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모든 순간이 너였다.2021.12.06.
“꺄아-!”
욕실에서 들려오는 외마디의 비명에 이든은 생각할 것도 없이 욕실로 뛰어갔다. 욕실 문을 열어젖힌 그의 시야에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이슬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슬은 물벼락에 당황한 듯 얼어붙은 채 두 눈만 끔뻑였다. 그녀의 외마디 비명에 놀란 이든은 그나마 별일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의 숨을 흘리며 수건을 집어 들어 이슬의 젖은 머리를 말려주었다.
“세수하라고 들여보냈더니 이렇게 고혹적인 자태로 날 유혹하는 거야?”
그의 입술이 기분 좋게 호선을 그리자, 이슬은 인상을 구기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오늘도 어김없이 왜 하필 그의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게 되는 것일까. 이슬은 민망해서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든은 한 걸음 물러난 이슬을 멀거니 응시하다 애써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갈아입을 만한 옷 앞에 둘게. 갈아입고 나와.”
이든이 욕실을 나서자, 이슬은 밀물처럼 몰려오는 수치심에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묵음으로 포효했다. 처음엔 그저 앞머리만 살짝 감아볼 생각이었다. 샤워기를 든 채 수도꼭지를 틀었을 뿐인데, 손에 들고 있는 샤워기가 아니라 레인 샤워기에서 물이 나올 거란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머리를 쥐어박으며 자책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 건너편에서 이든의 음성이 들렸다.
“옷 앞에 뒀으니까. 갈아입고 나와.”
마음 같아서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집을 나서고 싶었지만, 몸에 딱 달라붙은 옷은 이루어 말할 수 없을 만큼 찝찝했다. 이든은 주방 테이블 앞에 앉아 묵직한 숨을 토해냈다. 이슬이 자신과 재이가 결혼했다고 오해했던 일처럼, 앞으로 수없이 많은 오해를 풀어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오해를 풀어나가야 할지도 암담했지만, 무엇보다 완벽히 오해를 풀 때까지 그녀가 곁을 내줄지 의문이었다. 흐릿한 눈동자로 깊은 상념에 젖어있던 그는 작은 인기척에 눈동자에 빛을 되찾았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이슬에게 다가간 이든은 작은 체구의 이슬이 자신의 옷을 입은 모습에 좀 전까지의 시름을 말끔히 잊은 듯 비죽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는 말없이 이슬의 옷소매를 걷어 올려주었다. 잠시 흔들리는 눈동자로 이든을 응시하던 이슬은 그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의 시선이 아주 잠시 이슬에게 내려앉더니 이윽고 꿋꿋하게 다시금 옷 소매를 걷어 올려주며 말했다.
“기분 참 묘하네. 네가 이렇게 내 옷 입고 있으니까 꼭,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
평소라면 이든의 말에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라며 면박을 주기 바빴겠지만, 지금만큼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체향이 가득 배어 있는 옷을 주워든 순간 불현듯 그와 함께했던 행복한 시간이 떠올랐다. 그 시간이 너무나 달콤해 잠시 현혹된 것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겼던 그와 무엇인가 해도 되는 사이라는 말에 잠시 흔들린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바람처럼 잠시 흘러가는 생각일 뿐이었다. 그가 결혼하지 않았다고 한들 달라질 것은 없었다. 여전히 그는 자신을 처참하게 무너뜨리고 떠난 사람이었고 그를 향한 미움과 분노 또한 변함없었다. 이든은 자신을 빤히 응시하는 이슬의 시선에 가슴이 욱신거리는 듯 애써 화제 전환을 했다.
“옷은 건조기 돌리고 있어. 밥 맛있게 먹어주면 돌려줄게.”
“…….”
선녀와 나무꾼도 아니고 옷을 빌미로 협박하는 이든의 모습에 이슬의 눈매가 좁아졌지만, 이든은 타격감 없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 집에서 나가고 싶으면 밥 한 공기 뚝딱 비워.”
“정이든.”
시베리아 중심에 서 있는 듯 차가운 냉기가 공간을 지배했다. 싸늘한 적막과 날 선 눈빛이 이든의 숨통을 서서히 조여올 즈음이었다. 콜록콜록-. 이든의 마른기침 소리에 장난하냐고 따져 물으려던 이슬의 말문이 턱 막혔다. 수척해진 얼굴로 기침을 하는 그를 두고 모질게 밀어붙일 수가 없었다. 그 점을 이용한 것일까, 이든은 이슬을 주방 테이블로 이끌었다.
“그래. 이 집에서 나가고 싶으면 밥 맛있게 먹어줘. 나 정말 오늘은 혼자 밥 먹기 싫어서 그래.”
미약하게 갈라진 그의 음성이 그녀의 마음을 사정없이 흔들었다.
‘그래, 어디까지나 죄책감을 덜기 위한 것뿐이야. 정이든이 감기에 걸린 게 나 때문인 건 변함없는 사실이니까.’
