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2021.11.08.
회사로 돌아온 이슬은 속이 울렁거려 이마를 짚은 채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무래도 불편한 자리에서 식사한 탓에 점심 먹은 것이 그대로 얹힌 듯했다. 체한 증상이 두통까지 번질 즈음, 노크 소리에 자세를 고쳐앉았다.
“네. 들어와요.”
입술을 잘근 깨문 채 어떻게든 버티려 했건만, 그녀의 시야에 이든이 가득 들어차자 나지막한 숨을 토해냈다. 이든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지그시 바라보다가 책상 위에 약상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몸 안 좋으면 그만 가자. 데려다줄게.”
약상자를 응시하는 이슬의 시선이 처량하게 흔들렸다. 많고 많은 소화제와 두통약 중에서 왜 하필 그 약을 사 왔을까. 똑같은 성분의 약일지라도 사람마다 약효가 더 잘 들어 애용하는 약이 있듯 그가 사 온 두 가지 약이 이슬에게 그런 약이었다. 이슬은 이든을 빤히 응시한 채 보란 듯이 약상자를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그의 시선이 아주 잠시 쓰레기통으로 향했지만, 그 시선은 다시 이슬에게 향했다. 이슬은 감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이든을 응시하며 팔짱을 낀 채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정 대표님.”
그를 부르는 글자 하나에 힘을 실으며 비웃음 섞인 조소를 지었다.
“아까부터 왜 계속 반말이실까? 일하러 만난 사이면 선 좀 지킬까요?”
“그 점은 시정 하도록 하죠. 컨디션 별로이신 것 같은데 일어나시죠. 집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이번엔 깍듯하게 존대하며 약 올리는 것만 같은 이든의 모습에 지끈거리던 머리가 더 아팠다. 이마를 짚으며 나지막이 신음하던 이슬은 재킷과 가방을 챙겨 이든에게 다가갔다.
“적당히 까불지 그래. 여기 있는 사람들 앞에서 네 민낯을 샅샅이 밝혀주기 전에.”
이슬의 섬뜩한 경고에도 이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차 키 가지고 금방 내려갈게. 그러니까…….”
“정이든, 좋은 말로 하니까 못 알아먹지? 오늘은 반대편 정강이 까여볼래?”
“네가 그러고 싶으면 얼마든.”
그래서 그녀의 분이 풀린다면 얼마든 감당할 수 있었다. 이든은 이슬의 날 선 눈빛에 가슴이 저미는 듯 한쪽 입술을 길게 늘어트리며 말했다.
“알았어. 귀찮게 알짱거리지 않을 테니까.”
이든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약상자를 꺼내어 이슬의 손에 쥐여주었다.
마치, 자신이 약상자를 쓰레기통에 버릴 것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같은 약을 하나 더 준비한 모양이었다.
“약 먹고 가서 푹 쉬어.”
이든이 대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이러는지 알 리 없는 이슬은 회사를 벗어나며 연이어 헛웃음을 토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체했는데. 그야말로 병 주고 약 주고 하고 있네.’
어제 우산처럼 약은 아무런 죄가 없지만, 약상자를 볼 때마다 이든이 떠올라 신경을 긁어댔다.
“자기 전에 침대에 발가락 찧어서 잠 확 깼으면 좋겠다.”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이슬에겐 오던 잠이 달아나는 것만큼 무시무시한 저주가 없었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언제 내렸냐는 듯 말끔하게 개어 화창한 봄 날씨가 되었다. 이토록 좋은 봄날이건만, 이슬의 기분은 화창하지 못했다. 불면증으로 며칠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한 까닭에 잔뜩 예민한 상태건만, 거기에 이든이 기름을 퍼붓는 격이었다. 스마트 키를 누르며 차로 다가가려던 때, 날카로운 음성이 이슬의 귀를 찔렀다.
“저기요!”
이슬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뒤돌아섰다. 그녀의 시선 끝에 팔짱을 낀 채 삐딱하게 선 재이가 보였다. 재이는 이슬의 앞에 서서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재이의 행동에 살짝 불쾌한 듯 눈살을 절로 찌푸려졌다.
“용건 있으시면 말씀하시죠?”
“회사가 놀이터도 아니고 근무시간에 퇴근하고 싶다고 퇴근을 해요?”
