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귀자를 잡아야 한다
“가장 먼저, 네게 협력한다는 증거를 보여 주지.”
로만의 말에 태호가 반문했다.
“어떻게?”
“손쉽게 데페로를 잡게 해 주마.”
“손쉽게라...”
태호와 로만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곧, 로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협력한다고 했다. 난 약속한 건 지킨다.”
“지켜보지.”
태호가 주먹을 내밀었다. 로만은 자신의 주먹을 태호의 주먹에 맞부딪혔다.
거래가 어느 정돈 성립됐다.
로만은 천천히 데페로에게 나서 입을 열었다.
“데페로! 요구사항이 하나 있다!”
[뭐냐, 사티로스!]
데페로는 호쾌하게 대답했다.
“너도 알다시피 지금 내 몸 상태가 말이 아니다! 혼돈의 힘을 좀 나눠 줘야겠다!”
[뭐라고!]
로만은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이어갔다.
“조금 아까 아수라 놈이 하는 것을 다 봤지 않느냐! 이게 다 내가 힘이 없어 그런 것이다! 그런 허섭스레기 같은 놈들에게 무시를 당해서야 판타로스 님의 위세가 설 자리가 없다!”
[흐음...]
데페로는 일리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한, 나는 이 주박술을 완전히 해제하고 온전한 힘을 되찾을 필요가 있다. 네 힘을 절반만 나눠 다오! 온전한 힘을 회복하면, 네게 다시 돌려주겠다!”
데페로에게는 거절할 이유가 없다.
그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로만은 태호를 보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데페로의 전신에 박혀 있는 무수히 많은 눈깔이 일순간 활짝 펼쳐졌다.
전신의 모든 눈동자가 로만을 향했다.
고오오오오-!
데페로의 전신에서 회색 힘이 물씬 새어 나왔다. 혼돈의 힘이었다.
“......!”
태호는 그 힘을 자세히 관찰했다.
마력, 비전력, 술력, 법력, 신력 등.
각종 힘들에는 고유의 느낌이 있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확연히 보인다.
혼돈의 힘에는 규칙이란 것이 없다. 그 힘은 한없이 자유롭고, 또 제멋대로다.
‘비슷해.’
아주 비슷하다, 신비력과.
태호는 그 기묘한 연결 고리를 보며 여러 생각에 잠겼다.
고오오오오-!
혼돈의 힘은 점차 로만에게 주입돼 간다. 사방의 장군급이 무릎을 꿇은 채 데페로에게 힘을 보태어 주었다.
콰아아아아아!
눈에 보이는, 아주 선명한 회색 힘! 로만은 전신에 그 힘을 받아들이며, 점점 더 활기를 되찾아 갔다.
태호는 그 힘과 로만을 주시했다.
어느 순간.
로만의 전신에 새겨진 주박이 강렬한 빛을 발했다. 하얀빛 같기도 하고, 블랙홀의 어둠 같기도 했다.
그리고.
촤아아아악-!
로만의 전신의 주박이, 혼돈의 힘을 죄다 흡수해 버렸다.
“......?”
[으응?]
데페로도 이상 현상을 느꼈는지, 혼돈의 힘 주입을 멈추었다.
[대체 이게 뭐냐! 사티로스!]
“음?”
[이건 마치! 판타로스 님의 주박! 같은 느낌 아닌가!]
로만 역시 그렇다고 느낀 듯, 심상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론 어림도 없군. 조금 더 힘을 써 봐라, 데페로.”
[흠! 상위 신 중에서도 이런 신력은! 느껴 본 적이 없다! 아자무스! 대체 무슨 짓을...!]
태호는 이 촌극을 한 걸음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확실히 편하네.’
판타로스의 사념체, 사티로스. 놈을 아군으로 끌어들인 것은 신의 한 수였다.
태호가 스스로 헤쳐 나가기엔 벽이 너무나도 많았다. 하지만 그를 손에 넣으며, 모든 것의 난이도가 두서 단계는 족히 하락한 셈이다.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다!
사티로스, 즉 로만은 지난 140회차의 시간 동안 임무를 충실히 수행해 온 판타로스의 오른팔이었으니까!
그가 말하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통한다. 그가 그렇다고 하면, 그게 새로운 메주 제조 방식이라고 취급될 정도의 유명인사였다.
[좋다, 사티로스! 이번엔 전력으로!]
콰아아아아아!
가엾은 데페로가 필사적으로 혼돈의 힘을 끌어냈다. 그리고 그것이 로만에게 스며들었다.
