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화력의 정수 >
천계의 상황은 우선 일단락되었다.
상위 신들이 저마다의 구역으로 흩어지는 것이 보였다.
로키는 아스가르드로 돌아와, 자신의 왕궁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벌, 엿 될 뻔했네.]
아무리 그라지만 라와 직접 맞붙는 것은 꽤나 심적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그때.
로키에게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키, 일이 잘 해결됐군요. 볼카노스는 탈출하였습니다.
자애로운 부처의 목소리였다.
-......예. 덕분입니다.
로키는 그에게 격식에 맞는 대답을 했다. 하나, 그 대답을 하는 로키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이놈, 정체가 대체 뭐지?’
로키는 시간을 벌기 위한 겸, 여러 가지 실험을 해 보았다.
우선, 괜히 말싸움을 붙이고, 도발하고, 둠 제네울의 개입을 유도했다.
둠 제네울이 개입할 것이란 건 그리 어렵지 않게 추측이 가능했으니까.
그다음, 둠이 자신을 죽이려 들 거라는 것도 계산했다. 그래서, 부처를 불렀다.
부처가 나타난 뒤, 로키는 더욱 그들을 도발했다.
우선은 볼카노스가 탈출할 시간이 필요했다. 또한, 그들의 반응을 지켜보기 위해서다. 그리고, 그 와중 독특한 점을 발견했다.
‘상위 신 세 놈이, 나 때문에 졸아서 덤벼들지 않았을 리는 없고.’
부처를 보고 섣불리 달려들지 않았던 것. 그나마 성미 급한 라만 달려들었지만, 그 와중에도 라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다.
마치 간만 보고 금세 빠지려는 것처럼. 말리기를 기다리면서, 어중간하게 힘을 개방한 채였다. 그리고, 아후라가 말리자마자 냉큼 빠졌다.
결론.
‘부처, 이놈의 정체가 대체 뭐지?’
로키는 의심이 많다.
그는 함부로 누군가를 믿지 않는다.
샤아악-!
그러는 로키의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어쩐지 지독히도 지쳐 보이는 카실론이었다.
[네메데스.]
[휴우, 힘들구만.]
카실론은 씩 웃으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로키는 그를 빤히 보다가 물었다.
[당신, 부처의 힘을 빌렸나?]
[물론.]
카실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키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그를 보다, 다시 물었다.
[이상할 정도로 빠르게 천옥을 클리어했군. 부처의 천옥이야 거저먹기니 그러려니 해도, 너무 빨라.]
카실론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내, 그 역시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수상쩍습니다.]
두 남자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로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타트론이 돌아섰군.]
[그렇습니다.]
[그 요지부동이던 빛의 괴물이 대체 어쩐 영문이지?]
[글쎄올시다...]
카실론 역시 도통 아는 바가 없었다.
메타트론은 천계에서도 미지의 존재였다. 둠 제네울처럼 표 안 나게 뒤에서 움직이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베일에 뒤덮여 있다.
[그가 누군가를 섬긴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알고 있으나... 사실 정확히는 확인 불가입니다. 정확한 것은...]
카실론이 두 눈을 반짝였다.
[그가 천 년 전, 돌변하였다는 점이겠죠.]
정확히는 볼카노스가 속성의 지배자들과 함께 판타로스의 대장군들과 맞서 싸운 뒤다.
로키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놈들의 목적이 정말로 순환의 고리를 순리대로 놔두는 거란 말인가?’
그런 것이라면 사실 더할 나위 없다. 실제로 여태까지는 태호와 볼카노스를 돕기도 했다. 하나, 조금의 방심도 해서는 안 되는 시기.
이런저런 방향으로 머리를 굴려 보아도 큰 답이 나오지 않는다.
* * *
“잘 들어라.”
로만이 입을 열었다.
“내 체감상, 곧 헤파이돈이 나올 거다.”
태호는 이미 네 명의 대장군을 잡았고, 헤파이돈은 마지막 대장군이었다.
놈의 얼굴이 진지했다.
“재수 없으면 판타로스 님도 같이 나온다.”
“......”
오히려 나쁘지 않았다.
태호의 표정을 읽은 로만이 피식 웃어 버렸다.
“넌 역시 미친놈이다. 내가 140여 회차를 보내며 본 모든 존재를 통틀어 가장 미친놈.”
“그러냐.”
태호는 어깨를 으쓱였다.
