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제 데칼 (2)
기묘한 일이었다.
하늘 높이 치솟아 올라 이중 맹약을 뚫고 나니, 저 아래에 또 다른 세계들이 있었다.
사람이 사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세상들!
태호는 두 눈을 부릅뜬 채 그 세계를 내려다 보았다.
본대륙의 크기로 보이는 땅 하나, 그리고 저편 독립된 섬나라 같은 곳이 보였다. 이상하게, 시선을 집중하자 그곳이 망원경으로 보는 것처럼 가까이 보인다.
호화스러운 궁이 보이고, 거대한 성벽과 신성해 보이는 조각상들이 보였다.
문득.
그 궁의 테라스에 서서 저편을 주시하는 남자가 보였다.
‘로키...!’
그는 로키였다. 로키의 전신에서는 신력이 사정없이 요동치고 있었다.
‘그럼, 저 곳이 아스가르드!’
그렇다면 지금 태호가 내려다보는 것이 바로 천계라는 말이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요동친다.
대체 왜?
어떻게?
그 생각은 일단 잊기로 했다. 태호는 이 광경을 잊지 않기 위해 최대한 여러 곳을 살펴보기로 했다.
이제 시선을 돌려 보자.
남쪽에 거대한 섬이 있었다. 아니, 섬이라기엔 너무 크니 또 다른 대륙일 것이다.
오색 찬란한 대지가 보인다.
태호는 그 곳을 보았다.
마치 정령 같은 것들이 보인다. 구역이 나누어진 그 세계는 저마다의 정령들이 움직이며 독자적 사회를 구축하고 있었다.
‘저기가 정령계구나.’
잠깐만.
그런 거다
아르카네는 꽃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 꽃의 이름은 파리지옥, 식충 식물이었다.
아르카네는 이 녀석이 파리 몇 마리를 잡아 끈적한 액체를 뿜어 용해하는 과정을 빤히 지켜보았다.
[조져졌다.]
소녀는 그것을 관찰하다 문득, 고개를 반짝 들어 저편을 보았다.
[......?]
저 하늘 높이, 까마득히 먼 곳에서 아주 잠깐 익숙한 느낌이 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건, 자신의 주인인 카이저의 느낌이었다. 아주 잠깐, 그와 계약을 한 자신이 아니면 느끼지도 못할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쭈우욱-!
그 순간.
소녀의 눈앞에 게이트가 만들어졌다. 게이트 너머에서, 태호가 보였다.
[핫! 카이저!]
“그래.”
* * *
아르카네는 태호가 반갑다는 듯 후다닥! 달려와 태호에게 쑥! 뛰어들었다.
태호는 그런 소녀를 받아 들었다.
“읏샤!”
[방금 전에! 아니 좀 아까! 아닌가? 아무튼!]
아르카네는 신기한 것을 봤다는 듯 태호에게 조잘조잘 이야기를 시작했다.
[카이저 있었던 것 같아! 저기 말이야! 진짜야!]
“......”
놀랍게도 그 두서없는 이야기를 태호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역시 진짜였어.’
태호는 이중 맹약을 꽤나 가볍게 뛰어넘었다. 그것은 비단 대사제 데칼의 부름 때문은 아닌 듯하다.
‘바로, 이 신비력 3단계 덕분인 거야.’
3단계 신비력이 개방되자마자 태호는 이중 맹약을 뚫고 천계로 향할 수 있었다.
또한, 이제 태호는 마력 대신 신비력을 사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혹시.
태호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르카네는 태호의 심장에 귀를 기울이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 아파?]
“글쎄다.”
천천히, 아르카네가 빠져나온 차원 문을 바라보다 그곳에 손을 집어넣어 본다.
쑥-!
공간을 통과한 팔이 느끼는 촉감이 달라졌다. 이 너머, 특유의 싸늘한 바람이 느껴진다.
“......”
혹시나 모른다. 태호는 그곳으로 분신체 하나를 집어넣었다.
쑥!
분신체는 별 어렵지 않다는 듯 그곳으로 들어가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내부의 풍경은 별도의 모니터 화면으로 공유되니, 이제 남은 것은 놀랄 일 뿐이었다.
‘맙소사.’
분신체가 움직이는 데엔 아무런 제약도 없었다. 그저 애초부터 이 세계의 일부였던 것처럼 받아들여졌을 뿐.
[우와! 어떻게 간 거야?]
아르카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탁!
차원 문이 닫혔다. 허나 태호의 분신체는 그 내부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된다.’
된다!
진짜로 된다!
두근 두근 두근!
태호는 분신체를 조작해, 사방의 물건을 수집해 보기 시작했다.
[‘아이템 : 정령계의 비전초’를 획득했습니다.]
선명히 떠오르는 메시지.
쿵 쾅 쿵 쾅!
심장이 더욱 요란하게 뛰었다.
‘일단 죄다 모아!’
태호의 분신체가 움직였다. 녀석이 움직이며 보이는 모든 것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좋았어!’
과거의 시점에서도, 정령계의 물건이 리얼 포스의 대륙에 등장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잠깐만.’
태호는 잠시 멈칫했다.
정령계로 들어설 수 있다는 말은, 여러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태호는 조겐을 꺼냈다.
“야.”
-왜 그러냐?
“영산이 어디냐?”
-신선의 산 말인가? 그건 왜?
태호는 말을 길게 하는 것이 귀찮아, 조겐을 한껏 흔들어 혼을 쏙 빼놓은 뒤 다시 물었다.
“어디냐?”
-꾸에에에엑! 이런 빌어먹을...... 영산은... 쥬신, 쥬신의 북동부에 있는... 허나 네가 신선이 아닌 이상, 어차피 들어설 수도 없다!
‘그렇단 말이지.’
태호는 조겐을 집어넣은 뒤,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쥬신.
쥬신의 북동부로 향하는 길은 길었지만, 지금의 태호에게는 크게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없었다.
어느새 태호가 서 있는 온 사방은 자욱한 안개로 뒤덮여, 한 치 앞도 구분이 안 가는 지경이었다.
‘안개 지역에 영산이 있다 이거지?’
과거 유저들을 미아로 만들기 일쑤였던 골치 아픈 안개 지역에 영산이 있었다니, 그건 꽤 놀라운 정보였다.
전 생의 리얼 포스에서는 ‘영산’이란 게 있단 이야기만 들었지, 직접 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팟!
태호가 안개 지역을 주파해 나갔다. 가만 보니, 안개들은 하나하나가 거대한 힘의 일부였다. 이런 힘을 신선들이 쓰는 술력이라 칭하는데, 비전력보다 조금 하위의 힘이라고 보면 된다.
사실상 법력이나 술력 등 보다는 비전력이 조금 더 높은 등급의 힘임은 확실했다.
아무튼.
힘의 성질을 읽자, 일은 조금 더 쉬워졌다. 태호가 신비력을 개방해 사방으로 흩뿌리자, 술력의 안개 사이에 한 줄기 길이 열렸다.
뿌연 안개!
그 안에 홀연히 나타난 산 하나!
산은 마치 동양화에 붓으로 그려진 것처럼, 선이 굵고 선명했다. 묵색과 백색, 그리고 알 듯 모를 듯한 우아한 청색이 어우러진 절경의 산이었다.
이곳이 영산!
신선들에게만 허락된 땅이다! 드래곤도, 승려도 독자적인 힘을 연마해도 신선이 아니면 들어설 수 없는 비밀의 땅!
태호는 그곳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우선, 다시 조겐을 꺼냈다.
“야.”
-뭐냐... 헉...? 여, 여긴 영산이 아니더냐?
“너도 영산 와 봤지?”
-......끄응, 그, 그, 그렇다만... 네가 대체 어찌? 여기는 술력을 익힌 이들만이 들어설 수 있는 곳인데...?
“여기는 보물들 많지?”
-......
태호는 조겐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이곳에 분신체 셋을 할애하기로 했다.
조겐이 말한 대로 움직임을 지시한 뒤, 태호는 그 자리에서 볼카노스를 불렀다.
정령계에도, 영산에도 통함을 확인했다. 이제, 천계의 차례였다.
‘볼카노스 님, 나와 주세요!’
싸아아아아-!
어느새 어둠이 깔리고.
[나를 불렀느냐.]
볼카노스가 나타나자, 태호는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 * *
[호오... 수호 일족의 힘이 이토록 대단하단 말인가.]
현 상황을 설명하자 볼카노스는 두 눈을 깜빡이다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거... 정말 엄청난 이야기군.]
사실이었다.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힘은 역시나 ‘균형’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막강한 힘을 가진 신들이 리얼 포스의 대륙에서 제힘을 발휘하지 못 하는 것도, 사실상 균형의 역풍 때문이었다.
헌데 이 상황에서 ‘균형의 역풍’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메리트가 있었다.
또한, 특수한 마력의 상위 힘을 얻거나 통상적으론 갈 수 없는 차원 너머로도 아무 제약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혜택이다.
태호는 자신이 떠올린 생각을 확인받기 위해 입을 열었다.
“볼카노스 님. 여쭤볼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음...?]
“신들은 혼돈의 유산이나 에픽 아이템들을 제물로 받습니다. 그것들은 대체 어디다 쓰는 겁니까?”
태호의 물음은 사실 예전부터 궁금해하던 부분이기도 했다.
볼카노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별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균형의 대가로 받은 제물들 말이구나? 보통은 신력으로 변환하여 흡수한다.]
“흡수라...”
[에픽급 아이템에서 추출한 신력은 질이 좋고, 더 고등의 세계로 가는 일종의 경험치와 같다고 보면 된다.]
“더 고등의 세계...?”
[천계 신들 중, 대부분이 상위 신이 되기를 꿈꾼단다. 그 경지에 오르기 위해선 막대한 신력이 필요하니, 그것을 위함이다. 너희 세계로는 레벨이라 보면 된다.]
“그렇다면, 균형의 역풍이란... 소위 ‘렙따’ 같은 건가요?”
[그런 셈이지.]
이해가 아주 쉬웠다.
태호는 균형의 역풍을 받아 급격히 약화돼 가던 악신들을 떠올렸다.
