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둠의 신화력 (2) >
드래고니악.
태호는 그곳의 긴장감을 읽었다. 드래고니악의 중심부에 위치한 여섯 개의 빛의 파동이 보였다. 그 빛은 드래고니악을 전체적으로 뒤덮으며, 철저히 방어하고 있었다.
“너로군.”
태호의 앞에, 검은 아지랑이가 일렁이더니 어느새 소테드 스펠터가 나타났다.
그는 블랙 드래곤 장로로서, 태호에게 비전력을 가르쳐 준 장본인이었다.
그의 몸속에선 더욱 진득하고 강렬해진 비전력이 느껴졌다. 확실히 예전보다 강해졌다. 바로, 신과 덕분이었다.
태호는 그에게 고개를 숙인 뒤 입을 열었다.
“조만간 전쟁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그래 보이는군. 바람이 심상치 않다.”
소테드는 저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짙은 피로에 가득 찬 얼굴이었다.
그는, 아주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비록 리얼 포스가 초기화되는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렴풋이 기시감을 느끼고 있기도 했다.
얼마 전 태호에게 진실을 들었을 때, 그는 크게 절망하지 않았다.
차라리 다행이었기 때문이다.
오래 살아왔다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것을 느꼈다. 원 없이 살았다, 란 생각이 들 만큼 살았으며 그래서 더 많은 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는, 태호가 이곳을 찾은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래.”
소테드는 천천히 운을 떼며, 태호를 똑바로 보았다.
“무엇을 원하느냐?”
그 말의 힘을 태호는 안다. 그가 큰 결심을, 또한 최후의 선택을 했음을 알았다.
“드래곤의 유산이 필요합니다.”
“그렇겠군.”
소테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
“......”
태호는 생각했다.
전생은 나쁘지 않았다. 태호는 리얼 포스를 하며, 많은 인연을 만들었고 행복한 삶을 살았었다. 하지만, 이번 생도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감사합니다.”
* * *
드래고니악 중심부.
중심부에서는 여섯 개의 드래곤의 유산이 저마다 고유의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미리 모인 듯, 그곳엔 드래곤 일족 장로들이 모여 있었다. 긴장감 가득한 얼굴을 한 채, 태호를 보던 그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기어코 이런 날이 오고 말았다니...”
레드 드래곤의 장로가 탄식했다.
그들의 의견이 대강 결정된 것 같았다.
소테드가 그들의 앞에 나섰다.
“우리는 의견을 굳혔다. 네게 필요하다면, 기꺼이 제공하기로. 그것이... 우리의 유산이라고 할지라도.”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소테드는 군말 없이 드래곤의 유산으로 걸어갔다. 블랙 드래곤의 유산으로 향한 그는, 천천히 그것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쏴아아아아아아-!
어마어마한 힘이 느껴졌다. 소테드의 손이 닿자, 유산은 점점 작아지더니 주먹 두 개를 포개어 놓은 보석처럼 변했다.
그가 태호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태호는 조심스럽게 유산을 받아 들었다.
[블랙 드래곤의 유산을 획득했습니다.]
-이 유산 속에 어둠의 신화력의 단서가 있을 것이다.
볼카노스의 말에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닌 게 아니라, 태호에게도 느껴졌다.
블랙 드래곤의 유산은 전체적으로 거대한 비전력 덩어리였다. 그 내부에, 유독 강렬한 어둠의 힘이 느껴지는 것이다.
‘예전엔 전혀 몰랐을 텐데.’
이제는 태호에게 확실히 느껴진다. 태호의 신비력이 이제 완전히 무르익었다는 뜻이었다.
가만히 그 비전력에 손을 가져다 댄다. 태호의 신비력은 기본적으로 비전력과 신력이 결합된 결과물. 아주 부드럽게 태호를 받아들였다.
쏴아아아-
비전력이 천천히 태호에게 빨려 들어갔다. 몸속으로 스며든 기운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아, 신비력으로 포함되었다.
그 작업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오... 오오!”
“세상에...”
드래곤들이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큰 유산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어지고, 내부에 보패 같이 생긴 물건 하나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것을 집어 들었다.
[등급 : 에픽]
[종류 : 재료]
[이름 : 드래고니악(어둠)의 정수]
[블랙 드래곤 일족의 힘의 원천이 남아 있는 마지막 조각. 어둠의 비전력의 단서.]
