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2021.11.26.
이든은 윤이 무슨 의도로 이런 메시지를 보낸 것인가 의문스러운 얼굴을 한 채 사무실로 시선을 돌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잔뜩 달뜬 얼굴로 왁자지껄하던 직원들이 보이지 않았다. 아무래도 윤과 예나가 이번에도 이슬과 시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일찍 나선 듯했다. 이든은 윤을 얕은수를 비웃듯 입매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이슬을 응시했다.
‘강윤, 네가 간과한 사실이 있어.’
아무리 단둘이 놓인다고 한들 한 차로 이동하지 않으면 네 계략은 아무 쓸모 짝에도 없단다.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이슬에게 한 차로 이동하자고 말은 건넨다고 한들 그녀가 동의할 리 없다는 걸 알기에 이든은 마음을 비운 듯 소리 없는 탄식을 토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직원들은 먼저 출발한 것 같은데. 우리도 이동하자.”
이든은 테이블에 놓인 이슬의 태블릿 PC를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이슬과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오른 이든은 한쪽 손을 바지 주머니에 밀어 넣더니 힐긋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넌지시 물었다.
“차 가지고 왔지?”
이슬은 대답할 의향이 없는 듯 침묵으로 일관하며 층수를 표시하는 계기판을 뚫어지듯 응시했다. 아무래도 좁은 공간에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어색하고 부담스러운 듯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밖으로 나선 이슬은 가방 안에 손을 넣으며 차로 다가가다 말고 외마디 탄식을 내뱉었다.
“아!”
터벅터벅 이슬의 뒤를 따르던 이든은 어느새 곁에 서서 그녀를 응시했다.
“왜 무슨 일 있어?”
“강윤.”
“응?”
이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이슬은 눈살을 찌푸렸다.
“강윤 어딨어?”
“이미 출발했지. 윤이는 왜.”
“강윤이 내 차 키를 갖고 있는데.”
이슬이 난처한 얼굴로 혼잣말하듯 중얼거리자, 윤의 메시지 내용이 불현듯 스쳐 지나갔다.
‘개자식님, 다 차려놓은 밥상에 밥숟가락까지 입에 넣어드렸는데. 날로 먹는 건 하실 수 있으시죠?’
이든은 입술을 설핏 말려 올라간 채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밥숟가락까지 입에 물려줬네.”
이슬은 허리춤에 손을 얹은 채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분명, 다른 수가 있을지 방법을 모색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든은 괜히 헛기침하며 천연덕스럽게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어이쿠, 윤이가 차 키를 갖고 있으면 어떡해? 내가 윤이한테 한번 전화해볼게.”
이슬은 잘근 깨물었던 입술을 느슨하게 풀며 통화를 하는 이든을 응시했다. 간절한 표정을 짓는 그녀에겐 미안했지만, 입에 물려준 밥숟가락마저 먹지 못하는 등신이 되고 싶진 않았다. 몇 번의 통화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자, 이든은 심각한 얼굴로 전화통화를 했다.
“어, 나야. 디자이너님 차 키, 윤이 네가 갖고 있다며.”
분명 윤이 운전 중이라 블루투스로 전화를 받을 것을 예상한 이든은 깍듯하게 ‘디자이너님’이라는 호칭을 붙여가며 통화를 했다.
“지금 어디쯤이야?”
- 정 대표야, 출발한 지 10분 정도밖에 안 됐는데 어디쯤이겠니? 고속도로 진입하려고 꽉 막힌 올림픽 대로 한가운데에 있지.
이든은 심각한 표정을 지은 채 깊은 탄식을 터트렸다.
“아, 벌써 고속도로 탔다고? 그래, 운전하는데 긴 통화는 무리지. 그만 끊을게.”
- 정이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직 …….
휴대폰으로 예나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든은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는 이맛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어렵게 입을 뗐다. 마치, 진심으로 유감이라는 듯이.
