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전설-175화 (175/194)

세 치 혀의 무서움

태호는 그 자리에 앉았다.

미리 깔아 둔 만유의 눈들을 하나하나 확인해 본다.

로키가 떠났다.

[비밀 병기를 하나 가져가니까, 전혀 걱정할 것 없다.]

그 말을 남긴 채.

로키의 화면을 보던 태호는, 그의 모습이 그야말로 바람처럼 사방을 비춤을 느꼈다. 어마어마한 속도로 사물이 늘어져 보이더니, 어느새 저 멀리 올림포스가 보였다.

‘빠르다.’

그는 눈 한 번 깜빡할 사이 올림포스의 꼭대기에 도달해 있었다.

* * *

[오랜만이네?]

로키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자, 잔뜩 긴장한 얼굴의 제우스가 고개를 까닥였다.

[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로키는 저벅저벅 걸어가, 올림포스의 거대한 회의장 테이블 한쪽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급스러운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테이블 위에 손가락을 놓고, 탁탁 내려치며 소리를 내다가 입을 열었다.

[가서 술이나 한잔 가져오너라?]

[......]

제우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로키를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고 포도주 잔을 가져다주었다.

곧.

끼아아아악-!

하늘 저편에서부터 거대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금세 하늘 한편이 시뻘겋게 물들고, 금색 독수리 떼가 보였다.

상위 신, 라가 등장하는 것이다.

콰아아-!

붉은빛이 하늘 저편에서부터 쑤욱 날아와, 어느샌가 올림포스의 회의장에 안착했다.

거대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딱 인간형 크기로 변했다. 그는 붉은색과 황금색이 섞인 고풍스러운 옷을 입은, 20대 남성의 모습이 되었다.

라가 로키를 보더니,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문득.

온 사방이 시커멓게 변하고, 세상 전체에 별자리가 수놓아지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어느샌가, 탁자에는 30대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 영롱한 빛을 뿜는 별자리들이 보였다.

상위 신, 브라만이다.

촤라락-!

허공에 기계로 만들어진 동그란 문이 만들어진다. 그 문을 열자, 기계 태엽들이 잔뜩 움직이는 내부 공간이 보이고, 그곳에서 아후라가 걸어 나왔다.

콰아아아아아!

하늘이 진동하며, 반으로 갈라졌다. 갈라진 틈에서 거인이 몸을 드러냈다. 허나, 거인 역시 지상으로 내려앉으며 점점 작아지더니 인간 크기가 되었다.

올림포스의 주인, 우라노스였다.

이렇게 대회의의 주인공들이 모두 모였다.

로키는 팔짱을 낀 채, 여유를 잃지 않으며 하나하나 놈들을 지켜보았다.

-보고 있냐?

로키의 목소리가 귓속말처럼 들려왔다.

-예.

태호도 대답했다.

-붙여라.

-지금 시작합니다.

로키에게는 사전에 만유의 눈을 많이 붙여 두었다. 이제, 그것들을 하나하나 움직여 저 상위 신들에게 붙일 것이다.

우선 첫 번째.

목표대상은 라.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라가 입을 열었다. 동시에 그의 신화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며, 불의 새의 형상을 만들어냈다.

[지상으로 향한 나의 사도가 연락 두절이 되었다. 심정적으론, 죽었다고 보는 게 맞겠지.]

-새끼, 힘쓰는 거 봐라.

로키가 투덜거렸다.

태호는 만유의 눈 하나를 움직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도 원거리이기도 하지만, 눈에게 힘을 최소한으로 넣어 상위 신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해야 했기 때문이다.

‘잘 안 되네.’

투덜거리면서도 고도의 집중을 발휘해, 만유의 눈이 천천히 이동하다가.

찰싹!

라의 이마에 찰떡같이 붙었다.

‘좋아.’

[네 사도가 뒤진 걸 왜 여기서 지랄이야?]

기다렸다는 듯 로키가 소리쳤다.

[지상에 회귀자가 있을 것이란 추측은 이제 천계 내에서도 파다한 일! 그 회귀자를 잡기 위해 보낸 사도가 당했다는 것은, 그 회귀자의 힘이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는 말과 같은 것!]

라의 반박에는 일리가 있었다.

[내 사도도 당했다.]

브라만과.

[내 사도 역시.]

아후라도 짧게 덧붙였다.

