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언제까지 여유 부리는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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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언제까지 여유 부리는지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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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언제까지 여유 부리는지 볼까?
2022.06.13.
집요하게 이슬을 파고들고 탐닉하던 이든은 그녀가 더는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듯 잠자리에 들고서야 멈추었다.
너무 그녀를 몰아붙였나 싶다가도 예쁘게 곤히 잠든 그녀를 보며 입술을 길게 늘어트렸다.

“그러게 적당히 예뻤으면 됐잖아.”
왜 그렇게 예뻐서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까.
곤히 잠든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에 그녀의 보드라운 살결과 체온이 느껴지자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피가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따스한 체온에 온몸이 나른해져 이슬을 담았던 두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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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이 잠에서 깨어난 것은 노을이 붉게 물들 즈음이었다.
눈꺼풀을 말아 올리자마자 시야 가득 들어찬 것이 곤히 잠든 이든의 모습이라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가 몇 번이나 휘몰아치듯 몰아붙인 터라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지만, 손을 뻗어 짙고 곧은 그의 눈썹을 손끝으로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평생 생색내, 네가 내 인생에 나타나 준 것만으로도 넌 한 사람을 살린 거야. 충분히 생색낼 자격 있어.’
낮에 그윽한 눈빛으로 이야기하던 이든의 음성이 다시금 떠올라 두 뺨이 붉게 물들었다.

“잘생기거나, 멋지거나, 매혹적이거나 한 가지만 하지, 뭘 이렇게 다 잘해서 정신없게 만드나 몰라.”
한참을 멍한 얼굴로 이든을 바라보던 이슬은 픽- 웃음을 터트렸다.
언제나 옳기만 한 그가 오늘은 틀렸다.
성한 곳 하나 없이 온통 가시뿐인 내게 기어이 손을 내밀어 준 네가 있어서.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따뜻한지 비로소 알게 되었으니 내가 널 살린 것이 아니라.
네가 날 살린 것이었다.
우리의 관계를 두고 고마워해야 할 사람은 나였다.

“사랑해 이든아.”
곤히 잠든 그의 단잠을 방해하기라도 할까 봐 들릴 듯 말 듯 숨소리와 같은 음성으로 사랑을 말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핑- 돌아 시야가 흐릿해졌다.
행복해서.
다시 네 곁에 머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해서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다 말고 두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3년 전, 우리 회사를 기만했던 그 파렴치한 인간이 당신 아버지더라?’

‘여차하면 정이든도 함께 무너트릴까 봐.’

‘무릎 꿇고 빌어봐, 혹시 알아? 내가 마음 약해져서 정이든 만큼은 건들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독기가 오를 때로 오른 눈빛으로 자신을 응시하며 경고하던 재이의 말이 그녀를 두려움 속으로 몰아넣었다.
잉크가 종이에 떨어지기 무섭게 번져나가는 것처럼 두려움 또한 빠르게 번져 그녀를 옭아맸다.
머리가 아픈 듯 눈매를 좁히던 이슬은 이든의 손가락 틈 사이로 제 손가락을 끼워 넣으며 불안감을 상쇄시키려 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든이 뒤척이더니 이윽고 옆으로 돌아누우면서 이슬의 허리를 제 몸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엄마야!”
흠칫 놀란 이슬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돌렸다.
언제부터 깨어 있었던 걸까, 그가 두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일어났어?”

“자려고 하는데 단이슬이 날 가만히 둬야지.”

“내가 뭘 했다고?”

“그렇게 내가 좋아? 날 한시도 가만두지 않던데?”
아무래도 문득 스며든 불안감을 잠재우려 그의 손을 만지작거린 것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이슬은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가슴에 파묻히듯 안겼다.

“그럼, 좋아하다 못해 가슴 벅찰 만큼 사랑하지. 그런 너는 이제 날 향한 마음이 시들시들 한가 보네?”
이슬이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이든의 품을 벗어나려 하자, 이든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내 마음 아까 충분히 보여줬던 것 같은데, 아니었어?”