그를 빗속에 두고 오지만 않았어도, 그가 우산을 쥐여줬더라도 우산을 끝내 받지 않았더라면, 그가 감기에 걸릴 일 또한 없었을 테니까. 이슬이 마지못해 식탁 앞에 앉아 젓가락으로 쌀알을 고르고 있었다. 그녀를 애틋한 시선으로 응시하던 이든은 용기 내어 목소리를 냈다.
“이슬아.”
그가 나긋한 음성으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이슬은 쌀알 고르던 것을 멈추었다.
“지금껏 너 말고 다른 여자는 한 번도 없었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묵직한 음성에 이슬은 쿵- 심장이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숨도 제대로 쉴 수조차 없어 하얗게 질린 얼굴로 그를 응시하자, 그는 애써 밝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난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네 맘에 들 거니까 단단히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순간 흔들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테다. 10년을 만났고, 내 삶에 행복했던 순간마다 그가 있었으니 흔들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목 끝에 걸린 울음을 참으려 젓가락을 잡은 손에 힘이 실으며 분노에 가득 찬 눈빛으로 이든을 응시했다.
‘앞으로도 나밖에 없을 거라고? 그런 사람이 날 떠나? 날 무참히 짓밟고 떠난다고.’
이슬의 두 눈빛에서 원망하는 마음을 읽은 것일까, 이든은 감정을 꾹 삼켜내며 말했다.
“내가 어떤 말을 한다고 한들 믿지 못하겠지만…….”
“지금까지 뱉은 거지 같은 변명들 다 집어치우고, 날 떠나야 했던 이유나 말 해봐.”
끝까지 대꾸하지 못하던 이든은 처량한 두 눈동자로 이슬을 응시했다. 날 둘러싼 모든 불행에, 내가 끊임없이 날 갉아먹도록 설계한 사람이 네 엄마였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 네게 엄마가 어떤 존재인지 잘 아는 내가 어떻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있겠어. 그저 내가 조금 더 비열한 놈이 되는 게 낫지. 그녀에게 다가갈수록 닿지 못할 진심 또한 켜켜이 쌓여가고 있었다. 이든은 입을 꾹 다문 채 도톰한 계란말이를 이슬의 밥 위에 올려주었다.
“너, 내가 만든 계란말이 좋아했잖아. 꼭꼭 씹어서 많이 먹어.”
이슬은 밥 위에 있는 계란말이를 보며 입매를 비틀어 냉소를 흘렸다. 옆에 놓인 물잔을 단번에 비어낸 이슬은 탁- 소리 나게 컵을 식탁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정이든, 날 다 안다고 생각하지 마. 네가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건 어디까지나 3년 전에 나일 뿐이니까.”
그가 날 잊지 못했다고 한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난 여전히 그가 미웠고 내게 상처를 준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이슬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자, 이든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그렇네. 그럴 수도 있겠다. 3년이나 흘렀는데 당연히 변한 것들이 있겠지.”
그는 입술을 길게 늘어트리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참에 새롭게 알아가면 되겠네. 나 머리 좋은 거 알지? 금방 배울걸?”
“정이든. 너 정말…….”
이슬이 적의에 가득 찬 눈빛으로 이든을 응시하자, 이든은 물러날 생각이 없는 듯 웃음기 가신 얼굴로 그녀와 거리를 좁혔다.
“내가 왜 이러는지 잘 생각해보라고 했는데, 생각해봤어?”
이슬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든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밀어 넣으며 상체를 이슬 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였다.
“표정 보니까 생각 안 해본 모양이네. 그럼 단도직입으로 말할게.”
“…….”
“네가 행복해지길 바라며 네 손을 놓았던 건데. 내가 너의 행복을 앗아갔다면, 내가 다시 너의 행복을 찾아주고 싶어졌어.”
“…….”
“네겐 우스운 말로 들리겠지만 한 번도 널 잊은 적 없었어. 내 삶은 네가 없는 순간에도 전부 너였어.”
이슬은 이를 악문 채 이든을 빤히 응시하며 한쪽 입술을 길게 늘어트리며 말했다.
“네가 날 떠나 어떤 삶을 살아왔건 관심 없어. 앞으로도 그럴 거고. 그러니까 개수작 그만 부려.”
싸늘한 말 한마디만 남겨두고 이슬은 그를 버려두고 떠나갔다. * * * 요 며칠 이슬이 카페에 오지 않자, 도하는 서준의 집을 들락날락하며 한 번이라도 이슬과 마주치기 위해 노력했다. 서준의 집에서 나와 이슬의 집 현관문을 멀거니 응시하자 띠링- 청아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서려던 도하는 엘리베이터 안에 서 있는 이슬을 발견하고 입가에 미소가 스며들었다. 그녀에게 반갑게 인사를 하려 할 무렵, 멍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있는 그녀의 얼굴과 그녀가 체구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또 그 표정이었다. 그녀가 옛 연인에게 손을 잡히고 무참히 뿌리치지도 못했던 날처럼 세상이 무너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입고 있는 옷 또한 그 남자의 옷인 듯했다. 이슬을 마주친 게 반가워 스며들었던 미소가 연기처럼 증발했다. 그녀가 자신을 봐줄 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도하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서둘러 버튼을 누르며 애써 미소를 머금었다.
“이야, 이렇게 또 만나네요.”