“흠... 그렇다면 잠깐만요... 균형의 역풍을 해소만 하면, 일단 에픽 아이템은 신들의 소유라 이거죠?”
[바로 그렇지.]
“흐음...”
우선 태호는 자신이 생각한 바를 말해 보았다. 그중 첫째는 바로 이것이다.
“제가 생각해 본 것은 이렇습니다. 우선, 여러 신들의 권능을 부여받을 겁니다. 이득이 될 스킬들만 골라서 받으면...”
그의 미소에서 기묘함을 느껴질 무렵, 볼카노스가 말했다.
[나는 네게 내 권능을 준 바 있다.]
“예.”
[그게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느냐?]
권능.
태호는 그 단어에 큰 의미를 부여해 본 적이 없다. 으레 여태까지 받아 왔던 ‘가호’류가 그랬듯, 태호에게 하사한 정도라고 여겨 왔기 때문이다.
“가호류처럼...”
볼카노스의 얼굴을 흘끗 보던 태호는 그게 아님을 깨달았다.
그것은 애초에 다른 문제였다.
태호는 자신의 말이 경솔했다고 생각했다.
“설마...”
이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제게 당신의 권능을 하사한다는 것은, 정말 당신의 힘을 제게 양도한 겁니까?”
[......]
그가 말없이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이제 당신에게는 죽음의 어둠 불꽃이나, 절멸의 화살, 나락의 절대 구역 등이 없다는 말씀이세요?”
볼카노스는 대답하지 않은 채 긍정의 미소를 지었다.
“......”
태호는 어쩐지 가슴 한편이 뭉클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힘 그 자체를 태호에게 넘겨주고 있었던 것이다.
에픽 10개, 20개가 너무 크다고 투덜거리던 자신이 어쩐지 부끄러워진 태호가 고개를 숙였다. 그가 요구하는 대가는 결코 적지 않았다.
신이 권능을 통째로 내어 준다는 건, 자신의 힘을 약화하며 내어 준다는 것이다.
[마지막 수호자가 네게 승부를 걸었다.]
“......!”
[나도 승부를 걸 때가 된 거다. 그뿐이지.]
태호는 그의 나지막하지만, 포근한 목소리를 들으며 점점 더 고개를 숙였다.
볼카노스는 유사시, 자신을 주박으로 묶어 달라는 주문 역시 한 바 있었다.
“왜... 제게 그렇게까지?”
[네게 묻고 싶군.]
그가 물어 왔다.
[너는, 왜 그렇게까지 하고 있지?]
“.....저, 저는.”
어쩐지 말문이 턱 막혔다. 태호는 밝은 미래를 원했다. 망가지고 부서진 세계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신이 살아갈 밝은 미래.
자신이 아니면 할 사람이 없어서다.
그 마음을 읽었는지, 그가 씩 웃었다.
[......그런 거다.]
태호는 생각했다, 필사적으로 해 보겠다고.
지금까지 설렁설렁 해 온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정말 더 필사적으로 해 볼 생각이었다.
자신에게 목숨을 건 신이 있다. 목숨을 걸고 권능을 사용해, 회귀시켜 준 수호 일족이 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님을 알려 준 대사제 데칼도 있다.
가능성은 이제 충분해졌다.
태호의 두 눈이 독기를 품었다.
“그런 거군요.”
태호와 볼카노스가 시선을 마주쳤다. 두 개의 어둠의 기운이 훅! 하고 퍼져 나왔다.
태호는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주기로 마음먹었다면, 받는다.
결심을 다졌다.
이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 재차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럼, 돌아와서. 천계의 신들 중, 에픽 아이템을 모아 두는 신도 분명히 존재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추측이 틀렸나요?”
볼카노스는 팔짱을 낀 채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지극히 일리 있군.]
“이미 정령계에는 가 본 바 있습니다. 지금도 분신체가 활보하는 데 큰 지장이 없습니다. 즉, 천계 역시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이 듭니다.”
[......]
볼카노스는 두 눈을 깜빡였다. 잠깐 태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두 눈을 치켜떴다.
[너 설마.]
“맞습니다.”
태호가 씨익 웃었다.
“그 창고 한두 개만 털어 오면 이득입니다.”
신선 전우치
황당무계하다는 얼굴의 볼카노스는, 문득 곰곰이 생각하다 흠- 하고 말끝을 흐렸다.
[허나, 천계의 신들의 창고를 터는 것은... 혹시 계획이라도 있는 것이냐?]
“계획이요? 물론입니다.”
태호는 그 말을 한 뒤, 인벤토리창에서 조겐과 로두스를 꺼냈다.
[......]
“......”
태호와 볼카노스는 서로를 마주 보며 같은 생각을 했다.
-어? 어어? 뭐라고?
조겐이 펄쩍 뛰었다. 그리고, 그가 일리 있는 소리를 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협력했다! 그러니까, 내, 내 생각에는...
“이 녀석의 창고를 뜯어라, 이거지?”
가만히 있던 로두스가 날벼락을 맞았다.
-뭐, 뭣이라고 이 망할 땡중아? 정말로 죽어 볼 테냐?
두 녀석이 치고 박을 때, 태호는 인벤토리창에 집어넣은 뒤 말했다.
“이 두 녀석 중 하나의 창고를 먼저 털어 보죠. 성과를 보고 나머지도 털면 됩니다.”
[......대단하군.]
볼카노스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문득 태호는 궁금해서 물었다.
“헌데 이것은 그저 저의 생각일 뿐이었습니다만, 일리가 있다는 말씀이시죠?”
[그렇다.]
“신들에게는 인벤토리창 같은 게 없습니까?”
간혹 신들은 품속으로 손을 넣어 여러 아이템을 꺼낸다. 때문에 태호도 당연히 인벤토리창 같은 게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거다
아르카네는 꽃 앞에 쪼그려 앉았다. 이 꽃의 이름은 파리지옥, 식충 식물이었다.
아르카네는 이 녀석이 파리 몇 마리를 잡아 끈적한 액체를 뿜어 용해하는 과정을 빤히 지켜보았다.
[조져졌다.]
소녀는 그것을 관찰하다 문득, 고개를 반짝 들어 저편을 보았다.
[......?]
저 하늘 높이, 까마득히 먼 곳에서 아주 잠깐 익숙한 느낌이 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그건, 자신의 주인인 카이저의 느낌이었다. 아주 잠깐, 그와 계약을 한 자신이 아니면 느끼지도 못할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다.
쭈우욱-!
그 순간.
소녀의 눈앞에 게이트가 만들어졌다. 게이트 너머에서, 태호가 보였다.
[핫! 카이저!]
“그래.”
* * *
아르카네는 태호가 반갑다는 듯 후다닥! 달려와 태호에게 쑥! 뛰어들었다.
태호는 그런 소녀를 받아 들었다.
“읏샤!”
[방금 전에! 아니 좀 아까! 아닌가? 아무튼!]
아르카네는 신기한 것을 봤다는 듯 태호에게 조잘조잘 이야기를 시작했다.
[카이저 있었던 것 같아! 저기 말이야! 진짜야!]
“......”
놀랍게도 그 두서없는 이야기를 태호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역시 진짜였어.’
태호는 이중 맹약을 꽤나 가볍게 뛰어넘었다. 그것은 비단 대사제 데칼의 부름 때문은 아닌 듯하다.
‘바로, 이 신비력 3단계 덕분인 거야.’
3단계 신비력이 개방되자마자 태호는 이중 맹약을 뚫고 천계로 향할 수 있었다.
또한, 이제 태호는 마력 대신 신비력을 사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혹시.
태호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르카네는 태호의 심장에 귀를 기울이다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디 아파?]
“글쎄다.”
천천히, 아르카네가 빠져나온 차원 문을 바라보다 그곳에 손을 집어넣어 본다.
쑥-!
공간을 통과한 팔이 느끼는 촉감이 달라졌다. 이 너머, 특유의 싸늘한 바람이 느껴진다.
“......”
혹시나 모른다. 태호는 그곳으로 분신체 하나를 집어넣었다.
쑥!
분신체는 별 어렵지 않다는 듯 그곳으로 들어가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내부의 풍경은 별도의 모니터 화면으로 공유되니, 이제 남은 것은 놀랄 일 뿐이었다.
‘맙소사.’
분신체가 움직이는 데엔 아무런 제약도 없었다. 그저 애초부터 이 세계의 일부였던 것처럼 받아들여졌을 뿐.
[우와! 어떻게 간 거야?]
아르카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탁!
차원 문이 닫혔다. 허나 태호의 분신체는 그 내부에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된다.’
된다!
진짜로 된다!
두근 두근 두근!
태호는 분신체를 조작해, 사방의 물건을 수집해 보기 시작했다.
[‘아이템 : 정령계의 비전초’를 획득했습니다.]
선명히 떠오르는 메시지.
쿵 쾅 쿵 쾅!
심장이 더욱 요란하게 뛰었다.
‘일단 죄다 모아!’
태호의 분신체가 움직였다. 녀석이 움직이며 보이는 모든 것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좋았어!’
과거의 시점에서도, 정령계의 물건이 리얼 포스의 대륙에 등장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잠깐만.’
태호는 잠시 멈칫했다.
정령계로 들어설 수 있다는 말은, 여러 가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태호는 조겐을 꺼냈다.
“야.”
-왜 그러냐?
“영산이 어디냐?”
-신선의 산 말인가? 그건 왜?
태호는 말을 길게 하는 것이 귀찮아, 조겐을 한껏 흔들어 혼을 쏙 빼놓은 뒤 다시 물었다.
“어디냐?”
-꾸에에에엑! 이런 빌어먹을...... 영산은... 쥬신, 쥬신의 북동부에 있는... 허나 네가 신선이 아닌 이상, 어차피 들어설 수도 없다!
‘그렇단 말이지.’
태호는 조겐을 집어넣은 뒤,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쥬신.
쥬신의 북동부로 향하는 길은 길었지만, 지금의 태호에게는 크게 대단한 일이라고 할 수 없었다.
어느새 태호가 서 있는 온 사방은 자욱한 안개로 뒤덮여, 한 치 앞도 구분이 안 가는 지경이었다.
‘안개 지역에 영산이 있다 이거지?’
