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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거짓말의 거짓말. (33/130)

34. 거짓말의 거짓말.2021.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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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48620498771.jpg[자?]

조금 전까지 차갑게 굳은 얼굴로 세상 심각했던 이슬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스며들었다.

16548620498776.jpg“너도 결국은 시대를 막론하고 전 남친들이 구사한다는 이 멘트의 클리셰를 넘지 못하는 건가?”

세계 모든 전 남친들이 같은 학원에서 수업이라도 받나. 어쩜 이렇게 멘트에 차별성이 없는지 비웃으면서도 그녀의 입가엔 서서히 미소가 번져 들었다. 망설일 것 없이 이든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흐르는 그 잠깐 사이. 쿵- 쿵- 쿵-.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요동쳤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날뛰는 심장을 불안함 탓으로 넘기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 했다. 일이 잘 해결되지 않아 이 새벽에 연락한 것일까. 이번 일로 그가 낙심하거나 손해를 보면 어쩌나. 딱 그 정도의 마음일 뿐이라고 자신에게 주문을 걸듯 되뇌었다.

16548620498771.jpg- 안 잤나 보네.

통화가 연결되고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나른한 음성은 이슬의 심장에 찌르르 전류를 흐르게 했다. 그 순간 직감했다. 자신의 마음은 기어이 외면한다고 외면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상황을 직면하게 되자 사고가 마비되었다. 어떠한 말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고, 심지어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16548620498771.jpg- 이슬아.

그의 부름에 이슬은 꽉 막힌 목을 긁어대며 갈라진 음성으로 대답했다.

16548620498776.jpg“어.”

16548620498771.jpg- 자는데 내가 깨운 건 아니지?

16548620498776.jpg“이제 막 자려던 참이었어. 무슨 일이야?”

16548620498771.jpg- 혹시나 마음 쓰여서 못 자는 건 아닐까 걱정돼서 전화했어.

16548620498776.jpg“쓸데없는 걱정 했네. 너가 망하기 일보 직전인데 파티를 해도 모자랄 판에 잠이 안 올 리가.”

제 감정이 툭 튀어나와 그에게 전해질까. 그가 제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다면 그가 막을 수 없는 파도가 되어 밀려올까 봐. 일부러 퉁명스럽게 말하며 감정을 숨겼다. 전화기 너머로 이든의 잔잔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16548620498776.jpg‘뭐가 좋다고 웃어.’

따뜻한 말 한마디 듣지 못하면서 왜 웃기만 해. 바보같이. 가슴이 미어져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16548620498771.jpg- 내가 잘 해결했어. 내일, 아니. 아침에 정정 기사 나겠지만 그래도 직접 말해주고 싶었어.

16548620498776.jpg“…….”

16548620498771.jpg- 어때, 나 꽤 능력 있는 대표지?

16548620498776.jpg“뭐, 그 정도로 유세야. 대표라면 당연히 회사를 지켜야지.”

16548620498771.jpg- 회사.

그는 이슬의 말을 곱씹듯 되뇌다가 말을 덧붙였다.

16548620498771.jpg- 사실, 회사는 안중에 없었어. 그냥 널 지키고 싶었을 뿐이야.

덜컹-. 심장이 내려앉았다. 나른한 그의 음성이 이토록 콧잔등을 시큰하게 만들 일이던가. 고즈넉한 새벽에 너의 나긋한 음성을 듣는 것이 얼마만의 일이던가.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어느새 두 눈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16548620498776.jpg‘난 너랑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아.’

그러니까 부디 날 흔들지 말아줘. 그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 줘. 그녀의 마음을 알 리 없는 이든은 가벼운 농담으로 무겁게 내려앉은 분위기를 풀려 했다.

16548620498771.jpg- 왜 말이 없지? 감동했나?

16548620498776.jpg“감동은 무슨.”

그 후로 두 사람 사이엔 침묵만이 흘렀지만, 그 누구도 선뜻 통화를 끊는 사람은 없었다. 떨어져 있던 그 시간, 두 사람 모두 바라왔던 시간이었을 테다. 침묵으로 가득 찬 전화라도 좋으니 그저 서로의 숨결이라도 느끼고 싶었던 그 마음이 통했던 것일까. 얼마나 바라왔던가, 수화기 너머로 숨결 소리만이라도 듣고 싶었던 그 무수한 새벽. 이슬은 그토록 바라왔던 시간이었지만 행복하지 않고 되레 혼란스러웠다. * * * 재이는 어제부터 밥 한술, 물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을뿐더러 제대로 잠도 못 잔 터라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까칠하고 핼쑥해진 얼굴로 출근 준비를 마치고 계단을 내려와 거실로 향했다. 재이는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는 민 회장을 발견하고 입매를 한껏 올리며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든의 매몰찬 모습에 상처받고 우울해도 아버지 앞에서 상심하고 낙담한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다. 아버지에겐 빈틈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든의 환심을 사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아버지를 실망하게 하고 싶지 않기도 했고. 자신의 힘으로 정이든 마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16548620555615.jpg“아버지 오늘 제주도 가시죠?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건강 생각해서 너무 무리하진 마시고요.”

