직여 온다.
허나.
콰지지직!
태호는 달려오는 손오공의 몸에 ‘강화된 어둠의 명령 15연발’을 쑤셔 넣은 뒤 슬쩍 한 걸음 오른쪽으로 물러섰다.
“쿠아아아악!”
달려오던 손오공이 15연발을 얻어맞곤, 그대로 태호의 옆을 스쳐 간다.
녀석이 허물어져 가는 것이 보였다.
힘의 차이는 이 정도였다. 너무나도 명확하고 대단히 차이가 나,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는다.
“우어어어억!”
허나 손오공이 쓰러지면서도 여의봉을 기어코 던졌다.
“커져라, 여의!”
콰지지직!
그대로 집채만 한 크기로 변한 여의봉이 태호에게 작렬했다.
태호는 그것을 빤히 보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여의봉은 태호의 몸에 그대로 직격했으나, 대미지는 느껴지지 않았다.
[26%의 방어막이 소모되었습니다.]
[대미지를 반사합니다.]
티-잉!
여의봉은 반사 대미지를 받고 저 멀리로 날아가, 별처럼 변해 사라졌다.
“우어!”
손오공이 그것을 보더니 벌떡 일어섰다. 온몸에 상당히 큰 대미지를 받았는지 휘청휘청하다가, 이내 털썩 무릎을 꿇었다.
손오공은 압도적인 힘의 차이로 패배했다.
‘신급은 아닌데.’
신체 능력은 어마어마했지만, 신력을 사용하지 못한다. 결국, 절대 태호를 이길 수 없다.
허나 녀석은 패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거나, 분한 기색이 없이 그저 즐거운 듯했다.
“정말 믿기지 않는 괴물이다. 넌 대체 뭐냐? 저 녀석보다 센데?”
태호는 흘끗 삼장을 보았다.
삼장은 이쪽을 빤히 바라보다가, 어느 순간 태호의 앞에 섰다.
그의 전신에서 은은히, 아주 잘 갈무리된 힘이 느껴졌다. 지독히도 선하고 순수한 기운이었다.
‘이게 법력인가 보군.’
법력 술력 등등은 비전력 같은 독자적인 힘들이었다. 마력보단 상위, 신력보단 하위다.
“당신께선... 혹여 어떤 신의 제사장이십니까?”
그가 조심스레 태호에게 물어왔다.
태호는 대답하기를 잠깐 주저하다, 그에게 반문했다.
“당신께서는요?”
“아, 이런 실례를.”
삼장이 합장을 한 뒤 자신의 소개를 했다.
“저는 관음보살님을 모시는 보잘것없는 아무개, 현장이라 하옵니다.”
관음보살.
이는 동방 대륙의 신이라고 보면 무방한 신이었다. 신임은 알고 있으나, 그가 어떤 성향의 신이고 상위 신과 교점이 있는 사람인지도 잘 모른다.
“잠깐만 시간을 주실 수 있을지요?”
“아, 물론입니다.”
잠시 생각하던 태호는 인벤토리창에서 조겐을 꺼냈다. 그리고 뒤로 멀찍이 떨어져 놈에게 속삭였다.
“야.”
-......뭐냐. 어라? 여긴 동방 대륙인가?
조겐은 어쩐지 고향에 온 듯한 목소리였다. 약간은 들떠 있었으나, 그것을 내색하기 싫어하는 듯했다.
태호가 심드렁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 너 관음보살 알아?”
-관음보살? 당연히 알지...
안다?
“네 주제에 어떻게?”
-......어떻게라니? 고향 동문인데? 멍청아? 죽고 싶냐?
고향 동문이라.
하긴, 조겐은 동방의 파계승. 모르는 것이 이상하긴 했다. 게다가 관음보살은 신. 조겐 역시 지금은 위상이 많이 추락했으나, 일단은 신이었기에 직위도 동등했을 것이다.
“관음보살의 성향은?”
-......
조겐은 말하기 귀찮다는 듯 투덜거리며 대답했다.
-그는 부처의 휘하에 있는 보살 중 하나다. 나와는 정반대의 세력이라고 할 수 있지. 어릴 적부터 고고한 척하는 것이 신물이 났던 게 생생하군.
“아, 그렇군.”
태호는 단숨에 이해했다.
부처.
고타마 싯다르타라고 불리나, 통칭은 부처.
그는 천상의 권좌에 있는 상위 신 중 하나다.
그의 휘하에 무수히 많은 보살들이 있으며, 보살이란 동방 대륙의 신과 동일한 쓰임으로 보면 된다.
부처라는 이름은 꽤 특별하다.
예전, 조겐과 로두스는 상위 신들 중 ‘부처’만이 유일하게 현 상황을 극렬히 반대한다고 말한 바 있었다.