과거 유저들을 미아로 만들기 일쑤였던 골치 아픈 안개 지역에 영산이 있었다니, 그건 꽤 놀라운 정보였다.
전 생의 리얼 포스에서는 ‘영산’이란 게 있단 이야기만 들었지, 직접 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팟!
태호가 안개 지역을 주파해 나갔다. 가만 보니, 안개들은 하나하나가 거대한 힘의 일부였다. 이런 힘을 신선들이 쓰는 술력이라 칭하는데, 비전력보다 조금 하위의 힘이라고 보면 된다.
사실상 법력이나 술력 등 보다는 비전력이 조금 더 높은 등급의 힘임은 확실했다.
아무튼.
힘의 성질을 읽자, 일은 조금 더 쉬워졌다. 태호가 신비력을 개방해 사방으로 흩뿌리자, 술력의 안개 사이에 한 줄기 길이 열렸다.
뿌연 안개!
그 안에 홀연히 나타난 산 하나!
산은 마치 동양화에 붓으로 그려진 것처럼, 선이 굵고 선명했다. 묵색과 백색, 그리고 알 듯 모를 듯한 우아한 청색이 어우러진 절경의 산이었다.
이곳이 영산!
신선들에게만 허락된 땅이다! 드래곤도, 승려도 독자적인 힘을 연마해도 신선이 아니면 들어설 수 없는 비밀의 땅!
태호는 그곳에 들어서 있는 것이다.
우선, 다시 조겐을 꺼냈다.
“야.”
-뭐냐... 헉...? 여, 여긴 영산이 아니더냐?
“너도 영산 와 봤지?”
-......끄응, 그, 그, 그렇다만... 네가 대체 어찌? 여기는 술력을 익힌 이들만이 들어설 수 있는 곳인데...?
“여기는 보물들 많지?”
-......
태호는 조겐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이곳에 분신체 셋을 할애하기로 했다.
조겐이 말한 대로 움직임을 지시한 뒤, 태호는 그 자리에서 볼카노스를 불렀다.
정령계에도, 영산에도 통함을 확인했다. 이제, 천계의 차례였다.
‘볼카노스 님, 나와 주세요!’
싸아아아아-!
어느새 어둠이 깔리고.
[나를 불렀느냐.]
볼카노스가 나타나자, 태호는 빠르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 * *
[호오... 수호 일족의 힘이 이토록 대단하단 말인가.]
현 상황을 설명하자 볼카노스는 두 눈을 깜빡이다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거... 정말 엄청난 이야기군.]
사실이었다.
이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힘은 역시나 ‘균형’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막강한 힘을 가진 신들이 리얼 포스의 대륙에서 제힘을 발휘하지 못 하는 것도, 사실상 균형의 역풍 때문이었다.
헌데 이 상황에서 ‘균형의 역풍’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메리트가 있었다.
또한, 특수한 마력의 상위 힘을 얻거나 통상적으론 갈 수 없는 차원 너머로도 아무 제약 없이 움직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혜택이다.
태호는 자신이 떠올린 생각을 확인받기 위해 입을 열었다.
“볼카노스 님. 여쭤볼 것이 하나 있습니다.”
[음...?]
“신들은 혼돈의 유산이나 에픽 아이템들을 제물로 받습니다. 그것들은 대체 어디다 쓰는 겁니까?”
태호의 물음은 사실 예전부터 궁금해하던 부분이기도 했다.
볼카노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별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균형의 대가로 받은 제물들 말이구나? 보통은 신력으로 변환하여 흡수한다.]
“흡수라...”
[에픽급 아이템에서 추출한 신력은 질이 좋고, 더 고등의 세계로 가는 일종의 경험치와 같다고 보면 된다.]
“더 고등의 세계...?”
[천계 신들 중, 대부분이 상위 신이 되기를 꿈꾼단다. 그 경지에 오르기 위해선 막대한 신력이 필요하니, 그것을 위함이다. 너희 세계로는 레벨이라 보면 된다.]
“그렇다면, 균형의 역풍이란... 소위 ‘렙따’ 같은 건가요?”
[그런 셈이지.]
이해가 아주 쉬웠다.
태호는 균형의 역풍을 받아 급격히 약화돼 가던 악신들을 떠올렸다.
“흠... 그렇다면 잠깐만요... 균형의 역풍을 해소만 하면, 일단 에픽 아이템은 신들의 소유라 이거죠?”
[바로 그렇지.]
“흐음...”
우선 태호는 자신이 생각한 바를 말해 보았다. 그중 첫째는 바로 이것이다.
“제가 생각해 본 것은 이렇습니다. 우선, 여러 신들의 권능을 부여받을 겁니다. 이득이 될 스킬들만 골라서 받으면...”
그의 미소에서 기묘함을 느껴질 무렵, 볼카노스가 말했다.
[나는 네게 내 권능을 준 바 있다.]
“예.”
[그게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느냐?]
권능.
태호는 그 단어에 큰 의미를 부여해 본 적이 없다. 으레 여태까지 받아 왔던 ‘가호’류가 그랬듯, 태호에게 하사한 정도라고 여겨 왔기 때문이다.
“가호류처럼...”
볼카노스의 얼굴을 흘끗 보던 태호는 그게 아님을 깨달았다.
그것은 애초에 다른 문제였다.
태호는 자신의 말이 경솔했다고 생각했다.
“설마...”
이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제게 당신의 권능을 하사한다는 것은, 정말 당신의 힘을 제게 양도한 겁니까?”
[......]
그가 말없이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이제 당신에게는 죽음의 어둠 불꽃이나, 절멸의 화살, 나락의 절대 구역 등이 없다는 말씀이세요?”
볼카노스는 대답하지 않은 채 긍정의 미소를 지었다.
“......”
태호는 어쩐지 가슴 한편이 뭉클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힘 그 자체를 태호에게 넘겨주고 있었던 것이다.
에픽 10개, 20개가 너무 크다고 투덜거리던 자신이 어쩐지 부끄러워진 태호가 고개를 숙였다. 그가 요구하는 대가는 결코 적지 않았다.
신이 권능을 통째로 내어 준다는 건, 자신의 힘을 약화하며 내어 준다는 것이다.
[마지막 수호자가 네게 승부를 걸었다.]
“......!”
[나도 승부를 걸 때가 된 거다. 그뿐이지.]
태호는 그의 나지막하지만, 포근한 목소리를 들으며 점점 더 고개를 숙였다.
볼카노스는 유사시, 자신을 주박으로 묶어 달라는 주문 역시 한 바 있었다.
“왜... 제게 그렇게까지?”
[네게 묻고 싶군.]
그가 물어 왔다.
[너는, 왜 그렇게까지 하고 있지?]
“.....저, 저는.”
어쩐지 말문이 턱 막혔다. 태호는 밝은 미래를 원했다. 망가지고 부서진 세계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신이 살아갈 밝은 미래.
자신이 아니면 할 사람이 없어서다.
그 마음을 읽었는지, 그가 씩 웃었다.
[......그런 거다.]
태호는 생각했다, 필사적으로 해 보겠다고.
지금까지 설렁설렁 해 온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정말 더 필사적으로 해 볼 생각이었다.
자신에게 목숨을 건 신이 있다. 목숨을 걸고 권능을 사용해, 회귀시켜 준 수호 일족이 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님을 알려 준 대사제 데칼도 있다.
가능성은 이제 충분해졌다.
태호의 두 눈이 독기를 품었다.
“그런 거군요.”
태호와 볼카노스가 시선을 마주쳤다. 두 개의 어둠의 기운이 훅! 하고 퍼져 나왔다.
태호는 그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주기로 마음먹었다면, 받는다.
결심을 다졌다.
이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 재차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그럼, 돌아와서. 천계의 신들 중, 에픽 아이템을 모아 두는 신도 분명히 존재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 추측이 틀렸나요?”
볼카노스는 팔짱을 낀 채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지극히 일리 있군.]
“이미 정령계에는 가 본 바 있습니다. 지금도 분신체가 활보하는 데 큰 지장이 없습니다. 즉, 천계 역시 마찬가지일 거란 생각이 듭니다.”
[......]
볼카노스는 두 눈을 깜빡였다. 잠깐 태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두 눈을 치켜떴다.
[너 설마.]
“맞습니다.”
태호가 씨익 웃었다.
“그 창고 한두 개만 털어 오면 이득입니다.”
신선 전우치
황당무계하다는 얼굴의 볼카노스는, 문득 곰곰이 생각하다 흠- 하고 말끝을 흐렸다.
[허나, 천계의 신들의 창고를 터는 것은... 혹시 계획이라도 있는 것이냐?]
“계획이요? 물론입니다.”
태호는 그 말을 한 뒤, 인벤토리창에서 조겐과 로두스를 꺼냈다.
[......]
“......”
태호와 볼카노스는 서로를 마주 보며 같은 생각을 했다.
-어? 어어? 뭐라고?
조겐이 펄쩍 뛰었다. 그리고, 그가 일리 있는 소리를 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협력했다! 그러니까, 내, 내 생각에는...
“이 녀석의 창고를 뜯어라, 이거지?”
가만히 있던 로두스가 날벼락을 맞았다.
-뭐, 뭣이라고 이 망할 땡중아? 정말로 죽어 볼 테냐?
두 녀석이 치고 박을 때, 태호는 인벤토리창에 집어넣은 뒤 말했다.
“이 두 녀석 중 하나의 창고를 먼저 털어 보죠. 성과를 보고 나머지도 털면 됩니다.”
[......대단하군.]
볼카노스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문득 태호는 궁금해서 물었다.
“헌데 이것은 그저 저의 생각일 뿐이었습니다만, 일리가 있다는 말씀이시죠?”
[그렇다.]
“신들에게는 인벤토리창 같은 게 없습니까?”
간혹 신들은 품속으로 손을 넣어 여러 아이템을 꺼낸다. 때문에 태호도 당연히 인벤토리창 같은 게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있다. 하지만, 에픽이나 혼돈의 유산을 신력으로 변환하려면 정화 과정을 거쳐야 하지. 때문에 창고가 당연히 존재하는 것.]
그렇군.
“그럼, 일단 이쪽 볼일을 좀 본 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 * *
영산.
