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 돌아온 그녀들의 프로듀서_한제희 - 0177
#
177. 심경의 변화2021.05.03.
"다 제각각이야."
연아는 노트에 적은 걸 보면서 중얼거린다.
거기에는 짧은 멜로디와 사용된 악기 등이 적혀 있다.
열 개가 넘은 광고음악을 듣고 정리한 것이다.
"초반은 일렉트로닉 뮤직이고, 후반으로 갈수록 팝에 가깝네."
인지도가 적은 만큼, 초반에는 예술성이 돋보였다.
그개 팝으로 방향성을 바꾼 건 대중성을 노린 모양이라고 추측한다.
그렇다고 후반부의 음악이 전부 대중적인 것도 아니다.
어떤 건 보컬이 들어가고, 반대로 안 들어간 것도 있다.
결국 전부 느낌이 다르다, 공통점은 찾기가 어렵다고 연아는 결론 내린다.
굳이 공통점이 있다면 기억에 남지 않는 음악이었다는 점이다.
"이 정도면 되려나?"
양팔을 앞으로 쭉 뻗으면서 기지개를 켠다.
그리고 스마트폰의 시계를 확인한다.
오후 6시 58분.
2시 반에 귀가하고, 계속 지후의 과제에 매달렸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
"하은 언니는 식사 준비하고 있으려나?"
가서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에 일어난다.
그리고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다.
그때, 맞은편의 방문이 열리면서 미나가 나온다.
"어…."
순간 멈칫하긴 했다.
하지만 굳은 표정으로 미나를 바라본다.
"네가 이 시간에 웬일이야?"
평소라면 밥 먹으라고 부르기 전까지 방에 틀어박혔을 텐데.
그러자 미나가 어깨를 으쓱거린다.
"전처럼 네가 갑자기 나타나면 심장마비라도 걸릴까봐."
"흥."
코웃음친 연아는 계단을 내려간다.
미나도 그 뒤를 따른다.
"연아야."
계단 중간에서 미나가 부른다.
"왜?"
연아가 돌아보자, 미나는 멋쩍은 듯이 뺨을 긁적인다.
"어제 일 말이야. 미안해, 내가 말이 좀 심했어."
미나의 사과에 연아의 눈이 커진다.
"네가 사과할 때가 다 있어?"
"미안한 감정 정도는 나도 가지고 있어."
미나의 얼굴에 약간의 불쾌함이 느껴진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을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여기는 건 좀 그런 모양이다.
"말이 심한 건 인정해. 그래도 말이야."
미나의 표정이 원래의 무표정으로 돌아온다.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라고 생각해.”
"…지금 시비 거는 거야?"
연아의 얼굴이 험악해진다.
사과가 끝나자마자, 이 소리다.
사과가 맞기는 한가?
"네가 진심으로 사장님을 좋아한다는 건 인정해."
연아가 또 화낼 게 염려됐는지, 미나는 그렇게 말한다.
"하지만 네가 사장님을 동등한 입장에서 대하고 있냐고 하면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해."
"당연한 거 아냐? 그 사람은 소속사 사장이자, 우리들의 보호자니까."
"그러니까."
미나는 그런 게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젓는다.
"넌 그런 식으로 사장님을 보고 있는 거 같지 않다니까."
"너 정말…!"
또 열받기 시작한다.
어제 미나가 말했다.
자신이 지후를 대하는 게 꼭 애완견이나 어린애를 다루는 거 같다고.
왜 이 말을 들어야 하는 거지?
"그럼 묻겠는데."
미나가 연아의 눈을 바라보면서 묻는다.
"너에게 사장님은 어떤 존재야?"
"몰라서 물어?"
연아가 눈을 가늘게 뜬다.
"내가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지금의 내 모든 것이야, 됐어?"
대답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다.
그게 연아의 본심이니까.
그런데 미나가 아무 말 없이 빤히 쳐다보기만 한다.
"뭐야?"
당황한 연아가 할 말 있으면 하라는 듯이 묻는다.
그러자 미나가 천천히 입을 연다.
"사장님이 네 전부라서 소유하고 싶은 거야?"
"…뭐?"
소유란 말에 연아가 할 말을 잃는다.
틀린 말은 아니다.
지후를 독점하고 싶었던 건 사실이니까.
그런데 막상 타인에게서 그 말을 들으니, 이렇게 들린다.
그게 진짜 사랑이냐고.
"역시 넌 네 마음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겠어."
그렇게 말한 미나는 연아를 지나친다.
그리고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켠다.
그 모습을 연아는 멍하니 쳐다보기만 할 뿐이다.
"후아암~."
지후는 하품을 크게 하면서 주방으로 향한다.
어느덧, 자정이 가까워진다.
평소라면 작업에 몰두할 시간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눈이 무겁다.
"내일을 위해서라도 일찍 잘까?"
냉장고에서 물을 챙긴 다음, 침실로 향한다.
사이드 테이블 위에 물병을 올려놓고는 침대에 오른다.
불을 끄고 자려는 그때, 갑자기 스마트폰이 울리기 시작한다.