즉.
부처의 보살들은 현재 천상의 권좌를 반대하는 세력이라고 보면 된다. 천상의 권좌가 혼돈의 권좌와 동맹하여 순환의 고리를 부수는 것에 대한 반대.
어쩌면 그것은 윤회라는 거대한 굴레를 지키기 위한 신념의 실천일 지도 모르겠다.
태호는 어쩐지 꽤나 마음이 놓여 긴 한숨을 내쉰 채 천천히 삼장에게 걸어갔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자, 태호도 살짝 고개를 숙인 뒤 입을 열었다.
“저는 바다 건너의 본대륙에서 온, 볼카노스 신을 모시는 제사장입니다.”
“제사장이라...”
삼장은 그 말을 곱씹었다. 제사장이라는 직위는 꽤나 생소한 편이지만, 이해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가 반문했다.
“헌데, 동방 대륙에 어인 일이십니까?”
“아.”
태호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정공법으로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실은, 분신술을 배우고 싶어 화과산을 찾은 겁니다.”
“분신술...?”
“저는 서방 대륙에서 혼돈의 힘과 싸우는 중입니다. 분신술을 배우면 더 효과적일 듯하여, 수소문하여 화과산을 찾게 되었습니다.”
더 자세히 밝힌다면 물론 그럴 수 있지만, 태호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이들이 모시는 상위 신의 성향을 안다고 한들, 그 아래 사람들의 명확한 성향을 알 수 없음이 첫째.
어디에서든 조심하고자 하는 것이 둘째였다.
“아...!”
허나 삼장은 대번에 이해한 듯 활짝 웃었다.
“먼 땅에서도 저희와 같은 선업을 쌓고 계셨군요. 저와 이 원숭이 녀석 역시, 관음보살님의 명을 받들어 혼돈의 힘을 잠재우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서방 대륙에도 혼돈의 힘에 잠식된 세력들이 제법 많았다.
대부분의 확장팩은 혼돈의 힘의 근거지인 본대륙에서 벌어지지만, 동방 대륙에도 그 잔재들은 무수히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예를 들어, 요괴나 귀신 마물 등이 즐비하게 돌아다닌다. 그것들을 정화하는 것이 동방 대륙의 메인 퀘스트의 일부였다.
삼장은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다가, 고개를 돌려 손오공을 바라보았다.
“네 이 녀석. 그 성질머리를 고치라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니?”
“하하하! 하지만 즐거웠다! 현장, 이 녀석 아주 세다! 마치 네가 쓰는 힘 같은 것을 쓰는데, 훨씬! 아주 훨씬 더 강하다!”
태호의 신비력을 말하는 것이다.
태호는 짐짓 시치미를 떼고 말했다.
“이는 본대륙의 드래곤들이 사용하는 비전력이란 힘입니다.”
“오호. 저도 오며 가며 듣기는 했습니다. 고등 지능을 보유한 일족이 있다는 말 말입니다.”
삼장은 그렇게 고개를 끄덕였다. 삼장의 시선이 손오공에게 닿았다. 준엄하게 꾸짖는 눈이었다.
손오공은 여의봉을 빙글빙글 돌리다 작게 만들어 허리춤에 차더니 늘어지게 기지개를 폈다.
“분신술을 배우고 싶다고?”
태호가 빙긋 웃으며 그에게 대답했다.
“예.”
“그래? 그럼 까짓 거 알려 주지 뭐.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하하하!”
손오공은 호쾌하게 웃으며 자신의 머리털 하나를 뽑아 냈다.
그것을 삼장에게 주며 뭐라 말하자, 삼장이 알았다는 듯 법력을 쏟아 냈다.
그의 머리카락에 법력이 들어차 신성한 빛을 발했다.
퉁!
어느새 머리카락이 책 한 권으로 변했다.
“나도 법력이나 술력을 배워야 하긴 하는데, 귀찮아서 미루고 있었걸랑.”
손오공은 그 책을 던졌다 받았다 하며 씩 웃었다.
“여태까진 그걸로도 충분했으니까. 근데, 안 되겠네. 이런 강자들이 널려 있었다니, 우물 안 개구리와 다를 게 하나도 없어.”
그가 태호에게 책을 내밀었다. 딱히 다른 요구사항이 없어,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그냥 주시는 겁니까?”
“그냥 주지 않고? 이제 우린 친구가 됐으니까?”
-진실.
참 속 편한 녀석이었다. 제멋대로 싸움을 걸어 놓고, 패배하고 나서 쿨하다니. 허나 이런 성격은 싫지 않다. 적어도 음흉한 것 보다는 훨씬 낫다.
태호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거래 불가 : 미후왕, 분신술의 서’를 획득했습니다.]
< 미후왕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