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식전설-183화 (183/194)

< 생각해라 >

로만은 잠시 후 돌아왔다.

돌아온 놈의 몸에서 흐르는 혼돈의 힘은, 예전보다 훨씬 대단한 수준이었다.

“밑천까지 이제 탈탈 다 털었다.”

[가지. 아, 우선 이 녀석은 주박해 두도록 하자. 이대로 가면 천계에 입성하는 그 순간 모두가 다 혼돈의 힘을 감지해 버릴 거다.]

일리 있었다.

태호가 가볍게 고개를 까닥였다.

고오오오-

촤라락!

로만이 주박으로 칭칭 묶였다. 그리고, 삽시간에 로만을 포박해 버렸다.

“......!”

로만은 내심 놀랐다. 혼돈의 유산을 일곱 개나 더 획득해 파워업을 했다고 생각했건만, 정말 택도 없는 것이다.

“가죠.”

태호가 덤덤히 대답했다.

* * *

화아악!

어느새 천계!

로키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태호와 카실론을 맞았다.

태호는 만유의 눈을 깔아 둔 채 상위 신들의 동태를 살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 브라만.

브라만과 아후라의 시야가 겹친다.

‘아후라가 브라만과 협상을 하고 있군.’

태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귀를 기울였다.

-곧 판타로스는 깨어날 것 같은데, 사티로스 놈은 행방이 묘연해졌다. 게다가 놈은 이번 회차에서 한 게 아무것도 없다. 이건 마치...

브라만이 대답했다.

-사티로스... 아니, 판타로스가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말하는 건가?

-그, 그렇다.

-일리 있군.

놈들의 입장에서는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일이었다.

자.

이번엔, 둠 제네울과 라의 상황을 볼까.

두 녀석 역시 한 곳에 모여 작당 모의를 하고 있는 듯하다.

-젠장, 아후라가 브라만에게 붙은 것 같은데.

라의 말에, 둠 제네울이 냉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걱정할 것 없다. 어차피 놈들은 섣불리 움직일 수 없어. 판타로스는... 대체 무슨 꿍꿍이인 건지 모르겠다만, 확실한 것 하나가 있다.

둠 제네울은 이를 갈며 낮게 읊조렸다.

-부처를 해치우지 않으면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거. 우선은 하나로 힘을 모아야 한다.

“지금 놈들은 부처를 칠 생각입니다.”

[그렇겠지.]

로키가 고개를 까닥였다.

카실론이 말했다.

[부처 역시 믿을 수 없는 상대다. 허나, 지금 대사제 데칼 님을 구하기 위해선 그의 힘이 필요해. 이대로 놓아두었다간, 판타로스가 온전한 힘을 되찾아 버린다. 또한, 문지기들이 문을 열게 될 거야.]

문지기들이 문을 연다.

그 섬뜩한 뜻을 태호는 알고 있었다. 현실이 초토화된다는 것!

다시 지구에 강림한 판타로스가 모든 것을 다 부수어 버린다는 것!

‘어쩔 수 없다.’

지금은 부처의 속셈이 어떻든, 일단은 따라 주어야 한다.

그때.

샤아악-

하늘에서 문이 열리고, 오색 선녀들이 계단을 만들어 천천히 내려왔다.

그곳에서 나타난 것은, 태호가 익히 아는 존재였다.

“관음보살 님...”

[다들 고생이 많군요.]

관음보살이었다.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머금은 채 로키와 태호, 그리고 카실론을 보았다.

[대사제 데칼 님을 구해 내지 않으면, 무익한 살인이 일어날 것입니다. 서두르지요.]

“......”

태호는 흘끗 로키를 보았다. 로키와 카실론이 예상했다는 듯 살짝 눈을 감았다.

-기묘한 동맹이로군.

말 그대로였다.

기묘한 동맹이 완성되어, 대사제 데칼 구조 작전에 돌입하는 것이다.

[우선, 카이저. 당신의 힘으로 결계를 유지해 주십시오.]

관음보살의 말에 태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야 추적에 걸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 * *

파파파팟-

관음보살은 하늘을 평범하게 걸었다. 허나, 그 걷는 속도는 그야말로 바람과도 같았다.

태호와 카실론, 그리고 로키는 그의 뒤를 따라 천천히 걷는데도 사방의 풍경은 어마어마하게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그들은 황금성 앞에 서 있었다.

천상의 권좌!

그 빛나는 성은 결계로 꽁꽁 틀어 막혀 있었다. 허나 관음보살은 그런 것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듯 그 앞에 섰다.

태호는 신비력의 결계를 유지한 채 안쪽을 살폈다.

곧.

쿵-!

파시식!

결계 안쪽에서 거대한 빛의 거인이 나타났다. 거인은 우묵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때 가 되 었 나.]

바로, 메타트론이었다.

빛의 거인 메타트론은 그렇게 물으며,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득, 그의 시선이 태호에게 멈추었다. 잠깐이지만, 그의 두 눈은 뚫어져라 태호를 보다 관음보살에게 향했다.