"이 시간에 누구야?"
목소리에서 불쾌함이 묻어난다.
지금이 몇 시인 줄 모르나?
그러면서도 스마트폰의 화면을 들여다본다.
"응? 연아?"
화면에 연아의 이름이 뜨자, 놀라 눈을 깜빡인다.
연아가 전화를 자주 거는 편이긴 하다.
하지만 지후를 배려해서 늦은 시간에는 전화하지 않는다.
무슨 일 있나?
걱정스러운 마음에 얼른 통화 버튼을 누른다.
"여보세요? 연아야?"
『…아, 사장님.』
연아의 목소리에 기운이 없다.
"왜? 무슨 일이야?"
지후의 질문에는 연아는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그 탓에 지후의 걱정이 더욱 커진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요.』
한참의 침묵 끝에 연아가 입을 연다.
『그냥 사장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요.』
아무 일 없다고 말했지만, 그게 거짓말이라는 건 지후도 알 수 있다.
"그래?"
하지만 연아에게 캐물어서까지 이유를 듣고 싶지는 않다.
"다른 애들은? 자?"
『혜민이랑 유진이는 자는 거 같아요.』
"수지랑 미나는?"
『오늘 「베스트 모델」 방영일이니까요.』
"미나도 같이 봐?"
좀 의외다.
미나는 드라마를 잘 보긴 하지만, 예능 방송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래도 같은 멤버가 나온다고 해서 관심 있는 건가?
『그냥 옆에서 훈수 두고 싶은 건지도 모르죠.』
지금 한 말에서 냉기가 느껴진다.
마치 미나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혹시 미나랑 무슨 일이 있었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묻는다.
그러자 또 침묵이 이어진다.
정곡이었나?
지후의 어깨가 축 처진다.
"사정을 모르니까 뭐라 할 수는 없는데."
침묵을 견디다 못한 지후가 말을 꺼낸다.
"미나랑 화해할 생각은 없어?"
『사장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니에요.』
다시 기운 없는 목소리가 들린다.
싸운 게 아니라고?
그럼 대체 뭐야?
『그냥 좀…. 뼈아픈 말을 들었달까요.』
"그게 뭔지 물어봐도 돼?"
『죄송해요. 지금은….』
거북한 내용인지, 연아는 말하기를 거부한다.
모르긴 해도, 중요한 얘기이긴 한 모양이다.
"나중에 말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 아까도 말했지? 같이 답을 찾아주겠다고."
『감사합니다.』
여전히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지후는 최대한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연아가 기운 낼 좋은 방법이 뭐 없을까?
"어…."
뭐라도 말을 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연아가 먼저 말을 꺼낸다.
『사장님. 제가 사장님 많이 좋아하는 거, 아시죠?』
"아, 알지. 아는데…."
『아는데?』
"대놓고 말하지 마."
정말이지, 낯부끄러워 미치겠다.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왜요? 사장님께서도 잘 알고 계시잖아요?』
"안다니까."
『그럼 뭐가 문제인데요?』
"대놓고 들으면 창피하다고!"
도대체 이게 뭔 난리인지 모르겠다.
자기 직전에 전화해서는 이런 얘기나 하고 있다.
덕분에 잠이 확 달아났다.
"부탁이니까 이 시간에는 그런 얘기 좀 하지 마."
『그러니까 왜냐니까요?』
"잠을 못 자니까!"
이런 식으로 두 사람의 실랑이는 몇 시간이나 이어졌다.
"으으…. 졸려."
지후는 작업실이 아닌, 사무실 책상 앞 의자에 축 늘어졌다.
어젯밤부터 새벽까지 이어지는 연아와의 실랑이 때문에 잠을 거의 못 잤다.
정말이지, 전화를 끊는 것도 큰일이었다.
"그래도 연아가 조금은 기운을 차린 거 같아서 다행이야."
통화를 마치기 전의 연아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통화를 이어온 보람이 느껴진다.
…물론 그 결과가 작업도 못 하고 졸고 있는 거지만.
"자면 안 되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점점 눈이 감긴다.
잠시 후, 지후는 고른 숨을 내쉬면서 잠든다.
"저 왔어요."
잠시 후, 연아가 문을 열고 사무실로 들어선다.
그리고 사무실 의자에 앉아 잠든 지후를 발견한다.
곤히 잠들었는지, 사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도 깨지 않는다.
들고 온 도시락통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지후에게 다가간다.
"사장님?"
조심스레 불러보지만, 지후는 눈을 뜨지 않는다.
역시 밤에 못 잔 모양이다.
연아도 미안함을 느낀다.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담요라도 있으면 좋은데…."
덮어줄 게 없나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하지만 지후가 평소 사무실에서는 일만 하기에 물건을 많이 놓지 않았다.
그래서 담요는커녕, 쿠션도 없다.
"밥이라도 먹고 자지."
연아가 아쉽다는 시선으로 도시락통을 바라본다.
그래도 지금은 한숨 자게 두는 게 더 나을 거 같다.
"피곤해 보이네."
