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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알 수 없는 마음. (85/130)


85. 알 수 없는 마음.
2022.06.24.


재이는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젠 무슨 이유로 제게 전화를 걸었는지 말씀해주시겠어요?”

“최근에 사교모임을 통해 이상한 소문이 돈다죠?”

냉담한 연희의 음성에 재이는 입매를 비틀었다.


“아, 댁의 아드님이 뒤를 봐주는 여자가 있다는 소문이요? 그 일이랑 제가 무슨 연관이 있다고 부르신 건가요?”

당돌한 재이가 귀여운 듯 연희는 픽-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꽤 당돌한 아가씨네, 보통의 사람들은 이쯤 되면 이실직고하길 마련인데.”

“도통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일어나보겠습니다. 제가 항간에 떠도는 풍문이나 이야기하고 있을 만큼 한가롭지 않아서요.”

재이가 핸드백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연희는 지독하리만큼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앉아. 그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퍼트린 사람이 너란 거 알고 부른 거니까.”

“여사님은 어떻게 그 소문이 헛소문이라고 자부하시죠?”

연희는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애초에 네가 목격한 두 사람은 연인 사이 혹은 대가성 만남을 주고 받을만한 사이가 아니니까.”

겨우, 그런 이유 하나로 확신에 가득 차 이야기하는 건가 싶어 재이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드님에 대한 확신이 있으신가 봐요.”

“확신도 확신이지만, 윤지한 단이슬. 두 사람은 남매야.”

여유가 가득했던 재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굳어버렸다.


“지……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을.”

“비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고, 법적으로 남매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가를 주고받는 관계거나, 연인 사이도 아니라는 말이지.”

재이는 너무 놀라 입을 쩍 벌린 채 털썩- 소파에 주저앉았다.


“집안에 호적에 올리지 못할 자식이 있다는 것은 누구나 숨기고 싶고,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허물이니 거짓말이라 생각하진 않겠지?”

재이의 두 눈동자가 불안한 듯 요동치자 연희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스며들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민재이 양한테 허위 소문을 유포나 명예훼손에 대한 책임을 묻지는 않을 테니까.”

재이는 마른침을 삼키며 여전히 불안함이 가득 담긴 눈동자로 연희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아마, 체면도 있으니 잘못된 이야기를 바로잡긴 어려울 테고…….”

연희는 부러 좋은 수가 없을지 상념에 젖은 척 연기하며 힐긋 재이의 반응을 살폈다.


“이 일은 그냥 덮기로 하죠.”

연희의 단순명료한 해결책에 재이는 믿기지 않는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단,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조건으로 말이죠.”

재이는 비릿한 숨을 토하며 시선을 비스듬히 내렸다.


“듣기로는 이슬이를 눈엣가시처럼 여긴다죠?”

“…….”

“하긴, 나라도 그럴 거야. 꽤 오랜 시간을 마음에 담고 있었고, 곁을 지켰는데. 갑자기 나타난 여자가 첫사랑이니 옛사랑이니 하며 눈앞에 나타났으니 얼마나 답답하고 화가 났겠어.”

심장이 발아래로 쿵- 하고 떨어진 것만 같았다.

처음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사랑을 이해해주고 공감해주는 일이.

자신의 사랑이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이야기 해주는 사람 또한 처음이었다.

가슴에 찌르르 전류가 흐르며 눈동자가 옅게 흔들리자, 연희는 자세를 고쳐앉았다.


“재이 씨가 가져요.”

재이가 넋이 나간 듯 멍한 표정을 짓자, 연희는 사납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수단과 방법 가리지 말고 두 사람 떼어내고 재이 씨가 정이든 가지라고.”

“…….”

“그게 내가 말하는 조건이야. 어때, 해볼래요?”

잃을 것이 없는 게임이었다.

고개를 묵직하게 끄덕이자, 연희는 일그러트렸던 얼굴을 펴며 의미심장한 말을 뱉었다.


“정 안 되겠으면 누구도 갖지 못할 만큼 망가트려 놓는 것도 방법이라면 방법이겠지.”

 

 

 
* * *

윤은 출근하자마자 서버 오류를 발견하고 사무실에 틀어박혀 오류를 잡아내느라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지, 다 완벽한데.”

머리를 긁적이며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을 때, 전화벨 소리가 울렸다.

