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파이팅이야
[캬아아아아악!]
나락의 절대 구역 저 안쪽에서 끔찍한 살육이 벌어지고 있다.
새삼 깨닫는다.
과거, 균형 파괴자들을 처음 만난 그날이 새록새록했다.
가장 먼저 만났던 장군은, 샤반타였다.
본신의 1/3급 힘을 보유한 샤반타에게 태호는 극심한 고전,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고비를 넘어 간신히 승리했다.
돌아와, 지금.
태호는 이제 장군급은 눈 한 번 깜빡일 시간에 해치울 수 있는 무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이다.
태호는 그대로 팔짱을 낀 채, 이어지는 메시지들을 확인했다.
[균형 파괴자를 처치하였습니다.]
[균형 파괴자를 처치하였습니다.]
[균형 파괴자를 처치하였습니다.]
[균형 파괴자를 처치하였습니다.]
네 놈의 장군급이 금세 터져 나갔다.
콰드드득! 콰드득! 콰득!
말 그대로 갈려 나가 버린다. 이제는 익숙한 광경, 태호는 무덤덤한 얼굴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끔찍한 15연발의, 나락의 절대 구역이 끝나고. 그 안에서 만신창이가 된 데페로가 나타났다.
[허억... 이 무슨.... 이런 터무니 없는...]
놈은 태호의 공격에 굉장한 충격을 받은 듯했다.
[사, 사티로스! 네놈이, 배, 배신을!]
배신할 리 없다고 생각했던 아군의 배신. 어쩐지 착잡해진 태호의 몸이 불어났다.
하나, 둘, 셋, 넷...
분신체들이 망설임 없이 지팡이를 휘둘렀다.
‘강화된 어둠의 명령, 5연발.’
파파파팍!
파파파파팟!
파파팍!
각기 어둠의 명령 5연발을 쏟아 내자, 어마어마한 대미지가 데페로에게 누적되었다. 놈은 머리를 얻어맞아 휘청! 하며 고꾸라졌다.
[이럴... 수가 있나... 대체 어찌하여... 너는... 사티로스...]
콰드득!
그것이 최후였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시곗바늘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
로만을 꺼낸다.
그는 쓰러진 데페로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마음이 무겁군.
그 말은 진심일 것이다. 태호가 물었다.
“죽음 뒤에는 뭐가 있지?”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글쎄다. 솔직히 말하자면, 잘 모르겠다.”
-무(無)다.
“......”
-그저 무(無).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그렇다.
이제 태호는 천계, 정령계, 혼돈의 권좌. 기타 등등을 비롯해, ‘인간’이 ‘신’이라고 여기는 이들을 보았다.
-그것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태호는 로만의 말을 이해했다.
가진 것이 많은 이들이, 그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는 상황. 그것이 죽음.
죽음, 그리고 영원한 ‘소멸’ 앞에 한없이 나약해지는 존재들.
샤아악-
데페로의 몸, 그리고 네 장군급의 몸이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태호의 눈앞에 고대하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균형 파괴자를 처치하였습니다.]
[대장군(4/5)]
[‘균형의 수호자’가 업그레이드됩니다.]
[패시브 : 균형의 수호자Ⅳ]
[설명 : 최초로 균형을 파괴하는 혼돈의 존재를 사냥했을 때 얻을 수 있는 스킬. 일정 범위 안의 균형을 탐지합니다.]
[균형의 수호자에게 사냥당한 ‘균형 파괴자’들은, 혼돈의 권좌로 돌아가지 못하고 완전히 소멸합니다.]
[대장군(4/5)]
[장군(11/25)]
[1차 업그레이드]
[‘사냥한 균형 파괴자들의 능력 일부를 흡수하였습니다. 또한, 균형의 수호자는 앞으로 균형 파괴자를 상대할 때 20% 더욱 강력해집니다.’]
[2차 업그레이드]
[‘사냥한 균형 파괴자들의 능력을 일부 흡수하였습니다. 또한, 균형의 수호자는 균형을 위배하는 모든 존재에게 50% 더욱 강력해집니다.]
[3차 업그레이드]
[‘사냥한 균형 파괴자들의 능력을 일부 흡수하였습니다. 또한, 균형의 수호자는 존재하는 모든 힘과 융화가 가능합니다.]