자신이 먼저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으면 그녀의 시야에 자신이 들어오는 일은 없을 거란 걸 알기에 웃으며 다가갔다. 도하의 음성에 흐릿했던 이슬의 눈동자가 또렷하게 빛났다.
“어? 오늘도 친구 만나러 왔나 봐요.”
“네. 그나저나 너무 오랜만에 보는 거 아니에요? 카페에서 매일 이슬 씨 기다렸는데.”
이슬은 멋쩍게 웃으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도하 앞에 섰다.
“며칠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워크숍 다녀왔어요.”
“그랬구나. 난 또 내 커피 맛없어서 안 오는 줄 알고 걱정했어요.”
이슬은 피식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좋아해요.”
도하는 순간 움찔한 듯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고 심장이 철렁였다.
“도하 씨 커피도 ‘봄날’에 걸려있는 류 그림도.”
이슬이 그 뒤잇는 말을 잠잠히 듣던 도하는 뒤늦게 피식 미소를 지었다.
“난 또, 나 좋아한다는 줄 알고 심쿵했네.”
도하의 말에 멀뚱히 도하를 응시하던 이슬은 짙은 당혹감이 서린 얼굴로 성급히 사과했다.
“잠시라도 불쾌했다면 사과할게요. 잠시 오해의 소지가 있었네요.”
“불쾌하긴요. 이슬 씨가 좋아해 준다면 나야 영광이죠.”
“좋게 봐줘서 고마워요.”
농담을 가장한 진심을 알 리 없는 이슬이 싱겁게 웃자, 도하는 착잡한 마음을 감추었다.
“워크숍 다녀와서 피곤할 텐데 쉬어요.”
이슬이 작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 돌아서자, 도하는 입을 달싹이며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이슬 씨, 월요일에 퇴근하고 뭐해요?”
왜 자신의 스케줄을 묻는지 의아한 듯 도하를 바라보자, 도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날, 별일 없으면 나랑 류 아틀리에 가지 않을래요?”
비겁하게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이용해서라도 그녀의 환심을 사고 싶었다. 과거라는 큰 연결고리를 가진 그녀의 옛 연인과 달리 자신은 그녀를 붙잡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익숙하고 편해진 사람, 그리고 그와 함께한 추억을 무슨 수로 이길 수 있을까. 애초에 과거의 연인과 겨룬다면 절대로 그와 내가 동일 선상에서 출발할 수가 없으니 페어플레이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류 화백님 아틀리에요?”
그녀가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뜨며 말하자 도하는 그녀와 벌어진 간격을 좁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류를 직접 보지는 못하겠지만, 갤러리처럼 작품을 전시한 공간이 있어서요. 발표되지 않은 작품도 있을 건데. 보러 갈래요?”
“네! 갈래요!”
이슬은 망설이지 않고 두 눈을 반짝이며 덥석 제안을 받아들였다. ‘류’의 이야기만으로 머릿속에 가득 들어찼던 이든을 말끔히 지워낸 듯했다. * * * 주말이 지나 월요일 아침이 밝았다. 워크숍 덕분에 한결 가벼워진 분위기 속에서 회의를 마친 이슬은 꽤 만족스러운 회의 결과를 얻은 듯 미소를 머금었다. 회의가 끝나고 자료를 정리하던 준희는 문득 떠오른 듯 이든을 바라보며 물었다.
“대표님! 디자이너님에게 소원 말씀하셨어요? 그때 흑기사 하셨잖아요.”
회의자료를 살피던 이든은 의자에 기대어 앉아 매끈한 턱을 쓰다듬으며 입술을 기울였다.
“그러게. 소원권이 있었네.”
“에이. 이러실 줄 알았다니까, 저희 앞에서 지금 쓰세요. 그러지 않으면 소원권 제대로 쓰지도 못할 것 같은데.”
이든의 노골적인 시선에 이슬은 책상에 늘어놓은 자료를 서둘러 정리했다. 이든은 이슬의 분주한 손만으로 이 상황을 불편해하고 있다는 것이 빤히 보였지만 당황한 표정이 꽤나 귀여웠다. 이든은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나 이슬을 보며 말했다.
“밥 한번 먹어요.”
‘밥 한번 먹자.’ 누구에겐 참으로 소박한 소원이었지만, 이든은 이슬과 함께하는 한 끼가 절실했다. 이슬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밥 한 끼가 뭘 대수냐 싶었다. 물론, 그와 오붓한 식사 자리는 피하고 싶었으니 직원들 다 같이 먹자고 선수를 칠 생각이었다.
“단둘이.”
이든이 먼저 선수를 치자, 이슬은 미간을 찌푸렸다. 제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그가 얄미웠다. 이든은 얄궂은 미소를 머금은 채 이슬의 곁으로 다가왔다.
“줄 것 있으니까 내 방에서 잠깐 봅시다.”
이슬이 이든의 저의를 파악하지 못한 듯 날 선 눈빛으로 응시하자, 이든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스며들었다.
“잊어버렸나 보네. 우리 집에 옷 놓…….”
이든이 호기롭게 뱉은 말은 온전한 한 문장이 되기 전에 입술 끝에서 뭉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