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4. 전부이자 세상인 사람. (63/130)


64. 전부이자 세상인 사람.
2022.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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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요리는 옥돔입니다. 부드럽게 익힌 옥돔과 밑에 깔린 멸치 베이스로 만든 소스를 푹 찍어 드시는 걸 추천해 드립니다.”

직원이 안내를 마치고 자리를 비우자 예나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기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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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 이슬이 네 덕분에 미슐랭 3 스타도 오고, 고마워!”

시무룩한 얼굴로 음식을 바라보던 이슬은 애써 입매를 말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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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긴 내가 더 고맙지, 일탈을 제대로 시켜주신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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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클럽 가지고 일탈은 무슨. 밥 먹고 쇼핑몰 가서 클럽 의상으로 싹 바꿔입자!”

예나는 조심스레 옥돔을 커트러리로 썰어 한 입 맛보더니 눈매를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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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입에 넣자마자 녹아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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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 맞다니 다행이다. 많이 먹어.”

예나는 슬쩍 이슬의 눈치를 살피더니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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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왜 갑자기 일탈을 꿈꾸실까?”

예나의 물음에 흐릿했던 이슬의 눈동자가 점점 짙어졌다.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커트러리를 내려놓은 이슬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콧방귀까지 뀌며 입을 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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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야, 내가 어디에 내놓길 창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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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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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학교 다닐 때도 내 팬클럽이 있을 정도였고, 뉴욕에 있을 땐 배우 할 생각 없냐고 캐스팅을 셀 수 없이 받았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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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치, 단이슬 한번 보려고 근처에 있는 학교 남학생이 몰려올 정도로 한 미모 하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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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나 단이슬이야. 단이슬인데 왜?”

뭐 이제 와서 밀당이라도 하자는 거야 뭐야.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메울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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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정이든이 길 가다가 너 모른 척이라도 했어?”

대수롭지 않게 툭 던진 예나의 말에 이슬의 눈동자에 지진이 일었다.

이슬이 입을 꾹 다물자, 예나는 픽-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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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네는 10년을 연애했는데도 여전히 풋풋하다, 풋풋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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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다시 만나는 거 이든이가 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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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 자식이 어디 본인 이야기하는 거 봤어? 굳이 이야기 안 해도 다 알겠던데. 게다가 그 반지를 끼고 있는데 모를 리가 있나.”

예나가 턱 끝으로 반지를 가리키자 이슬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민망한지 두 뺨이 붉어지는 이슬을 보며 예나는 입술을 한쪽만 길게 늘어트리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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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걔가 네가 창피해서 그랬겠어? 또 제 딴에 너 위한다고 그랬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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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아는데. 묘하게 기분이 나쁘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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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우대 멀쩡하고 얼굴 반반하고 머리 좋으면 뭐 해, 지가 사랑하는 여자 마음 하나 몰라주는 등신인데.”

예나가 속 시원하게 이든의 흉을 보자, 이슬은 서운한 마음이 누그러지는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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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든 네가 전부이고, 네가 세상인 사람이야. 그러니까 괜한 걱정 하지 마. 너 예전부터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거 꺼렸으니까, 이번에도 그런 생각으로 배려 한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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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야, 사람이 참 간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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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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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도 안 하던 질투를 지금 하는 거 있지, 처음엔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이젠 이든이가 나만 봤으면 좋겠고 세상에 우리가 사랑하는 사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면 좋겠어.”

이슬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예나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으며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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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해봤으니까, 지금이라도 하고 싶은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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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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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이든이 힘들까 봐 투정 한번 제대로 못 부렸잖아.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어도 너 두고 아르바이트 가는 이든이 마음 불편할까 봐 쿨한 척 보내주고, 남들처럼 꽃놀이도 가고 여행도 가고 싶어도 차라리 그 시간에 이든이가 조금이라도 눈 붙이길 바랐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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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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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꾹꾹 눌러왔던 마음이 한순간에 봇물 터지듯 터져 나온 거 아닐까? 이젠 마음껏 투정 부려도 될 만큼 이든이가 안정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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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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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거 있으면 다 해달라고 해, 이젠 참지 않아도 돼 이슬아.”