[앞으로 ‘5’인의 균형 파괴자를 사냥하면 다음 단계로 업그레이드됩니다.]
태호는 메시지 하나를 곱씹었다.
‘균형의 수호자는 존재하는 모든 힘과 융화가 가능합니다.’
그렇다.
여태까지의 모든 것들이 설명이 된다. 태호는 팔짱을 낀 채 여러 가지 힘들을 떠올렸다.
‘가장 먼저, 역시 혼돈의 힘이지.’
혼돈의 힘.
그것을 받아들인 선택은 뛰어났다.
‘잠깐만.’
그렇다면, 혼돈의 유산들도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일까? 그렇게만 된다면야 더할 나위가 없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에픽 둘둘 세팅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혼돈의 유산들은 더욱 뛰어난 옵션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
“혼돈의 힘을 운용하게 되면, 유산 사용도 가능하냐?”
-그건 잘 모르겠는데...
로만은 말끝을 흐렸다.
-기본적으로 그건, 혼돈의 권좌와 계약하는 거다. 영혼을 바치는 계약으로 힘을 당겨 쓰는 식이라... 쓴다 한들 그리 권장할 방법은 아니다.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
태호는 입맛을 살짝 다셨다.
자, 그럼 다음 보상들을 살펴보자.
[수호자의 스킬을 선택해 주세요.]
메시지는 기존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눈앞에는 두 가지의 스킬의 형상이 일렁이고 있다.
‘고르는 거?’
어쩐지 꽤 흥미롭다.
태호는 흥미진진한 얼굴로 왼쪽의 스킬부터 확인했다.
[균형의 수호자의 특수 스킬]
[‘최후의 수호자’]
[일시적으로 수호자의 힘이 극대화됩니다. 단 5초간, 수호자는 10배의 힘을 발휘합니다. 이후 패널티로 100초간 옴짝달싹할 수 없습니다.]
‘흐음.’
일시적으로 10배의 힘을 발휘하고, 이후 패널티로 죽는다는 것과 크게 다를 게 없다.
태호는 그것을 곰곰이 지켜보다 오른쪽으로 향했다.
[균형의 수호자의 특수 스킬]
[‘수호의 벽’]
[수호자의 사방에 절대적 방어막을 형성합니다. 또한 자신의 모든 방어 능력이 10배 상승하며, 1분간 지속됩니다.]
요컨대, 창이냐 방패냐의 선택이다.
망설여진다.
태호는 곰곰이 생각했다.
뒤이어 메시지가 떠올랐다.
[현 등급에서 익힐 수 있는 스킬은 한 가지이며, 선택한 스킬을 익힌 뒤 다음 등급에서 또 다른 선택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친절하기도 하다.
태호는 이 친절함의 원천이 이 세계를 만들기 위해 갈려 나간 수호자들임을 깨달았다.
‘즉, 이번에 놓친 스킬은 다음 업그레이드 때 배워도 된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냉정하게 따져, 지금의 태호에게는 일순간 폭딜(폭발적인 딜링)을 할 수 있는 스킬이 필요했다.
오히려 지금은 ‘죽음’이라는 패널티에 대해 초연해질 수 있다. 이유? 바로 분신체들 때문이다.
분신체들에게 폭딜을 명령한 뒤 소환을 해제하거나, 죽여도 될 거라는 계산이 선다.
좋다.
태호는 그럼, 왼쪽을 고르기로 했다.
[최후의 수호자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다음은?
[‘만유(漫遊)의 눈’을 획득했습니다.]
[‘폭탄마’를 획득했습니다.]
[‘파괴의 미학’을 획득했습니다.]
[올 스텟이 50 상승했습니다.]
이번 역시 총 세 개의 스킬을 얻었다.
[엑티브 스킬 : 만유(漫遊)의 눈]
[설명 : 혼돈의 대장군(데페로)을, 혼돈의 장군(하크, 나크, 오크, 데크)을 사냥해, 그들의 힘을 일부 획득하였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만유의 눈을 설치합니다.]
‘흠?’
솔직히 말해 맥이 탁 풀린다. 대단한 스킬이라도 얻나 했더니, 그게 아닌 모양이다.
