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에서 밀리네
지팡이는, 마몬이 들었을 때는 그야말로 거대했는데 이렇게 보니 작다.
태호는 그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용자에 따라 크기가 달라지나 보군.’
신화력이란 것이 어찌나 대단한지, 단순한 무구만 들었을 뿐인데도.
화륵-
태호의 온몸에 불이 붙었다. 온몸이 후끈거리며 달아오른다. 동시에, 과거 ‘물의 여신 에테리얼’ 에게 받았던 가호가 발동되었다.
[물의 방어막이 발동 중입니다.]
치이이이이이이익-!
요란한 수증기가 뿜어져 나온다. 신화력의 힘이 깃든 장비인지라, 물의 방어막이 오래 버티지 못했다.
태호는 자신의 신비력을 끌어올렸다. 그 상태에서 지팡이를 쥐자, 지팡이의 신화력이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 순간!
화아아악-!
태호의 온 사방이 바뀌었다. 환상? 아니다. 이것은 현실!
어느새 사방은 지옥의 업화로 뒤덮인 황폐한 세계가 되었다. 대지는 지글지글 타오르고 하늘은 시커멓다.
‘여긴 어디지?’
-역시 그랬군.
로만이 말했다.
“뭔데?”
-......상위 신들의 신화력이 깃든 장비는 나 역시 처음. 허나, 그 신화력이 깃든 장비들이 자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
“......”
아닌 게 아니라.
화아아아악!
온 사방의 화염이 모여들더니, 소용돌이치며 하나의 인영을 만들어 냈다.
[누ㅡ 구ㅡ 냐.]
화염 거인!
태호는 그 거인을, 사도들의 싸움에서 목격한 바 있다. 지팡이가 만들어 냈던 거인이다.
[너는 누구지?]
태호는 그 거인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느껴지는 신력의 힘이 어마어마하다. 놈은, 정확히 말하자면 신화력으로 만들어진 괴물이었다.
‘어쩐지 저놈 하나가 아수라랑 비비더라.’
꿀꺽-
“나는...”
태호는 놈을 굴복시키지 않으면 지팡이를 쓸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네 주인이 되고 싶은데?”
[으하하하하하하!]
거인이 웃었다. 웃을 때마다 불꽃이 사방으로 튀어서 지글지글 타올랐다.
[웃기구나! 아그니가 이 몸을 꺾겠다고 덤비던 그때 보다 훨씬 더!]
아그니?
불의 신 아그니 말인가?
“아그니를 알아?”
[내 이름은 수르트! 불의 제왕이자, 위대한 라 님의 수하! 네까짓 놈이 감히 이 몸의 주인이 되시겠다고? 하하하하하!]
놈이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네놈은, 지옥의 업화에 뒤덮여 죽게 되리라!]
“오...”
태호는 눈을 깜빡이다가, 손에 쥐고 있던 지팡이를 놓았다.
화아악-!
“......”
어느새 현실. 태호는 지팡이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저건 아수라만큼 미친놈이네.’
우선.
태호는 아이템들을 죄다 챙긴 뒤, 바닥에 남은 세 개의 배지 같은 형상의 얇은 판을 발견했다.
주먹 크기의 얇은 판은, 어디서 본 적 있는 속성의 것들이었다.
‘보자.’
[등급 : 에픽]
[종류 : 재료]
[이름 : 우주의 신화력의 정수]
[우주의 신화력의 단서.]
“......!”
이것은 바로 신화력의 단서들이었다. 태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수 세 개를 챙겼다.
각기 ‘우주의 신화력’, ‘창조, 파괴의 신화력’, ‘태양의 신화력’ 이었다.
우선.
획득한 에픽들을 정리한 태호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 녀석들, 유용하긴 하지만...’
자아가 하나씩 다 있다는 말이렷다.
우선 지팡이에서 보았던 화염 거인 같은 녀석들이 하나씩 자리 잡고 있다면 곤란한 일이었다.
태호는 문득 다우징에게 물었다.
“너는 왜 고분고분하냐?”
[답 : 당신이 접속 기준에 충족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접속 가능한 기준이라.
“기준?”
[답 : 접속 금지 제한에 속하지 않은, 특수한 힘을 가진 존재입니다.]
“내가 가진 힘이 뭔데?”
[답 : 측정 불가.]
아무래도 감지 불가능인 수호자의 힘 때문인 것 같았다.
[답 : 또한, 사도의 힘에 육박함.]
그렇다는 말은...