분신체들의 화면으로 보이는 영산은 영험한 기운이 가득해 보이는 산이었다.
술력으로 만들어진 뿌연 안개가 신비롭게 흩어져 있었고, 여기저기서 처음 보는 생물체들이 태호를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다.
‘우선, 신선과(神仙果)들.’
조겐은 영산의 보물들에 대하여 말했었다.
-우선, 신선과들을 꼽을 수 있겠지... 또한, 천년설삼을 비롯한 각종 영약들도 있다. 중원무림에도 존재하지만, 영산의 영약들은 더 효과가 좋다.
영약이라.
우선 챙길 수 있는 부분은 챙겨 보고 싶긴 한데, 중요한 점 하나가 있다.
-다만, 적당히 챙기는 게 좋다.
이곳은 영산.
신선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신선들을 적으로 돌리고 싶으면 별말 하지 않겠으나, 그들은 기본적으로 이타적으로 사는 것이 몸에 배어 있는 별종들이니... 양해를 구하면 나눠 줄 거다.
그래서 태호는 일부러 분신체들에게 그저 탐색의 역할만을 맡겨 두었을 뿐이다.
그중.
제3 분신체가 신선과 나무에 도달했다. 분신체의 키만 한 크기의 나무에, 복숭아 같은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태호는 분신체에게 걸음을 멈추라는 지시를 내렸다.
제2 분신체는 영약 밭에 도달한 것 같았다. 텃밭 같은 느낌의 작은 밭이었지만, 기묘한 힘이 울컥울컥 새어 나오는 중이었다.
문득.
두 분신체의 시야에 기묘한 인영이 하나씩 잡혔다.
-어라, 이건 또 뭐래?
그의 목소리는 굉장히 청량하고 밝았다. 듣는 이의 기분이 절로 좋아지는 목소리였다.
두 인영은 모두 같이 생겼다. 제2 분신체, 그리고 제3 분신체의 시야에 잡힌 인물이 동일하게 생겼다는 말이다.
그는 20대 초반의 청년으로 보였다. 동양풍의 하얀색 도포를 입은 채, 머리를 질끈 묶은 맑은 두 눈을 가진 남자다.
-너, 어디서 온 거냐? 신선으로 보이진 않는데?
-어라, 여기도 있네?
태호는 그중 제2 분신체의 화면을 키웠다. 이제 태호의 시야가 마치 분신체로 플레이하는 것처럼 변했다.
* * *
“안녕하세요.”
태호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이 곳에 어쩐 일이고, 또 신선과 앞에서 무엇을 하는 중이냐?”
태호가 그를 보았다.
[영산(靈山)]
[신선(神仙), 전우치]
이 남자가 전우치였다. 역시나 분신체 능력의 달인답게 태호의 분신체들의 앞에 동시에 나타난 이유가 있었다.
‘오히려 잘 됐어.’
운이 좋았던 걸까?
어쩌면, 분신체 능력을 가진 그는 영산의 여러 보물들을 지키기 위해 특화된 것일 수도 있다.
태호가 입을 열었다.
“저는 바다 건너 본대륙에서 왔습니다. 이 곳에 분신 능력을 사용하는 전우치 님이 계시단 소문을 들었습니다.”
“오, 그래?”
전우치는 허리춤에 양손을 올린 채 씩 웃었다.
“이 몸이 바로 그 전우치 신선님이시다. 그런데, 너도 분신 능력을 쓰는 것 같은데?”
“예, 하지만 신선님에 비하면 별것 아닙니다.”
“흠... 그래. 그래서, 이 몸을 찾아 무엇을 하려고? 아니, 그보다 앞서서. 영산에 어찌 들어온 게냐?”
태호는 그를 빤히 보았다.
“제게는 본대륙 특유의 힘이 있습니다. 비전력이란 것인데, 그로 인해 입장이 가능한 것 같습니다.”
“흐음...... 그건 들어 본 바가 없군.”
전우치는 팔짱을 낀 채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네게 악(惡)의 기운이나, 혼돈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으니 일단 믿어 보도록 하마. 네게는 지나칠 정도로 깨끗한 느낌이 드는구나?”
-그들 역시 부처의 휘하에 있다 봐도 무방한 세력들이다. 쳇... 어쩌다 이런 말까지 하게 되는 거지.
역시, 조겐의 말 대로 영산 역시 부처 휘하의 세력이 분명했다.
“저 역시 혼돈의 힘과 싸우기 위해 분신술의 연마가 필요하다 느낀 것입니다. 또한... 영산에 여러 보물이 있음을 알고 있지만, 손끝 하나 대지 않았습니다. 제가 악의가 있지 않음을 알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우치는 재미있다는 듯 빙글빙글 웃었다.
“마치 영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듯한 말투로군. 흥미로운 일이야...”
그의 수준을 가늠해 본다.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술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1/10 신노스에 비하면 조금 더 떨어진다.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었다.
불과 몇 달 전, 태호는 1/10 신노스를 그야말로 죽음을 불사한 전투로 간신히 잡은 바 있었다. 수백만의 유저가 달려들어 신노스와 케노스를 잡았다.
헌데, 높은 세계에는 이미 그때의 놈들과 맞먹는 괴물들이 득시글거린다.
‘하긴.’
당시의 신노스와 케노스는 고작 1/10수준.
게다가 이중 맹약으로 인해 가진 힘의 극히 일부밖에 사용하지 못 하는 치명적 제약까지 떠안은 상태였다.
또한.
-판타로스 님이 깨어난다면, 그들의 힘은 훨씬 더 가중된다. 혼돈의 집약체의 주변에서 대장군들과 맞서게 되면, 너도 느낄 것이다.
로만은 과거 태호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그렇다면 유저의 힘이란 대체 이 얼마나 보잘것없단 말인가?
마치, ‘먹기 좋은 먹잇감’으로 쑥쑥 자라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태호는 새삼 과거의 리얼 포스를 떠올리며, 몸서리를 쳐야 했다.
‘그냥 딱 우물 안에서 누가 더 강하니 마니를 따지며 살아간다는 말이잖아.’
돌아와서.
“그래서 분신술을 알려 달라? 으흠- 하지만 그냥 알려 줄 수는 없는걸~ 나도 열심히 수련한 결과물이니까 말이야?”
그의 말은 당연히 일리가 있었다. 애초부터 그냥 얻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태호가 물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나는 항상 환술에 관심이 있걸랑. 환술을 가르쳐 준다면야 교환해 줄 여지가 있지.”
“환술...”
태호는 문득 눈을 반짝였다.
환술이라면, 배워 둔 환술이 하나 있다. 바로 케노스를 잡고 얻은 에픽 스킬북인 ‘경계의 환술’이었다.
태호는 경계의 환술을 이미 배운 바 있었다. 물론 그것을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배워 둔 것은 확실하다.
“어찌 알려 드려야 합니까?”
“응?”
“환술 말입니다.”
“환술을 알아?”
“적당히는요.”
전우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허나 알려 주는 법은 모른다.
애초에 익힌 마법을 타인과 교환할 수 있다면 에픽 아이템의 가치가 그리 높을 리가 없었던 것이다.
태호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자, 전우치는 씩 웃으며 손을 뻗었다.
“어디 한번 구경이나 해 볼까?”
그가 태호의 심장에 손을 댄 채 술력을 뿜어냈다.
지이이이잉-!
곧.
태호의 눈앞에 메시지 하나가 떠올랐다.
[영산(靈山)의 신선(神仙), 전우치에게서 술법 교환의식을 걸어왔습니다.]
‘술법 교환의식?’
이는 처음 보는 것이다.
“영산에서도 흔치 않은 술법이지. 다만, 이건 평생 세 번밖엔 쓸 수가 없어.”
동시에 눈앞에는 교환창 같은 것이 떠올랐다.
아이템 거래가 아니라, 익힌 마법에 대한 교환이라니? 태호는 이 신기한 현상이 재미있어,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곧.
저쪽 교환창 위에 뭔가가 올라왔다. 네모난 데다,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는 그림이 그려진 보패 같은 식이었다.
[술법 : 신선 분신술(숙련도1)]
자세히 본다.
[영산의 신선 전우치가 익힌 분신술의 일부 숙련도를 인계받는다. 교환에 성공 시, 전우치의 숙련도는 그만큼 사라지고 교환자에게 전송된다.]
즉.
숙련도 1의 ‘신선 분신술’을 인계받으며, 이쪽의 환술을 내어 준다는 말이다.
무제한으로 가능하면 그만큼 사기는 없겠지만, 안타깝게도 강력한 제한이 걸려 있는 모양이었다.
“이 능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이거? 나랑 스승님... 이제는 두어 명 남았으려나.”
그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지만, 별게 아닌 게 아니었다.
“스승님이라니요?”
“천강진인이란 분이신데, 지금은 저 위에 계시지.”
전우치가 하늘을 가리켰다.
‘신이구나.’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천강진인.
그 이름을 기억하기 위해 몇 번 되뇐 뒤, 자신의 스킬창에서 ‘경계의 환술’을 꺼내 올렸다.
“오... 이건 뭐지? 광역 환술이잖아?”
전우치가 흥미를 보였다. 그는 한참을 요모조모 살펴보다가 태호에게 물었다.
“이거 굉장한데. 난 흥미가 생겼어, 바꿀래?”
“그러실까요?”
[보유한 ‘경계의 환술(숙련도 1)’을 거래하시겠습니까?]
[한번 거래한 환술은 더 이상 거래가 불가합니다.]
나쁠 게 하나도 없다.
태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교환이 수락되었다.
[교환이 완료되었습니다.]
[술법 : 신선 분신술(숙련도1)을 익혔습니다.]
태호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사실상 거저 익힌 것이나 다름없었다.
“......”
눈앞을 보니 전우치 역시 주먹을 불끈 쥐고 기뻐하고 있었다.
“너무 기쁜걸, 환술을 아는 사람은 진짜 흔치 않은데. 게다가 이 환술은...”
그는 놀란 듯 양팔을 번쩍 들었다.
“진짜 질 좋은 환술이다! 동방대륙에선 찾기도 힘든 광범위 환술이야!”