우선 다음 거.
[패시브 스킬 : 폭탄마]
[설명 : ..]
[자폭 병기가 됩니다. 자신이 소유한 올 스텟, 생명력, 마력, 공격력, 마법공격력, 방어력, 마법방어력을 합산한 수치의 폭발 광역 대미지를 줍니다. 사용 후 즉사합니다.]
“......”
아무래도 장군급 중 하나가 이런 스킬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히려 이게 좋은데?’
태호는 어쩐지 흥미로운 얼굴이 돼, 분신체 하나를 소환했다.
지-잉!
분신체에게 새로 얻은 스킬을 지시해 본다.
‘우선... 최후의 수호자.’
5초간 10배의 힘을 발휘하는 최후의 수호자를 발동시키고, 그다음.
‘폭탄마.’
폭탄마를 지시한다.
지이이이이잉-!
분신체의 전신이 시뻘겋게 빛났다. 태호는 아차, 싶어 다급히 소리쳤다.
‘어둠의 발걸음.’
펑!
분신체는 어둠의 발걸음을 통해 저 멀리 떨어져, 폭발했다.
콰콰콰콰콰콰콰쾅!
“......!”
삽시간에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나, 사방이 초토화 돼 버렸다.
[당신의 분신체가 죽었습니다.]
‘분신을 배워 두는 건 최고의 선택이었군.’
새삼 그렇게 느끼며, 다음 스킬을 보았다.
[패시브 스킬 : 파괴의 미학]
[설명 : ..]
[아이템을 파괴하여 그 수치만큼의 일시적 대미지 상승을 꾀합니다.]
‘이건 또 신선하네.’
태호는 헛웃음을 흘렸다. 뭐, 어찌 됐든 일단 받아 두기로 할까.
두둑-
몸의 변화가 생긴 것은 그즈음이었다.
두두두두둑-
본래는 현실로 돌아갈 때마다 변화하던 몸이었다.
허나, 이제 리얼 포스의 세계에서도 현실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영위하는 태호였다.
변한다.
태호는 자신의 피부가 쩌억- 갈라지는 것을 보았다. 머리카락이 우수수- 다 빠져 버리고, 다시 수북이 돋아나는 기묘한 체험을 했다.
두둑- 두두둑-
뼈마디가 뒤틀리고 맞추어진다. 전신에 신선한 기운이 쑤욱, 몰려 들어온다.
싸아아아-!
몸은 더없이 가벼워지고 있었다. 소설에서 봤던 무림인들의 환골탈태가 이러할까.
마치 자연과 그대로 하나가 돼 버리는 느낌!
땅을 한 번만 차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뿌듯함!
과거에는 그저 그런 수준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다르다.
‘이건... 신의 몸을 갖게 되는 과정!’
태호는 점점 더 신들의 세계에 근접해져 가고 있는 것이다.
두둑- 두두둑-
키가 조금 더 컸다. 온몸은 이제 강철과도 같은 단단함을 자랑하는 듯, 매끄러운 하얀 색에 잡티 하나 없었다.
잠시 눈을 감는다.
사방에 일렁이는 세상만사의 힘이 느껴졌다. 사이한 혼돈의 힘이 점점 더 세밀하게 느껴진다. 신비력의 어둠이 마치 만져지는 것 같이 오감이 예리해졌다.
-더 괴물이 됐군.
감상을 깨는 로만의 목소리에, 태호는 눈을 떴다.
.......광휘의 궁전으로 돌아온 태호는 이제 완벽히 만들어진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저기 유저들이 제법 많이 보였다.
[리얼 포스, 동시접속자 1억 3천만 명 돌파!]
이미 비정상이란 말로 표현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현재의 열풍.
태호는 혼자 광휘의 궁전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여러 생각을 했다.
“아, 형님!”
막 궁전에서 나오던 라간이 태호를 반겼다.
“라간.”
“사람 봐. 진짜 많지?”
라간의 말 대로였다.
마을의 경제 구조는 이미 자리가 잡힌 모양이었다. 저쪽에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세율 조정이랑 카지노 지분 얘기를 좀 할까 하는데. 일단 그게-”
“너 다 해.”
“응?”
태호는 빙긋 웃었다.
