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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숱한 불안 속 행복. (59/130)

60. 숱한 불안 속 행복.2022.03.28.

이슬은 저녁을 배불리 먹은 탓인지 눈꺼풀이 무거워 소파에 녹아내리듯 기대어 앉았다. 물을 마시던 이든은 피식 웃으며 이슬에게 다가왔다.

16548627810232.jpg“씻고 누워. 시간 지나면 더 귀찮아진다.”

이슬은 손을 허공에 휘이 저으며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16548627810239.jpg“먼저 씻어, 난 이미 틀렸어.”

이든은 어림없다는 듯 이슬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16548627810232.jpg“무슨 소리야, 씻고 자야지.”

16548627810239.jpg“그럼 너 먼저 씻어, 너 씻고 나오면 씻을게.”

16548627810232.jpg“같이 씻어야지 무슨 소리야?”

이든이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이는 말에 이슬은 잠이 싹 달아난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16548627810239.jpg“그게 무슨 소리야, 같이 씻긴. 허 참.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짙은 당혹감이 서린 이슬과 달리 이든은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뗐다.

16548627810232.jpg“나 씻겨주면 어차피 너도 다 젖을 텐데, 같이 씻어.”

16548627810239.jpg“내…… 내가 왜 널 씻겨줘? 너 혼자 씻으면 되지.”

이슬이 마른침을 삼키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이든은 그 간극을 좁혔다.

16548627810232.jpg“약속했잖아, 내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힐 거라며.”

16548627810239.jpg“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지금까지 샤워는 혼자 잘했잖아. 세수나 면도는 도와줄게.”

16548627810232.jpg“계약할 때 이야기한 거랑 너무 다르지 않나?”

옅게 떨리던 이슬의 두 눈동자는 이윽고 평온함을 되찾았다. 턱을 높게 치켜드는 것으로 보아 아무래도 모르쇠로 일관할 작정인 듯했다.

16548627810239.jpg“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고, 난 모르겠는데?”

이슬이 뻔뻔하게 나올 줄 미리 알았다는 듯이 그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주억거렸다.

16548627810232.jpg“결국, 이렇게 나오시겠다는 건가? 이런 방법까지 쓰지 않으려 했는데.”

이슬은 엄습하는 불안감에 시선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16548627810239.jpg‘나 단이슬은 정이든이 반깁스를 풀 때까지 정이든이 손에 물 한 방울도 묻히지 않게 모든 것을 대신 해주겠습니다.’

휴대폰에서 녹음파일이 재생되었지만, 이슬은 결코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았다.

16548627810239.jpg“여기에 내가 샤워해주겠다는 말은 없잖아.”

이든은 웃음을 참느라 고개를 비스듬히 떨구었다. 그 모습만으로 이 게임의 승자가 이든이라는 것이 명확해졌지만, 이슬은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았다. 아무리 10년을 연애했기에 볼꼴 못 볼 꼴을 다 본 사이라지만. 함께 샤워하는 상황은 이슬이 감당하기엔 너무나 하드코어였기 때문이었다.

16548627810232.jpg‘나, 정이든은 손에 물을 묻히는 상황이 올 때마다, 단이슬이 모든 것을 대신해준다는 조건으로 손에 물을 묻히지 않겠습니다.’

휴대폰 너머로 흘러나오는 이든의 음성에 이슬은 허망한 얼굴로 이든을 응시했다.

16548627810239.jpg“너, 너 설마 여기까지 내다보고 녹음한 거였어?”

그렇지 않고야 빠져나갈 구멍 하나 없이 철저히 자신을 옭매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든은 휴대폰을 소중히 재킷 안주머니에 넣으며 한 걸음 또 한 걸음 이슬을 향해 다가갔다. 어느새 그녀에게 닿아 두 팔로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감싼 그는 얄궂게 웃었다.

16548627810232.jpg“그러게 내가 뭐라고 그랬어. 계약할 때 독소 조항은 없는지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고 했지?”

이슬의 시선이 소파에 놓인 이든의 슈트로 향하자, 이든은 넥타이를 풀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16548627810232.jpg“설마 내가 이 귀한 음성 파일을 백업도 안 해 놨을까.”

이슬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원망의 눈초리로 이든을 쏘아보았다. 완벽한 그가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는 것은 당연했다. 시계를 풀러 슈트 재킷 위에 툭- 내려놓은 그는 얄궂게 입술을 늘렸다.

16548627810232.jpg“자, 이제 계약을 이행하러 가 보실까요?”

16548627810239.jpg“꺄아-.”

한순간이었다. 몸이 공중에 붕 뜨며 그에게 안기게 된 것은.

16548627810239.jpg“아, 잠깐만! 잠깐만! 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단 말이야.”

16548627810232.jpg“괜찮아, 넌 실전에 강하잖아.”

그렇다, 이슬은 실전에 강했다. 욕실에 들어선 이든이 자연스레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자, 그녀는 황급히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분명 꽁꽁 가렸던 눈은 그가 셔츠를 온전히 벗을 무렵엔 가리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싶을 만큼 손가락 틈이 벌어져 문제였다. 이슬은 강한 자성에 이끌리는 자석처럼 이든에게 안겼다.

