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
싸아아아아-
고요해진 잊혀진 섬에 바람이 불었다.
로만의 대 사기극은 성공리에 끝났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군.’
하지만, 여기서 끝났다고 보기엔 어폐가 있었다.
상위 신들은 바보가 아니었고, 이렇게 무마하는 것도 엄연히 한계가 있었다.
시간을 끌어야 한다.
태호는 그렇게 생각했다.
모든 것을 로키에게 물어볼 수는 없다. 그 역시 만능이 아니었기에, 정말 중요한 판단은 스스로 내려야 했다.
‘어쩐다.’
상위 신들은 분명 이 사태에 의구심을 품을 것이다.
그리고, 지상의 사태를 조사시킬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흑마법이 드러나는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태에 흑마법이 얽혀 있다는 것은, 결국 볼카노스에게 불똥이 튄다.
결국, 시간을 벌어야 한다. 사건을 점점 더 오리무중으로 만들고, 단서를 최대한 조각조각 끊어 놔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단기적으로 강해질 수 있는 대부분의 수단을 이용해 지상에 내려온 상위 신의 사도 하나를, 잡아 족친다.
어차피 이중 맹약은 아직 남아 있다.
이중 맹약이 사라지면, 어설픈 정치질도 끝장이다. 이중맹약이 사라졌다는 것은, 상위 신들이 직접 강림하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말이다.
맹약이 존재하는 시간 동안 최대한 강해져 둬야 한다.
태호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쳤다.
그렇다면.
우선 순위를 매겨 보자.
첫째. 눈 앞의 데페로를 비롯한 혼돈의 장군들을 잡아 족친 뒤, ‘수호자의 힘 다음 단계’를 손에 넣는다.
둘째. 보유한 림몬을 죽인 뒤, 놈의 능력을 손에 넣는다.
셋째. 헤르메스를 이용해, 추가 신과를 입수한다.
넷째. 그렇게 얻은 추가 신과를 이용해 아군들의 전력을 대폭 강화시키고, 사도 잡이 준비를 한다.
태호는 그런 결심을 마친 뒤 그림자에서 쑥, 빠져나왔다.
저 멀리, 로만이 그런 태호를 보더니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호는 천천히 로만에게 걸어왔다.
데페로는 이미 태호를 몸종으로 알고 있기에, 큰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로만이 자리에서 일어나, 태호에게 왔다.
태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신의 계획을 말하자, 로만이 두 눈을 깜빡였다. 이내, 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군.”
“그거 그리 반갑지 않은 소리네.”
태호가 피식 웃자, 로만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 가지, 네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뭔데?”
로만이 잠시 머뭇거리다,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상위 신들에게 공갈을 친 거, 어차피 드러나는 거 한순간이다. 주박의 상흔이라고 얼버무렸지만, 제대로 파 보면 상흔이 아닌 건 금세 드러날 문제다.”
일리 있었다.
태호가 그의 얼굴을 보았다.
“내게 건... 주박을 해제해 다오.”
“......”
곤란한걸.
태호는 팔짱을 낀 채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로만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다, 협상 카드를 몇 장 가지고 있는지 재차 말했다.
“그러면 내가 알고 있는 포인트 몇 가지를 알려 주마.”
“포인트라?”
“그, 그래. 앞서 말했듯, 나는 신들과 대립할 때를 대비해 지상세계 곳곳에 히든 카드들을 숨겨 두었다. 천계 놈들은 영악하기가 이를 데 없어, 언제 말을 바꿀지 모르는 일이니까.”
놈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포인트 몇 개를 알려 주마. 그, 그리고 결정해도 늦지 않는다. 혀, 협상 하겠느냐?”
우선 받아는 보기로 했다.
* * *
쿠구궁- 쿵-
브라만은 고요히 눈을 떴다. 그의 눈에는 삼라만상의 우주가 보였다.
무수히 많은 세상을, 그는 헤쳐나왔다.
파아아아앗-!
사방의 우주가 보인다. 점점이 박힌 찬란한 별들, 은하수. 새카맣게 펼쳐진 광활한 우주 저 편 너머, 그의 시선이 닿은 것은 단 하나였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
저것은 거대한 순환의 고리.