그는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이쪽도 춤이라도 추고 싶네.’
그게 비록 혼돈의 대장군 케노스의 유품이지만, 본인이 좋아한다면 그걸로 됐다. 때론 몰라도 되는 것들이 있다는 게 태호의 생각이었다.
태호가 씩 웃자, 그는 선심 쓴다는 듯 소리쳤다.
“옛다 기분이다! 여기 신선과 열 개 가져가!”
“예?”
“내겐 그 정도의 가치는 있걸랑!”
태호는 두 눈을 깜빡이다가, 냉큼 신선과 열 개를 챙겼다.
“아하하하! 호탕해서 좋구만!”
“저어...”
태호가 조심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그럼, 기왕 선심 쓰시는 거 저기 텃밭에 있는 것도 좀.”
“......”
전우치가 두 눈을 끔뻑이며 태호를 보았다.
“천년설삼 말이야?”
이내, 기분이라는 듯 호탕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래그래! 그것도 다섯 뿌리만 가져가!”
“여섯 뿌리는 곤란하신가요?”
“......”
전우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거 웃긴 녀석일세. 좋다, 여섯 뿌리 가져가. 더는 안 돼!”
천계 탐방
태호는 냉큼 천년설삼 여섯 개, 그리고 신선과 열 개를 챙겼다.
“너는 대단한 장비들을 갖춘 것 같은데도 꽤나 욕심이 많구나?”
전우치가 신기하다는 듯 태호를 보며 물었다.
“그런가요?”
“응. 하긴 뭐, 인간이란 무릇 그런 법이지. 하하하!”
태호는 그런 그를 보며 쓰게 웃었다.
전우치가 태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같은 길을 걷다 보면 또 만날 일이 오겠지.”
태호는 그의 손을 잡았다.
“다음에 뵙겠습니다.”
* * *
전우치와 헤어져 영산에서 내려오며 태호는 여러 생각에 잠겼다.
‘에픽을 적당히 구하고 싶은데, 하나같이 시간이 터무니없이 걸리네.’
우선은 ‘신선 분신술’을 사용해 본다.
[이미 보유한 ‘분신체’ 장비가 존재합니다. 두 개의 성능을 합치시겠습니까?]
‘좋아 좋아.’
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통합 : ‘더 섀도우의 상징’ 의 분신 능력에 합산되었습니다.]
[등급 : 에픽]
[종류 : 장착(캐릭터에 장착 귀속됨)]
[이름 : 더 섀도우의 심장]
[더 섀도우. 혹자는 그를 뱀파이어의 조상이라고 말하고, 혹자는 추락한 신이라고도 말하죠. -초보 학자, 카실론]
[옵션 : 본신의 65%의 성능을 발휘하는 그림자 분신을 2체 만들어냅니다. 분신은 본체의 의지대로 움직이며, 모든 착용 아이템과 스킬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옵션2 : ‘미후왕, 분신의 서’ 의 분신 능력이 합산되어, 기존의 분신체들의 개수가 2체 증가하고 5%의 성능 향상이 이루어졌습니다. 분신의 서의 숙련도가 증가하면, 분신체의 개수와 성능 향상이 추가로 이루어집니다.]
[옵션3 : ‘신선 분신술’ 의 분신 능력이 합산되어, 기존 분신체들의 개수가 2체 증가하고 5%의 성능 향상이 이루어졌습니다. 추가로, 사용자는 언제든 분신 중 하나로 이동하여 본신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신선 분신술의 숙련도가 증가하면, 분신체의 개수와 성능 향상이 추가로 이루어집니다.]
옵션3이 생겨났다.
태호는 그것을 찬찬히 읽어 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분신은 총 여섯 체가 운영된다.
또한, 분신 중 하나를 본신으로 삼을 수 있단 말은 여러 의미를 시사했다.
‘목숨을 유지하기가 더 수월해졌어.’
문득 그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소름 끼쳤다.
죽음!
이제는 죽음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데 익숙해져 버린 자신의 현실이 보인다.
자.
시험해 보자.
태호는 우선, 자신의 모니터 한편에서 열심히 뭔가를 채집하고 있는 ‘정령계’의 분신체를 보았다.
‘어떻게 쓰는 거지?’
그 분신체에게 정신을 집중해 본다.
그 순간.
쑤우욱-!
온몸이 빨려드는 기묘한 기분과 함께, 태호의 사방의 시야가 바뀌었다.
“.....!”
사방의 시야는 정령계의 풍경!
태호는 어느새 정령계의 분신체와 몸을 바꾸게 된 것이다!
‘맙소사다.’
이건 진짜 대단했다. 분신이 있는 곳으로 언제든 몸을 바꿔치기할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니던가?
태호는 팔짱을 낀 채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큰 정원 같았다. 저 멀리, 거대한 궁이 보였다. 어둠의 기운이 뭉실뭉실 새어 나오는 것이, 어둠 정령계의 왕궁이었다.
‘좋아, 이 정도면.’
태호는 곧바로 쥬신으로 돌아온 뒤, 분신들을 모조리 해제했다.
그리고 쥬신의 귀환 스크롤을 대량 구매한 뒤 본대륙으로 돌아갔다.
* * *
[헐.]
로키는 태호의 말을 듣더니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여러모로 생각하는 듯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이군...]
“예?”
태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그 과정에 뭔가가 잘못된 걸까?
“무, 무슨 일이 잘못됐습니까?”
[아니?]
로키는 심술궂게 두 눈을 떴다.
[네 녀석이 나보다 좋은 생각을 떠올려서, 잠깐 위기의식을 느낀 것뿐이다.]
“.....”
로키는 턱을 괸 채 고개를 연신 까닥였다.
[아주 좋은 생각이야. 천계로 가서, 신들의 창고를 털어 버린다고? 그런 정신 나간 생각을 하는 놈이 있을 리 만무하지.]
태호는 피식 웃어 버렸다.
“그래서 몇 가지 건의드릴 게 있습니다.”
[얼마든지.]
“우선, 로키 님께서 알아봐 주셔야 할 것이 총 두 가지입니다.”
[어쭈구리?]
로키는 킬킬킬 웃으며 덧붙였다.
[계속해 봐라?]
“천계에서 가장 많은 에픽을 가진 신들 목록, 그리고 그들의 창고 위치를 먼저 알아내 주십시오.”
[......]
로키는 잠깐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마.]
“그리고... 다른 속성의 지배자들의 동향을 살펴 주십시오.”
[그건 볼카노스의 부탁이 있어, 알아보고 있었다. 현재로서는 아직 불투명하다. 몸이 하나여도 부족한데, 너는 좋겠다? 여섯 개나 있어서.]
로키는 툴툴거리며 말을 이었다.
[에픽을 많이 보유한 녀석 하나는 수배해 둔 놈이 하나 있다.]
태호가 두 눈을 반짝였다.
“수배해 두셨군요?”
[그래. 딱히 너를 위해서는 아니지만...]
그는 괜히 쑥스럽다는 듯 험험, 헛기침을 했다.
[녀석이 최근 에픽 수집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말이 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상위 신의 자리로 올라가기 위해 스퍼트를 당긴다는 건데... 알려 주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놈의 이름은 마몬. 인간으로 치면 악신 계열이라고 봐야겠지. 위치는 황금대지, 딱 보면 알 거다. 황금성이 놈의 궁전이니까.]
“마몬이라.”
[다른 신들의 에픽을 대량 구매해서 사들이고 있다는 소문이 진짜였더군.]
“에픽을 사들이고 있다? 천계에도 화폐라는 게 있습니까?”
[당연한 것을 묻는구나. 인간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미 봤잖느냐? 먹고 자고 살기 위해 재물이 필요한 건 이쪽도 똑같느니라.]
마몬.
현실에서의 마몬이라면 악마로 분류된 탐욕의 상징이라 보면 된다.
물론, 리얼포스의 세계에서는 등장한 바가 없었다.
[놈의 창고를 찾아냈다. 다만, 그 주변엔 상위 신의 고등 결계가 펼쳐져 있다. 시도해 볼 생각이 있느냐?]
그의 물음에 태호는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시도하진 않더라도, 우선 탐색전은 펼쳐 보겠습니다.”
[유익하겠군.]
대화가 일단락되었다.
[그나저나, 천계로 가는 방법은 어찌할 생각이냐?]
태호는 미리 생각해 둔 방법을 써 보기로 했다.
* * *
로키가 천계로 돌아갈 준비를 마치자, 태호의 분신체1이 로키를 꼭 끌어안았다.
[......]
“......”
[......?]
로키는 대체 이게 뭐냐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태호는 굳이 대답하지 않은 채 목청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자, 갑시다.”
태호가 말하자, 로키가 인상을 찌푸렸다.
[고작 이거냐? 볼썽사납게시리...]
“음... 일단 시도는 해 보죠.”
[......]
로키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꼭 끌어안은 태호의 팔을 툭툭 쳐 보더니 빛으로 변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태호는 신비력을 모조리 끌어내 로키를 꼭 끌어안았다.
[어이씨 진짜 별걸 다 하네!]
화아악!
로키가 그대로 하늘로 빨려 들어 올라갔다. 화신체의 몸을 따라 움직이는 태호의 분신체1이 휘청이다가, 그를 따라 저 높은 하늘로 사라졌다.
쐐애애애애액!
어마어마한 속도감이 느껴지는 화면이 보였다. 마치 초월의 영역에 들어선 것 같은 화면이 한참 보이다, 어느 순간 이중맹약의 결계를 넘어서는 것이 보였다.
쑤욱-!
‘그렇지.’
화면을 보며 태호가 마른침을 삼켰다.
잠시 후.
태호의 분신체1은 처음 보는 동산에 서 있었다. 그 앞에는 황당한 얼굴의 로키가 서 있었다.
[세상에, 진짜네? 이게 되네?]
태호는 지상에서 모니터를 통해 그것을 보다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됐다!’
그리고 분신체와 몸을 바꾸었다.
샤아아악-!
사방의 동산은 총천연색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따스한 기운이 솔솔 풍겨오는 한가로운 세계였다. 하늘은 더없이 파랗고 청명했으며, 햇살은 따사로웠다.
이곳은 아스가르드.