16548627810239.jpg“정이든, 여기까지만 하자. 이번엔 내가 못 참을 것 같아.”

이든은 이슬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며 매혹적인 음성으로 말했다.

16548627810232.jpg“못 참겠으면 선을 넘는 것도 방법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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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나긋한 음성이 촉매가 되었던 것일까, 어느새 눈동자가 검게 짙어진 이슬은 두 팔로 그의 목을 감싸고 입을 맞췄다. 부드럽게 이슬의 입술을 탐닉하던 이든은 어느새 모든 것을 집어삼킬 기세로 휘젓고 다녔다. 이슬은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고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탓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뜨거운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이슬이 고개를 살짝 뒤로 빼자, 이든은 지그시 이슬을 눈에 담으며 말했다.

16548627810232.jpg“이슬아.”

16548627810239.jpg“…….”

16548627810232.jpg“살면서 먼 훗날 네가 내 손을 다시 잡게 된 걸 후회하지 않도록 잘할게.”

이슬은 모든 것이 꿈이 아닐까, 그의 온기를 느끼려 재빨리 손을 뻗어 그의 뺨을 그러쥐었다.

16548627810232.jpg“너무 행복해서 불안해.”

16548627810239.jpg“불안할 게 뭐가 있어.”

16548627810232.jpg“다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떠나지 마.”

이든은 자신의 뺨을 감싼 이슬의 손을 포개며 고개를 끄덕였다.

16548627810239.jpg“걱정 마. 네가 놓으라 해도 안 놓아줄 거니까.”

  * * * 끼익-. 귓가를 찌르는 타이어 마찰음과 함께 갓길에 거칠게 차를 세운 윤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거친 숨을 쉬며 주변을 살피던 그는 보도블록에 걸터앉아 몸을 동그랗게 말아 웅크린 채 떨고 있는 예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예나를 발견하자마자 먹먹했던 가슴은 반파된 예나의 차를 발견하고 충격에 미간이 일그러졌다. 단번에 그녀에게 닿아 무릎을 굽혀 눈높이를 맞췄다.

16548627893834.jpg“어디 봐, 다친 데는 없어?”

두 눈 가득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예나는 윤의 음성에 고개를 들자마자 왈칵 눈물이 터져나왔다. 목이 메어 간신히 고개만 끄덕이는 예나를 말없이 와락 품 안에 끌어안았다.

16548627893838.jpg“미안해. 너 약속 있는 거 아는데, 생각나는 사람이 너밖에 없었어.”

16548627893834.jpg“무슨 소리야 당연한 거지, 잘 불렀어.”

고저 없이 평온한 음성이었지만 윤은 울음을 꾹 참는 듯 두 뺨이 경직되어 있었다. * * * 예나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고 그녀의 집으로 들어선 윤은 자연스레 주방으로 들어섰다. 얼마 후, 머그잔에 따뜻한 차를 담아와 예나 곁에 앉아서도 그녀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16548627893834.jpg“안 넘어가더라도 따뜻할 때 조금이라도 마셔봐.”

예나는 두 손으로 머그잔을 감싸며 미약하게 떨리는 손을 감추려 했지만, 그 찰나의 순간을 그가 놓칠 리 없었다. 윤이 자신의 손을 따스히 감싸자, 예나는 애써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16548627893838.jpg“나 이제 괜찮으니까 가, 윤아.”

16548627893834.jpg“가긴 어딜 가, 너 잠들 때까지 옆에 있을 거야.”

그의 고집에 예나는 하는 수 없이 윤의 손에 이끌려 침실로 향했다. 자신을 아이 다루듯 대해주는 그를 보며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16548627893838.jpg‘만에 하나 네 곁에 좋은 사람이 생긴다면 그땐 네게 연락하면 안 되는 거겠지?’

나보다 애인이 우선인 건 당연한 일이지만, 상상만으로 심장이 저릿했다. 내 일상에 켜켜이 스며든 널 지워낼 수 있을까? 예나의 두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리자, 윤은 예나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16548627893834.jpg“아무 생각하지 말고 자.”

죽다 살아난 상황에서 그가 자신의 손을 잡아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사고가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는 것 같았다.

16548627893838.jpg“왜 안 물어봐?”

16548627893834.jpg“뭘?”

16548627893838.jpg“어쩌다 사고 났는지.”

16548627893834.jpg“그게 뭐가 중요해, 네가 무사한 게 중요하지. 내일 출근하기 전에 병원부터 가자. 네가 괜찮다고 해도 병원부터 데리고 갔어야 했는데.”

윤의 얼굴에 근심으로 가득 들어차자, 예나는 그를 다독이려는 듯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16548627893838.jpg“정말 괜찮대도, 나 평생 쓸 운을 오늘 다 썼다니까. 도시락 픽업해서 오는데 차랑 서너 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트럭이 주차장을 덮친 거 있지. 차 안에 있지 않길 다행이지 차 안에 있기라도 했으면…….”