이슬은 잠잠히 재이를 바라보더니 이윽고 비웃음이 섞인 조소를 터트렸다. 재이가 자신의 퇴근에 이토록 언짢아하는 이유가 대표이사 아내로서 직원들을 관리 감독하는 것이라 여겼다. 이슬은 납득이 된다는 듯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게 말로만 듣던 갑질이구나.”
“뭐라고요?”
“계약서 어디에도 내 근무시간에 대해 적혀있지 않은 것 같은데요. 지금 대표 와이프라고 유세 떨고 싶은 모양인데. 이런 쓸데없는 거 관리 감독할 시간에 그쪽 남편 단속이나 잘하지 그래요.”
재이는 이슬이 이든과 자신의 사이를 제대로 오해하고 있음을 알아차렸지만, 오해를 바로잡을 생각 또한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이든이 제 남편이라고 알고 있으면 이슬이 그에게 다른 감정을 갖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재이는 이슬이 떠난 자리에 덩그러니 남아 두 주먹을 힘껏 말아쥐었다. * * * 30분 전, 재이는 그레이스의 계약서를 확인하고 뭔가 못마땅한 듯 아랫입술을 잘근 깨문 채 이든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늘 서류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그가, 자신이 들어온 것도 모른 채 한곳을 빤히 응시했다. 그 순간 불안이 빠르게 스며들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아니나 다를까 그레이스가 시야에 가득 찼다. 그레이스를 두 눈 가득 담은 재이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무슨 일이야.”
지독하리만큼 차가운 그의 음성에 재이는 주먹을 힘껏 말아쥐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슈트 재킷에 팔을 끼워 넣으며 무심히 말했다. 불안에 잠식되지 않으려 마음을 다잡으며 이든의 곁으로 다가갔다.
“그레이스 계약서 살펴봤는데. 이건 너무 불합리한 계약인 것 같아서.”
그는 셔츠 소매를 정리하며 감정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재이를 힐긋 바라보았다.
“불합리한 계약? 그런 건 없을 텐데.”
“갑이 원하는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을의 책임으로 계약을 파기한다니 이것만큼 불합리한 조건이 어딨어.”
이든은 나지막한 숨을 토하며 미간에 주름을 지었다.
“내가 감당할 수 있어서 받아들인 제안이 왜 불합리한 조건이지?”
“이 계약의 주도권이 저 여자한테 있잖아.”
이든은 눈매에 힘을 잔뜩 주더니 눈썹을 거칠게 문지르며 말했다.
“그레이스는 우리한테 절대적인 갑이니까 주도권을 가져가는 게 당연하지. ‘도로시’가 아닌 다른 회사와 계약해도 절대적인 갑의 위치는 변하지 않을 거야. 더 문제 될 사항이 있어?”
“오빠.”
“민재이.”
한껏 낮아진 그의 음성이 음산하게 울려 퍼졌다.
“호칭 똑바로 하라고 말했던 것 같은데. 더 할 말 없으면 이만 나가.”
재이가 마지 못해 집무실을 나서자, 이든은 급한 일이라도 있는 듯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을 벗어났다. 머지않아 사무실로 복귀한 이든의 발걸음이 닿은 곳은 그레이스 작업실이었다. 그 순간, 재이는 애써 외면하려 했던 숱한 불안에 잠식되어 버리고 말았다. 한 사람에게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면 그 사람의 눈짓이나 말투, 작은 손짓만으로 미묘한 변화를 쉽게 알아차릴 수 있길 마련이다. 재이의 시선에 확연히 보였다. 3년간 미소는 물론이고 감정 없는 사람처럼 살던 그의 입가에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재이는 이를 악물며 어깨가 들썩일 만큼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는 것도 모자라 이든이 그레이스의 손을 잡아 무엇인가를 건넸다. 입술 틈 사이로 비릿한 숨이 흘러나왔다.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서둘러 나서던 이유가 그레이스에게 약을 사주기 위함이었다니.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분했고 그럼에도 이든을 마음껏 미워할 수조차 없었다. 감히 화조차 낼 수 없었다. 그를 좋아하는 것도 계속해서 자신을 밀어내도 좋다고 다가간 것도 자신의 좋아서 한 일이었고, 자신만의 일방적인 감정이었으니. 재이가 이든과 인연을 맺은 것은 꽤 오래전 일이었다. 그녀가 고등학생이던 때 과외를 맡았던 선생님이 이든이였다. 그녀가 원하던 대학교에 입학하며 자연스레 끊어졌던 인연은 3년 전 우연한 기회로 다시 이어지게 되어 그에 대한 감정도 함께 피어났다. 3년간 일에만 매달리는 그를 보며 그저 곁을 머무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하지만, 그레이스를 바라보는 이든의 눈빛을 확인한 이상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재이는 두 눈을 부릅뜨고 그레이스와 이든을 번갈아 보며 나지막이 읊조렸다.
