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온 세상이 등 돌린 순간.2021.10.18.
1시간 전. 한 회장과 미팅을 마친 이든이 막 엘리베이터에 오르려던 참이었다.
“나 화보 촬영 간 동안 오빠 보고 싶으면 어떡해?”
“어떡하긴. 보고 싶을 때마다 영상통화 하면 되지. 아니다, 나도 발리 따라갈까?”
“정말? 그럼 나야 좋지.”
한눈에 봐도 다정한 커플을 연상케 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이든의 목울대가 거칠어졌다. 문이 열렸는데 사람이 타지 않자, 힐긋 시선을 옮긴 남자는 이든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다.
“저……, 정 대표.”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남자는 이슬의 약혼자이자, 자신의 회사 도로시에 막대한 투자를 한 한 회장의 아들. 성민이었다. 성민은 넋이 나간 얼굴로 이든을 멀거니 바라보더니 문득 정신이 든 듯 분주하게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누르며 문을 닫았다. 반쯤 닫힌 문 사이로 손을 넣은 이든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안으로 들어섰다.
“지금 제가 목격한 일에 대해 자세히 해명해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이든이 매섭게 응시하자 성민은 입만 달싹거리며 뜸을 들였다. 사납게 구겨진 이든의 얼굴에서 깊은 분노가 드러났다. 성민은 마른침을 삼키며 곁눈질로 이든을 살피더니 이윽고 태세를 전환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왜 정 대표한테 해명해야 하지?”
뻔뻔한 성민의 모습에 이든은 판단력과 이성이 뚝- 끊어지고 말았다. 이든은 한껏 가라앉은 목소리로 나지막이 읊조렸다.
“하긴, 양심 있는 자식이었으면 약혼녀 두고 이딴 짓 하지도 않았겠지.”
“뭐? 이 새ㄲ…….”
성민은 모욕감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이든에게 달려들었다. 이든은 단번에 성민의 멱살을 잡고 그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그 순간, 성민이 투자자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기도 했지만, 자각했다고 한들 상황이 지금과 다르진 않았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네 손을 놓았는데, 피눈물을 삼키며 사지가 뜯겨나가는 고통을 참아내면서까지 왜 널 떠났는데. 고작, 이런 형편없는 놈이나 만나라고 네 가슴에 무참히 비수를 꽂은 게 아니었다. 내가 채워줄 수 없는 것을 채워줄 수 있는 남자를 만나 더없이 행복하길 바랐다. 다른 남자 곁에 선 널 처음 마주했던 순간도 숨이 끊어질 듯 아팠지만, 너의 작은 몸짓도 놓치지 않으려는 성민을 보며 널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한다 생각했다. 내 욕심에 널 내 곁에 두지 않길 잘한 거라고, 내 곁에 있었다면 내 어둠이 너에게 물들었을 거라고. 스스로 위안하며 쓰디쓴 마음을 다독였는데. 좋은 사람이라 믿었던 성민이 이런 쓰레기 같은 짓을 벌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 했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 엘리베이터가 로비에 도착하자, 이든은 터진 입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비장한 얼굴로 호텔을 빠져나왔다. 한 걸음씩 내딛는 그의 발걸음은 묵직하고 거리낄 것이 없었다. 내가 채워줄 수 없는 것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사람일지라도 벌레만도 못한 놈 곁에 널 둘 수 없었다. 그건 내가 용납할 수 없었다. 막아야 했다. 그녀에게 불편한 진실을 알려서라도 이 결혼을 막아야만 했다. * * * 회사에 도착한 이든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여유도 없는 듯, 한 번에 두세 계단을 올라 사무실로 향했다. 막상, 이슬의 얼굴을 마주하니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참담했다.
‘네 약혼자에게 여자가 있어.’
그녀가 충격을 덜 받도록 순화해보려 해도 전해야 하는 진실은 참혹했다. 거친 숨을 다 고를 새도 없이 미간을 일그러트리며 힘껏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 결혼, 꼭 해야겠어?”
이슬이 말없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미약하게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 마. 그 결혼.”
숨 막힐 만큼 고요한 침묵이 두 사람을 감쌌다. 한참 말없이 이든을 응시하던 이슬은 실소를 터트렸다.
“내가 결혼을 하든 말든 그쪽이 관여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이슬은 이든에게 구태여 성민과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밝히고 싶지 않았다. 나도 널 잊은 지 오래라고, 네가 날 잊고 가정을 이룬 것처럼 나 또한 영원을 약속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비록 가짜 약혼자, 가짜 행복일지라도. 그에겐 완벽한 모습만 보이고 싶었다. 그토록 사랑했던 이에게 버림받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알량한 자존심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이든은 고통스럽게 인상을 구기며 머뭇거리던 끝에 입을 뗐다.
“네 약혼자한테 여자가 있어.”