힐긋 발신인을 확인한 윤은 전화를 받고 싶지 않은 듯 묵직한 숨을 토하며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왜.”

무미건조한 음성에 솔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 이 자식이 누나가 전화했는데 왜에? 왜에!

“바쁘니까 용건만 간단히 말해.”

- 너 오늘 엄마 생신인 거 잊지 않았지?

“아…… 맞다.”

- 아 맞다? 이게 정말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요즘, 편집숍 론칭 준비로 정신이 없어서 그랬어. 지난주까지만 해도 알았어.”

사실 몰랐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로부터 한참을 솔의 잔소리에 시달리고 있을 무렵, 노크 소리와 함께 예나가 문틈 사이로 얼굴을 비죽 내밀었다.

그 순간 예나가 이 무한 잔소리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한 줄기의 빛과 같이 느껴졌다.


“어, 회의? 알겠어, 지금 나갈게. 누나 들었지! 나 바쁘니까 끊어.”

재빨리 통화를 마친 윤은 녹아내리듯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엎드렸다.


“아, 정말이지, 예나 너 아니었으면 귀에서 피 나오기 일보 직전이었어.”

예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또 무슨 잘못을 했길래, 언니가 잔뜩 화가 나 있는 거야?”

윤은 억울하다는 듯 자세를 고쳐 앉으며 심통을 부렸다.


“잘못은 무슨, 왜 누나 말이 다 옳다고 생각하는 거야? 우리 누나가 독재적이라곤 생각 안 해봤어?”

예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기다 이윽고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기억하기론 언니는 언제나 정의롭고 옳았는데? 언니가 화났으면 무조건 네 잘못이 확실해.”

“와, 배신감 드네. 난 정이든이랑 너랑 싸우면 무조건 네가 옳다고 할 생각이었…….”

윤은 예나가 책상 위에 툭- 올려놓는 쇼핑백을 보고 말끝을 흐렸다.


“이게 뭐야?”

“오늘, 너희 어머니 생신이잖아. 어제 백화점 갔다가 어머님이 좋아하실 것 같아서 샀어.”

나지막한 탄성과 함께 윤은 머리를 긁적였다.

윤이 부담스러울까, 예나는 소파에 털썩 앉으며 말을 이었다.


“부담가질 것 없어, 우리 박 여사님 화장품 떨어져서 사다가 어머님 생각나서 산 거니까. 게다가 어머니께서 네 반찬 챙겨주시면서 내 몫까지 챙겨주시는데 이 정도는 당연한 거고.”

“고마워, 잘 전달할게.”

“고맙긴 우리 사이에.”

예나가 사무실을 나서고 홀로 남겨진 윤은 한참 텅 빈 시선으로 쇼핑백을 응시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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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 알 수 없는 감정을 쫓던 윤은 가족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 마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생각에 잠긴 채 젓가락으로 쌀알을 골라내던 때.

테이블 아래에서 누군가 힘껏 제 정강이를 차는 바람에 상체가 비스듬히 앞으로 쏠렸다.

윽-.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러나오자 모두의 시선이 제게 쏠렸지만, 윤은 제 앞에 앉은 솔을 죽일 듯 노려볼 뿐이었다.


“처남! 왜 그래? 어디 아파?”

윤은 어색하게 입술을 가로로 길게 늘어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갑자기 발에 쥐가 나서.”

사실을 말하고 싶었지만, 매형은 누나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불쌍한 매형에게 누나의 실체를 고발한다면 누나의 보복이 두려워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강윤, 넌 엄마 선물 뭐 없냐?”

솔의 물음에 윤은 나지막한 숨을 터트리며 오전에 예나가 건넨 쇼핑백을 어머니에게 건넸다.


“어머, 그냥 밥만 먹자니까 무슨 선물이야 선물은.”

명주는 쇼핑백 안을 힐긋 보더니 두 눈이 반짝였다.


“이 화장품 요즘 인기 많다던데 고마워, 잘 쓸게.”

함박웃음을 짓는 명주를 두고 윤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건 예나가 어머니 생신이라고 가져다드리라고 했어요. 제 선물은 여기에 담았고요.”

이윽고 그가 품속에서 두둑한 봉투를 꺼내자 솔은 익히 예상했다는 듯이 콧방귀를 꼈다.


“그래, 잘 받으마. 아들! 예나한테 고맙게 잘 쓰겠다고 전해줘.”

“네.”

