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 갔습니다.
“대회의라...”
태호는 팔짱을 낀 채 고민에 빠졌다. 로키는 아스가르드의 왕이었고, 본진에서는 상위 신 급 힘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로키를 포함해 상위 신들이 모이는 대회의라면, 모여서 그냥 얘기만 하는 회의일 리가 없다.
“좋다.”
태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빨리 포인트부터 해치우자.”
[까아아악!]
그때.
태호의 뒤에서 나타난 야타카라스가 빽 소리쳤다.
[네 이노옴! 나를 잊어버린 것이 사실이냐아악!]
“......?”
태호는 야타를 보다가, 고개를 살짝 갸우뚱거렸다.
“뭔 소리냐?”
[날 잊어버려서 소환하지 않았던 것이냐아악!]
“그럴 리가 있겠어? 내가 어찌 너를 잊을까.”
태호가 빙긋 웃으며 야타를 달래자, 녀석의 목소리가 단숨에 고분고분해졌다.
[진짜냐악?]
“그치. 진짜야. 너 주려고 결정체도 많이 모아 놨다.”
사실은 잊고 있었다.
태호는 녀석을 일단 소환해제 시킨 다음에 걸음을 옮겼다.
* * *
첫 번째 포인트는 알바롱이었다.
“알바롱?”
북쪽 초보자 마을 알바롱. 태호도 그 곳에서 게임을 시작했기에 아주 잘 기억하고 있는 곳.
늘 그렇듯, 이 곳에 도달하자 한기가 스물스물 기어오고 하늘에서는 약한 눈발이 날리고 있었다.
“그래. 일단 여기가 첫 번째 포인트.”
“......? 여긴 정말 뜬금없군.”
“그럴 거다. 전생에서는 어디보자... 그래, 여덟 번째 확장팩때 대륙의 지형이 바뀌었던 것을 기억하나?”
전생을 떠올려 본다.
여덟 번째 확장팩, 심연의 헤파이돈.
그 무렵, 리얼포스의 본대륙에 지각변동이 일어났었다. 태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만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것을 비롯한 포인트들 때문이었다.”
“......”
정말 아찔한 소리군.
태호는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그래서, 이게 대체 뭔데?”
“정확히는 이 알바롱 자체가 거대한 유적지다. 지상의 이 마을은 눈속임이지.”
“뭐?”
로만은 주머니에 두 손을 쑤셔넣은 채 휘적휘적 마을 내부로 걸어 들어갔다.
-초심자 버스, 시간당 2골!
-2차전직까지 가장 빠른 코스로 태워드립니다!
초보자 마을에서는 호객이 한창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알바롱은 초보자 마을 중에서도 비주류인데 사람이 많은 것이다.
-각종 잡템 삽니다!
-비밀 얼음호수 사냥하실 파티 모집!
이 곳에 돌아오니 막 시작했을 무렵의 추억이 새록새록이었다. 판타로스에게 다시 복수할 것임을 다짐하며, 함박 눈을 맞던 그 날의 결심이 떠올랐다.
“......”
그리고 지금, 태호는 그 판타로스의 사념체와 동맹관계를 맺게 되었다.
세상 일 참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며 로만을 따라 걸었다.
로만은 알바롱의 어귀에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태호도 자주 향했던 잡화점이었다.
잡화점 NPC가 로만을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옵쇼!”
“혼돈의 시대가 도래했다.”
로만이 쌀쌀한 목소리로 입을 열며, 혼돈의 힘을 개방했다.
“......!”
NPC의 표정이 바뀌었다. 놈의 두 눈은 어느새 혼탁함을 물씬 풍겼으며, 목소리도 걸걸해졌다.
“그 날이 왔습니까?”
“그래.”
쿠구궁-!
NPC가 탁자를 가볍게 밀쳤다. 그러더니, 잡화점 내부가 거대한 소리를 내며 변하기 시작했다.
“헐...”
태호는 솔직히 대단히 놀랐다. 이런 장치를 대체 누가 어떻게 생각한단 말인가?
잡화점 내부가 마치 변신로봇이 변신하는 것처럼 변하더니 거대한 지하 길을 드러냈다.
“가지.”
로만이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거대한 터널!
계단으로 만들어진 그 곳으로 점점 더 내려가니, 어느새 탁 트인 거대한 지하공간이 나타났다.
그 내부에는 딱 봐도 수상쩍은 심장 하나가 불길하게 뛰고 있었다.
쿵 쾅 쿵 쾅!
이 멀리서도 그 선명한 심박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저게 일단 첫째라고 할 수 있겠군.”