가만히 그것을 지켜보던 브라만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문득. 그의 전신이 쭈우우욱- 빨려들 듯 움직였다. 사방의 우주는 쏜살같이 스쳐 지나가고, 어느새 그는 황금색 궁의 옥좌에 앉아 있었다.
[......]
눈을 뜨니,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한 사내가 보였다. 붉은 머리칼이 인상적인 사내의 이름은 아수라.
브라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하라...]
[어, 저기... 브라만 님. 저기...]
아수라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자신이 본 것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주먹만 한 크기의 수정구에 담긴 것은 로만과의 대화가 담긴 것이었다.
브라만은 그 수정구의 기억을 모조리 흡수한 뒤, 지그시 눈을 감았다.
‘라.’
이번 회차는 확실히 기묘했다.
지상의 일이 틀어지는 일은 지난 140여회차에 걸친 시간 동안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최근 라의 동태가 수상쩍다는 것은 그 역시 해 오던 생각이었다.
[에... 또한... 얼마 전 라의 부하인 마몬이, 올림포스 정벌에 나선 적이 있었습니다.]
아수라가 쭈볏거리며 말하자, 브라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해 보라는 뜻이다.
[그 과정에서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상자라?]
브라만이 흥미를 보였다.
[그 과정이 흥미롭긴 한데... 마몬의 부하인 림몬이란 놈이 배신을 했답니다. 그런데, 그 배신이란 게... 올림포스에서도 무단으로 신과를 따고 헤르메스를 죽이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마몬의 탑에서도 놈의 에픽을 죄다 훔쳐 가기도 해서...]
[오호.]
브라만이 두 눈을 제대로 떴다.
‘윽!’
아수라가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두 눈은 똑바로 보게 되면, 끝없는 심연 저 속으로 빠져 버린다.
[그래서?]
[그래서 라와 올림포스의 우라노스가 전쟁 직전까지 갔다가... 지금 대치 중이랍니다... 그리고 아스가르드의 로키에게 찾아가 난장판을 벌리다, 호되게 당하고...]
[흥미롭군.]
브라만은 라를 아주 잘 안다.
천상의 권좌의 상위 신들은 겉으로 보면 협력 관계처럼 보이나, 끝없는 견제와 암투의 연속이었다.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지?’
하지만.
그는 라를 아주 잘 알기에, 오히려 이 상황이 조금 더 의심스러웠다.
‘너무 뜬금없군.’
[또한 라의 수하인... 아자무스가, 혼돈의 권좌의 사티로스에게 주박을 걸려던 시도를 해답니다.]
[주박을?]
브라만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너무 뜬금없어.’
역시나 그런 생각이 든다. 하지만, 오히려 뜬금없기에 의심이 간다.
‘무슨 생각인 거지.’
최근 라의 행보가 지나칠 정도로 파격적인 면은 분명히 있다.
그는 다시 눈을 뜬 뒤 아수라에게 말했다.
[너는 지상에서 정보를 수집하고, 내게 돌아오너라. 또한... 그 주박이 심상치 않군. 주박이라... 사티로스가 그리 약한 존재였던가?]
사티로스는 판타로스의 사념체.
절대 약하지 않은 존재였다. 이중맹약으로 뒤덮힌 리얼포스의 대지에서 아자무스 따위에게 속박당하다니?
여러 모로 미심쩍다.
고오오오-!
브라마가 손을 펼치자, 그 손에 별자리가 새겨진 다우징 하나가 만들어졌다.
[이 물건을 네게 하사하마.]
아수라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가 내민 물건을 받아 들었다.
상위 신이 직접 하사하는 보구라니. 아수라조차 이런 물건을 받아 본 것은 심히 간만이었다.
[상세히 알아보고, 정확히 고하라.]
[알겠습니다.]
그는 천천히 브라만의 방을 나섰다. 방이라기엔 지나치게 거대하고, 또 끝없이 넓은 방이었다.
브라만의 공간은 그야말로 끝없는 우주 한복판과도 같았다.
방을 나서자 중압감이 귀신처럼 사라졌다.
식은땀을 흘리며 뒤로 물러서던 아수라는 문득, 지극히 순결한 기운이 뒤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선 그는 다시금 화들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화아아악-!
그 곳에 서 있는 것은 중년의 남성이었다.