민 회장은 보던 신문을 접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16548620555621.jpg“한심한 놈.”

묵직하지만 나지막이 울리는 민 회장의 음성에 재이는 입을 꾹 다물었다.

16548620555621.jpg“고작 남자 하나 때문에 몰골이 그게 뭐냐? 네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놈한테 목을 매달아!”

16548620555615.jpg“…….”

16548620555621.jpg“당장, 도로시 그만두고 회사 법무팀으로 들어와라.”

16548620555615.jpg“그럴 수 없어요.”

16548620555621.jpg“뭐?”

처음으로 제 말에 반기를 드는 재이의 모습에 민 회장은 얼굴을 구겼다. 재이라고 편안한 마음으로 반기를 든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언제나 아들을 원했다. 유일한 자식인 자신이 있음에도 아들이 없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던 사람이었다. 아들에게 회사를 물려주고 싶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던 그였기에. 재이는 아버지에게 인정받고 싶어 뭐든 그의 뜻대로 움직였지만, 단 하나. 자신의 전부인 이든 만큼은 절대로 포기할 수 없었다. 재이는 또렷한 눈동자로 민 회장을 응시하며 말했다.

16548620555615.jpg“정이든 꼭 제 사람으로 만들 거예요. 제가 꼭 갖고 말 거라고요.”

16548620555621.jpg“네 성화에 못 이겨 별 볼 일 없는 회사에 투자도 했고, 정 대표 어르고 달래서 회사 입사까지 시켜놨으면 뭐 이렇다 할 성과를 들고 왔어야지.”

16548620555615.jpg“…….”

16548620555621.jpg“눈에 보이는 성과도 없이 무슨 수로 그 녀석 마음을 얻어?”

재이가 아랫입술을 짓이기든 깨물자, 민 회장은 묵직한 숨을 토하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 * 이슬은 어제 삐끗한 발목이 불편한 듯 절뚝이며 회사로 들어섰다. 사무실은 어제의 분주했던 분위기와 완벽히 대조되게 고요했다. 텅 빈 사무실을 멀거니 응시할 때쯤 집무실 창 너머로 의자에 기대어 잠든 이든이 시야에 들어왔다. 홀린 듯이 한 걸음 한 걸음 망설임 없이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반쯤 연 문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곤히 잠든 이든의 모습에 넋을 놓았을 때였다.

16548620584738.jpg“디자이너님! 굿모닝입니다!”

우렁찬 준희의 목소리에 흠칫 놀란 이슬은 앞으로 서서히 몸이 기울었다. 기대고 서 있던 문이 활짝 열리더니 의도치 않게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침착하게, 침착하게. 정이든한테만 안 들키면 그만이잖아.’ 최대한 침착하게 자세를 고쳐 선 이슬은 아주 자연스럽게 문 쪽으로 돌아섰다. 그 순간. 집무실 내 블라인드가 작동되더니 묵직한 음성이 들렸다.

16548620498771.jpg“어딜 가려고?”

이든의 음성에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그에게 시선을 옮겼다. 곤히 잠들었다고 생각한 그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제게 다가왔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가 가까워질수록 오늘도 어김없이 심장은 미친 듯 요동쳤다. 쿵- 쿵- 쿵. 귓가에 울려 퍼지는 심장 소리만으로 정신이 아찔하건만. 그는 상체를 기울여 이슬과 눈높이를 맞추었다.

16548620498771.jpg“들어올 땐 네 마음대로 들어왔어도.”

어느새 문을 짚고 선 그는 얄궂게 입술을 늘리며 이슬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16548620498771.jpg“나갈 땐 마음대로 못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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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간 눈동자에 이슬을 담던 그는 웃음을 꾹 참으며 말을 이었다.

16548620498771.jpg“뭘 훔쳐보고 그래. 보고 싶으면 언제든 와서 보면 되지.”

16548620498776.jpg“훔……. 훔쳐보긴 누가 누굴 훔쳐봤다고 그래? 허! 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히끅- 눈치 없이 터져 나오는 딸꾹질 소리에 이슬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16548620498776.jpg‘단이슬, 가지가지 한다.’

이슬을 응시하던 이든의 입매가 기분 좋게 휘었다. 그녀는 여러모로 심장에 해로운 존재였다.

16548620498771.jpg“다음엔 훔쳐보지 말고 대놓고 봐.”

16548620498776.jpg“정말 아니라니까?”

질끈 감았던 눈을 부릅뜨고 죽어도 아니라고 우기는 모습이 오랜만이라 반가워서 지그시 그녀를 두 눈에 담으며 말했다.