“큽!”
압박이 굉장한지, 로만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허나, 로만의 몸에 새겨진 주박은 점점 더 선명해지며 더욱 로만을 옥죄어 올 뿐이다.
샤아아아악-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촌극을 마칠 시간이 다 됐다.
[헉, 헉... 말도 안 돼! 이건... 대체?]
태호 역시 솔직히 말하자면, 감탄했다.
‘이게 수호자의 힘이구나.’
수호자의 힘은 균형을 파괴하는 존재들에게 있어 재앙과도 같다.
상성이 완전히 갈려 있다고 해야 할까? 다른 힘보다 혼돈의 힘에게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느낌이었다.
“헉... 헉...”
로만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놈의 전신에 만들어진 주박이 점점 더 강렬해지고, 아주 선명한 흑색 빛을 띠었다.
그는 천천히 태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태호가 나설 차례다.
[사티로스! 아무래도 이건 무리다! 나는...]
펑!
그 순간.
로만이 구슬이 되었다. 그 순간, 태호의 눈앞에도 기묘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당신이 만들어 낸 ‘신의 주박’에 가해진 ‘혼돈의 힘’을 흡수합니다.]
‘어?’
지이이잉-!
태호의 심장부에 회색 소용돌이가 생겼다.
[허용치를 초과한 혼돈의 힘이 체내에 머뭅니다.]
메시지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받아들이겠냐고?
미쳤냐!
혼돈의 힘은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힘. 태호는 대번에 거절하려다가, 문득 이질감을 느꼈다.
예전이라면 절대 느낄 리 없는 감정이었으나, 이제는 약간 희한한 느낌이 든 것이다.
‘왜 이렇게 친숙하게 느껴져?’
혼돈의 힘에서 느낀 익숙함.
그것은 바로, 다른 의미의 ‘신비력’과의 동질감.
머릿속에 여러 생각이 오고 갔다.
허나.
묘하게 절대 질 것 같지 않은 도박을 하는 기분이었다.
‘받아들인다.’
[‘패시브 : 혼돈의 힘’ 획득!]
“어?”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그 순간, 태호의 몸은 마치 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아니.
착각이 아니다!
온 세상은 멈춰 있는 것 같았고, 태호는 육신을 떠나 저 먼 하늘로 치솟아 올라가고 있었다.
한번 겪어 본 적 있는 이 현상!
태호는 어쩐지 초연해졌다.
고오오오오!
하늘로 치솟던 태호의 저편이, 쩌억 갈라졌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회색 안개의 세계! 그곳은 바로 혼돈의 권좌였다.
촤아아아악-!
태호는 그 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회색 세계에는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의 괴물들이 득시글거리고 있었다.
촉수를 일렁이는 바다 괴물이 시커먼 바닷속을 부유하고, 하늘에는 해파리처럼 생긴 끔찍한 괴물이 수없이 많이 떠 있었다.
산처럼 생긴 거대한 기괴 식물, 그리고 수포처럼 생긴 집에 사는 벌레들이 보였다.
그들이 이루는 거대한 도시!
저 멀리, 육중한 몸집의 판타로스가 보였다. 판타로스는 그들 도시를 굽어보며, 옥좌에 앉아 있었다.
촤라라라락-!
사방에서 회색 아우라가 몰아치고 있었다.
[준비... 하라... 헤파이돈... 나의... 종이여...]
귓가를 울리는 끔찍한 목소리!
[최후의... 수호자가... 권능을.... 사용했다... 이제... 이중 맹약은... 끝이다...]
그의 목소리는 도심 전체에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우리는... 순환의 고리를... 부수고... 천상의 권좌를... 탈환한다...]
천상의 권좌를 탈환?
[둠 제네울이여... 약속의 시간... 그대는 우리의 힘이 되겠다고 했노라...]
둠 제네울!
태호는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판타로스의 앞, 희끄무리한 형체로 서 있는 작은 인영이 보였다.
둠 제네울이라면 상위 신 중 하나.
나비의 날개를 가진 인영은 태호가 보았던 둠 제네울이 확실했다.
[허나, 이변이 생겼다 판타로스!]
그가 말했다.
[이변...?]
[어쩌면 이번 회차에서 이중 맹약이 끝나지 않을지 모르겠군!]
둠 제네울의 목소리는 어둠고 쇳소리가 났다.
[무슨... 소리지.]
[리얼 포스의 대륙, 진행이 되어야 할 일들이 하나도 되지 않고 있다. 또한...]