“내 수준이 아수라나 다른 사도들과 동등하단 말인가?”
[답 : 그렇습니다.]
“......”
그건 꽤 놀라운 말이었다. 그때, 다우징이 덧붙였다.
[답 : 단순한 무력 수치로 보면 1/3 미만의 수준이지만, 보유한 힘의 등급은 사도의 수준을 상회합니다.]
그렇군.
“수호자의 힘, 그리고 혼돈의 힘 검색.”
[검색중...]
곧 답이 도출되었다.
[유의미한 검색결과는 1개입니다.]
[1. 두 가지의 힘은 어디서 온 걸까? 존재하는 모든 힘 중 가장 강력하고, 균형을 무시하는 그 힘의 근원은? 많은 시간 동안 고심해 보았지만, 그런 상식을 파괴하는 힘은 결국 순환의 고리에서 파생된 것이 아닐까?]
태호가 과거 본, 순환의 고리에서 느낀 것과 같았다.
그리고, 조금 아까 세 사도를 해치우고 얻은 힘들을 소화하는 과정에서도 한 번 느꼈다.
‘혼돈의 힘이라...’
혼돈의 힘.
그것을 이용해 소화하려 하자, 마치 모두 빨아들이듯 고통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야.”
-그래.
로만에게 태호가 물었다.
“혼돈의 힘을 극대화하는 방법은 뭘까?”
-......제정신이냐?
“제정신이다.”
태호의 말에 로만이 콧방귀를 뀌었다.
-그 일을 하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냐?
“그렇겠군.”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혼돈의 힘을 증폭해 세계에 퍼트리는 것이 놈의 임무였다.
펑!
로만을 사람으로 만들었다. 놈을 한참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한다.”
“......말해라.”
“주박을 풀어 주겠다.”
“정말이냐?”
놈이 반색했다.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상황은 이미 어그러질 대로 어그러졌다. 이미 천계에서도 이미 로만은 배신자고, 혼돈의 권좌로 돌아갈 수도 없어졌다.
“너를 믿어도 되냐?”
태호의 물음에, 로만은 빤히 태호를 보았다.
“믿는다라...”
그는 고심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라. 당분간은.”
-진실.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나는 너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다.”
-진실.
오히려 그편이 더 신뢰가 간다. 이해관계에 의한 믿음이란 것, 때론 그편이 더 믿음직스러울 때가 있다.
“다만, 나와 한 약속은 기억하겠지?”
로만의 물음에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잘못되면, 판타로스가 널 찾기 전에 영원한 소멸을 시켜 주지.”
“좋아.”
로만이 태호에게 손을 내밀었다. 태호도 놈의 손을 잡았다.
파아앗-!
곧.
로만의 전신에 얽혀 있는 어둠의 주박이 빛을 발휘했다. 전신에서 떨어져 나오듯, 주박이 점점 희미해지더니 태호의 몸속으로 회수되었다.
후우웅-!
로만의 전신에 힘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사이한 혼돈의 힘이 천천히 들어차, 사방으로 흩날리기 시작했다.
“하아-”
로만은 가슴 벅차다는 듯 양팔을 활짝 벌린 채 한참이나 가만히 있다가, 눈을 떴다.
“좋군.”
이제 로만에게는 온전한 힘이 돌아왔다. 로만은 태호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 이제 뭘 어떻게 하면 되냐?”
“그 혼돈의 힘 증폭하는 걸 나한테도 시도해 봐.”
“......”
로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지금 바로 할까?”
“시작해.”
고오오-!
로만의 몸에서 혼돈의 힘이 물씬 새어 나왔다. 그리고 그 힘이 사방으로 퍼지며, 환영을 만들어 냈다.
콰아아아아아-!
어느새 온 세상은 회색 안개가 자욱하게 낀 공허한 벌판이 되었다.
고오오오-
태호는 저편, 그림자로 일렁이는 판타로스의 모습을 보았다.
족히 서울의 63빌딩에 맞먹는 크기, 일렁이는 끔찍한 촉수들!
그것이 판타로스의 사념체라는 것을 알면서도 태호는 문득 과거가 떠올랐다.
“으.”
잠깐 몸서리치는 사이, 놈이 물어왔다.
[무엇을... 바치겠느냐...]
사이한 목소리!
마치 끊기는 라디오 속에서 들려오는 귀신의 목소리 같은 그 음성.
태호가 빽 소리쳤다.
“시끄럽고! 바로 시작해!”
[쳇... 알았다...]
곧.