이슬은 고개를 주억이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와 해야 할 것들이 하나둘 늘어난다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몽글몽글해졌다.

Drrrrr.

테이블 위에 놓은 휴대폰이 진동을 일자, 이슬의 시선이 자연스레 휴대폰으로 향했다.

서운한 마음에 이든에게 걸려오는 전화를 족족 거절했는데, 이번에도 받지 않는다면 마음이 무거울 것만 같아 휴대폰으로 손을 옮기려 했다.

이슬보다 반 박자 빨리 휴대폰을 집어 든 예나는 얄궂게 입술을 늘리며 이슬의 휴대폰 전원을 꺼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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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선생님. 오늘 제대로 된 일탈 예약하셨잖아요. 이 자식은 조금 더 속 타게 내버려 둡시다. 하여간 여자 마음을 눈곱만큼도 모르는 녀석들은 아주 그냥 속이 시꺼멓게 타봐야 해.”

이슬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윽고 예나의 말에 동감하듯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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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수육에 짬뽕 국물 부어버려라.”

이슬의 귀여운 저주에 황당한 표정을 짓던 예나는 이윽고 피식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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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그걸 저주라고 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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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나 더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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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해봐! 신박하니 괜찮은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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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넋 놓고 컵라면에 물 붓다가 찬물 부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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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슬에게 전화를 걸던 이든은 고개를 떨군 채 묵직한 숨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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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님의 전원이 꺼져 있어 소리샘으로…….’

앞에 몇 번은 통화음이 연결되더니 이젠 전원이 꺼져 있다는 안내 메시지가 들리자 거칠게 넥타이를 풀어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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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피 말리게 하는 것도 아니고, 어딜 가면 간다, 정도는 말해줘야지.”

사납게 눈매를 좁히던 그는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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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지, 이슬이가 이유 없이 이럴 사람이 아니지. 정이든 생각해내야 해. 너 뭐 잘못했어? 대체 뭘 잘못한 거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며 고뇌하던 이든은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아픈데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윤을 매서운 눈빛으로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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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안 가냐?”

처음엔 노트북을 가지고 와 남은 일을 한다던 윤은 아예 소파에 누워 팔로 눈을 가린 채 연신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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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하나뿐인 사촌 동생이 연락이 안 되는데 걱정도 안 돼?”

이든은 가관이라며 한심한 얼굴로 윤을 빤히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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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지금 정예나가 걱정이야? 정예나가 이슬이랑 함께 있는데 휴대폰 전원까지 꺼졌어, 휴대폰 전원을 누가 껐을까?”

윤은 벌떡 일어나 이든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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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가 나쁜 짓 한 것도 아니고, 그깟 휴대폰 전원 하나 대신 끈 거 가지고 유난이야 유난은! 그리고 설사 예나가 전원을 껐다고 해도 이슬이도 네 전화 받기 싫으니까 전원을 안 켜는 거지!”

이든은 꽤 상처를 받은 듯 처연한 얼굴로 휴대폰을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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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정말로 내 전화 받기 싫은 거야?’

그간 한 번도 이슬이는 연락이 안 되었던 적이 없었다.

무엇을 서운해한다거나, 화를 내는 일도 없었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까지 행동한다면 당연히 그런 이유가 있을 게 분명한데, 이든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누군가 정답을 알려줬으면 좋겠다.

잠시 집무실을 나갔던 윤은 배달 온 음식을 들고 돌아오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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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 먹고 하자, 기다려 보면 연락이 오든 어디에 있든 알게 되겠지.”

좀비가 아닐까 싶을 만큼 넋이 나간 윤은 허공을 응시하며 탕수육에 소스를 부었다.

그 광경을 멀거니 응시하던 이든은 입매를 비틀어 냉소를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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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 네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탕수육은 바삭한 맛으로 먹는 거라면서 찍먹 고집할 땐 언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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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 예나가 찍먹을 좋아하니까 그런 거지. 사실 난 부먹을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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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슬이도 부먹을 좋아…….”

젓가락을 들던 이든은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윤을 빤히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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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지금 부은 거 짬뽕이야.”