둠 제네울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상하게도... 이중 맹약은 점점 더 힘을 회복하고 있다!]
힘을 회복한다!
태호는 흥미롭게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크르르르...]
판타로스는 흉측한 신음 소리를 냈다. 그의 흉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다면... 데칼이... 결계에서... 빠져나왔다...?]
[그건 아니다! 데칼이 조금씩 힘을 회복하고는 있으나, 우리 모두는 현재 데칼의 결계를 덧대느라 상당량의 신화력을 소모하고 있음이다!]
[......]
[문제는 지상에 있다! 뭔가, 훼방을 놓는 놈이 하나 있는 것 같다. 아우슈리네의 권능이 사용됐다면, 필시 누군가가 회귀자(回歸者)가 되었다는 말! 어쩌면 그것은 인간일지 모른다!]
[인간... 따위가... 그 하찮은... 존재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거지?]
[우리 역시 인간이었음을 잊지 마라, 판타로스! 그 회귀자를 잡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할 것!]
움찔!
상위 신과 판타로스가 회귀자를 찾아야 한다는 말을 주고받고 있으니, 영 어색한 일이다.
[나는 곧 나의 사도를 지상으로 보낼 생각이다! 빌어먹을 이중 맹약 때문에 아주 더럽게 됐군!]
그리고 새삼 느낀다.
이중 맹약의 위대함을. 그리고, 수호 일족의 대사제 데칼의 공포스러울 정도의 힘을.
촤아악-!
그리고 태호의 몸이 쏜살같이 움직였다. 혼돈의 권좌를 스쳐 지나가 저 바깥세상으로 빠져나왔다.
고오오오오-!
어마어마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거대한 우주! 그 너머, 저 너머에 압도적일 정도로 큰 하나의 고리가 보였다.
무수히 많은 별들이 모여 있는 걸까? 아니면?
마치 은하수처럼 모여 있는 그 별들의 군집체가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의 형태였다.
‘순환의 고리구나!’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마치 태호를 빨아당기듯 움직이고 있었다.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태호는 순환의 고리를 이루고 있는 거대한 두 힘의 정체를 깨달았다.
‘하나는 수호자의 힘,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바로.
‘혼돈의 힘!’
수호자의 힘과 혼돈의 힘.
따지고 보면 오직 두 개의 힘만 균형으로부터 자유롭다.
‘어쩌면 두 힘의 근원은 하나!’
두근 두근 두근
태호는 순환의 고리로부터 굉장한 따스함을 느꼈다. 가만히 그 곳을 향해 손을 뻗어 본다.
순환의 고리가 환하게 빛난다.
그리고.
싸아아아아아아-!
모든 것이 역행되며, 어느새 태호는 잊혀진 섬으로 돌아와 있었다.
뚝-
세상은 멈춘 상태 그 대로.
허나, 태호의 시간은 분명히 흐르고 있었다.
째깍-
째깍-
째깍-
이것이 시스템이 의도한 흐름이 아니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그 어떤 메시지도, 위업도 떠오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순전히, 수호자의 힘과 혼돈의 힘이 동시에 공존하며 만들어 낸 기이한 공명 현상일 것이다.
째깍-
째깍-
시곗바늘 소리가 점점 더 선명하게 들려온다. 그리고 어느 순간.
화아악-!
세계의 시간이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일시적으로 태호는, 어쩌면 수호자의 힘을 더욱 강화하다 보면 이 능력에 근접해질 수 있지 않을까?
[사티로스!]
상념을 깬 것은 데페로의 목소리였다.
태호는 데페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 이놈에게 남은 혼돈의 힘은 채 3할도 되지 않는다.
[이건... 주박! 설마! 주박은 상흔이 아니라...!]
태호는 그런 데페로에게 지팡이를 겨누었다.
[너...! 너 정체가 뭐냐!]
쿠구궁-!
대답 대신 날아든 것은, 나락의 절대 구역 15연발이었다.
[어? 어어엇! 이, 이건 볼카노스의 권능!]
놈이 경악했다.
[죽여라!]
[해치우자!]
데페로의 뒤를 지키는 4인의 장군들이 태호에게 달려든다.
그 모든 것들이 슬로 모션처럼 보였다.
태호는 그들을 지켜보다가.
슈슈슝-!
나락의 절대 구역 15겹에서 쏟아지는 어둠의 창 세례를 확인하며.
팟!
냉큼 그 공간 속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