“이미 고속도로 진입해서 되돌아오긴 힘들 것 같은데. 내 차 타고 가자.”
이슬은 입술을 사리물고 생각에 잠겼다. 이든과 한 차로 이동하는 것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하고만 싶었다. 아무리 감정을 배제한다고 한들 좁은 차 안에서 3시간이 넘는 거리를 이동한다 생각하니 숨이 턱 막혔다. 그 순간, 번뜩이는 생각을 즉각 실행으로 옮겼다. 바로, 차의 주인인 지한에게 스페어키를 얻을 생각이었다.
‘그래, 사람이 죽으라는 법은 없지.’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했던가, 쾌재를 부르며 지한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멈칫하고 말았다. 그녀는 아주 잠시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 지한이 어제부터 일주일간 해외 출장을 떠났다는 것을. 허탈한 숨이 입술 틈으로 새어 나왔다. 영락없이 이든과 한 차로 이동하는 것 말고는 다른 수가 없는 듯했다. 이든은 꿈틀거리는 입꼬리를 꾹 숨긴 채 무겁게 내려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역에서 호텔까지 거리가 꽤 있던데. 아마 거기까지 가는 대중교통도 없을 테고 택시도 안 들어가려 할 거야. 그러니까 내 차 타고 가자.”
이슬은 내키진 않았지만, 대책이 없기에 체념하고 이든을 따라나섰다. 조수석에 오른 이슬이 안전벨트를 매자, 이든은 설핏 미소를 머금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바닷가 근처라 저녁엔 쌀쌀할 텐데.”
이든은 이슬이 슬리브리스 새틴 투피스에 재킷만 걸친 것이 걸리는 듯했다.
“안 되겠다. 짐도 다 차에 있을 텐데. 옷이랑 필요한 것 사서…….”
이슬은 목덜미를 문지르며 인상을 찌푸렸다.
“정 대표님, 내가 정 대표님이랑 오붓하게 쇼핑할 사이는 아니지 않나?”
“감기 걸릴까 봐 그렇지. 한번 감기 걸리면 오래 앓잖아.”
이슬은 싸늘하리만큼 차갑게 굳은 얼굴로 이든을 응시했다. 조소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날 걱정하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에 와서 이런 같잖은 걱정을 늘어놓을 게 아니라 날 혼자 두고 매정하게 돌아서지 말았어야 했다. 아무리 내가 싫었어도, 나에게 질리고 떠나고 싶더라도 내가 네게 의지하고 있던 그 순간만큼은 떠나지 말았어야 했다. 적어도, 날 사랑했더라면 넌 나한테 그러지 말아야 했다. 한 바가지 욕설을 퍼붓고 싶었다. 그의 위선에 욕지기가 치밀어올랐다. 입안 부드러운 속살을 사리물고 있던 이슬은 감정을 꾹 누르며 힘주어 이야기했다.
“뻔뻔한 건지, 양심이 없는 건지.”
이든은 쓴웃음을 머금은 채 말없이 핸들만 만지작거렸다.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에 그는 검지로 콧잔등을 매만지며 어색하게 웃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주었다는 것은 외면하고 싶어도 외면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고속도로에 진입하기 전까지 생각에 잠긴 듯 입술을 문지르던 이든은 힐긋 이슬을 보며 마른 미소를 지었다.
“10년을 만났는데, 차 태워주는 게 처음이네.”
그는 착잡한 마음에 땅이 꺼질 만큼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게 뭐 그리 어려운 거라고 10년을 만나면서 차 한번을 태워주지 못했을까 회한에 잠겼다. 팔짱을 낀 채 창밖을 응시하던 이슬은 눈을 가늘게 뜨고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번듯한 외제 차 끌고 다니는 거 자랑하고 싶어서 강윤이랑 짠 거 아니지?”