“좋다. 아무튼, 판타로스 님이 깨어나면 이번엔 진짜로 이중 맹약이 깨질 거다. 그럼 천계의 상위 신들과의 마찰이 생길 거고, 우리는 그 와중을 노린다.”
“일리 있군.”
“중요한 건, 조금이라도 힘을 더 비축해 놓는 거다. 먹어 치울 수 있는 건 다 먹어 치우고, 싸울 수 있는 존재는 다 아군으로 만들어야 한다.”
태호는 머리를 굴렸다.
우선, 아군의 라인에 포함돼 있는 이들을 꼽아 본다.
드래고니악의 드래곤들.
무 대륙의 패자였던 카자토스.
로키.
볼카노스(현재 흡수됨).
로만(사티로스).
상위 신, 부처.
상위 신, 메타트론(의문).
카실론.
그리고...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신선들이 있겠지?”
“그들은 기꺼이 도울 거다. 우리와는 꽤 악연이 깊은 녀석들이니까. 아, 물론 내 기억 속에서지만.”
어차피 회차가 거듭될 때마다 그들의 기억은 사라지기 마련이니 그런 셈이다.
태호는 로만에게 물었다.
“네가 잘 알겠군. 치열하게 대립했던 녀석들 목록 좀 불러 봐.”
“우선, 손오공이 있겠군.”
“그렇지.”
삼장과 함께 서역행을 떠난 손오공이 떠오르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우선 부처 님과 메타트론 님은 아군의 계열에 속해 있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볼카노스가 말했다.
일리 있었다.
-하나... 미심쩍은 부분은 남아 있다.
태호 역시 동조했다.
“맞습니다.”
이상한 일이었다.
부처는 그렇다 쳐도, 메타트론의 행동은 영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과거 볼카노스를 직접 천옥에 가두기 위해 잡아 왔던 이력이 있다.
그리고 누군가를 모시는 듯한 발언을 했었다. 이는 시계탑의 기억에서 태호가 직접 보았다.
태호는 이번 삶을 살며, 신들이 지극히 인간적인 사고를 함을 이미 알았다. 그들이 삶에 보이는 집착은 광적인 수준이었고, 그 누구도 믿을 수 없음을 납득했다.
그렇다면.
“하지만, 그들의 의도가 어떻든. 우리는 이용합니다.”
그게 아니라면 답은 없다. 그들이 적으로 돌아서면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하나하나 따져 보니, 의외로 할 만했다.
가장 중요한 것.
바로 자신의 몫.
태호는 두 눈을 빛냈다.
* * *
수련 장소로 정한 곳은 거대한 무인도였다.
동방 대륙에서도 남쪽으로 한참 내려가다 보면 나오는 이 섬은 넓고 광활했다.
유저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다는 것은 섬에 대한 이점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곳에도 다 존재 이유가 있었다.
“원랜 이쯤에서 해적들을 키우려고 했지.”
로만의 말에 태호가 어깨를 으쓱였다.
“정말 세상 나쁜 짓은 아주 죄다 통달해 있구나?”
“칫.”
그러든 말든, 일단 넓고 좋은 수련 장소가 생긴 것은 사실.
우선.
해야 할 것이 많지만, 가장 최우선은 상위 신들에게 얻은 보패들이었다.
태호는 우선 사방에 신비력을 뿜어내, 결계를 만들어 냈다.
신비력으로 만들어 낸 결계는 단순한 원리로 구동이 가능했는데, 보안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현재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몇 가지를 사전에 확인하기 위해 다우징을 발동시켰다.
“신화력의 정수.”
[검색중...]
[검색 결과 : 9건.]
[유의미한 정보 2건.]
[1. 신화력의 정수는 각 신화력을 고밀도로 농축시켜 만들어 낸다.]
[2. 정수는 각 신화력의 힘을 수반하며, 신화력의 원리가 담겨 있다.]
“흐음... 신비력.”
[데이터 없음.]
역시나.
“각기 다른 신화력의 정수가 모이면 어떻게 되냐?”
[검색중...]
[유의미한 결과 1건.]
[1.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라의 신화력은 나와 거의 같은 종류의 힘일 지도. 언젠가 놈을 죽이고 힘을 흡수할 수 있다면...]
“......!”
이것은 브라만이 작성한 정보였다.
태호는 곰곰이 생각했다.
“메타트론, 부처.”
