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전설-173화 (173/194)

지면 곤란해

분신체들이 신비력을 쏟아붓는다!

쑤욱-!

동시에 신비력이 주입되는 용량이 대폭 늘어났다. 태호는 전신에 가득 활개 치던 혼돈의 힘과 신비력의 힘이 대등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지지지직 지지지직!

두 힘은 한참 동안 대등한 씨름을 했다.

쏴아아아아아!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야 하지만, 태호의 머릿속에는 마치 회색 물결이 홍수처럼 몰아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어느새.

눈을 뜨니, 온 세상은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 갈라지고 황폐한 대지 위, 온 사방에서 몰아치는 회색 물결이 보인다.

‘환영?’

환영이라면 환영.

하지만, 태호는 ‘또 다른 눈을 뜬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사방에는 태호의 분신체들이 서 있었고, 신비력의 힘은 그 회색 물결 앞에서 가녀린 촛불 같아 보였다.

‘엄청나다.’

이것이 혼돈의 힘.

왜 유저들이 혼돈의 힘을 얻고 나서 타락해 버리는지, 그 힘에 저항할 수 없어지는지. 그 이유는 따지고 보면 자명한 일이었다.

이 힘은 본래 인간이 절대 견뎌 낼 수 없는 힘이다.

고오오오오오-!

태호의 전신에 신비력이 들끓었다.

‘버텨 보자.’

두 눈 가득 독기가 들어찬다.

철-썩!

회색 물결이 온 사방에서 날아들어, 태호를 뒤덮었다.

* * *

“......”

로만은 정면에 앉아,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것 같은 태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허점이었다.

공격한다면, 먹힐 확률도 있다.

그는 가만히 태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펑-!

크르르르르르르르릉!

그때 자동 소환된 것은, 펜리르 3세였다. 녀석은 로만을 노려보며 시커먼 늑대로 변했다. 허연 이를 드러낸 채, 한 걸음이라도 더 다가오면 물어뜯어 버리겠다는 결의를 다지는 것 같았다.

“......”

그 옆에는 막시무스가 소환돼,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섬뜩한 검이 언제든 뽑혀 나와, 공격할 준비를 마쳤다.

마지막으론 아르카네가 빤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거 참.”

로만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서라, 이것들아. 공격할 마음이 있었으면 진작에 했다.”

사실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로만 역시 태호라는 존재에게 이상한 기대감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놈이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전대미문!

한낱 인간이 신들에게, 그리고 혼돈의 권좌에 도전하는 것은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일이다.

지난 무수히 많은 회차의 리얼 포스에서 등장한 적 없던 것은 아니다. 허나, 그 저항군들의 힘은 하염없이 약할 뿐. 개미가 인간에게 도전하는 것과 같았을 뿐이다.

허나 이제는 다르다.

‘수호자의 힘...’

수호자의 힘을 가진 인간. 눈 앞의 이 인간은, 어쩌면 진짜로 그 모든 것을 깨부수고 새로운 세계를 열 가능성이 있었다.

“흐음......”

로만은 천천히 뒤로 물러서, 털썩 주저앉았다.

[꾸아아악!]

그리고, 자신이 뭔가를 깔고 앉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죽는다아악!]

까마귀였다.

로만은 까마귀를 꺼내 빤히 바라보았다. 이 녀석은 야타카라스, 가엾은 까마귀 왕이다.

“네 꼴이 나와 비슷하구나.”

로만의 말에, 야타가 빽 소리쳤다.

[저 빌어먹을 인간이 거짓말을 했다악! 단 한 번도 나를 부르지 않는다아악!]

“널 까먹었을 가능성이 높아.”

로만은 그런 실없는 농담을 던지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판타로스 님은 나를 잊어버렸을 리 없지.’

다시 시선을 돌려 태호를 보았다.

‘너.’

그의 두 눈이 깊어졌다.

‘지면 곤란해.’

* * *

태호는 혼돈의 힘에 최선을 다해 저항했다. 신비력이 그야말로 폭주하듯 치솟아, 사방의 회색 물결을 막아 냈다.

혼돈의 힘은 친숙하다. 막아 내는 한편으로, 달려드는 혼돈의 힘을 흡수했다.