[그 분 이 움 직 이 시 기 로 하 셨 다.]

[맞습니다.]

쿠구궁-

그때였다.

하늘 한쪽이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천계의 온 하늘이 서서히 황금빛으로 물들고, 그 하늘에 거대한 부처의 형상이 비추었다.

마치 거대 부처상이 보이듯, 합장을 한 채!

데엥-

데엥-

그리고.

사방에 기묘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맑고, 그야말로 정신이 상쾌해지는 종소리였다. 허나 태호는 그 소리가 만들어 내는 기이한 파장을 분명히 느꼈다.

종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것은 은은한 염불 외는 소리였다. 마치 눈을 감고 있으면 자연이 만들어 내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빌어먹을, 부처가 선수를 쳤군.

만유의 눈을 통해 보이는 라가 소리쳤다.

곧.

천상의 권좌의 한복판에서 시뻘건 불꽃이 치솟아 올라 거대한 새의 형상이 되었다.

[부처! 이게 무슨 짓거리냐!]

콰아아아아아-

태호의 두 눈에는 똑똑히 보인다.

부처의 소리가 만들어 내는 그 기묘한 음파 하나하나에 실린 거대한 힘이!

마치 일대를 모조리 지배하는 것 같은 막대한 힘이 사방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지금은 이를 앙다물고, 위협이 아닌 호의를 베풀고 있지만 이를 드러내는 순간 사방의 대기가 짓눌러 올 것이다.

오싹!

새삼스럽게 오싹한 기분이 드는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부처... 당신은 대체?’

[부처, 선전 포고라도 하겠다는 거냐?]

하늘에 푸른빛 우주가 펼쳐지며, 브라만이 외쳤다.

촤라라라라락!

기괴한 벌레 무리가 떠오르며 둠 제네울도 쩌렁쩌렁 소리쳤다.

[그렇다면 응당 받아 줄 수밖에!]

상위 신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며 부처와 대립 구도를 만들었다.

[네놈이 드디어 시커먼 속을 드러내는구나!]

아후라까지 나타나 저마다의 신력을 뿜어내자, 그야말로 사방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콰콰콰콰콰쾃-

지상의 풀이며 나무, 그리고 생명체들이 기괴하게 움직였다. 분해되었다가 재창조되었고, 분열되었다가 합성되어 기괴한 물질로 변했다.

어떤 것은 불탔고, 또 어떤 것은 그대로 산화돼 버렸다.

바로, 신화력이 뿜어져 나오니 그에 직격으로 영향을 받는 것이다.

‘이것이 신화력의 싸움...!’

데엥-

데엥-

데엥-

종소리가 더욱 강렬해졌다. 태호는 사방에 흩뿌려진 부처의 신화력이 공격 태세로 변환되었음을 자각했다.

쿠-웅!

동시에 가해져 오는 압력! 태호는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을 뻔했다.

[이런 미친놈들...]

로키가 질렸다는 듯 혀를 찼다.

저 하늘에서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부처가 서서히 입술을 열었다.

[이제 여러분을 심판해 볼까 합니다만. 특별히, 마음을 고쳐먹으시는 분들께는 자비를 베풀어 드릴 겁니다.]

[웃기지 마라, 빌어먹을 땡중 자식!]

라가 빽 소리쳤다.

콰아아아아아아아!

온 사방으로 신화력이 더욱 가중되었다. 이제는 온 사방의 모든 것들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마치 무중력 같은 상태에 접어들어, 모든 것이 부서지고 재창조되기를 반복한다.

[가지요.]

관음보살이 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잉

천상의 권좌를 뒤덮은 결계 한쪽이 열렸다. 태호와 일행이 들어서자 결계는 닫혔다.

바로 바깥쪽에선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는데, 정작 안쪽은 태평했다. 마치 태풍의 눈 같았다.

파파팟!

다시 관음보살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상의 권좌, 황금성을 한걸음에 주파하는 그를 따라 도달한 곳은 성의 지하였다.

지하로 가는 계단에 발을 딛자마자 사방의 풍경이 변했다.

콰아아아아아아아!

이곳은 마치 세기말의 풍경 같았다. 온 사방에 금속 독수리가 날아다니고, 거대한 피라미드가 수십 개씩 세워져 있었다.

그 사방에 섬뜩한 눈깔이 둥실둥실 떠 다니는 세계!

[우리는 지금 데칼 님을 감금하는 고등 결계에 진입한 겁니다.]

그렇다.

데칼은 볼카노스가 감금된 천옥과 거의 흡사한, 하지만 수십 배 이상의 신화력으로 만들어진 훨씬 거대한 천옥에 감금돼 있는 셈이다.

[걱정 마시지요, 이들을 모두 상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관음보살이 미소를 머금었다.

오싹!

어쩐지, 그의 미소가 섬뜩하게 느껴지던 어느 순간.

촤아아아아악-!

눈앞에 황금빛 융단이 깔린 듯, 한 줄기의 길이 만들어졌다.