착잡한 얼굴로 운전을 하던 이든은 잠시 잘못 들은 건가 싶어 고개를 홱 돌려 이슬을 응시하다가 이윽고 시선을 바로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손등으로 입을 가린 채 웃던 그는 잿빛 하늘처럼 어두웠던 감정들로부터 벗어난 듯 연신 웃음을 지었다. 이슬은 이든을 이해할 수 없는 듯 고개를 삐뚜름하게 두었다.
“웃어?”
“그럼, 웃지. 안 웃어? 너 때문에 웃네.”
넌 언제나 날 웃게 했지, 숨통이 조여 제대로 숨도 쉬지 못했던 날 살아 숨 쉬게 했었지. 그 아련한 기억에 찌릿- 저미는 가슴을 다독이며 덤덤하게 말했다.
“단이슬 엉뚱한 건 여전하네. 설마, 차 자랑할 사람이 없어서 너한테 자랑하겠어? 너가 나보다 훨씬 더 좋은 차 타고 다니는데?”
이슬은 의심으로 얼룩진 눈동자를 그 이후로도 쉽게 거두지 못했다. . . .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던 이슬은 따스한 봄 햇살 때문인지,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디자인 작업에 매달렸던 탓인지 무거운 눈꺼풀을 좀처럼 감당할 수 없었다. 꾸벅꾸벅 졸던 이슬은 자각하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꽤 깊게 잠들었는지 이슬은 가뿐하게 눈꺼풀을 말아 올렸다. 눈을 뜨자마자 핸들을 감싸 안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이든과 시선이 맞물렸다.
“잘 잤어?”
온몸을 감싸고 있던 나른함이 순식간에 증발하는 느낌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슬은 살짝 뒤로 젖혀진 좌석을 바로 고치려다 미간에 미약하게 주름을 일구었다. 자세를 고쳐 앉자 이든의 재킷이 무릎으로 툭 떨어지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그가 덮어 준 모양이었다. 세심하게 챙겨주는 그의 행동들은 지난 연인에 대한 미안함 치고는 과한 것 같아 이슬은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며 이든을 쏘아보았다. 이든은 미소를 머금은 채 재킷을 거두어가며 말했다.
“너, 모르지?”
“.......”
“넌 화낸다고 화내는 거겠지만, 보는 사람한테는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거.”
이슬은 기가 찬 듯 헛웃음을 터트리며 이든을 빤히 응시했다.
“그렇다고 눈으로 심한 욕은 하지 말고, 나가자. 곤히 잠들어서 어떻게 깨우나 싶었는데. 딱 맞춰서 일어났네.”
벌써 다 도착했나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그 어디에도 호텔은 보이지 않았다.
“딱 반 왔어. 밥 먹고 가자.”
“내가 정 대표님이랑 밥을 왜 먹습니까?”
꼬르륵-. 단호하고 차가운 음성과 달리 신체적 반응은 거짓말을 하지 못했다. 좁은 차 안에서 하필 정적이 내려앉은 그때 꼬르륵거릴 게 또 뭐람. 이슬은 발을 동동 구르며 포효하고 싶은 것을 꾹 누르고 헛기침으로 무마하려 했다. 이든은 괜히 먼 곳을 보며 웃음을 꾹 참았다.
“아, 미안. 내가 주말부터 쭉 밥을 제대로 먹질 못해서.”
이든은 배에서 난 꼬르륵 소리가 제게 난 것이라는 듯 능청스럽게 배를 만졌다.
“너 별로 내키지 않아도 같이 먹어주면 안 될까? 나 진짜 배고파서 손가락도 못 움직일 것 같은데.”
그가 주말부터 밥을 먹지 못했다는 말은 사실이었지만, 배고프다는 말은 완벽한 거짓말이다. 여전히 속이 쓰려 무엇인가 넘기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게 느껴졌어도 그녀에게 맛있는 음식을 사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 * * 레스토랑에 들어선 이슬은 메뉴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신중히 메뉴를 고르는 이든을 탐탁지 않은 얼굴로 응시했다. 조금 전 레스토랑에 들어서며 직원과 그의 대화를 들은 후 꺼림칙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직원이 예약했냐는 물음에 그가 당당히 예약자 이름으로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것만으로 윤이 자신의 차 키를 들고 떠난 것이 우연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여기 해산물 요리는 다 괜…….”