꽉 막힌 목구멍을 긁으며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순간, 이슬은 어느 쪽이 덜 비참할지 생각에 잠겼다. 약혼자가 바람을 피운 비련의 여주인공, 혹은 네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 가정을 이룬 그 시간에도 난 널 잊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죽어도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다. 내가 너에게 잊히고 있을 그 시간, 넌 내 안에서 끊임없이 살아 숨 쉬었다고, 나조차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진실이었다. 이슬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이윽고 타격감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랑 없는 결혼에 세컨드야. 흔하디흔한 서사 아닌가?”
내가 무참히 버림받은 것은 너 하나로 족했다. 비록 가짜 약혼자에게까지 버려진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았다. 성민에게 여자가 있는 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다는 듯,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받아쳤다. 이슬이 남 이야기하듯 메마른 음성으로 말하자, 이든은 제 귀를 의심하며 한동안 충격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마른세수하며 생각을 정리하던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 그러니까. 지금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결혼하겠다는 거야?”
덤덤한 얼굴로 이든을 응시하던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조소를 머금었다.
“사랑 없는 결혼이 뭐 어때서?”
그저, 반항심에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었다. 누군가 책임지고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관심 없던 내가 널 만나 꿈꾼 것이 ‘결혼’이었다. 내게 결혼은 그저 법적으로 ‘배우자’라고 정의하는 사회 규약을 넘어서, 하늘이 허락해주는 날까지 당신 곁에 머물다 당신만 사랑하다 눈감겠노라, 영원을 다짐하는 것이었다. 너로 인해 시작된 꿈이었고, 너로 하여금 무너진 나의 오랜 꿈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되묻는 이슬의 모습에 이든의 심장은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고작 그런 자식이나 만나라고…….”
내가 널 보내준 줄 알아?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한 채 목구멍을 타고 치솟는 뜨거운 것을 삼켜냈다. 뒤통수를 둔기로 얻어맞은 듯 정신이 얼얼했다.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짓자, 이슬은 지독하리만큼 냉기를 품은 얼굴로 그와 거리를 좁혔다.
“사랑? 그게 얼마나 덧없는 건지 알려줘?”
“.......”
초점 없던 이든의 눈동자가 처량하게 흔들리며 이슬에게 닿았다. 그녀의 원망 어린 눈빛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이든의 가슴에 꽂혔다.
“10년을 내가 너인지, 네가 나인지 분명한 경계 없이 살아왔는데, 하루아침에 그 시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게 사랑이야. 얼마나 덧없어.”
그는 한순간에 세상이 무너져 내린 듯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마주하기 힘든 현실에 충격을 받은 탓일까,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하늘이 빙그르르 돌고, 땅은 꺼지는 것 같아 속이 울렁거렸다. 자신이 그녀를 떠나는 것이 그녀를 위한 일이라 생각했다. 지금껏 한 번도 그 선택을 의심한 적 없었고 그것이 최선이라 믿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말에 모든 것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말았다. 그녀가 행복하길 바라며 내린 결정이 이런 상황을 맞이할 거라곤 가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숨이 탁 막혀 입술을 깨물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떻게든 눈앞에 드리운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고작 이런 현실을 마주하려 네 손을 놓은 게 아닌데. 너만은 어둠에 물들지 않길 바라며, 날 선 말로 네게 상처까지 남기며 떠났건만.
‘기어이 내가 널 어둠으로 이끌었구나.’
자신이 그녀를 지옥으로 등 떠밀었다는 생각에 가슴이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이든의 눈동자가 요동치듯 흔들리자 이슬은 적의를 품은 눈빛으로 그를 응시했다.
‘정이든, 우리의 이별이 너에겐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나를 떠나 홀가분했겠지만, 내겐 온 세상이 등을 돌린 거였어. 그런데 사랑?’
“세상 사람 모두가 사랑 없이 조건보고 결혼한다고 손가락질해도 넌 그럴 자격 없어. 네가 사랑을 운운할 자격이나 돼?”
신랄하게 한껏 퍼붓던 이슬은 싸늘하게 얼어붙은 얼굴로 이든을 스쳐 지나갔다. 이든은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설 힘도 없는 듯 벽에 기대어 가까스로 버텼다. 굳건했던 신념이 한순간 산산이 부서져, 처참한 현실을 마주한 그는 모든 것을 잃고 무너져내렸다. * * * 이슬은 회사를 빠져나와 흥분을 가라앉히던 중 어이가 없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와. 한성민, 애인이 있었어? 그런데 태연하게 약혼을 하자고 해? 완전, 미친 자식 아니야?”
아무리 이 바닥이 사랑 없는 결혼이 흔하다고 해도 결혼 따로 연애 따로라니. 도무지 자신의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되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 이루어 말할 수 없는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비록 진짜 약혼자는 아니었지만, 성민이 자신을 우롱했다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다.
“설마, 도 관장은 다 알면서 그런 자식이랑 날 엮으려 그런 건 아니겠지?”