몸 안으로 스며 들어오는 혼돈의 힘을 천천히 소화한다. 소화할 수 있는 만큼만 받아들이고, 소화가 완료되면 추가 분량을 소화한다.

쏴아아아아-

1회분의 혼돈의 힘을 신비력으로 덮어,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렸을까?

한 시간?

두 시간?

솔직히 시간 계산을 할 정도로 여유가 있지 않았기에,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기계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다.

쏴아아아-

온몸의 신비력은 점점 더 늘어나며, 또 변화해 갔다. 융화라고 해야 할까?

혼돈의 힘은 섞이면 섞일수록 고유의 성질은 남은 채, 신비력화 되어 갔다.

받아들이고.

막는다.

다시 받아들이고.

다시 또 막는다.

무수히 많은 반복, 그리고 반복.

사방의 분신체들이 돕지 않았다면 진작 신비력 부족으로 혼돈의 힘에 잡아 먹혔을 지도 모른다.

허나.

그것도 곧 한계에 봉착했다. 태호는 온몸이 근질거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색 힘은, 태호의 몸을 갉아 먹으려고 작정한 양 온몸을 잠식해 오고 있었다.

‘젠장.’

불현듯.

마음속에서 악마가 속삭이고 있었다.

-포기하면 편해.

또 다른 자아가 깨어난 걸까?

-이쯤 하면 할 만큼 했지. 안 그래?

귓가에 속삭이는 듯 한, 태호 자신의 목소리였다. 자신의 목소리를 선명하게 들으니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여기서 힘을 놓아줘. 어차피, 더 해 봐야 아무 의미도 없어.

의미가 없다?

-이렇게 강해지면 어떻게 할 거야? 상위 신들과 정말로 싸우기라도 하려고?

그게 아니면?

-판타로스 님은? 넌 판타로스 님을 몰라? 지구를 지워 버리던 그 괴물을 이기겠다고? 그건 불가능해.

그렇다면?

-그냥 여기서 포기해. 어차피 아등바등해 봐야, 결과는 죽음뿐이야.

기묘하지만 달콤한 제안이다.

허나.

태호는 감았던 두 눈을 떴다.

“엿 먹어.”

혼돈의 힘이 만들어 냈던 내면의 악마가 실수 하나를 했다.

“판타로스는 개새끼야.”

태호가 이를 악물었다.

“‘님’ 같은 게 아니지.”

그 순간.

[‘마음의 평온’이 발동 중입니다.]

급격히 태호의 마음이 평온해지기 시작했다.

[패시브 : 마음의 평온]

[설명 : 관음보살의 평정심을 이어받다.]

[의지가 남아있다면, 그 의지를 극대화합니다.]

악마의 속삭임은 이제 사라졌다.

태호는 다시 반복 작업을 시작했다. 점점 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조차 잊어 먹을 정도로 몰두한다. 어느새 무념무상의 경지로 접어들게 되었다.

어느 순간.

태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사방에서 몰아치던 회색 물결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마저 소화해 냈을 무렵엔 사방이 빙글빙글 돌며, 어느새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

태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헛웃음을 짓고 있는 로만의 모습이었다.

태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세상엔 어슴푸레한 어둠이 깔려 있었고, 몸속에선 신비력과 혼돈의 힘이 하나가 되어 고유의 색깔을 잃지 않은 채 일렁이고 있었다.

신비력이 강화되거나 하지도 않았다. 신비력은 그저, 기존의 등급과 숙련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양이 늘지도 않았다.

그러나.

‘미묘하게 달라졌다.’

물감의 색으로 표현하자면, 파란색이 더 짙으면서도 묘한 빛을 띄는 파란색이 된 기분이다.

“그걸 다 먹어 치웠군.”

로만이 묵묵히 말했다.

“기존에 네가 가졌던 힘과 완벽히 융화돼 버렸어. 수호자의 힘이 무섭다고 듣기는 했지만...”

그가 혀를 찼다.

태호는 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대략 일주일.”

일주일이나 흘렀단 말인가. 문득 돌아보니, 펜삼이와 막시무스, 아르카네가 보였다.

마치 태호를 보호하듯 빙 둘러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것이, 오랜 시간 동안 깨어 있었던 것 같았다.

그들을 가리키자, 로만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해코지라도 할까, 계속 저러고 있더군.”

“아.”