“글쎄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이슬이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든은 흘러내린 앞머리가 거추장스러운 듯, 한 손으로 쓸어넘기며 여유롭게 웃었다.
그녀의 허세는 언제나 귀여웠지만, 이런 허세라면 언제나 열렬하게 대환영이었다.

“단이슬, 감당할 수 있겠어?”

“너야말로 감당할 수 있겠어?”
어이쿠, 참나. 오늘따라 이리 기특할 수가 없다.
이든의 입매가 기분 좋게 호선을 그리며 그녀 위로 군림하려던 순간.
이든의 얼굴에 짙은 당혹감이 스쳤다.
눈 깜박할 아주 찰나의 순간, 이슬이 자신의 가슴을 밀치며 제 위로 군림한 것이 아닌가.
그의 입가에 공연히 미소가 스며들었다.
이든은 두 손을 베게 삼아 베고 이슬을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는 눈빛으로 응시했다.

“단이슬 언제 이렇게 컸지?”
이슬은 여유로운 이든의 태도가 못마땅한 듯 입가에 조롱기가 스며들었다.

“정이든, 언제까지 이렇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지 볼까?”
요염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멈출 것만 같은데 그에 그치지 않고 농염하게 퍼붓는 입맞춤에 정신이 아찔했다.
부드럽게 제 얼굴을 감싼 손길과 다르게 그녀의 입맞춤은 얼어붙은 것을 단번에 녹일 만큼 뜨거웠다.
그녀의 입술이 닿는 곳마다 뜨겁다 못해 데이고 타들어 갈 것만 같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흐읍-.
얄밉게 느껴질 만큼 여유 가득했던 그의 얼굴엔 어느새 여유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자신을 농락하듯 애를 태우는 이슬을 두고 그는 간절하고 눅눅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젠, 그만 애태우고 날 가져.”

그의 짙은 두 눈동자가 깊어지자, 이슬은 그의 단단한 가슴을 매만지며 입술을 단번에 집어삼켰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만큼은 아무 생각 없이 그를 사랑하고 싶었다.
등허리를 타고 목덜미까지 올라오는 짜릿한 전율에 숨결은 가빠오고 고개는 절로 뒤로 젖혀져만 갔다.
그가 두 손으로 이슬의 허리를 감싸며 상체를 일으키자 이슬은 그의 목덜미를 팔로 감싼 채 그의 어깨에 이마를 파묻었다.
그에게 깊게 새겨지고 싶었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낙인처럼.
* * *
종일 언론매체에서 ‘도로시’를 두고 보도를 하는 터라 연희는 머리가 아팠다.
이든을 압박하고 흔들어야 이슬이 이별을 선택할 텐데, 위기를 맞이하기는커녕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가는 상황에 부아가 치밀었다.
나서서 이든과 이슬 사이를 흔들어 놓고 싶어도 혹시 또 일이 잘못될까 싶어 섣부르게 움직일 수 조차 없었다.
지난번 이든을 검찰 조사를 받게 한 이후로 지한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미묘하게 달라진 것 같았다.
감정적으로 행동하다간 지한에게 자신의 민낯이 들킬까 두려워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뒤탈 없이 깔끔하게 마무리 질 방법이 있어야 하는데.
추후에 일이 잘못되더라도 자신은 쏙 빠져나갈 방법을 모색하던 때였다.
똑똑-.
노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그녀의 비서실장인 서 실장이었다.
그는 손에 검정색 서류봉투를 들고 나타났다.

“무슨 일이야?”
잔뜩 예민해진 연희가 날카로운 음성으로 묻자, 그는 서류봉투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정이든 대표가 QL 투자 승인과 배우 최시원의 홍보를 받기 전 MK 그룹 민 회장으로부터 투자 철회 통보를 받았다고 합니다.”
연희는 관심 없다는 듯 봉투를 손끝으로 밀며 시큰둥한 모습을 보였다.

“운이 좋은 건가? 민 회장이라면 따르는 투자자들도 많아서 함께 동조하는 세력도 있었을 텐데, 타이밍 좋게 QL 투자는 물론 배우 때문에 세계적으로 홍보는 물론 투자요청까지…….”
하늘이 그를 돕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이렇게 타이밍이 절묘할 수가 없었다.