메뉴판에서 시선을 거두며 말하던 이든은 이슬의 날카로운 시선에 말을 제대로 끝맺지 못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지? 이번엔 나 잘못한 거 없는 것 같은데?”
“사람 가지고 놀면 좋아? 재밌어?”
이든은 일순 굳은 얼굴로 메뉴판을 덮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무슨 말이야? 내가 알아듣게 이야기해줬으면 좋겠는데.”
“강윤이 내 차 키 갖고 떠난 거 실수 아니잖아.”
“왜 그렇게 생각해?”
“레스토랑 예약했다며. 게다가 지나가는 길도 아니라 한참 돌아온 것에 레스토랑이 위치했다는 것도 그렇고…….”
“그러면 좀 안 돼?”
한껏 내려앉은 그의 음성이 스산하게 울려 퍼졌다. 이든은 꿋꿋하게 이슬을 응시했던 시선을 떨구어 테이블 아래서 제 손을 내려보았다. 이젠 제법 익숙해질 때도 되었다 생각했는데 그녀의 차가운 눈빛은 언제나 가슴을 시리게 했다. 이든은 마음을 다잡으려는 듯 묵직한 숨을 내쉬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파도 아프다고 내색하면 안 되고 힘들어도 힘들다고 내색하면 안 되는 것이 그의 위치였다. 이든은 애써 입매를 말아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네가 듣고 싶은 말부터 먼저 하자면,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없었어.”
“.......”
“예약은 중간에 휴게소에서 한 거였고, 굳이 가는 방향도 아닌데 돌아서 이 레스토랑에 온 건…….”
“.......”
“그냥, 너랑 밥 먹고 싶어서. 이왕 밥 먹을 거 맛있는 거 사주고 싶어서 그랬어.”
“그러니까 왜.”
이슬은 주먹을 힘껏 말아 쥔 채 연이어 목소리를 냈다.
“다 끝난 사이에 이제 와 이러는 거 주제 넘는다고 생각하지 않아?”
날카로운 말이 사정없이 이든의 심장에 날아와 박혔다. 감정을 꾹 눌러 삼키는지, 그의 목울대가 거칠어졌다.
“비즈니스를 하기로 마음먹었으면 비즈니스만 해.”
“.......”
“정이든, 너가 이런다고 나 너 도와줄 생각 없어. 지금도 어떻게 하면 널 고통스럽게 망하게 할까 생각뿐이니까 어쭙잖은 호의 베풀면서 내 마음 돌릴 생각이라면 접어.”
긴 침묵을 지키던 이든은 잠잠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뗐다.
“이슬아.”
그의 음성이 처연하게 울려 퍼졌다.
“원한다면 지금 당장 날, 벼랑 끝으로 밀어도 좋아. 불구덩이에 빠트린다고 해도 널 원망하는 일 없을 거야.”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담담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이슬은 서서히 눈매를 좁혔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늘어놓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이 벼랑 끝으로 몰고 불구덩이에 빠트린다면 원망하겠지만, 너라면 뭐든 겸허히 받아들일 거야.”
“정이든.”
“너한테 잘 보이고 싶은 건 맞는데, 그 이유가 회사 때문은 아니야. 내 마음 몰라도 되는데, 이거 하나만 알아줬으면 좋겠어.”
이슬은 테이블 아래서 핏기가 가실 만큼 손마디를 힘껏 움켜쥐었다.
‘회사가 아니라면 대체 나한테 잘 보이고 싶은 이유가 뭔데.’
지나간 인연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라기엔 도가 지나쳤고, 회사를 지키기 위하는 것이 아니라면 대체 왜 그러는 거야. 그가 던진 묵직한 진심은 이슬의 마음에 거친 파동을 불러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