태호는 돌아서서, 그들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만히 하나 하나 뜯어 보았다.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고마운 녀석들.”

[아, 나의 주군. 깨어났는가.]

막시무스가 마치 깨어 있다는 듯, 눈을 감은 채 말했다.

“그래. 너희들, 고생 했다. 고맙다.”

태호는 막시무스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펜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녀석이 갸르릉 거리며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아르카네를 번쩍 들어 품에 안고 등을 토닥여 주었다.

[잘 잤어?]

“그럼.”

소녀는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폈다.

[그럼 나도 자러 갈래.]

세 녀석이 돌아갔다.

로만이 천천히 태호에게 다가왔다.

“너, 네 힘을 써 봐.”

태호는 군말 없이 자신의 신비력을 뿜어냈다. 섬뜩하고 잘 정제된 힘이 뭉실뭉실 솟아 나왔다.

로만은 그런 태호의 힘을 빤히 보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젠장. 정말 바로 옆에 있어도 모를 정도로 귀신같군. 그리고......”

로만이 자신의 혼돈의 힘을 뿜어내, 태호에게 쏟아부었다.

촤아아아악-!

태호의 신비력은 혼돈의 힘과 마주치더니, 마치 뜨거운 커피에 설탕이 녹아들 듯 혼돈의 힘을 녹여 버렸다.

“......혼돈의 힘의 속성까지 가지게 됐어. 뭐 이런 터무니없는 괴물이...”

로만은 허탈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렇다면... 조금 더 선택지가 넓어질 것 같은데...”

“선택지?”

“그래.”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예전, 내가 네게 말했던 것이 있다. 기억하나?”

-내 주박을 풀어 준다면... 내가 알고 있는 포인트 몇 가지를 알려 주마.

-앞서 말했듯, 나는 신들과 대립할 때를 대비해 지상 세계 곳곳에 히든 카드들을 숨겨 두었다. 천계 놈들은 영악하기가 이를 데 없어, 언제 말을 바꿀지 모르는 일이니까.

기억한다.

태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만이 말했다.

“그간은 여러모로 시간이 부족했으니 미루고 있었지만, 지금부터 그 포인트들을 클리어하러 가 볼까 한다. 그리고, 선택지가 넓어졌다는 말은...”

태호는 로만의 말을 듣다, 일리 있다는 듯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해 봐.”

“기본적으로 나는 판타로스 님의 사념체. 즉, 정말 강한 것들은 대부분 혼돈의 힘에 속할 수밖에 없다. 혼돈의 힘을 극성으로 끌어낼 수 있는 보물들이 대륙 곳곳에 숨어 있다.”

문득 드는 의문.

“기존의 대장군들에게는 왜 주지 않았지?”

“주었다.”

“주었다니?”

“깨울 수 있는 것들은 다 주었다.”

“그렇다면, 깨울 수 있는 자격 조건이 있단 말이냐?”

“있다.”

로만은 심통 맞은 얼굴을 한 채 덧붙였다.

“운명의 흐름이 뒤틀려, 대장군들이 제때 나오지 못했기에 모든 수순이 빠개져 버린 것뿐. 힘이 조금만 온전했어도 진작 다 먹어 치웠을 거다. 네놈이 정말 기막힐 정도로 죄다 사전 차단을 해 버렸단 얘기지.”

“......”

태호의 대선방을 놈이 말해 주고 있었다.

“장군급도 죄다 잡아먹고, 신노스와 케노스도 잡아먹고, 나름대로 최후의 보루였던 조겐과 샴도 네놈에게 당했으니까.”

어쩐지 꽤 흐뭇해져 자신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짓는 태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로만이 가슴을 탕탕 쳤다.

“후우...... 더 말해 봐야 소용없지. 빌어먹을, 빨리 가자.”

태호가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낌새가 수상쩍다. 조만간 천계에서 큰일이 벌어질 것 같아. 네가 무아지경에 빠져 있는 사이, 관음보살이 다녀갔다.”

“그래?”

“천계에서 대회의가 일어날 것 같다더군.”

대회의라.

태호의 두 눈이 반짝였다.

“상위 신들, 그리고 각 지역의 왕들이 모이는 대회의라고 한다. 극비라곤 하나, 로키가 포함됐다는군. 뭔가 큰일이 벌어질 게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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