‘좋아.’
태호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다른 유산들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머지 유산들도 비슷한 형식으로 이어졌다. 다만, 속성 자체는 저마다 달랐기에 우선 그 정수들을 모아 두기로 했다.
......[불렀어?]
아르카네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아르카네는 요즘 제법 살이 찐 듯, 양 볼이 포동포동해져 있었다. 태호는 녀석을 보며 쓰게 웃었다.
“그래, 불렀지.”
[오늘은 뭐 하고 놀 거야?]
소녀가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태호는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차원 문 너머의 존재를 바라보았다.
“잘 지내셨습니까.”
[그럭저럭.]
그 존재가 무덤덤하게 태호의 말을 받았다. 그는 어둠의 정령왕, 아카드였다.
아카드는 태호를 빤히 보다 물었다.
[내 딸에게 굉장한 걸 먹였더군.]
“......죄송합니다.”
태호가 고개를 숙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안한 일이 맞았다.
[아주 훌륭해.]
“......?”
아니다.
정령이란 녀석들은 원래 이런 족속들이었다.
[아주 훌륭하단 말이야. 저 녀석이 어찌나 강해졌는지, 내가 다 기쁘더군.]
아카드의 굳은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번졌다. 태호는 그가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음을 깨달았다.
“......”
대체 어디까지 이상한 걸까, 이 녀석들은.
[그래,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겠지. 나 역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아카드가 웃음기를 거둔 채 읊조렸다.
[이쪽으로 와라.]
차원을 넘어오라는 말. 그건, 태호의 비밀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예.”
태호는 군말 없이 그곳으로 넘어갔다.
쑤욱-
지상에 분신체 하나를 남겨둔 태호가 정령계로 넘어가자, 아카드가 헛웃음을 흘렸다.
[진짜로군. 차원을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다니... 이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거기서 놀 거야? 나도 갈래!]
아르카네가 훌쩍! 차원을 넘어 돌아왔다. 태호는 아르카네를 품에 안고 천천히 아카드를 따라 걸었다.
“저기 가서 놀고 있을래? 난 너희 아버지랑 할 얘기가 좀 있어.”
태호는 녀석을 내려놓은 뒤, 펜삼이를 불렀다.
망! 망망!
펜삼이가 신난다는 듯 소환되자마자 달려가고, 아르카네가 후다닥 쫓아갔다.
아카드는 문득 딸에게 시선을 두다, 그 자리에 대충 주저앉아 버렸다.
한가로운 어둠 정령계의 평원이었다.
[읊어 봐라.]
“예.”
태호는 대강의 일들을 설명했다. 아카드는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는 듯, 덤덤하게 이야기를 들었다.
결국 볼카노스의 이야기까지 나올 무렵, 그가 입을 열었다.
[볼카노스. 그곳에 있소?]
-카이저. 잠깐 네 몸을 쓰겠다.
“예.”
태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천천히 볼카노스의 자아가 앞으로 나섰다.
‘이런 것도 되는구나.’
태호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볼카노스가 표면으로 드러나자, 태호의 자아는 점점 밀려났다.
느낌은, 마치 모니터로 화면을 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시야와 감각, 그리고 감정은 공유되지만, 의지는 볼카노스의 것이 되었다.
“아카드. 오랜만에 보는군.”
[후후. 꼴이 참 가관이요?]
아카드와 볼카노스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아는 사이였던 것 같다. 하긴, 따지고 보면 어둠의 마법과 어둠의 정령은 떼어 놓을 수 없는 사이긴 했다.
[믿기지 않지만, 이제 믿을 수밖에 없어졌군. 당신이 직접 희생하겠다니... 저 인간을 그렇게까지 믿는단 말이요?]
“그래.”
[하하하. 재미난 일이로다. 그래, 이번 회차는 어떻소? 승부를 걸어 볼 만한가요?]
아카드 역시 리얼 포스의 무한 반복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긴, 정령왕쯤 되면 신보다 높은 직위라고 봐야 했다.
“어쩌면, 그럴지도.”
[그렇구만...]
아카드가 쓰게 웃었다. 잠시동안의 적막이 감돌았다. 아카드는 평원 저 멀리에서, 신나게 웃으며 뛰어다니는 아르카네를 보았다.