라는 그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 아니라, 현재 천옥에서는 볼카노스가 탈옥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조력자는 네메데스로 추정된다는군. 이 모든 것이 우연이란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로키는 눈을 가늘게 뜨고 후후후, 웃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게 말이야. 이상한 일이구만, 그 고강하신 상위 신들께서 친히 보낸 사도 셋이 동시에 골로 가 버렸다? 우연치곤 공교롭군그래.]

브라만과 아후라, 그리고 라는 서로를 마주 보더니 이마를 짚었다.

[내가 볼 땐 아무리 봐도 셋이서 서로 싸우다 뒤진 것 같은데 뭘.]

라가 두 눈에 불꽃을 이글거리며 탁자를 쾅! 내리쳤다.

[그렇게 비꼴 생각이라면 지금부터 꺼져 버리는 게 좋을 거다, 로키.]

[어이구 무셔라, 예이 예이. 계속해 보시던지.]

로키가 능글맞게 웃으며 포도주 잔을 들었다.

[묻겠다, 아후라. 그리고 브라만! 너희는 사도들에게 무엇을 주었지?]

브라만이 침음을 삼켰다.

그렇다.

중요한 건 그쪽이었다.

허나, 그 중요한 것을 선뜻 말할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라가 먼저 말했다.

[내가 먼저 말하지. 나는 나의 사도, 마몬에게... 태양신의 지팡이를 하사했었다.] ]

[미친놈이냐? 그걸 왜 줬어?]

브라만이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나는... 별빛의 다우징을... 하사했었지.]

아후라 역시 이렇게 된 거 밝히겠다는 듯 말했다.

[나 역시 은빛 섬광, 그리고 파괴의 쇄도를 하사했다.]

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왜냐하면, 서로의 사도를 죽이라 명했을 테니.]

이미 눈치챈 듯, 브라만과 아후라는 긍정의 표시를 했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거, 차라리 사실대로 털어 놓는 게 낫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중 맹약이 약해진 지금, 사도들 간의 신화력 장비로 이어진 싸움을 감지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 사도들 셋이 양패구상을 했다면, 지상 어딘가에서 신화력의 힘이 느껴져야 정상. 이중 맹약이 한껏 약해진 지금이라면 더욱 강하게 느껴져야 한다.]

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허나! 그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거대한 해일이 도시를 집어삼킨 것처럼, 흔적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장내가 고요에 잠겼다.

라가 끓는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만일 그 보구들을 손에 넣은 것이, 회귀자라면 어찌 될까? 회귀자가 사도들을 동시에 일망타진하고, 그 보구들을 손에 넣었다면?]

[사도가 셋이나 되는데 그게 될까?]

우라노스의 말에, 아후라가 대답했다.

[회귀자가 수호자의 힘을 손에 넣었고, 그 힘을 온전히 각성했다고 해도 납득가지 않는 상황이군. 아무리 수호자의 힘이 상상 불가라 해도, 그것은 너무 가능성 없는 이야기 아닌가?]

잠자코 있던 브라만도 덧붙였다.

[내 생각 역시 그렇다. 회귀자가 수호자의 힘을 쓴다 한들, 이번 세계는 시작된 지 고작 반년 정도이다. 그 사이 그런 성장을 하는 건 불가능해.]

로키는 그들을 보며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이것들 봐라?’

그리고 험험, 목을 가다듬은 뒤 말했다.

[그럼 답은 간단하네? 너희들 중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단 거잖아?]

[뭐?]

[뭐라?]

[......]

세 상위 신이 동시에 로키를 주목했다. 로키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그렇잖아. 내가 봐도 그래. 진짜 회귀자가 있다고 한들, 수호자의 힘이고 자시고 고작 6개월만에 사도 셋을 때려잡는다는 게 말이 돼? 너희도 대가리가 장식이 아니라면 생각이란 걸 좀 해 봐라.]

* * *

태호는 아스가르드에서 그 모습을 지켜 보며 생각했다.

‘와... 진짜 빠꾸 없는 사람이다.’

생각을 그대로 뱉어 낼 수 있는 유일한 마이웨이의 상남자, 로키가 재차 말하고 있었다.

* * *

[그건 불가능하지? 인간 따위에게 잠재력이란 한정돼 있을 수 밖에 없으니까. 그럼, 너희 셋 중 하나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네. 마몬, 앙그라마이뉴, 아수라. 셋 중 하나가 결국 이겨서 그 보구들 다 손에 넣은 건데 거짓말하는 거.]