일순 온 사방에 연꽃이 피었다. 좌우로 쫘악, 색동옷을 입은 선녀들이 부채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며 그 한가운데 남자가 서 있었다.
‘부처!’
상위 신, 부처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 후광이 밀려온다. 마치 태산같이 거대한 존재를 보는 기분이었다.
[고생이 많아요.]
목소리는 지나칠 정도로 따스하다. 듣는 것 만으로 온 몸이 노곤해지고, 잡념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으...!’
아수라가 다급히 좌우로 머리를 흔들었다.
[......]
[안에 계시는지?]
브라만을 찾는 듯 하다. 아수라는 침을 꿀꺽, 꿀꺽, 삼키며 고개를 간신히 끄덕였다.
[그럼 실례.]
부처가 브라만의 방 문 앞에 섰다.
황금성, 천상의 권좌.
아후라, 브라만, 라, 부처, 메타트론, 둠 제네울.
이 성에는 7명의 상위 신이 공존한다. 저마다의 방이 존재하는데, 각 방은 하나의 거대한 고유차원이라고 보면 된다.
상위 신들은 곧 저마다의 차원을 지배하는 절대신!
그들이 지배하는 차원에 무수히 많은 생명체들이 살아가는 것이다.
즉.
다른 상위 신이, 상위 신의 방에 들어선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뭔 일이 벌어지겠구나.’
아수라는 직감적으로 느꼈다.
* * *
볼카노스는 감았던 두 눈을 떴다.
끝없이 펼쳐져 있는 순백의 공간, 그 속에서 명상하고 있던 그는 고개를 돌렸다.
[......]
[오랜만.]
볼카노스의 옆에 서 있는 것은, 익살스러운 얼굴의 카실론이었다.
[네메데스.]
볼카노스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래 기다리셨나요, 볼카노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군요.]
볼카노스의 말에 카실론이 씩 웃었다.
[대강의 준비가 끝났어요. 그간, 천계에 꽤 재미난 일들이 벌어지고 있더군. 흔적조차 남지 않은 그 힘은, 수호자의 힘이 분명해 보여.]
[......]
볼카노스는 대답 없이 빙긋 웃었다.
[덕분에 일이 조금 더 쉬워졌지. 자, 갑시다.]
카실론은 순백의 허공에 자신의 모든 힘을 끌어모았다. 볼카노스는 그의 힘을 주시했다.
신력은 아니었다.
수호자의 힘?
그것도 아니다. 정확히 말 하자면, 그것들이 섞여 있는 듯 한 힘이었다.
그는 상위 신들의 탐지에 걸리지 않는다. 수호자 일족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천계를 거스를 수 있는 자’ 에 속하는 이유다.
[가끔 생각하곤 합니다, 볼카노스.]
카실론은 뒤를 돌아보며 웃어 보였다.
[책을 펴고, 그저 하루 하루 공부하는 낙으로 살아가던 그 오랜 옛날이.]
번쩍-!
그 순간.
카실론의 힘으로, 하얀 공간이 갈라지고 바깥 세계가 보였다.
[......!]
카실론이 그 곳을 비집고 바깥으로 나섰다.
두근 두근 두근!
천년 전, 대격변 이전.
상위 신들은 볼카노스에게, 혼돈의 힘에 대적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볼카노스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상위 신에 가장 가까웠던 그는, 결국 그렇게 천옥에 갇혀 영겁의 시간을 썩어야 했다.
그 뒤로 천 년을 기다렸다.
볼카노스는 천천히, 하지만 신중히 틈새 속으로 몸을 집어 넣었다.
쑤욱-!
그와 카실론이 빠져나오자, 사방에 보이는 것은 거대한 한 폭의 지옥도였다.
[천옥은 총 여섯 겹.]
카실론이 말을 이었다.
[이제 우린 한 겹 넘어선 거요. 방금 전 것은 상위 신, 아후라의 상위 결계. 지금 눈 앞에 펼쳐져 있는 이 광경은 브라만의 상위 결계, 연옥입니다. 지금부터 우린 줄줄이 이어진 천옥의 결계를 빠져나가야 해요. 준비 됐습니까?]
볼카노스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갑시다.]
두 사내가 천천히 연옥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방의 악마며 괴물들이, 두 사내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캬아아아앗-!
이내, 놈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