로키가 다스리는 천계의 한 왕국이다.
태호는 그곳에서 로키를 보며 새삼 놀랐다.
‘엄청 강하다.’
로키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력은, 지상의 느낌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로키는 화신체로서 일시적으로 지상에 머무는 것이기에, 최소 화신체일 때보다 다섯 배 이상 강했다.
현재로서는 태호가 만나 본 신들 중, 가장 체감적으로 강하단 느낌이 들 지경이었다.
“로키 님... 당신은...”
[왜? 어마어마하게 강해 보여서 놀랐느냐?]
로키는 긴 코트를 입은 채 씩 웃어 보였다. 태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래 봬도 일국의 왕이니까.”
그렇다.
생각해 보면, 그는 아스가르드를 이끄는 왕. 신들 중에서도 굉장히 강한 축에 속해야 정상이었다.
“이쪽은 천계에서도 북서쪽에 위치한 섬이라 봐야겠군요?”
[음, 그렇지.]
로키는 고개를 끄덕인 뒤 양팔을 활짝 펼쳤다.
지이이잉-!
태호의 두 눈에 천계의 월드맵이 나타났다. 리얼포스의 월드맵과 크게 다를 것 없어 보이는 지형들이 즐비한 지도가 보였다.
[받아라.]
쑤욱!
로키가 손뼉을 치더니, 태호의 몸에 뭔가를 주입해 넣었다.
[신력의 전이가 가해집니다!]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보유능력 : 천계의 월드맵]
“......!”
태호가 새삼 놀라 로키를 보니 그가 킬킬거리며 웃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놀랍느냐? 이곳은 천계다. 이중맹약으로 제약을 받는 지상이 아니란다.]
“아... 감사합니다.”
맞는 말이었다.
태호는 새삼 이 세계가 피부에 와닿았다.
지금의 태호는 그 어떤 악신이 지상에 강림해도 일단 비벼 볼 수 있었다. 그들은 이중맹약에 결정타를 맞아 힘이 절반 미만으로 격하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은 천계. 맹약의 제약 따윈 없다.’
새삼스럽게 등골이 오싹해 온다.
[알겠느냐? 객기를 조심해야 한다. 그러니 조심 또 조심해서 나쁠 것이 하나도 없다. 게다가...]
로키의 말을 새겨듣기로 했다.
태호가 귀를 기울이자, 로키는 어깨를 으쓱였다.
[일단 나는 천계에서 중립 포지션을 유지하고 있다. 표면상으론 말이지... 알아듣겠지?]
“......예.”
로키가 전면에 나설 수는 없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좋다.
태호는 분신체 하나를 더 늘려, 아스가르드의 왕궁에 박아 두기로 했다.
[우선은 조겐과 로두스의 창고부터 터는 거다. 그 두 놈들, 상위 신들의 따까리나 다름없으니 꽤나 털 맛이 날 거다.]
로키의 말을 들으며,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은 차근차근 시작해 보는 거다.
[또한.]
로키는 자신의 손을 태호의 이마에 짚었다.
[신력의 전이가 가해집니다!]
[보유능력 : 천성음(天聲音)]
곧, 로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너희 세계의 귓속말과 같다. 이걸로 나와 대화를 유지한다.]
태호가 두 눈을 반짝였다.
“알겠습니다.”
......태호는 달렸다.
아스가르드의 세계는 그야말로 천외천의 세계였다. 하나하나가 그야말로 경악스럽다.
예를 들어.
[Lv. 300]
[천계의 영물]
[달토끼]
그냥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토끼 한 마리도 평범하지가 않았다.
태호는 그대로 달려 아스가르드를 벗어나, 거대한 바다 앞에 섰다.
바다는 지상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그 속을 알 수 없는 어마어마한 깊이, 그리고 그 속을 부유하는 기상천외한 괴물들이 느껴졌다.
등골이 오싹해져 온다!
-쫄지 마라.
로키가 천성음으로 말했다.
-걔들 다 내 쫄따구거든.
-그렇습니까?
-공격하지 말라고 명령해 두었다. 그대로 주파해 간다.
태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이곳은 천계, 아스가르드를 벗어난 거대한 바다.
지금부터 천계 탐방을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 생각이었다.
천계 싹쓸이
바다를 건너니 거대한 산맥이 수십 개는 솟아 있는 신비의 땅이 나타났다.
과연.
바다를 건너는 동안 단 한 번도 바다 괴물들이 덤벼들지 않은 것이 신기했다.
육지에 도달하자 그나마 한숨 돌릴 수 있었다.
[Lv. 960]
[정예]
[해룡(海龍) 카무사]
바닷속에서 태호를 지켜보던 거대한 뱀 한 마리가 두 눈을 번뜩이더니 해저 깊숙한 곳으로 사라졌다.
‘시부럴... 이게 대체.’
태호는 솔직히 천계의 남다른 스케일에 오줌을 지려 버린 셈이다.
말 그대로, 지상은 그저 튜토리얼 수준이었다.
태호는 그대로 인벤토리창에서 조겐을 꺼냈다.
“야.”
-......
“얌마.”
-......하아, 이런 미친놈이 드디어 천계까지 쳐들어왔구나. 미친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들어오는 게냐?
태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마디만 더 씨부리면 진짜로 대가리를 아작 내 주마. 그게 아니라면 삼박 사일 동안 쉼 없이 흔들어 줄 수도 있고, 솔직히 로두스만 살려 두고 너는 죽여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아니, 그게 아니고 내 말은...
놈이 깨갱 하며 말을 흐렸다. 때론 공포가 가장 효율적인 통제방법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태호는 깨달아 버린 것이다.
“네 목숨이 더 길어질지, 아니면 여기서 끝날지 다 네게 달렸다. 네놈이 가진 창고는 어디에 있어?”
-......
조겐은 통한의 비명을 질렀다.
-크아아아아! 이 빌어먹을! 이런 빌어먹을! 대체 어쩌다 이런 신세가 됐단 말인가!
놈은 그렇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후우... 이곳에서 그리 먼 곳은 아닐 것이다... 나의... 휴우... 재산... 네게..... 후우... 주마...
태호는 조겐이 말하는 위치로 달렸다.
쿠-웅!
쿠-웅!
하얀색의 거인들이 마치 보초를 서듯 움직이고 있었다.
하늘 저 너머에는 기계로 만들어진 것 같은 거대한 황금 독수리가 배회를 하고 있다.
-이쪽은 천계에서도 북부 끝자락에 해당한다.
그리고 바다 건너 땅의 북부에서 가장 높은 산봉우리 위에 있는 거대한 사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산봉우리 위에서 저 먼 곳을 향해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 거대한 도시가 있었다.
‘신들의 도시.’
이제 시선을 돌려 본다.
동양의 절처럼 지어진 곳은 인적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 사방엔 신력으로 만들어진 두터운 결계가 있었다. 태호는 우선, 주변의 나뭇가지 하나를 던져 보았다.
와지직!
나뭇가지가 가루가 되었다. 허나, 그 기운이 전혀 무섭지 않게 느껴진다.
태호는 자신의 분신체 하나를 소환해 집어넣어 보았다.
쏘옥!
나뭇가지를 부수어 버렸던 그 결계는 태호의 분신체에 생채기 하나 내지 못했다.
-저, 저, 저런! 허어...
조겐이 탄식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태호는 조겐을 보며 씩 웃었다.
역시 신비력은 신력으로 만들어진 결계를 사정없이 투과할 수 있다. 혼돈의 힘에 버금가는, 균형을 무시하는 힘이기 때문일 거다.
분신체를 넣은 뒤, 그 분신체로 본신 이동을 했다.
그리고 내부로 들어섰다.
목재로 만들어진 고풍스러운 건물 안은 먼지 하나 내려앉지 않은 깔끔함을 보였다. 태호는 그 깨끗한 복도를 뚜벅뚜벅 걸어갔다. 걸어갈 때마다 발자국이 남았다.
그것을 본 조겐이 발작하듯 소리쳤다.
-야! 얌마! 신발은 벗어라!
“거 참 되게 땍땍거리네.”
태호가 혀를 찼다. 그 건물의 중심부에는 어려운 고문자들이 적혀 있는 진형이 있었는데, 에픽 아이템들이 그 내부에 있었다.
고오오오-
태호는 에픽 아이템들이 정화되는 과정 자체를 처음 보았기에, 제법 흥미가 돋았다.
고문자들로 만들어진 진형 안쪽에서는 에픽 아이템들에서 에너지가 추출돼 가고 있는 듯했다. 추출이 완료된 힘은 진형 한편에 가지런히 모여 있었다.
생김새는 구슬인데, 주먹만 한 크기의 형형색색의 구슬들이 모여 있었다.
“야, 저게 정화 완료된 힘이냐?”
-......그래.
“저건 어찌 쓰냐?”
-먹는다.
진실의 눈이 그 말이 ‘진실’임을 알려준다. 태호는 그곳으로 걸어가, 구슬을 쥐어 보았다.
촉감은 말랑말랑하고 시원한 공을 만지는 듯하다. 그것을 하나 냉큼 입에 넣어 본다.
샤아악-!
입에 들어가자마자 전신에 힘이 샘솟는 것이 느껴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단숨에 3렙이 올랐다.
“엥?”
동시에.
[특수 스킬 ‘신력’의 숙련도를 얻었으나, 현재 신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신력의 숙련도를 ‘신비력’에 추가하시겠습니까?]
“......예.”
[신비력(어둠)Ⅲ 의 숙련도가 상승했습니다.]
대충 이런 식이라고 보면 맞는 듯하다.
태호는 신들이 어떤 느낌으로 에픽을 챙겨 사용하는지 대번에 이해했다.
-아흐! 아흐! 아흐으... 내 저것들을 얼마나 노력을 했는가...
조겐은 아까워 미치겠다는 듯 알 듯 모를 듯한 신음 소리를 냈다.
태호는 그런 조겐을 보며 씨익 웃었다.
“맛있네?”
막 하나를 더 쥐려던 그 순간.
[신성한 에픽의 기운을 받아, 일정 부분의 능력치가 상승합니다.]