[......]

[......]

[......]

일리 있는 말이었기에, 세 상위 신이 모두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그리고 그 놈들을 주인이 감지할 수 있을 테니, 너희 중 하나가 분명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지.]

로키는 흥미롭다는 듯 키득키득 웃으면서도 할 말은 다 했다.

물론, 다 허위 사실이었지만.

[혹시 그 회귀자가 어떻느니 하는 것도, 다 지어낸 말 아니야? 사도들 지상으로 보내서, 일망타진해서, 자기 세력 넓히려는 개수작질 아니었냐 이거야.]

로키는 브라만을 정확히 지목했다.

[야, 브라. 회귀자 나타났다고 니가 먼저 입 털었지? 어쩌면 이 사태는 네놈이 주도했다고 봐도 되는 거지? 왜 그랬어? 사도들 다 지상에 불러다 놓고, 싹 모아서 한 번에 잡아먹으려고?]

브라만이 드물게 당황해 벌떡 일어서서 소리쳤다.

[무, 무, 무슨 소리냐!]

브라만은 그야말로 아닌 밤 중에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삽시간에 범인으로 몰리다니, 이 상황은 전혀 예측도 못 했다.

이를 바득바득 갈던 브라만이 소리쳤다.

[마, 만약!]

로키가 싸늘하게 웃었다. 자신의 사기가 통했다.

이놈들을 이대로 놔두면, 이 대회의는 대통합의 장이 될 확률이 높다.

이곳의 신들이 동맹 관계라도 만든다면 곤란해진다. 그런 의미로, 성공적이었다.

[만약 뭐?]

로키의 말에, 브라만이 다급히 외쳤다.

[내 이름과 모든 신화력을 걸고 맹세컨대, 나는 그런 불순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만약 내가 그런 목적이 있었다면, 다우징 따위를 하사하진 않았을 터!]

다우징은 전투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어필하자, 로키는 일리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브라만이 아수라에게 신화력을 쏟아부으며, 그를 다른 사도들보다 월등히 강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게다가.

[흐음... 그건 일리가 있긴 하네. 그런데 진짜로 네놈이 다우징을 줬는지, 뭐 다른 걸 줬는지는 알 방법이 없잖아? 다우징 준다고 거짓말했지만, 뭐 강한 무기 같은 거 줬을지 누가 알아? 어라? 그런데 그렇게 치면...]

로키가 아후라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너! 아후! 너 진짜 수상하네? 신화력 깃든 장비를 두 개나 줬잖아? 앙그라마이뉴가 두 개나 가지고 있었다는 그 말이 사실이냐?]

[억!]

역시나 가만히 있던 아후라도 봉변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

[나, 나, 나는... 애, 애시당초 나의 신화력은 두 가지 종류이기 때문에 두 보구가 합쳐 하나의 힘을 낸다!]

[그건 니 사정이지, 남들이 그걸 어떻게 확신해? 아무튼 두 개 준 건 맞잖아? 불.순.한 의도로.]

특별히 ‘불순한’을 강조하자, 아후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젠장, 그런 식이라면 저놈이 제일 수상하다! 저놈은 무려 태양신의 지팡이를 줬단 말이다! 그 무기의 힘은 우리 모두가 다 안다!]

[뭐라고? 이 빌어먹을 기곗 덩어리가 감히 나를 의심해?]

라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사실 아닌가! 네놈의 그 무기에는 적잖은 신화력이 깃들어 있다! 아니지! 상위 신에 가까웠던 불의 제왕이 들어 있다고 해야 맞겠지! 우리 모두의 보구를 합쳐도 그거보단 약할 거다!]

가만히 있던 브라만도 참전해 라를 몰아붙였다.

[닥쳐라, 브라만! 네 빌어먹을 아수라가 여기저기 캐고 다니는 것을 몰랐을 줄 아느냐? 네놈만큼 수상쩍은 놈은 없다!]

로키는 어깨를 으쓱이며 뒤로 슬쩍 물러섰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에 앉아 포도주를 홀짝였다.

-보고 있냐?

* * *

-보고 있습니다.

태호가 대답했다.

-물었다. 머저리들, 만 년을 살아도 멍청한 건 똑같다니까.

솔직히 진심으로 감탄했다.

세 치 혀가 얼마나 무서운지, 지금 태호는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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