로만이 일정 거리를 유지한 채 걸음을 멈추고, 덧붙였다.
“저건 혼돈의 괴마(怪魔) 라 불리는 녀석이다. 판타로스 님이 만들어 낸 독자적 생명체지. 일정량 이상 혼돈의 힘을 보유하고 있어야 저놈을 흡수할 수 있다.”
태호는 놈의 수준을 가늠해 보았다.
‘데페로보다 훨씬 세다.’
데페로가 가지고 있던 힘을 훨씬 상회하는 수준. 어마어마한 혼돈의 힘이 일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허나.’
태호는 자신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크게 대단한 수준은 아니란 말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태호가 걸음을 옮기자, 심장이 점점 더 크게 뛰었다. 곧, 펄쩍!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그리고 허공에, 심장을 중심으로 회색 거인이 점차 형성돼 가며 거대한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사 티 로 스 으 으 으 으!]
“그래.”
로만이 살짝 귀를 막으며 소리쳤다.
“괴마여! 일어나 힘을 바쳐라!”
[누구냐! 어떤 위대한 대장군이 나의 힘을 원하는가! 나의 시련을 받아 볼 용기를 내었는가!]
괴마의 시선이 태호를 향했다.
[그대인가!]
태호는 말 없이 신비력을 뿜어내며, 분신체들을 늘려 나가고 있었다.
[나는 혼돈의 괴마! 위대한 혼돈의 권좌의 주인, 판타로스 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피조물이며 심판의 날 힘을 보태어.....억!]
콰지지직!
그 긴 대사를 기다려 줄 생각이 없는 태호가, 강렬한 일격을 날렸다. 강화된 어둠의 명령이 15연발이나 날아들어 놈의 심장을 가격한 것이다.
‘최후의 수호자.’
태호는 최후의 수호자를 분신체들에게 주문했다.
[허으윽!]
놈이 다급히 몸을 일으키려던 그 순간. 온 사방을 뒤덮는 거대한 어둠의 명령 세례가 퍼부어지고 있었다.
퍼퍼퍼퍼퍼퍼퍼퍽!
그 단시간 동안, 10배 증폭된 대미지로 어둠의 명령이 100발은 날아갔다.
‘자폭.’
분신체들이 괴마에게 달려가 그대로 자폭해 버렸다.
[크어어어엇!]
괴마가 그렇게 쓰러졌다.
“......?”
그 광경을 지켜보던 로만이 헛웃음을 흘렸다.
‘데페로도 저걸 흡수하기 위해선 제법 공을 들여야 할 터인데...’
태호는 괴마가 쓰러진 자리에서 펄떡이는 심장을 주웠다.
[나의... 힘을... 허락하노라...!]
심장이 그 말을 마친 채 태호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동시에 떠오르는 메시지!
[혼돈의 힘이 대폭 강해졌습니다.]
그 강대한 힘은 태호의 몸으로 샤아악, 스며 들어오고 있었다. 태호는 그 힘을 컨트롤 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했다.
“어?”
허나, 새삼 놀랄 수 밖에 없었다. 그 힘은 그야말로 본래 태호의 것이었던 것처럼, 몸으로 스며들어 신비력과 하나로 융화되었기 때문이다.
“맙소사군. 그걸 먹어 치웠는데도 큰 변화가 없다니.”
로만이 질렸다는 듯 혀를 찼다.
“이거 원래 이런 거냐?”
“원래 그런 거겠냐? 대장군급도 그거 하나면 대폭 파워업을 하는데, 너는 큰 변화가 없다. 빨리 다음 포인트로 이동이나 하자.”
즉.
태호가 가진 힘의 크기가 워낙 대단해, 이 정도론 기별도 안 간다는 뜻이었다.
그 후로 태호와 로만은 본대륙을 일주하며 여러 포인트들에서 힘을 흡수해 나갔다.
당연하게도 혼돈의 힘들!
태호는 혼돈의 힘을 더 흡수하고 강화시켜 나갈 때 마다, 이상할 정도로 신비력이 더 정순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만이 만들어 둔 포인트들은 그야말로 기상천외했다.
전혀 눈치채지 못 할 장소들에 존재했으며, 각기 확장팩을 구동할 때 동력원이 되거나 대장군들의 힘 회복에 도움을 준 녀석들이었다.
그렇게 본대륙을 싹 훑고 나자, 태호의 몸 속에 일렁이는 신비력은 그야말로 청정 그 자체가 될 지경이었다.
고오오오-
신비력을 끌어 올리자.