[에픽 : 가로나의 무쌍 장갑]
[공격속도가 5%, 이동속도가 5% 상승했습니다.]
“......?”
태호는 에픽을 굳이 정제하여 먹어 치우는 이유를 그제야 온전히 알았다.
‘에픽의 옵션 중 일부는 영구 저장되는 거라고?’
그렇다면 신들이 이토록 강력한 이유 역시 금세 설명이 된다.
-으으으으!
조겐이 비명을 지르고.
태호는 날름날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 업 메시지가 계속해서 떠올라, 어느 순간부터는 신경을 쓰지 않게 됐다.
[마법 공격력이 2% 상승했습니다.]
[생명력이 5% 증가했습니다.]
[공격력과 방어력이 10% 상승했습니다.]
조겐이 모은 에픽은 총 7가지나 됐는데 토탈 레벨이 20이 올랐다.
그 외, 에너지가 추출된 에픽은 가루가 되어 산산이 바스러져 버린다.
어쩐지 아깝단 생각이 들어 입맛을 다시던 태호는, 조겐에게 다시 물었다.
“야, 너 다른 건 또 없냐?”
-없다! 이젠 진짜 내 밑천이 다 바닥나 버렸다!
-진실.
진짜였다.
태호는 슬퍼하는 조겐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기왕에 먹기 시작한 거, ‘신선과’ 그리고 ‘천년설삼’ 역시 먹어 치우기로 했다.
신선과는 푹 익은 복숭아 맛이 났다. 막 베어 물면 솜사탕처럼 녹아 버려 금세 입안이 심심해진다. 하나를 사정없이 먹어 치우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보유한 신선의 능력, ‘신선 분신술’의 숙련도가 상당히 상승했습니다.]
‘신선과는 신선의 능력 중 한 가지의 숙련도를 올려 준다고 했었지.’
신선과는 적어도 신선들에게 있어선 상당한 보물일 것이다.
지금 태호에게 있어 분신술은 최고효율을 발휘할 수 있는 스킬. 망설임 없이 먹어 치우기로 했다.
아삭! 아사삭!
그야말로 신명 나게 열 개의 신선과를 모조리 먹어 치우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현재 장비에 합산된 ‘신선 분신술’이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신선 분신술이 업그레이드되었다.
정확히는 ‘더 섀도우의 심장’에 각인된 옵션이 업그레이드된 셈이다.
[분신체 4체를 부릴 수 있으며, 분신의 성능이 5% 추가로 상승한다.]
신선 분신술의 업그레이드가 가져온 요점은 저 정도라고 볼 수 있다.
즉, 이제 태호는 총 8체의 분신을 부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다음은 천년설삼의 차례다.
묘하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천년설삼을 꺼내 든 태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것도 그냥 막 먹으면 되나?”
그런 태호를 보며 조겐이 기겁했다.
-이야... 저, 저놈 보소! 저 귀한 걸 그냥 마구 먹는다! 이놈아! 잠깐만! 천년설삼은 그냥 먹으면 안 된다! 차라리 나를 죽여라!
“안 돼?”
태호가 묻자, 조겐이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대꾸했다.
-그래 이 녀석아! 천년설삼은 운기조식이란 것을 해야 효과가 있단 말이다! 내가 알려 줄 테니 제발 그 아까운 걸 그냥 먹지 마라!
“......”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우선 이곳에서 뭘 하기는 위험하니, 분신체를 조겐의 저택 안에 잘 숨겨 둔 뒤 리얼 포스의 대륙으로 몸을 바꾸었다.
샤아아악-!
‘이거 진짜 편하네.’
태호는 어느새 리얼 포스의 세계로 돌아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일단 한 뿌리를 먹어라. 휴우... 내 어찌 이런 신세가 되었단 말인가.
조겐은 투덜거리면서도 나름대로 세심히 태호에게 지도를 해 주었다.
아작!
태호는 천년설삼을 한 뿌리 꺼내 입에 넣었다. 인삼 맛이 났는데, 마치 인삼 주스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입에 넣는 순간 사르르 녹아 버리는 것이다.
운기조식이라는 개념은, 태호가 신비력 수련을 하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
태호가 신비력을 끌어모으고, 온몸으로 퍼트리고 모으고를 반복하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천년설삼의 신묘한 기운을 모조리 흡수하였습니다.]
[운기조식에 성공하였습니다.]
[신비력(어둠)Ⅲ의 숙련도가 상승했습니다.]
‘이 녀석 아주 쓸 만한데?’
사람이 간사하다고, 조겐 녀석이 자신의 쓸 만함을 입증하자 썩 마음에 들어졌다.
태호는 같은 방식으로 천년설삼 여섯 뿌리의 신묘한 기운을 모조리 흡수했다.
콰아아아아-!
눈을 뜨자, 전신에 신비력이 몰아치고 있었다.
[보유 중인 스킬 ‘신비력(어둠)Ⅲ’ 이 업그레이드됐습니다.]
‘요새는 진짜 훅훅 잘 올라가네.’
사실은 태호가 보유한 물건들이 대부분 보통 유저는 평생 한 번 볼까 말까 한 사기 아이템들이기 때문이었지만, 최근의 성취가 비약적으로 상승한 것은 사실이었다.
‘한번 볼까.’
[신비력(어둠)Ⅳ]
[설명 : 태고의 힘, 정순한 어둠의 비전력과 신력의 결합체를 사용합니다.]
[2단계에 접어들며 신비력의 농도가 더욱 짙어졌습니다. 신비력으로 가하는 모든 스킬의 성능이 20% 상승했습니다.]
[3단계에 접어들며 마력이 신비력으로 대체되었습니다. 신비력으로 가하는 모든 스킬의 성능이 50% 상승했습니다.]
[4단계에 접어들며 신비력을 조금 더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습니다.]
“......?”
4단계의 설명이 기묘했다.
‘별 달라진 게 없는 건가?’
태호는 그 부분에 대해 몇 번 곱씹으며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최근 얻은 이런저런 아이템들 덕에 성장 시간은 혁신적으로 단축되었다.
이제 다시 천계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기회를 보며 움직여야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속전속결이다.’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지만, 지금 상황은 조금 다르다.
‘상위 신들의 사도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천계 전체가 비상 태세에 접어들 확률이 분명히 있다.’
그렇다면, 기회를 보다 한방에 챙길 수 있을 만큼 챙겨 두는 것이 이득일 확률이 높다.
우선 조겐의 집을 털고 난 천계로 돌아온 태호는 동태를 살펴보았다.
“야, 너 친한 신들 이름 대 봐.”
-......내가 모시는 메타트론 님. 그리고...
조겐이 우물쭈물했다. 태호는 빤히 녀석을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넌 친구가 별로 없나 보구나?”
이 녀석의 파탄 난 성격으로 보아하니, 천계에서도 독보적 외톨이가 분명했다.
태호는 로만을 꺼내 대질 신문을 했다.
-저 땡중 자식은 천계에서도 소문난 망나니라, 친구가 있을 리가 없다. 내가 지난 시간들을 보아하건대 저놈을 좋아하는 신은 아무도 없었다.
-크읏...
그렇다면 조겐은 안심이다.
적어도 상위 신이 조겐을 직접 찾아 나서기 전까지, 문제가 생길 일은 없다.
이번엔 잠자코 있던 로두스를 꺼냈다.
“불어.”
로두스는 체념이 빠른 놈이었다.
티 안 나고 신속하게
로두스는 조겐의 창고보다 가져갈 것이 없어, 큰 재미를 볼 수 없었다.
로두스의 집 역시 천계 북부에 위치한 외진 산기슭이었다.
산기슭에 태호는 이곳에서 정화가 완료되기 전의 에픽 4개를 획득할 수 있었다.
정화가 완료되기까지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린다. 며칠 단위의 시간이 필요하다기에, 일단 에픽을 갈무리한 뒤 조겐의 집을 나섰다.
가장 우선 순위에 두었던 두 악신의 집을 털고 나니 일단락된 셈.
이제부터는 천계 자체를 탐방해 볼 생각이었다.
태호는 조심스럽게 산을 내려가, 남부로 걸음을 옮겼다.
육안으로도 먼 거리고, 실제로 아주 먼 거리임은 분명했으나 태호에게 있어서는 짧은 축에 속했다.
파파파파팟!
신비력을 뿜어내며 달린다.
사방을 활보하는 거인들, 그리고 하늘의 독수리에게는 태호가 전혀 감지되지 않을 터다.
그렇게 태호는 첫 번째 도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도시 이름이 뭡니까?
-아도니스다. 천계에 존재하는 세 개 대도시 중 하나지.
로키의 답변이 왔다.
-천계의 대도시는 누가 관리합니까?
-그쪽은 상위 신 ‘라’의 영역이다. 그곳부터 북반구 전체적으로 라의 땅이지.
-아.
태호는 그제야 하늘을 활보하는 금속 독수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라는 독수리의 생김새를 띄고 있었기에, 아무래도 그의 하수인 중 하나가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대도시를 관리하는 것이 상위 신이라면...
태호는 천천히 로키에게 물었다.
-로키 님 역시 상위 신에... 속하신단 겁니까?
-꼽냐?
-......
태호가 딱히 뭐라 대답해야 할지 말을 고를 무렵, 로키가 대답했다.
-뭐... 나는 정확히는 그 세계에 들어갈 자격이 없다고 해야 할까.
-자격이라면?
-상위 신들은 저마다의 고유 힘이 있다. 예를 들어, 상위 신 ‘라’는 태양신이라 불릴 정도로 강대한 불의 힘을 가지고 있지.
-......!
-그 외, 메타트론은 광대한 빛의 힘을... 뭐 그런 식이다. 그런 것을 신화력(神話力)이라 부르는데... 그걸 얻지 못했다.
신화력이라.
태호는 새삼 높은 세계의 규모에 학을 뗄 수밖에 없었다. 문득 드는 생각.
-그렇다면 볼카노스 님은...
-녀석에겐 신화력이 있다.
-......
-정확히는, 있었다.
태호는 과거 그들의 대화에서 대강 내용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볼카노스의 등급이 격하되었다는 말.
그 말대로라면...
-그래, 네 생각대로 유배를 당하며 신화력을 강제 봉인당했다고 보면 된다.