“조만간 밥 한번 같이 먹자고 할까? 예나 못 본 지도 꽤 된 것 같은데.”

“불편해할 거에요.”

“그런가?”

명주는 기분이 좋은 듯 콧노래를 부르다가 멈칫했다.


“예나 만나는 사람은 있니? 얘가 싹싹하고 예뻐서 인기 많을 것 같은데, 없으면 엄마가 중간에 다리 좀 놔주고.”

지금껏 멍한 표정을 지을 뿐 별다른 반응이 없던 윤은 눈썹을 긁적이더니 이윽고 표정 관리가 되지 않는 듯 보였다.


“어머니, 다리는 무슨 다리예요.”

“아니, 정말 좋은 사람이 있어서 그렇지. 문화센터 함께 다니는 공 여사님이라고 있는데, 그 집 아들이 치과 의사야 성격 좋지 인물 좋지 사람 좋지. 그런데 공 여사님이 지난번 지후 돌잔치 때 예나를 보고 마음에 들었는지, 나만 보면 예나 소개 좀 해달라고 그러더라고.”

윤은 입안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지 앞에 놓인 물잔을 단번에 비우며 애써 표정 관리를 했다.


“성격도 좋고 인물도 좋고 사람도 좋은데 왜 여태껏 애인이 없겠어요? 그리고 요즘 누가 ‘사’자 들어가는 직업 좋아한다고.”

“그동안 일하느라 바빠서 연애도 제대로 못 했다네, 나이도 4살 차이면 궁합도 안 본다잖니.”

“어머니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이 흥미롭게 전개가 되는 듯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있던 솔이 입을 뗐다.


“왜, 그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야? 예나는 좋은 사람이니까, 충분히 좋은 사람 만나고 소개받을 수 있지.”

솔의 말에 윤은 아무런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예나는 분명 좋은 사람이니,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 또한 당연한 건데.

왜 그 만남을 주선하는 것이 이토록 싫은 건지 알 수 없었다.

윤의 침묵이 길어지자, 명주는 기나긴 한숨을 토해냈다.


“하긴, 내 코가 석 자인데 누굴 중매하겠어. 윤아, 엄마 소원인데 선 한번 보지 않을래?”

평소라면 듣고 싶지 않은 연애와 맞선 이야기였지만, 예나의 맞선 이야기가 쏙 들어간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한숨 돌리던 참이었다.


“그래! 처남, 장모님이 소원이라고 하시는데 한번 나가봐.”

“매형, 매형까지 왜 그러세요.”

“왜, 안 될 게 뭐가 있어. 마음에 둔 사람이라도 있는 거야?”

자신을 놀리듯 얄궂게 입술을 늘리며 말하는 솔을 두고 윤은 묵직한 숨을 토했다.

솔과 윤을 번갈아 바라보던 연석과 명주는 입꼬리를 꿈틀거렸다.


“아들, 네 누나 말이 정말이냐? 마음에 둔 사람이라도 있는 거야?”

솔은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여 테이블에 바짝 붙어 앉아 나지막이 말했다.


“강윤, 엄마랑 아버지가 너 연애 하는 게 그토록 소원이라고 하시는데 선 한번 봐봐. 마음에 둔 사람도 없고 만나는 사람도 없으면 안 될 것도 없잖아.”

윤은 거칠게 눈썹을 문지르며 미간에 주름을 지었다.

솔의 바람대로 선을 보는 건 싫었지만.

따지고 보면 예나를 아주 잠깐 여자로 본 이유가 오랫동안 연애를 쉰 탓일 수도 있었다.

마침 연애의 필요성을 느끼던 참이었으니 새로운 만남을 갖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무엇인가 탐탁지가 않았다.

은연중 시선을 돌리던 윤은 두 눈을 반짝이며 잔뜩 기대에 찬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명주와 연석을 발견하고 말았다.

윤은 질끈 눈을 감았다 뜨며 말했다.


“그럼, 그냥 만나만 볼게요. 너무 기대하지는 마세요.”

“그래! 황 여사님한테 전화 해봐야겠다.”

명주가 신나서 자리에서 일어나자 윤은 쓴웃음을 지으며 창가로 시선을 옮겼다.

무엇이 잘못된 걸까. 솔의 말처럼 마음에 둔 사람도 만나는 사람도 없는데.

새로운 만남이 기대되기는커녕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잊어버린 것 마냥 불안하고 공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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