놈이 온 사방의 회색 기운을 태호에게 주입하기 시작했다.
콰아아아아아-!
전신으로 스며드는 혼돈의 힘!
[당신이 보유한 ‘혼돈의 힘’이 더욱 강력해졌습니다.]
[당신이 보유한 ‘혼돈의 힘’이 더욱 강력해졌습니다.]
[당신이 보유한 ‘혼돈의 힘’이 더욱 강력해졌습니다.]
메시지들이 연달아 떠오른다.
덩달아 태호의 몸속에서 요동치는 혼돈의 힘이 덩어리를 키워 갔다.
느낌.
힘이 가져다주는 느낌은...
‘진짜 친숙해.’
전혀 이질적이지 않은 데다, 어찌 된 영문인지 친숙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고오오오-
혼돈의 힘이 점점 더 커질수록.
[크... 후우...]
로만이 힘겨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내 놈이 소리쳤다.
[야... 혼돈의 유산... 몇 개만... 던져 봐...]
판타로스의 사념체의 모습으로 로만의 말투가 되니, 그건 또 그 나름대로 그로테스크했다.
태호는 인상을 찌푸리며 인벤토리창에서 혼돈의 유산 세 개를 꺼내 던졌다.
샤악-!
온 사방의 회색 기운이 다시 진득해졌다.
[다시... 간다...]
콰아아아아아!
이상할 정도로 많은 힘이 쏟아져 들어오는데, 신들의 힘을 흡수할 때 같은 고통은 전혀 없다.
태호는 마치 공기를 마시듯 그 힘들을 흡수했다.
카아앙-!
어느 순간.
태호의 몸속에 주입되는 혼돈의 힘의 양이 더 이상 늘어나지 않았다.
[이 정도가... 한계...]
사방의 회색 안개들도 온데간데없어지고, 풍경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후우... 후우...”
로만은 다리가 후들거리는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태호는 우선 몸속에 일렁이는 혼돈의 힘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마치 태초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양, 자유롭게 움직이는 그 힘은 정말이지 기묘했다.
‘어디.’
태호는 자신의 신비력을 한껏 끌어올려, 혼돈의 힘을 뒤덮어 보았다.
쿠-웅!
그 순간.
“억!”
태호는 자신도 모르게 풀쩍 뛰었다. 온몸에서 느껴지는 격렬한 저항이 있었던 것이다.
쿵 쿵 쿵 쿵 쿵!
혼돈의 힘이 저항하고 있다.
태호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단 말이지...’
이미 수호자의 힘을 얻으며 그 힘의 진면목에 대해 깨달은 바가 있었다.
[‘사냥한 균형 파괴자들의 능력을 일부 흡수하였습니다. 또한, 균형의 수호자는 존재하는 모든 힘과 융화가 가능합니다.]
균형의 수호자 4단계를 개방하며 알게 된 사실이었다.
즉.
이 혼돈의 힘도 융화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과거, 신력과 비전력을 합쳐 신비력을 만들어 냈던 것처럼!
태호는 두 눈을 감은 채 신비력 운용에 총력을 가했다.
쿵 쿵 쿵 쿵 쿵!
쉽게 되지 않는다. 한참 동안 기를 쓰며 진땀을 빼던 태호는 문득 반짝 눈을 떴다.
‘아, 그렇지.’
샤샤샤샤샤샥-
분신체들이 늘어났다.
태호는 분신체들에게 같은 명령을 내렸다. 태호의 분신체들이 동시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신비력으로 혼돈의 힘 제압하는 것에 사력을 다하기 시작했다.
“......”
로만은 그 모습을 보며 기겁했다.
‘미친놈...’
저런 것은 정말이지 듣도 보도 못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 미친 괴물이 대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이게 정말로 인간이었던 건가.’
쿵쿵쿵쿵쿵-
태호는 집중에 집중을 거듭했다.
혼돈의 힘은 한참 동안 신비력과 씨름을 벌이더니, 점점 더 힘을 키워 나갔다.
쿵쾅쿵쾅쿵쾅!
마치 온몸이 터져나갈 것 같은 압박이 밀려왔다.
‘힘에서 밀리네.’
태호는 한참 씨름을 하다 두 눈을 뜨고 소리쳤다.
“다 이리 와!”
“뭐?”
로만이 반문했지만, 로만에게 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분신체들이 우르르 태호에게 달려와 자신의 신비력을 태호에게 쏟아붓기 시작한 것이다.
“......”
로만이 학을 뗀 듯 입을 쩍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