안쓰러운 마음에 그의 뺨에 살짝 손을 댄다.
그래도 지후가 눈을 뜨지 않자, 다정하게 그의 뺨을 쓰다듬는다.
"죄송해요."
이런 식으로 힘들게 한 게 너무 미안했다.
그러다가 문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이런 마음이 그에게 도움이 되는 걸까?
"그건…."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다.
어젯밤 전화만 해도 지후에게 좋아한다는 걸 알아달라고 떼쓰기만 했다.
그 전은?
뭐가 다를까?
"내 사랑은 대체…."
연아의 손이 힘없이 떨어진다.
뺨에서 느껴지던 온기가 사라진 탓인지, 지후가 눈을 뜬다.
"연아야?"
그리고 눈앞에 있는 연아를 잠이 덜 깬 얼굴로 쳐다본다.
"이런 데서 주무시면 어떻게 해요?"
연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면서 말한다.
"응. 미안…."
"제게 사과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보다 도시락 드실래요?"
"어."
지후는 크게 기지개를 켜고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잠깐이지만 푹 잠든 덕인지, 몸이 개운하다.
"왔으면 깨우지."
지후는 몸을 일으키면서 말한다.
"그러기에는 죄송하더라고요."
연아는 가져온 도시락을 테이블 위에 펼친다.
"사장님께서 피곤하신 건, 어젯밤 늦게 제가 전화를 건 탓이니까요."
"뭐, 그건 그렇지."
반대편에 앉은 지후는 순순히 인정한다.
"그럴 때는 그게 아니라고 말해주셔야죠."
연아가 입술을 삐쭉거린다.
"왜? 맞는 말인데."
"그러니까…! 아."
발끈한 연아가 뭐라고 하려다 갑자기 놀라면서 입을 다문다.
그러자 지후가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본다.
"왜?"
"아, 아니에요."
연아는 황급히 고개를 젓는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인다.
왠지 창피해하는 것 같다.
하지만 왜?
지후는 영문을 모르겠다.
어젯밤에 한 얘기랑 똑같은데?
"여, 여기요."
연아는 밥이 든 통을 지후에게 건넨다.
"어, 그래. 잘 먹을게."
좀 당황했지만, 그래도 식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음식 맛을 전혀 모르겠다.
밥 먹는 내내, 연아의 눈치를 살폈다.
연아의 얼굴은 어제처럼 어두웠다.
아까 눈 떴을 때만 해도 멀쩡하다가, 갑자기 표정이 바뀌었다.
대체 뭐 때문에 이렇지?
"잘 먹었어."
꾸역꾸역 먹은 끝에 간신히 도시락통이 비워졌다.
여태껏 연아가 만들어준 밥을 이런 식으로 먹은 적이 있었던가?
아무튼 속이 많이 불편하다.
"사장님, 죄송해요."
도시락통을 정리한 연아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 먼저 가볼게요."
"어, 그래…."
지후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연아는 사무실을 나간다.
순식간에 사라진 연아의 모습에 지후는 눈을 깜빡거린다.
연아가 이런 식으로 사라지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왠지 충격인데."
지후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어제부터 연아의 태도가 이상하다.
문제가 있다면 어떻게든 해결해야지.
"뭐가 원인이더라?"
한동안 생각한 끝에 대답을 떠올린다.
"맞다! 미나!"
연아의 태도가 이상해진 건 이틀 전부터다.
하지만 어젯밤 통화로는 미나에게 뼈아픈 말을 들었다고 했다.
"혹시 그제도 미나와 한바탕한 거 아니야?"
그것도 알기 위해서라도 미나와 얘기할 필요가 있다.
지후는 스마트폰을 꺼내 전화를 건다.
몇 번의 통화음이 들리더니, 곧 미나와 연결된다.
"아, 여보세요? 미나니?"
『사장님? 어쩐 일이세요?』
"다른 게 아니고, 네 낭독 음성을 녹음해야 할 거 같아서."
『네!?』
미나는 깜짝 놀란다.
뭐, 무리도 아니다.
"너도 알다시피, 배경음악을 42분 정도의 길이로 만들어야 해."
『네, 그건 알죠.』
"그런데 한 곡을 길게 만들기보다는 장면에 맞춰서 곡을 전환시키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아~. 그런 거였어요?』
상황을 설명하자, 미나도 납득한다.
그러려면 어디서 어떻게 전환되는지 알아두어야 한다.
그렇기에 낭독 녹음을 제안하는 것이다.
『그래도 저, 아직 낭독에는 자신이 없는데요.』
"괜찮아. 정식 녹음도 아닌걸."
나중에 제대로 녹음할 때가 있다는 말에 미나는 안심한다.
『알겠어요. 그럼 지금 갈까요?』
"응, 기다릴게."
그렇게 미나와의 통화를 마친다.
"후우…."
지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걸로 미나를 불러들일 수 있게 됐다.
낭독 녹음을 마친 후에 천천히 얘기해야지.
그 전에 녹음 준비부터 하기로 하고, 작업실로 향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