마치 엄청나게 맑은 에메랄드빛 바다 같은 빛깔의 아름다운 신비력이 출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 이상 혼돈의 힘을 흡수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포인트 더 있냐?”
태호의 말에 로만이 어깨를 으쓱였다.
“혼돈의 힘을 증폭시키는 포인트는 이제 다 네가 처먹었다.”
-진실.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 다음 도착한 곳은 광휘의 궁전이었다.
우선, 야타카라스를 마을에 풀어 주었다.
“볼일 좀 보고 올 테니 여기서 쉬어라.”
그리고 시선을 돌렸다.
로키의 제단이다.
로키를 소환하자, 그가 연미복을 입은 상태로 멋들어지는 지팡이를 든 채 나타났다.
[마침 잘 됐다....... 오우. 저거 왜 주박이 풀려 있지?]
로키가 살짝 놀랐다. 로만은 어쩐지 불쾌한 얼굴을 한 채 팔짱을 꼈다.
“혼돈의 힘을 이용해 보고 있습니다.”
자초지종을 대략 설명하자, 로키도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는 있었군. 성과가 있다니 다행이다. 저건, 저대로 놔 둬도 되는 거냐?]
“물건처럼 말하지 마라, 더러운 패륜아 새ㄲ...”
빠악!
태호는 그런 로만의 뒤통수를 한 대 친 다음 대답했다.
“됩니다. 당분간은요.”
[그렇네. 방금은 잘 막았다, 대사를 끝까지 치면 죽여 버리려고 했거든.]
“칫.”
로만이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대회의가 있다면서요?”
[그래.]
태호는 두 눈을 빛냈다.
대회의라는 거대한 모임이 실현된다면, 놈들의 본거지의 보안은 상대적으로 약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천상의 권좌. 그 황금성의 결계에 진입하는 시도도 해봄 직 했다.
“누가누가 온답니까?”
[우선... 브라만 라 아후라. 이 셋은 확정이고, 거기에 올림포스와 아스가르드가 포함됐다.]
게다가 지금의 태호는 혼돈의 힘을 대폭 흡수해, 신비력의 농도가 전에 없이 정순해졌다. 이번 기회에 천계의 주요인사들에게 CCTV를 하나씩 달아 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현 상황. 상위 신들을 믿을 수 없는 것이 사실. 게다가 로키는 아스가르드를 벗어나면 상위 신에게 맞서기 힘들다.
[후후. 든든한 아군을 얻었거든.]
로키는 그런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씩 웃었다.
태호가 로만을 보았다.
“너, 다시 주박에 묶여 볼래?”
천계에 데리고 다니려면 별 수 없는 일이었다.
“크...”
로만이 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태호는 로만을 주박으로 다시 묶었다.
샤아악-
‘손쉽다.’
로만에게 주박을 시전하는데 과거와는 전혀 다를 정도로 손쉬워 놀라울 지경이었다.
-젠장.
로만이 투덜거렸다.
화아악!
태호와 로키가 천계로 올라갔다.
아스가르드에 도착한 태호는 우선 로키의 몸에 만유의 눈 하나를 붙였다.
[뭐가 붙긴 했냐?]
로키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것이다. 태호는 신비력을 주입하여, 만유의 눈을 선명하게 만들었다.
[오... 진짜네.]
“그리고.”
태호는 어마어마하게 정순해진 신비력을 주입한 그 상태로, 만유의 눈을 움직여 보였다.
태호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눈깔은 제법 그로테스크해 보였다. 허나, 충분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예전에는 안 됐지만, 이제는 가능해졌습니다. 이 방법이라면...”
태호의 말을 로키가 재깍 알아들었다.
[이걸 상위 신 놈들에게 하나씩 붙이잔 거구나?]
“예.”
[똑똑하군.]
신비력을 적당히 빼내자 만유의 눈이 다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상태로도 움직이려는 의지를 보내자, 조금씩 눈이 움직이는 게 보였다.
[좋아. 이 쪽에 붙여라.]
로키가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만유의 눈이 그 곳에 붙자, 로키의 시야를 공유하는 것처럼 되었다.
혹시 몰라 만유의 눈을 여덟 개, 로키에게 붙여 두었다.
-아아, 들리지?
“예.”
천계에서의 로키는 태호에게 귓속말처럼 대화를 걸 수 있으니, 이 정도로 되었다.
[아참. 상위 신들 사도가 지상에서 연락두절이 됐다더라. 네가 한 짓이지?]
태호는 말 없이 빙긋 웃어보였다.
[죽였냐?]
“셋 다 골로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