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 마침표. (89/130)


89. 마침표.
2022.07.08.


지루할 만큼 길 거라고 예상했던 휴가는 쏜살같이 흘러 그 끝이 보였다.

예나는 아쉬운 마음이 가득한 얼굴로 거실 테이블과 주변에 굴러다니는 맥주캔과 과자봉지를 치우기 바빴다.

쉬는 동안 구태여 괜찮아지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가랑비에 옷 젖는 줄 모르는 것처럼 불현듯 스미는 것이었으니.

누군가를 마음속에 묻는 것 또한 불현듯 떨쳐내는 거라 생각했다.

숨 쉬듯 자연스럽게 뜨겁게 불타올랐던 격정의 감정 또한 흐르는 시간에 식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만, 자신의 일방적인 마음이 또다시 비죽 튀어나와 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마음을 다독이는 중이었다.

윤이 선을 본다는 소리에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분노와 원망이 치솟았지만, 그와 닿지 못할 만큼 멀어진 후에야 깨달은 것이 있었다.

나는 윤에게 화를 내거나 서운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좋아한다면서, 제 감정에 앞서 정작 그 사람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었다.

갑작스러운 고백과 입맞춤에 그가 얼마나 당혹스러웠을지 생각은 못 하고 제 감정만 들이밀기 바빴었다.

상대가 원치 않는 감정을 계속해서 들이미는 것은 엄연한 폭력이었다.

나는 그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그렇기에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쓰라린 실연 앞에서 아파하고 슬퍼할 자격도 없었다.

예나는 두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온라인 편집숍 론칭 끝나는 대로 사직서를 내야 할 판이네.”

아무리 아무것도 아니었던 일로 덮어두자고 말했어도, 정말 아무 일 없었던 사이가 되지는 못하기에.

그가 불편해하기 전에 자신이 회사를 그만두는 게 정답이라고 생각했다.

이 모든 일의 시발점이 자신이었던 것처럼, 말끔히 정리하고 마침표를 찍는 것 또한 자신의 몫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듯 예나는 깊게 숨을 내쉬며 어지럽혀진 거실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Drrrrr-.

테이블에 수북이 쌓여 있던 맥주캔을 말끔히 치웠을 무렵.

전화벨 소리에 전화를 받으면서도 쉬지 않고 청소를 했다.


“응, 아버지. 무슨 일로 전화하셨어?”

- 저녁에 시간 좀 내봐.

“시간은 왜?”

- 내 고등학교 동창 현태 알지? 그 녀석이 이번에 레스토랑 하나를 냈는데, 무료 식사권이 오늘까지잖아. 그래서 네 엄마랑 같이 저녁이나 먹자.

어깨로 휴대폰을 고정한 채 테이블을 닦던 예나는 전화를 고쳐 받으며 물었다.


“현태 삼촌, 레스토랑 오픈했어? 작년에 횟집 개업했다고 하지 않았어?”

- 흠흠!

우식이 연신 헛기침을 하자, 예나 이제야 알겠다는 듯 얕은 탄식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아, 횟집 안 돼서 접고 레스토랑 오픈한 모양이구나.”

- 어, 어! 그래, 맞아!

“나 바빠, 아버지랑 엄마랑 오붓하게 데이트하셔.”

- 네 엄마가 너 같이 안 가면 안 간다고 하니까 그러지, 6시까지 늦지 말고 청담 태리 레스토랑으로 와.

“그러지 말고, 내 차로 같이…….”

- 엄마랑은 잠깐 들를 곳이 있어서 너 먼저 가 있어. 그리고 이 아비 체면이 있으니 사람 몰골로 나와.

무엇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자신의 할 말만 마치고 뚝 끊겨버린 전화에 예나는 한숨이 섞인 미소를 툭 뱉었다.


“사람 몰골로 나오라는 말은 옷이며, 머리며 화장에 힘 좀 쓰라는 말인데.”