[부처께서 진공가향(眞空家鄕)의 길을 하사하여 주셨으니까요.]

부처의 신화력이 한껏 머금어진 보구인 듯한 그것이 쭈욱 길을 만들어, 천옥 저편에 거대한 균열을 만들어 냈다.

고오오오오-

까아악-

여기저기서 금속 까마귀들이 울부짖었지만, 감히 달려들 엄두를 내지 못한다.

‘마치 천옥을 애초부터 뚫을 수 있었던 것처럼...’

태호는 그 생각을 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애초부터 뚫을 수 있었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을 끌었던 거야.’

왜?

만약 부처의 뜻이 정말로 ‘순환의 고리’에 순응하는 것이었다면?

그 넘치는 힘으로 진작 상위 신들을 타파하고, 데칼을 구하고, 판타로스를 치면 그만이다.

헌데 왜 상황을 이렇게 끌고 왔는가?

-카이저.

볼카노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데칼 님을 구한 뒤, 이 자를 치는 것이 좋겠다.

볼카노스가 한 말 중에 가장 파격적인 말이었다. 태호는 슬쩍 로키를 보았다.

로키는 태호를 보며 눈짓을 했다.

-저놈, 데칼 님 구한 뒤에 잡아 두자.

뜻이 통했다.

태호의 생각 역시 비슷했다. 관음보살이란 이 자는 수상쩍은 게 너무 많았고, 의뭉스러운 부처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카실론이 외쳤다.

[빨리 갑시다!]

파파파팟!

길을 따라 천옥 하나를 주파하자, 다음 천옥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기계 거인들이 즐비한 천옥, 딱 봐도 아후라가 만든 천옥 같았다.

촤아아아아악!

곧.

쏴아아-

태호는 강렬한 수호자의 힘을 느꼈다. 결계 너머, 저편. 저 안쪽에, 분명히 수호자의 힘이 느껴졌다.

‘데칼 님. 거기 계십니까?’

그때.

지지직-

미약한 수호자의 힘이 느껴졌다. 아직은 몇 겹의 천옥에 갇혀 있었다.

‘결계를 더 파고들어야 해.’

이곳도 진공가향의 길이 놓이며, 쾌속 주파!

그렇게 차근차근 천옥들을 주파해 나가고, 마지막 천옥에 도달했다.

‘데칼 님!’

구구구구궁-

이제, 강렬한 수호자의 힘이 느껴졌다.

그곳은 온 사방에 연꽃이 피어 있고, 수천 개의 불상이 맑은 목소리로 불경을 외고 있었다.

촤아악!

그것이 마지막 천옥!

그 천옥 너머, 마지막 결계가 뚫려 있다.

일행은 그 곳을 너머 들어섰다. 이제, 완전히 하얀 순백의 공간에 도달해 있었다.

대사제 데칼!

데칼은 그곳에 홀로 가부좌를 튼 채, 고요히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데칼 님은 현재 깊은 수면에 빠져 계십니다. 수호자의 힘만이 그분을 깨울 수 있을 겁니다.]

관음보살이 외쳤다.

[수호자의 힘을 주입해 주십시오!]

“......”

태호의 이성이 냉정함을 되찾았다. 두근대는 심장은 점점 고요해지고, 머리는 지극히 차가워졌다.

“데칼 님.”

태호가 천천히 걸어가 그를 깨웠다.

데칼은 깊은 내면세계에 빠져 버린 것 같았다. 과거 그는 직접 태호를 이곳으로 불러들이기까지 했는데, 지금은 미동조차 없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수상한 게 한두 개가 아니다.

뭘까.

놈들이 순순히 대사제를 깨우게 해 주는 이유가 뭘까?

꿍꿍이가 있다면, 분명히 이를 깨워 얻게 되는 파생 효과가 그들에게 있어 효과적이기 때문일 거다.

파생 효과.

지금 와서 가장 큰 효과는, 이중 맹약의 강화가 될 터다. 그렇다면 판타로스는 온전한 힘을 되찾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거고, 시간을 벌게 된다.

즉.

놈들은 판타로스가 지금 온전한 힘을 되찾기를 바라지 않는다.

왜?

아직은, 판타로스가 가진 힘을 감당하기 힘들어서?

어쩌면 그럴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대체 왜, 데칼을 깨우는 것에는 관대한 것일까?

‘수호자의 힘은, 어찌할 수 있다는 자신감?’

자신감이 아니라면, 확신?

생각해라.

태호의 두 눈이 지극히 평온해졌다.

-그들은 나를 죽일 수 없다. 그저, 영겁의 시간 동안 나를 속박할 수 있을 뿐이다.

데칼은 과거, 그렇게 말했었다.

‘데칼을 죽일 수가 없다.’

한편으론 의문이 든다.

‘어째서 부처가 하사한 보구 하나가 천옥의 신화력을 죄다 뚫을 수 있는 걸까?’

태호가 여태까지 봐 온 바론, 그런 종류의 힘은 단 하나밖에 없었다.

‘수호자의 힘.’

< 생각해라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