뒤늦게 탕수육으로 시선을 준 윤은 영혼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얼굴로 낮게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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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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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지금 아? 가 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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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먹어, 사천 탕수육이라고 생각하고.”

이든은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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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부은 게 내 짬뽕이니까 문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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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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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예나한테 무슨 잘못을 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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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에 예나랑 폭립 먹고 있는데 머리칼이 흘러내리는 게 불편해 보이더라고.”

이든은 꽤 흥미롭다는 듯이 매끈한 턱을 쓰다듬으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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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는 이미 두 손으로 폭립을 잡고 있어서 내가 대신 머리를 묶어주겠다고 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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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너무 능숙하게 묶어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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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능숙하게 어떻게 묶냐, 그냥 예나가 시키는 대로 묶으면서 그랬지, 네 덕분에 처음으로 여자 머리를 다 묶는다, 나중에 여자친구 생기면 꼭 한번 해 줘봐야겠다고.”

이든은 끔찍하다는 듯 인상을 구기며 윤을 빤히 응시했다.

그 말이 우린 이성 사이로 발전할 수 없다고 선을 긋는 말이라는 것을 윤은 여전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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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걔가 입가에 소스를 묻히고 먹길래. 나니까 매번 이렇게 닦아주는 거지 남자들 이런 거 싫어한다고 말했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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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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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말이 없었어. 나 뭐 잘못한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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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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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나 뭘 잘못한 건데?”

보여도 너무 잘 보였다. 남의 연애는 이토록 잘 보이건만, 왜 자신의 연애는 까마득하게 보이지 않는 것일까.

윤이 두 눈을 반짝이며 묻자, 이든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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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스스로 깨달아야지.”

터벅터벅 탕비실로 향한 그는 컵라면에 물을 부으며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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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뭘 잘못했을까, 식당에서 마주친 그 여자와 대화를 나눈 게 문제였나? 그것도 아니면…….”

라면 뚜껑을 닫으려던 이든은 사납게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어쩐지 뜨겁지가 않더니.

라면에 뜨거운 물 대신 찬물을 부어버린 이든은 끙 앓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사람이 이렇게 고장 날 수 있는 걸까.

이든은 입술을 가로로 길게 늘어트리며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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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든, 돌아도 단단히 돌았네.”

그저 이슬이가 곁에 없을 뿐인데,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삐거덕거리고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실수를 저지르고 있었다.

그는 허공에 기나긴 숨을 흩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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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다.”

지금껏 한 공간에 같이 있었지만, 만지고 싶고 안고 싶고,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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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다, 보고 싶어 미치겠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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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든아! 정이든아!”

회사가 떠나가도록 소리를 지르며 요란법석을 떨던 윤은 이든에게 달려와 휴대폰을 바짝 들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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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았어! 예나 어딨는지 찾았어!”

이든의 짙은 눈썹이 들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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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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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슐랭 3 스타 파인다이닝.”

이든이 바람을 일으키며 슝- 하고 집무실로 들어서서 나갈 채비를 하자, 윤은 문 앞에 서서 두 눈을 끔벅이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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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인별에 한 시간 전에 올라와서 지금은 거기에 없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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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그럼 지금은 어딨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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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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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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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 럽.”

이든은 눈썹을 긁적이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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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끄럽고 사람 많은 그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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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그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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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가 없을 텐데, 이슬이는 시끄럽고 사람 많은 곳 딱 질색한단 말이야. 망할 정예나가 강제로 끌고 간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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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 신났던데, 절대로 강제로 끌려간 얼굴이 아니던데.”

윤이 느릿하게 눈썹을 꿈틀거리며 얄궂게 입술을 늘리자, 이든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는 단번에 윤에게 다가가 휴대폰을 빼앗아 들었다.

휴대폰 화면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이슬을 발견한 이든은 나지막이 앓는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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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와중에 이렇게 이쁠 건 뭐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든은 두 뺨이 단단하게 굳은 채 낮게 깔린 음성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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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하고 있어, 가자.”

존재 자체만으로 자신의 심장을 속절없이 녹아내리게 만드는 내 여자에게 숱하게 다가올 남자들을 처단하러 가야 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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