온갖 의심과 음모론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지만, 다른 것을 다 떠나 성민의 실체를 다른 사람도 아닌 이든이 알게 된 것이 치욕스러웠다.
“그 모자란 자식은 걸려도 하필 정이든 앞에서 걸리냐고 진짜 자존심 상하게.”
이든에게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만 보여주어도 모자랄 판에 의도치 않게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을 연달아 들키게 되니 짜증이 솟구쳤다. 드르르륵. 씩씩거리며 차에 오르자마자 울리는 전화에 평정심을 되찾으며 전화를 받았다.
“어. 오빠.”
- 너 어디야. 당장 만나.
“이제 퇴근해. 왜?”
- 집으로 갈 테니까. 만나서 이야기해.
한껏 내려앉은 지한의 목소리에 예삿일이 아님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 * * 이슬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잔뜩 화가 난 지한을 살폈다.
“뭐야? 진돗개 하나를 방불케 하는 이 살벌한 분위기는?”
지한은 벌떡 일어나 허리춤에 손을 얹더니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말했다.
“너, 한성민 그 자식 여자 있는 거 알았어? 몰랐어?”
이슬은 지한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이마를 긁적였다.
“알고 있었어?”
“알고 싶지도 않은데, 나도 알게 된 지 얼마 안 됐어.”
“내가 너무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와. 여자도 있으면서 감히 내 동생을.”
“그거 말하려고 빨리 오라고 한 거야?”
이슬이 소파에 털썩 앉자, 지한은 그녀를 따라 앉았다.
“인마, 넌 뭐가 그렇게 태연해?”
“태연하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어. 진심으로 사랑한 사이도 아닌데.”
“행사장에서 소란 일어나자마자 한성민 그 자식 행여나 본인 애인 다치기라도 할까 봐 애인 데리고 제일 먼저 연회장 벗어난 건 알아?”
이슬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중 의외라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의외로 사랑꾼이네.”
“인마!”
“그보다 도 관장은 한성민 애인 있는 거 모르고 나랑 엮으려고 한 거겠지?”
“당연하지! 그걸 말이라고 해?”
“그래, 그러면 조금은 덜 비참하네. 혹시 범인은 알아냈어?”
이슬은 이번에도 태연하게 물었지만 긴장되는 듯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렸다.
“피해자 가족한테 접근한 건 정두식이라고 건달 출신 연예 매니지먼트 대표야.”
이든이 아닌 다른 이의 이름이 거론되자 이슬은 그제야 소파에 편하게 기대어 앉았다.
“아무리 알아봐도 정두식이라는 사람과 그 사건이랑 관련이 없어서 여기저기 알아봤더니.”
“알아봤더니?”
“연예인 김시은이 나와.”
“김시은? 그 아이돌 출신 배우?”
플라라에 있을 당시 한국 모델 후보 중 한 명으로 거론될 만큼 유명한 배우였던 터라 이슬도 익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이슬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그 사람 개인적으로 모르는데?”
“넌 몰라도 그 사람은 널 알지. 그 여자가 한성민 애인이거든.”
“그러니까 내가 한성민이랑 약혼이든 결혼이든 못하게 막으려고 일을 꾸몄다는 거네. 아무리 조건만 보고 혼맥을 맺는다고 해도 어느 집안이든 이런 이슈는 피하고 싶어 할 테니까.”
의도치 않게 자신이 단태식 사장의 딸이라는 사실이 공개된 탓에, 한성 그룹과 약혼은 처음부터 없던 일로 무마될 뿐 아니라 앞으로도 대기업 후계자와 맞선을 보거나 결혼을 강요받는 일은 없을 듯했다. 기업 규모를 떠나 기업의 이미지가 매출로 직결되는 만큼, 티끌만 한 논란도 피해가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었다. 아무리 혼맥으로 탁월한 조건 일지라도 그 누구도 논란의 여지가 될 자신을 며느리 삼고 싶은 집안은 없을 테다. 집을 나서던 지한은 이슬에게 한가득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문단속 확실히 하고, 웬만하면 배달음식 직접 받지 말고 문 앞에 두고 가라고 하고.”
“시끄러워. 그만 가.”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잔소리에 이슬이 지한을 문밖으로 밀어내자, 지한은 닫히는 문틈에 대고 말했다.
“단이슬! 신발. 신발은 줘야지!”
지한은 간절히 문을 두드리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남자와 시선이 맞물리자 작게 소곤거렸다.
“단이슬! 오빠가 좋게 이야기할 때 신발 내놔라. 계속 그렇게 도발하면 조만간 단란하게 가족 모임 추진한다.”
남자는 초인종을 누르고 문이 열리길 기다리다 멈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작게 열린 문틈 사이로 이슬이 보이자 도하의 입매에 미소가 스며들었다. 그는 나지막이 읊조리듯 말했다.
“이렇게 보니까 더 반갑네.”
우연히 마주친 인연에 연이어 우연이 겹치자, 도하는 괜히 필연을 운운하며 이슬에게 다가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