“저…….”
서 실장이 선뜻 입을 떼길 망설이자, 연희의 시선이 서 실장에게 내려앉았다.

“언뜻 들리는 말로는 민 회장이 정이든 대표에게 거래를 제안했고, 정 대표가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아 보복성으로 민 회장이 투자를 철회했다고 합니다.”
연희는 구미가 당기는 듯 눈썹을 느릿하게 꿈틀거리며 물었다.

“거래? 무슨 거래였길래, 제까짓 게 시건방지게 거래를 받아들이지 않아?”

“당시 자리에 있던 레스토랑 직원에게 얼핏 들은 거라 정보가 확실한지는 모르겠지만 민 회장이 외동딸인 민재이 양과 정 대표의 결혼을 종용했다고 합니다.”
이야기의 전개가 흥미로운지 연희는 입매를 비틀어 비릿한 숨을 흘렸다.

“민재이 양이 정이든 대표를 마음에 둔 지 꽤 오래되었다는 정보도 있고요.”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여자 꾀어내는 재주는 대단한 모양이네.”
연희는 기분 좋게 입매에 호선을 그리며 서류봉투 안에서 자료를 꺼내었다.
재이의 신상명세서와 그간 이든을 조사하며 종종 목격된 재이와 함께 있는 사진이 한 뭉치 나왔다.
사진 속에서 재이의 시선은 언제나 이든을 향해 있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재이의 일방적인 감정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길은 있다더니, 죽으란 법은 없는 모양이네.”
재이의 눈에서 야망을 발견한 연희는 일이 꽤 순조롭게 흘러갈 것만 같아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주 잘 길들이고 이용하면 좋은 말이 될 수 있겠어.”
* * *
지한은 늦은 시각까지 퇴근하지 않고 집무실을 지켰다.
상념에 젖은 얼굴로 창가에 서서 어둠을 수 놓는 야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님.”
비서의 음성에 상념에서 벗어난 지한은 멈칫하며 돌아섰다.

“죄송합니다. 노크를 여러 번 했는데, 기척이 없으셔서…….”

“아, 미안해요. 잠시 생각 좀 하느라, 늦었는데 아직 퇴근 안 했습니까?”

“지난번에 부탁하신 일 보고드리려고요.”
지한은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묵직한 숨을 토했다.
연희가 이슬과 이든의 이별을 종용했다는 사실은 물론 이든을 압박하기 위해 거짓된 검찰 조사를 받게 한 이후로 지한은 은밀하게 연희에게 사람을 붙였었다.
모친을 일찍이 여의고 연희를 친 엄마처럼 따랐었기에 그녀에게 사람을 붙인다는 것이 어렵고 힘든 일이었지만 이슬을 지키기 위해선 불가피한 선택이라 여겼다.
지한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듯 두 손으로 책상을 짚은 채 연달아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어느 정도 마음을 다잡은 그는 메마른 얼굴로 비서를 바라보았다.

“수상한 움직임 있었습니까?”

“아뇨, 갤러리에 출근하셔서 퇴근하실 때까지 오찬을 제외하곤 다른 이와의 접촉은 없었습니다.”
지한은 이마를 긁적이며 자리에 털썩 앉았다.
연희는 치밀하고 꼼꼼한 사람이었으니, 자신이 예의주시하고 있다는 것을 꿰뚫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별다른 움직임 없어도 긴장 늦추지 말고 뒤밟아줘요.”
비서가 집무실을 나선 후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지한은 씁쓸한 듯 기나긴 숨을 토했다.
자신이 잘하고 있는지 불현듯 의문이 스칠 때마다 행복하게 웃는 이슬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연희의 보살핌 아래 30년 가까이 자신은 행복했으니.
이젠 이슬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이 옳은 일이라 생각했다.
지한은 휴대폰을 뚫어지듯 바라보며 공허한 미소를 지었다.

“자식, 연애하느라 바빠서 이 오빠는 안중에도 없나 보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