윤은 상상만으로 끔찍한지 미간을 구겼다.

16548627893834.jpg“생각하지마, 또 악몽 꿀 일 있어? 좋은 생각해, 무슨 얘길 할까?”

16548627893838.jpg“군대 동기는 잘 만났어?”

예나의 물음에 두 눈을 끔벅이던 윤은 그제야 재훈에게 말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게 떠올라 나지막이 탄식했다.

16548627893838.jpg“뭐야? 설마, 친구 두고 나한테 온 거야?”

16548627893834.jpg“몰라. 알아서 갔겠지 뭐.”

예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16548627893838.jpg“내일 미안하다고 전화 해줘, 보니까 사람 참 좋아 보이던데.”

16548627893834.jpg“사람 보는 눈 없는 건 알아줘야 해, 걔가 어디가 괜찮냐?”

16548627893838.jpg“내 눈엔 착해 보이던데.”

16548627893834.jpg“그러고 보니까 너 지금까지 만났던 얘들 보면 하나같이 네가 다 아까웠어.”

16548627893838.jpg“그랬나?”

  . . . 예나가 잠들 때까지 곁에 있기로 했지만, 그녀가 잠든 후에도 윤은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처음엔 그녀가 안정을 찾길 바라는 마음에 잡은 손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온기가 제게 안정을 주는 것만 같아 잡은 손을 놓을 수 없었다. * * * 다음 날 아침. 이든은 매서운 눈빛으로 이슬과 대립하고 있었다. 이슬은 눈동자만 굴리며 이든의 눈치를 살피다 이내 쪼르르 다가가 그의 품에 안겼다.

16548627810239.jpg“아니, 아침부터 왜 그렇게 무섭게 볼까?”

16548627810232.jpg“카페 양반이랑 콜라보하는게 그렇게 좋아? 아주 기다렸다는 듯이 미팅 약속을 잡네?”

16548627810239.jpg“함께 작업하면서 미팅은 당연하지, 왜 그래 아마추어같이?”

16548627810232.jpg“미팅은 회사에서 하면 되는데 그 녀석 작업실에서 하겠다니까 그렇지 그것도 단둘이!”

이슬은 이든이 왜 이토록 쌍심지를 켜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윽고 미소를 머금었다.

16548627810239.jpg“설마, 정이든. 지금 질투하는 거야?”

16548627810232.jpg“질…… 질투는 무슨, 내가 그걸 왜 하는데?”

16548627810239.jpg“아닌데, 질투 맞는 것 같은데.”

이든은 할 말을 잃은 듯 입을 꾹 닫고 시선을 외면했다. 세상 어느 남자가 제 여자에게 흑심을 가득 품은 남자와 한 공간에 있는 것을 두고만 볼 수 있을까.

16548627810239.jpg“미팅만 금방 마치고 들어갈게. 점심 같이 먹자.”

이든은 눈매를 느슨하게 풀며 못 이긴 척 이슬을 감싸 안았다.

16548627810232.jpg“그래, 메뉴 고민해볼게.”

이든은 언제 토라졌었냐는 듯 미소를 머금고 힘껏 이슬을 안았다. * * * 기나긴 회의를 마치자마자 이든은 예나의 앞을 막아섰다.

16548627810232.jpg“어제 사고 났었다며, 괜찮아?”

예나는 헛웃음을 토하며 자신의 눈치를 슬쩍 보고 회의실을 나서는 윤을 바라보았다.

16548627893838.jpg“아, 강윤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라니까 그러네.”

이든은 미간을 구기며 예나의 이마에 꿀밤을 주었다.

16548627810232.jpg“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알아야 하는 거 아니냐?”

16548627893838.jpg“너무 말짱해서 민망해서 그래. 차 안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16548627810232.jpg“그럼 다행이지 민망할 건 또 뭐 있어. 컨디션 안 좋으면 오늘 이만 들어가 봐.”

16548627893838.jpg“조퇴시켜줄 거면 회의 전에 말하지 회의 다 끝나고 말하는 건 뭐야?”

이든은 픽 웃음을 터트리며 안도의 숨을 뱉었다.

16548627810232.jpg“까불까불하는 것 보니까 괜찮은 모양이네. 혹시 컨디션 안 좋으면 언제라도 퇴근하고.”

예나의 어깨를 다독이고 회의실을 나온 이든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휴대폰을 확인하며 집무실로 들어섰다. 회사로 복귀하겠다는 이슬의 문자에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16548627810232.jpg“점심으로 뭐가 좋을까.”

오늘도 어김없이 이슬에게 맛있는 것을 먹여주고 싶은 마음에 빠르게 맛집 검색을 하던 때였다. 똑똑-. 의자에 기대어 앉아 있던 이든은 노크 소리에 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작게 열린 문틈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윤은 짙은 난색이 스친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16548627893834.jpg“저기, 정 대표야…….”

16548627810232.jpg“왜? 무슨 일인데 그래?”

16548627893834.jpg“그게…….”

이윽고 낯익은 얼굴이 집무실로 들어서자, 이든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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