라간에게는 항상 빚지는 마음이 있었다.
회귀를 하며 다짐했던 많은 것들은, 이미 어그러졌다.
돌아보면 반성할 점 투성이였다.
우선, 태호는 자신의 회귀행에서 배제된 여러 사람들을 떠올렸다.
‘조금 더 함께할 수 있지 않았을까.’
과거의 동료였던 라간, 그리고 끝까지 대립했던 쉬폰. 거대한 장사꾼, 강민. 그 외 많은 인간관계를 형성했던 과거의 사람들.
어느 순간부터 태호는 늘 혼자였다.
이제는 볼카노스와 로키가 있지만, 인간으로서 ‘인간애’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은 이제 남지 않았다.
‘점점 더, 괴물이 돼 가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배제한 것은, 처음에는 단순한 효율 문제였다. 아마, 효율을 가정하고 움직이기 시작할 때부터였을 거다.
태호는 지나칠 정도로 빠르게 강해져 갔다.
달리고 또 달렸다. 강해지고, 또 강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강해지는 것 자체를 억제할 수가 없었다. 억제할 필요도 없었다.
지긋지긋한 파워 게임에서, 찍어 눌리기 싫으면 그 외엔 답이 없었다.
어느 순간 돌아보니, 인간 중에는 함께 싸울 수 있는 사람이 없어졌다. ‘동료’라는 말로, 포함될 수 있는 존재가 사라졌다.
“......”
단순히 에픽을 독점하려는 이기심의 문제가 아니었다.
게임을 플레이해 나가며 계속해서 깨닫는다.
태호를 제외한 이들에게, 이 세계는 가상현실 공간의 게임임을.
천계의 신이고, 혼돈의 권좌의 존재들이고.
그런 것들에 신경 쓰며, 피 마르게 살아남기 위해. 또, 이겨 내기 위해 함께 목숨을 거는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어쩌면.
‘라간은 이런 싸움에 끼워 넣고 싶지 않아서였을 지도.’
태호는, 때론 굳이 몰라도 될 것을 알아야 할까? 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어찌 보면 오만한 생각일 수 있지만, 당장 자신만 봐도 그렇다.
과거의 리얼 포스를 즐기며, 태호는 단 한시도 즐겁지 않은 적이 없었다.
리얼 포스는 새로운 세계는 그야말로 새로운 미래나 다름없었다.
그 세계의 진실을 들여다보고 있는 지금, 이제는 더 이상 과거의 행복이 떠오르지 않게 돼 버렸다.
‘어떤 것이 맞았던 걸까.’
그리고.
‘정말 회귀란 축복인 걸까?’
뜬금없는 생각들을 해 본다.
“네가 다 한 거잖아. 그럼 당연히 네 거야. 필요한 거 뭐 더 없어?”
“흠-”
라간은 씩 웃었다.
“없어. 근데 형님은 안 받는다고 해도, 챙겨 줄 거야. 우리 아버지가 그러셨거든, 고마운 사람에겐 응당한 보답을 하라고.”
“그런가.”
“그런 거지. 암튼 요즘 사는 게 너무 즐거워 미쳐 버릴 것 같단 말이야.”
태호는 빙긋 웃었다.
-대장, 여기까진가 봐.
문득 과거, 죽기 직전 녀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꼭, 살아남아서. 우리 복수를 해 줘.
그 모습과 현재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어쩌면, 지금이 정답이었을 지도. 그리고...’
“즐거워 보여서 좋다.”
‘걱정 마라. 해낼 테니까.’
속으로 되뇌며 라간의 어깨를 두드렸다. 가만히 녀석을 보다, 다시 씩 웃으며 덧붙였다.
“좋구만.”
이제 와서 과거를 후회해 보아야 소용없다. 앞으로 할 일은 지금의 후회보다 더 대단한 후회를 야기할 수 있는 중대 임무들이었다.
나아간다.
행복한 시간에 녀석을 놓아두고, 이쪽은 이쪽의 길을 간다.
“아무튼 파이팅이야.”
태호는 라간에게 주먹을 내밀었다. 라간이 주먹을 맞부딪혔다.
“나만 믿어.”
이제 드워프들에게 맡겨 놓은 아머 슈트를 받고, 다음 단계에 착수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