16548620498771.jpg“나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어.”

이슬은 이든을 노려보던 눈매에 느슨하게 힘을 풀었다.

16548620498771.jpg“그러니까 나랑 점심 맛있는 거…….”

드르륵- 드르륵-. 책상 위에 올려놓은 그의 휴대폰 진동이 울리자, 이슬은 턱 끝으로 책상을 가리켰다.

16548620498776.jpg“전화부터 받지 그래.”

16548620498771.jpg“난 지금 너랑 대화하는 게 더 중요한데?”

잠시 그의 말에 멈칫했지만, 끊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진동 소리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16548620498776.jpg“진동 소리 때문에 머리 울리는 것 같으니까 전화 받아.”

16548620498771.jpg“안 나간다고 약속하면.”

16548620498776.jpg“뭐?”

16548620498771.jpg“전화 받는 틈에 도망가려는 거잖아. 어떻게 잡은 둘만의 시간인데 이 기회를 놓치나?”

이슬은 못 이기겠다는 듯 얕은 숨을 토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못 믿겠다는 듯 이든은 이슬을 소파로 이끌어 앉히더니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발신인을 확인하는 그의 얼굴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는 깊은숨을 들이마시며 전화를 받았다.

16548620498771.jpg“안녕하세요. 회장님.”

16548620555621.jpg- 그래, 정 대표 나일세.

이른 아침부터 민 회장이 왜 전화를 했는지 조금은 알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어제 재이에게 퍼부은 일갈 때문이리라 확신했다. 그가 도로시에 막대한 투자를 했고, 투자단 사이에서 영향력이 센 사람이니 무조건 잘 보여야 하는 인물이긴 했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휩쓸려 다닐 수 없다는 생각이 스며들었다.

16548620555621.jpg- 오늘 점심에 재이랑 함께 식사하지.

16548620498771.jpg“죄송합니다. 오늘은 제가 선약이…….”

16548620555621.jpg- 선약 말끔히 정리하고, 12시까지 재이 데리고 J 호텔 레스토랑으로 오게나.

그가 일방적 통보를 하고 전화를 끊자, 이든의 미간이 사납게 구겨졌다. 이슬은 관심 없는 듯하며 곁눈질로 힐끔 이든을 살폈다. 통화를 받기 전부터 싸늘하게 식은 얼굴만으로 받기 싫은 전화인 것을 알 수 있었다. 회장님이라는 호칭과 함께 깍듯한 자세를 취하는 것만으로 통화 상대가 투자자 중 한 명이라는 것 또한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16548620498776.jpg“통화 끝났으니까, 나가봐도 되지?”

이슬이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이든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기분이 가라앉은 그를 두고 집무실을 나온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가 마음에 걸린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곁을 지키는 것은 옳지 않았다. 한 걸음 내디뎠을 때. 발목을 타고 찌릿하면서도 묵직한 통증에 멈칫했다.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는 한걸음에 이슬에게 다가왔다.

16548620498771.jpg“왜 그래.”

그의 시선이 자연스레 퉁퉁 부은 이슬의 발목으로 향했다. 어제 지한의 충고를 가뿐히 무시하고 찜질을 건너뛴 터라 발목이 상당히 부어있었다.

16548620498771.jpg“발목이 왜 이래. 다쳤어?”

16548620498776.jpg“그냥 살짝 삔 거니까 신경 쓰지 마.”

그가 한쪽 무릎을 구부려 유심히 제 발목을 관찰하자 민망한 듯 발을 뒤로 뺐다.

16548620498771.jpg“이렇게 부었는데 어떻게 살짝 삔 거야. 안 되겠다, 당장 병원부터 가자.”

16548620498776.jpg“어제 병원 다녀왔고, 점심시간에도 갈 거니까 신경 끄고 네 일이나 하지.”

거짓말이었다. 그저, 그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도 이미 많은 시름을 안고 있는 그에게 자신까지 시름을 더하고 싶지 않아 불쑥 나온 거짓말. 생각해보니 그와 연애할 때도 그를 배려한다며 거짓말을 하곤 했었다. 괜찮지 않아도 괜찮은 척. 함께 더 있고 싶다고 어리광부리고 싶었지만 바쁜 그를 위해 일부러 쿨한 척. 질투가 나도 아닌 척. 사랑한다면서 왜 솔직하지 못하고 거짓말에 거짓말로 나 자신을 속였을까. 그를 배려한다면서 정작 왜 나 자신은 배려하지 못했을까. 어쩌면, 우린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한 까닭에 말 못 할 오해가 쌓이고 이별하게 된 것은 아닐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널 배려하려고 수많은 거짓말을 쏟아내었던 것처럼. 어쩌면 너도 날 배려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변명으로 이별을 포장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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