평소라면 우식이 왜 이토록 외모에 힘을 쓰라는 것인지 이해하지도 못할뿐더러, 그 말을 따를 의향도 없었지만.

오늘 마주할 상대가 아버지의 동창 ‘지현태’라고 하면 말은 달라진다.

그가 누구였던가, 아버지와 40년이 넘는 시간 라이벌로 살아온 인물이자, 자신의 모친인 선영을 두고 치열하게 싸웠던 연적이 아니었던가.

전 남자친구의 결혼식을 가는 기분으로, 전장을 누비는 장수의 마음가짐으로 필사적으로 꾸며야 한다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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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꾸민 예나는 시간에 맞춰 아버지가 말한 레스토랑으로 들어섰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우식에게 전화를 걸려던 찰나, 직원이 다가와 물었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자리 안내해 드리기 전에 예약하셨을까요?”

“정우식이라는 이름으로 예약이 있을까요?”

“아, 네! 바로 자리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직원을 따라 자리로 향하던 예나는 점점 자리와 가까워질수록 눈매가 좁아졌다.

직원이 안내한 자리 끝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닌 낯익은 남자가 자리하고 있었다.

긴장한 듯 헛기침을 하며 연신 물잔을 비우던 남자는 뒤늦게 예나를 발견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지난번에 한 번 뵌 적 있는데.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강현진이라고 합니다.”

예나는 짙은 당혹감이 서린 얼굴로 얼떨결에 그를 따라 고개 숙여 인사를 했지만, 머릿속이 복잡했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정리하려 했지만.

머릿속이 멍해져 아무 말도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멍한 얼굴로 현진을 응시하자, 그는 따스한 미소를 머금으며 자리를 권했다.


“놀라신 걸 보니, 교장 선생님께서 아무런 언질조차 없으셨나 봐요.”

“네, 죄송한데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예나는 가까스로 이성의 끈을 붙잡고 화장실로 걸음을 옮기며 우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나긴 통화연결음 끝에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예나는 잡고 있던 이성의 끈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아버지!”

- 아아! 귀청 떨어지겠네,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 뭐 하긴, 결혼까진 바라지 않으니 연애라도 하라는 거지.

“어떻게 이런 일을 저랑 상의도 없이 진행하세요.”

- 말했으면, 네가 순순히 자리에 나갔겠어?

예나는 이마를 짚으며 가슴이 크게 오르내릴 만큼 심호흡을 했다.


- 예나야.

나긋한 우식의 음성에 예나는 질끈 감았던 눈꺼풀을 말아 올렸다.


- 나한텐 네가 보물이야.

갑자기 뜬금없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저의를 알 수 없어 황당해할 무렵 우식은 말을 이었다.


- 그래서 이 아빤 네가 상처받는 사랑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심장이 덜그럭거리더니 이내 발등으로 쿵 내려앉은 것만 같았다.

머릿속은 새하얗게 물들고 시야는 뿌옇게 흐려졌다.


- 너 좋다는 사람 만나서 네가 소중한 대우를 받으며 상처받지 않고 행복했으면 좋겠다.

“…….”

목구멍 끝에 가시가 돋친 듯 따끔거리는 탓에 입 밖으로 한 마디도 꺼내지 못했다.

숨긴다고 숨겼는데, 아버지에겐 미처 숨기지 못했던 것일까.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는데 우식은 이미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 예나야, 강 선생이랑 꼭 연애하라는 것도 결혼하라는 것도 아니야. 이 세상에 남자는 많고 너 좋다고 너 아니면 안 된다고 목맬 그런 놈들 만나 보라는 거야.

설령 울음이 비죽 튀어나올까, 예나는 미간을 우그러뜨리며 눈물을 삼켜냈다.


“아버지 마음은 알겠는데요, 이따 집에 가서 마저 이야기해요.”

서둘러 통화를 마친 예나는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죄송합니다.”

예나가 민망하지는 않을까, 현진은 환하게 웃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네요, 혹시 이대로 저 버리고 가신 건 아닌지 긴장하고 있었거든요.”