“절대로 안 뺏겨. 저딴 것한테 빼앗기지 않을 거야.”
* * * 이슬은 테이블에 턱을 괸 채 눈앞에 놓인 치킨과 절친이자 정신건강의학과 전공의인 민영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맛있는 거 먹자더니.”
“그래. 맛있는 치킨.”
민영은 시원한 감탄사와 함께 맥주잔을 내려놓더니 이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잊지 않고 보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슬님”
배꼽에 손을 얹고 깍듯하게 인사하는 민영의 모습에 이슬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연락 못 해서 미안하다. 미안해.”
“한국 들어올 생각 없다던 분께서 한국에 머무르기로 한 이유가 뭘까? 내가 보고 싶어서는 아닐 테고.”
이슬은 두 눈을 깜박이며 괜히 술잔을 매만지며 말했다.
“처음엔 플라라가 재계약하자고 귀찮게 굴길래 한국으로 왔는데, 어쩌다 보니 한국에 있는 회사랑 계약하게 됐어.”
“정말? 플라라도 마다하고 계약한 회사가 어디야?”
“그냥, 조그마한 스타트업.”
“스타트업? 플라라를 마다하고 계약한 곳이 스타트…….”
민영은 불현듯 스치는 것이 있는 듯 일순 미소가 가신 얼굴로 눈매에 힘을 주었다.
“너 혹시.”
“아마도 네가 생각하는 게 맞을지도…….”
이슬은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괜스레 말을 얼버무렸다. 민영도 고등학교 동창이니 이든의 스타트업 창업 소식을 모르진 않을 테다. 긴 침묵이 이어지자, 먼저 정적을 깨트린 것은 이슬이었다.
“난, 사는 게 아니라 살아내고 있는데, 그 자식은 잘살고 있는 게 배가 아파서. 흐트러짐 없이 단정한 게 너무 꼴 보기 싫어서 분탕질이나 한번 해보려고.”
“그 감정을 갖는 것부터가 널 갉아먹는 거야.”
“알아, 그 자식 흔들어놓으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형편없는 짓인지. 그런데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
민영은 이슬의 확고한 의지를 차마 말릴 수가 없어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서 같이 일 해보니까 어때?”
이슬은 씁쓸한 표정으로 잔을 매만졌다.
“난 내가 정이든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더라. 내가 알던 정이든이 아니야.”
“지금의 정이든은 어떤데?”
이슬은 생각에 잠긴 듯 멍한 얼굴로 그간 이든의 모습을 떠올렸다.
“비열하고 기회주의자 냉혈한에 표독스럽고 파렴치하고 뻔뻔하기까지 하지.”
가만히 이슬의 말을 듣고 있던 민영의 미간에 잠시 주름이 일었다. 이슬이 읊는 단어는 하나같이 이든과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다. 민영은 이든과 고등학교 동창이지만 두 사람이 이별한 후 이든과 직접 교류하는 일은 없었다. 간혹 예나를 만나 이야기를 전해 듣거나 인맥이 겹치기에 경조사에서 우연히 이든을 마주치는 경우가 있었다. 종종 마주친 이든의 모습은 이슬이 말과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았다.
“이슬아,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게 뭔 줄 알아?”
민영이 닭 다리 한 조각을 손에 쥔 채 묻자, 이슬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는 맛.”
큰 명언이라도 나오길 기대한 것일까? 이슬은 싱겁게 웃으며 맥주잔을 들었다. 민영은 치킨에 고정했던 시선을 차차 이슬에게 옮기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는 남자.”