-흐음...
태호는 로키와 대화를 나누며 도시의 성벽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심의 문지기는 양팔을 x자로 교차하여 심장부에 대고 있는, 개의 머리를 가진 황금 조각상이었다. 개의 머리, 인간의 몸을 한 채 꼿꼿이 서 있는 모습이 다소 그로테스크해 보였다.
-역시 라의 하수인들이다. 걸리면 귀찮아지니, 적당히 피해 가라.
로키의 말에 태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보유한 에픽 아이템인 ‘칠흑의 어둠 밟기’를 발동했다.
‘발동.’
쭈우욱-!
태호의 몸이 그림자 속으로 빨려들어 갔다.
태호의 눈에 보이는 천계는 꽤나 기묘한 편이었다.
분명히 신들의 도시!
그곳에 사는 신들은, 분명히 신이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신들은 그리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 듯 보였던 것이다.
-로키 님. 이 자들이 정말 신이 맞습니까?
-맞다.
로키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말했잖느냐? 인간 세계와 크게 다를 게 없다고.
로키는 한 템포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천계에도 도시가 있고, 계급이 있다. 네가 보는 신들은 그야말로 하층민들, 그러니까 인간 세계에서도 그리 대단하지 못한 힘을 발휘하는 녀석들이다.
-아, 그렇습니까?
못내 신기했다.
그렇다면 리얼 포스의 대륙에 제단을 가지고 있는 신들의 힘은 이 중에서도 매우 높은 축이라는 말이다.
-왜 그렇습니까?
-다양한 이유가 있지. 현재의 천계는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유지돼 오는 작은 사회이다. 인간 세계처럼 그들 역시 번식을 하고, 경제와 계급을 유지한다.
-......
-타고난 재능, 그리고 자산, 혈통 등이 현재의 계급 사회를 만든 것이다.
이해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인간의 세계와 다르지 않았다.
-또한...
로키는 침음을 흘리며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신력’의 거래 때문이기도 하지.
신력의 거래!
태호는 두 눈이 반짝 뜨이는 느낌이었다.
-신력이 거래가 됩니까?
-신력은 거래가 가능하다. 정확히는 보유한 숙련치를 판매하는 거다. 그래서 다들 에픽을 원하는 거고, 그것을 정화해 먹어 치우는 거지.
그럼 결국 부는 부를 낳고, 빈은 빈을 낳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태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도심의 한복판에 섰다.
천천히 도심을 걸으며, 다양한 건축 양식과 신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 누구도 태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고, 저들 살기가 바빠 보여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도시의 한복판에는 거대한 피라미드가 우뚝 서 있다.
그 피라미드의 꼭대기에는 역시나 거대한 눈알 하나가 있어, 도시를 비롯한 온 사방을 비추고 있었다.
가장 먼저 한 것은 경제 조사이다.
이곳에서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은...
‘아이템들이잖아?’
태호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장면을 보고 있었다. 시장에서 거래되는 물건들은 레어-유니크-레전더리 등의 등급이 붙은 아이템들이었다.
-이런 아이템들을 뭐하러 거래합니까?
-그건 간단하다. 천계에선 그것들이 드랍되지 않으니까.
-드랍되지 않는다...
-모르겠느냐? 이곳은 그러니까, 리얼 포스의 ‘게임’ 속이 아니란 거다.
-아......!
새삼 다시 개안하는 기분이다.
그렇다.
태호의 현실 세계에서는 아이템이란 것이 없다. 만약 현실 세계에서 리얼 포스의 아이템이 거래된다면? 그건 말하지 않아도 당연히 고가에 거래될 것이다.
-그간 네가 만난 신들은 꽤 급이 높은 신들이었다. 그러니 에픽을 요구하거나, 레전더리를 요구하거나, 또 나처럼 용과 같은 걸 요구한 거다.
-아......!
그건 그랬다.
태호의 기억에도, 레어나 유니크 등을 먹어 치우는 신들도 제법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아가 있다.
우리아는 레어나 유니크도 가리지 않고 먹어 치우는 신으로, 한때 그녀의 의뢰를 유용하게 사용한 바 있었다.
-이유는, 그것들에게서도 힘을 뽑아낼 수 있기 때문이지. 에픽보다 불순하고 시간도 오래 걸리지만, 가능은 하다.
태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거리를 지나갔다.
여기저기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들 사이, 유독 거대하고 웅장한 탑이 하나 보였다.
-탑이 하나 있습니다.
-거기가 바로 마몬의 탑이다.
마몬!
태호는 마몬의 탑으로 접근하며 그곳의 사방을 살펴보았다.
탑 주변에는 거대한 신력의 결계가 단단히 족쇄처럼 채워져 있었다.
-요즘 놈이 라의 총애를 받는다더군.
과연, 마몬의 신력 결계는 조겐이나 로두스보다 족히 네다섯 배 이상 두껍다.
보통 신이라면 닿기만 해도 바스러져 버릴 거대한 신력의 결계!
-우선 접근해 보겠습니다.
태호가 말하자, 로키가 대답했다.
-일단 주의하거라. 그 결계는 어쩌면 신화력으로 강화되었을 수 있으니, 보통은 잿가루가 돼 버릴 테니까.
신화력!
태호는 그 단어를 곱씹어 보았다. 그야말로 무력(武力)의 세계란, 천외천이란 생각이 들어서다.
태호는 탑을 빙글빙글 돌다, 탑의 그림자 부분으로 자신의 분신체 하나를 밀어 넣었다.
쑤욱-!
그림자 속에 스며든 태호의 분신체가 막 신력의 결계를 통과하려던 그 시점이었다.
쿠-웅!
전신에 강한 압력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어?’
태호는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분신체를 밀어 넣은 것인데도 불구하고 본체에 오는 타격이 있다는 말 아닌가?
-신화력이 들어갔군. 신화력은 분신체를 타격해도 본질에게 일부의 대미지를 준다.
쭈우욱-!
허나 분신체는 그 압박을 견디고 결국 결계 너머의 땅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들킨 겁니까?
태호는 혹시나 문제가 생긴다면 도망치기 위해 사방을 경계하며 물었다.
-아마 그건 아닐 거다. 네 신비력은 탐지가 불가능함을 내 몇 번이고 확인한 바 있다. 허나, 확실하진 않으니 일단 속전속결로 해결하자.
-예.
로키의 말이 백번 맞다. 태호는 탑 내부로 들어선 분신체에게 본신 이동을 한 뒤, 탑 내부의 그림자를 통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탑은 거대했다.
거대하다는 말로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 높이는 서울의 63빌딩보다 훨씬 더 높고, 한 층의 천장까지의 길이가 족히 10미터는 되는 듯했다.
내부에는 거대한 기둥들이 층을 받치고 있었으며, 기둥에는 끔찍한 악마의 형상들이 음각으로 새겨져 음산함을 더했다.
아무튼 뭐든지 다 크다. 거인이 사는 탑 같았다.
쑤욱 쑥-!
탑의 내부에는 마몬의 하수인으로 보이는 괴물들이 배회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꼬리에 화살촉 같은 장식이 달려 있었고, 두 눈은 시뻘건 데다 전신에서 사악한 신력을 흘려 대고 있었다.
-악마들이군.
태호는 그들의 그림자를 통해 이동하며 탑 내부를 휘젓기 시작했다.
새삼 감탄스럽다.
‘역시 볼카노스.’
볼카노스는 본디 상위 신이 될 수 있는 몸이었지만, 그 자격까지 갖춘 상태에서 굳이 천 년 전의 대격변 이전 전투에 나섰다.
그리고 강등당했다.
그는 인간을 사랑했기에, 자신의 권능을 아이템으로 만들어 지상에 남겨 두었다.
그 아이템들이 가진 효과는 그야말로 상상 초월이다. 그림자 속을 누비던 태호는 탑의 최상층에 가까워지며 흘러나오는 사악한 신력을 느꼈다.
‘마몬이다.’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벅 -저벅-
태호가 스며든 그림자는 현재, 한 악마의 그림자다. 악마는 보초를 서는 듯 시뻘건 눈을 사방으로 굴리며 탑의 상층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벅- 저벅-
점점 더.
상층으로 향할수록 신력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진다. 탑의 상층으로 향하는 이 둥근 계단 위, 저 위에서부터 쏟아져 내려오듯 압박을 가해 오고 있었다.
‘이거, 장난이 아니다.’
꿀꺽-!
자신도 모르게 식은땀이 났다. 이 힘은 족히 로키와 비견될 정도로 강대했던 것이다.
저벅-
어느 순간.
악마가 최상층에 도달했다.
최상층은 탁 트인 거대한 광장 같았다. 기형적 조형물과 마법 문구가 새겨진 진 앞에, 괴물이 서 있었다.
괴물의 체구는 족히 10미터에 달한다. 하반신은 뱀의 것이었고, 상반신은 인간의 것이었는데 머리에 삐죽빼죽 솟아 나온 가시와 섬뜩한 눈빛이 놈의 정체를 대번에 알게 했다.
‘저게 마몬...!’
[보고드립니다.]
알 수 없는 언어가 악마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허나, 태호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북방에서... 올림포스의... 가디언들이... 선전포고를... 해 왔습니다...]
북방?
올림포스?
악마의 말에 마몬이 몸을 돌린 채, 뱀의 하반신을 꿈틀거리며 악마에게 다가왔다.
[읊으라...]
[최근 이어진... 북방 정벌을... 당장 멈추지 않으면... 올림포스의 가디언이 모두 출전해... 생사결을... 나누게 될 것이라... 합니다...]
올림포스라면 제우스와 헤라 등, 그리스 로마 신화로 유명한 땅이 아니던가?
문득 태호는 그런 생각 자체가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치면 로키 역시 신화 속 인물이다.
[웃기는군... 키크키킥!]
마몬이 기괴하게 웃었다. 놈이 웃을 때마다 사방으로 섬뜩한 신력이 퍼져 나간다.
태호는 놈의 뒤로, 마법진 속에 수북이 쌓인 에픽을 바라보았다.
‘스무 개는 되네.’
어떻게 해야 저것들을 티 안 나고 신속하게 먹어 치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