[그거 아시오?]
“.....”
[내 저번 회차에서 막내를 얻었잖소. 저 녀석을 얻으며, 꿈을 꾸었지 뭐요?]
“꿈이라.”
[우리 정령계에서 정령왕이 새로이 탄생하는 꿈이었소. 어찌나 생생하던지, 일어나고도 한참 동안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했더라니까.]
“그랬나.”
[그 뒤 얻은 게 저 녀석이요. 우리 아르카네, 저 작은 꼬마가 어쩌면 나아가 새 정령왕이 될지도 모르지. 아비 된 입장으로서는 좀 더 조져지고 해서 강해졌으면 했거든. 그런데, 이번 회차에는 어찌 된 영문인지 별종 하나가 나타나더니... 그 녀석과 계약을 덜컥 해 버렸지 뭐요. 그리곤...]
아카드는 볼카노스를 빤히 보며 덧붙였다.
[신나게 강해지더군. 나는 그게 마음에 들어. 하지만, 상위 신 놈들이 개판을 친다면 곤란해지지.]
그는 목을 좌우로 꺾었다.
[어찌어찌 우리 군단이라면 일개 신의 군대 하나쯤은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나는 우리 막내가 다음 정령왕이 됐으면 하는데, 당신은 어떻소?]
“그게 좋겠군.”
[훗.]
아카드가 피식 웃었다.
[그래서, 무엇을 원하시오?]
“우리는 어둠의 신화력을 깨우고자 한다.”
[그걸 원하는군. 어차피 나는 신화력을 얻지 못하는 몸. 왕국의 보물을 원한다면, 내어 줄 수밖에.]
아카드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갑시다.]
* * *
어둠의 정령계의 왕궁은 처음 와 봤다.
태호는 시야를 따라 이어지는 거대하고도 화려한 어둠의 궁전에 발을 디뎠다.
사방에서는 어둠의 힘이 일렁이고 있었다. 고요한 그 궁전의 복도를 걷던 아카드가 멈춰 선 곳은 작은 방문 앞이었다.
끼익-
문이 열리고, 그 내부에는 보패 모양의 정수 하나가 잠들어 있었다.
[언젠가는 쓸 일이 생길 거라 생각은 했소만, 오늘이 그날이 될 줄은 몰랐군.]
아카드는 그것을 소중히 들어, 건넸다. 태호의 몸에 깃들어 있던 볼카노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등급 : 에픽]
[종류 : 재료]
[이름 : 정령(어둠)의 정수]
[어둠 정령계의 힘의 원천이 남아 있는 조각. 어둠의 비전력의 단서.]
아카드가 손짓했다.
[괜히 보면 아쉬울 것 같으니 빨리 가 버리시오.]
* * *
다시 현실로 돌아온 태호에게 볼카노스가 몸을 내주었다.
-이쯤이면 됐군.
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자.
이제, 세 개의 정수가 모였다.
[아나크레온의 정수]
[드래고니악(어둠)의 정수]
[정령(어둠)의 정수]
상위 신들의 신화력의 정수를 이용해 본 경험이 있다. 이 녀석들을 어찌해야 할지는 태호가 아주 잘 알았다.
태호는 세 개의 정수에 신비력을 쏟아부었다. 이 단순하면서도 고된 작업도 이젠 이골이 났다.
하루.
이틀.
나흘.
그리고 그 세 개의 정수가 신비력을 끝까지 머금었을 때, 태호는 세 개의 정수가 서로에게 이끌리는 것을 보았다.
고오오오오오-
어느새.
찰캉!
세 개의 정수가 한 곳으로 모여, 자석 붙듯 붙어 버렸다. 그리고 세 개의 힘이 동시에 떠올라, 서로를 마주했다.
허나.
그간 봐 온 것들과는 달리, 세 개의 정수가 뿜어내는 힘은 서로 거의 비슷했다. 격렬한 다툼이나, 파장은 없었다.
세 힘은 서로 뭉쳐, 하나의 덩어리가 되었다.
구우우우우웅-
사방에 고귀한 어둠의 힘이 맴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어둠의 신화력의 정수를 완성했습니다.]
“......!”
< 어둠의 신화력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