[검색중...]
[1. 메타트론이 누구를 섬기는지 도저히 알 방법이 없다. 다만 놈은 분명히 변하였고, 그 의중을 알기 전에는 섣불리 도발할 수 없다.]
[2. 부처는 이상한 놈이다. 놈의 신화력은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인데, 지난 만 년간 단 한 번도 전력을 발휘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렇다 이거지.”
우선.
여기서 중요한 단서 하나를 얻었다.
‘비슷한 계열의 신화력의 정수는, 서로 하나로 합쳐질지도 모르겠어.’
지이이잉-!
결계가 만들어지고.
태호는 인벤토리 창에서 보패들을 꺼냈다.
[아나크레온의 정수]
[???신화력의 정수]
이 두 개는 신비력을 꽉꽉 채워 넣은 상태.
그리고.
브라만, [우주의 신화력의 정수] 4개.
라, [태양의 신화력의 정수] 4개.
아후라, [창조의 신화력의 정수] 2개, [파괴의 신화력의 정수] 2개.
둠 제네울, [태고의 신화력의 정수] 4개.
이렇게 총 4명의 상위 신들에게 16개의 정수를 털어 온 셈이다.
첫 번째 작업은 이것들에게 신비력을 쏟아붓는 것으로 시작한다.
태호는 분신체들을 죄다 불러냈다. 그리고, 16개의 정수를 죄다 내려놓은 뒤 신비력 불어 넣기를 시작했다.
고오오오오오-!
그야말로 압도적인 위용!
-놀랍군.
볼카노스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 무수히 많은 회차 중, 이토록 상위 신에 근접한 힘을 보유할 수 있는 인간이 나올 줄이야...
그렇다.
태호의 신비력은 이미 일개 신의 경지를 넘어섰다.
고오오오오-!
물론.
16개나 되는 정수들에게 신비력을 모조리 불어 넣는다는 건 굉장히 고된 일.
태호는 그야말로 하루 온종일 신비력을 충전하고, 쏟아붓고, 충전하고, 쏟아붓고를 반복했다.
온 사방이 퍼렇게 질릴 정도로 신비력이 일렁였으나 정수들은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 먹듯 죄다 흡수하고 미동조차 없다.
“끔찍하군.”
로만이 혀를 차며 뒤로 멀찌감치 물러서, 태호를 관찰했다.
하루가 지났다.
정수들은 아직도 큰 차도가 보이지 않았다.
이틀.
사흘.
나흘.
그리고 꼬박 일주일이 지났다.
“이건... 뭐지?”
태호는 그야말로 탈진 직전의 상태로 털썩 쓰러졌다.
이미 신의 경지에 들어선 신체 능력, 그리고 초월적 회복력을 가진 태호였지만 슬슬 지치기 시작했던 것이다.
-카이저, 신과를 먹어라.
“신과 말입니까?”
태호의 말에 볼카노스가 대답했다.
-기본적으로 신과는, 정신력과 체력 회복에 특효가 있다. 그걸 그 용도로 먹는 이는... 여지껏 본 적이 없지만.
“......”
신과라면 미어터지게 많다.
태호는 신과를 꺼내 아작아작 깨물어 먹었다. 청량함이 감돌며, 마치 정신이 리셋된 양 깨끗하고 의욕을 되돌아왔다.
“시벌...”
로만이 질린다는 듯 욕을 내뱉었다. 그 귀하다는 신과를 저렇게 처먹는 것을 올림포스의 존재들이 보면 게거품을 물고 뒤집힐 일이었다.
아무튼.
태호가 금세 정신을 다잡고, 다시 신비력 불어 넣기에 열중했다.
다시 하루.
이틀.
사흘.
그리고 나흘째 되던 날 새벽.
구우우우웅-!
드디어, 16개의 정수들이 한계치까지 힘을 받아들인 듯 진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간은 본 적 없는 기묘한 현상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구궁- 구구궁-
자석의 같은 극이 서로를 밀어내듯, 정수들이 서로에게서 떨어지거나 혹은 가까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구궁- 구구궁-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우징이 보여 준 말이 얼추 맞았다.
서로 상성이 맞지 않거나, 상성이 맞는 정수들이 저마다 모이고 있었다.
정수는 기본적으로 정오각면체의 납작한 보패 모형이었는데, 그 한 면씩이 맞아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 신화력의 정수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