가볍게 던진 농담에 예나가 피식 웃음을 짓자, 현진은 한결 편안한 미소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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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한 음식이 나왔지만, 예나는 마음이 먹먹하고, 머릿속은 복잡한 탓에 식사는 하지 않고 커틀러리로 음식을 건드리기만 했다.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마음속에서 말끔히 윤을 털어내지 못한 상태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알아가는 것이 죄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 앞에 있는 상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이 자리가 너무나도 불편했다.

그렇다고 자리를 박차고 나오기엔 계속해서 아버지가 했던 말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이 아빤 네가 상처받는 사랑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현진은 조심스럽게 커틀러리를 내려놓았다.


“입에 안 맞으시면 다른 음식 주문해 드릴까요?”

예나는 멋쩍은 웃음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아, 저 때문에 식사를 못 하시는구나. 죄송해요.”

한참 잠잠히 예나를 바라보던 현진은 머뭇거리던 끝에 입을 뗐다.


“교장 선생님께서 이 만남을 주선하실 때, 솔직히 고민 많이 했어요.”

예나는 곤란에 처했을 현진의 마음을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아버지 대신 사과드릴게요, 내색도 못 하고 얼마나 당황스러우셨을지 알 것 같아요.”

현진은 입술을 가로로 길게 늘어트렸다.


“당황하긴 했죠, 교장 선생님께서 제 마음을 꿰뚫어 보셨나 싶었거든요.”

예나는 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듯 눈썹이 산처럼 치솟았다.


“길 가다가 우연이라도 좋으니, 한 번이라도 예나 씨를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네? 왜요?”

“제가 원래 가볍고 충동적인 편이 아니긴 한데…….”

현진은 목덜미를 매만지며 수줍은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예나 씨를 처음 본 순간, 첫눈에 반한 것 같습니다.”

“네?”

현진의 입에서 연이어 흘러나오는 말들은 하나같이 믿기 놀라운 이야기였다.

멍한 표정으로 현진을 바라보자, 그는 입이 타는 듯 물을 벌컥 들이켰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말들이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가벼워 보이는지, 그렇지만 모두 진심이고 그래서 천천히 예나 씨를 알아가고 싶어요.”

“아…… 어…… 그러시구나.”

충격에 말문이 턱 막혀 연신 탄식만 토하던 예나는 이윽고 정신을 차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저기, 저는 아시겠지만 이런 자리인 줄 모르고 그냥 가족 식사하는 자리인 줄 알고 나왔어요. 무엇보다…….”

예나가 말끝을 흐리자, 현진은 입매에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말했다.


“그럼, 저랑 딱 세 번만 만나보시는 것 어때요?”

“네?”

“사람은 세 번은 봐야 한다고 하잖아요, 오늘 처음 봐서는 모를 테니까. 저랑 딱 세 번만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해요.”

예나는 두 눈을 끔벅이며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채 이마를 긁적였다.

외유내강이라는 사자성어가 의인화하면 현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그가 건네는 메시지는 견고했다.

넋이 나간 얼굴로 픽- 웃음을 터트리며 은연중 시선을 돌린 그 순간.

예나는 무엇인가 발견한 듯 순식간에 미소를 거둔 얼굴로 눈매를 좁혔다.

잘못 본 것이 아닌가 싶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지만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존재했다.

저 멀리서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시야 가득 들어찼다.


‘왜, 여기에 네가…….’

우연에 우연이 겹쳐 너도 이곳에서 누군가를 만나기로 한 걸까?

예나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윤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의 다급한 걸음이 닿은 곳이 자신이라는 사실에 두 눈동자가 옅게 흔들렸다.

자신이 알고 있는 윤이 맞을까 싶을 만큼, 그의 얼굴은 까칠하고 수척해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울컥 눈물이 차올라, 입안 여린 속살을 사리 물었다.

윤은 거친 숨을 다독일 새도 없이 예나의 손목을 잡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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