맥주를 들이켜려던 이슬의 손이 허공에 멈추더니 이윽고 두 눈동자가 옅게 흔들렸다.
“다이어트를 앞두면 다 아는 맛도 새롭게 느껴지듯, 아는 남자도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보면 새로운 자극을 일깨워주거든.”
이슬은 그 말에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새로운 자극이야 늘 깨닫고 있지. 내가 아는 정이든 맞나 싶어. 뻔뻔하고 오만하고.”
“믿고 싶은 대로 믿고, 보고 싶은 대로 본 건 아니야? 사람 본성 쉽게 안 변해. 바른 생활 정이든이 변해봤자지.”
“…….”
“네가 죄책감 없이 이든이 미워할 이유를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뭐?”
이슬은 복잡한 감정이 깃든 얼굴로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너가 지금까지 정이든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답게 민영은 이슬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을 들킨 듯 이슬은 입안 부드러운 속살을 힘껏 깨물었다. 혀끝에 비릿한 피가 감돌았지만, 전혀 괘념치 않았다.
“내가 대신 말해줄까? 넌, 이든이와 함께한 10년이라는 책의 마지막 장을 덮지 못했거든.”
덜커덩-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슬은 황망한 듯 비스듬히 고개를 떨구었다.
“이제 그 마지막 책장을 네가 직접 덮어보는 게 어때?”
어쩌면, 이별은 앞으로 함께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끝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과 함께 했던 모든 추억과 감정까지 정리하는 것인지 모른다.
“난 이슬이 네가 그 상처에서 벗어났으면 좋겠어. 이든이한테 받은 게 분명 상처만은 아닐 거야. 시작이 달콤했다고 인연의 끝도 달콤할 수는 없어.”
이슬은 단번에 잔을 비워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면 살아내는 게 아니라 살아갈 수 있을까?”
“아무래도 널 옥죄던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이슬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간절하게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이별의 원인을 너한테서 찾으려 하지 마.”
이슬은 의외의 말에 놀란 듯 눈동자가 커졌다.
“왜 이별의 원인이 너한테만 있을 거라고 생각해? 두 사람한테서 찾아봐야지. 찾다가 못 찾겠으면 이든이한테 직접 물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고.”
“직접?”
“왜? 자존심 상해?”
이슬은 흐릿한 눈동자로 먼 곳을 응시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제 와 자존심이 무슨 상관이야. 그냥 정말 그 이유가 나한테 있을까 봐 그게 두려운 거지.”
“만일 이유가 너한테 있다고 한들 달라지는 게 있을까? 어차피 헤어진 사이인데.”
그 후로 이슬은 한참 상념에 빠져있었다. 처음엔 분명 잘 먹고 잘사는 이든이 괘씸하고 원망스러워 분탕질이나 하자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숨을 쉬고 싶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만큼 잠수를 했으니, 이젠 수면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시원하게 숨을 쉬고 싶었다. 숨을 쉬면 조금은 살 것 같지 않을까. 하루하루 버텨내듯 살아내던 내가 남들처럼 살아가지 않을까 하는 작은 희망이 깃들었다. * * *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시간. 이든은 거실에서 보고서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휴대폰으로 시선을 두었다.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도 간사했다. 다가가는 것조차 욕심이라 여겼던 때는 그저 그녀를 곁에 두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건만. 다가가기로 마음을 먹으니 목소리가 듣고 싶고, 지금이라도 당장 달려가 얼굴을 보고 싶었다. 이든은 보고서를 덮으며 묵직한 숨을 토했다.
“보고 싶다. 단이슬.”
그녀를 보려면 아침이 밝아야만 한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웠고, 아침이 오지 않는 이 밤이 더디게 흐르고 길게만 느껴졌다. 서류를 보며 침실로 들어서던 그는 외마디의 신음을 토하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누군가의 간절한 저주가 통했던 것일까, 침대 모서리에 발가락을 제대로 찧고 말았다. 발가락을 움켜쥔 채 고통스러워하던 이든은 침대 옆으로 철퍼덕 쓰러졌다.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고통을 삭이던 그는 어느새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트렸다. 침대에 발가락을 찧어 눈앞에 별이 반짝거리는데도 마냥 좋고 행복했다. 내일도 이슬에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 그녀를 두고 무엇인가 할 수 있음이 가슴 벅차게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