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무슨 짓을 해도 행복하게 해줄 수 없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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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무슨 짓을 해도 행복하게 해줄 수 없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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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무슨 짓을 해도 행복하게 해줄 수 없겠구나.
2022.08.15.
저녁 식사 도중 연희가 꺼낸 그 말을 두고 지한은 연희가 이슬을 데리고 있다는 의심이 확신으로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들, 내일 시간 좀 내주세요. 이슬이가 함께 식사하고 싶다고 해서요.’
여전히 이든이나 자신에게 연락 한 통 없는 이슬이 어머니와 그것도 식사하고 싶다고 연락을 했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이슬이 언제나 피할 수 있으면 끝까지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 어머니와 함께하는 식사 자리였다.
그런 그녀가 연희에게 전화해 식사를 청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심한 갈증에 주방으로 가려 계단을 내려오던 중, 문이 닫히는 소리에 미약하게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새벽 두 시가 넘은 시각,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집으로 들어오는 연희가 보였다.
“어디 다녀오시나 봐요.”
이슬과 만나고 온 연희는 갑자기 환하게 켜진 거실 전등과 지한의 음성에 깜짝 놀란 듯 움찔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머리칼만 매만지던 연희는 애써 태연한 척 굴었다.
“응, 잠이 안 와서 잠깐 바람 좀 쐬고 왔어. 그러는 넌, 시간이 늦었는데 왜 안 자고.”
“오랜만에 이슬이 볼 생각하니까, 잠이 안 오네요.”
“오랜만은 무슨.”
“연락이 안 되던 아이가 나흘 만에 연락이 온 거잖아요, 그것도 어머니한테만.”
어딘가 모르게 말에 가시가 있는 것 같아 연희는 긴장한 듯 마른 침을 삼켰다.
“그러게, 나한테 연락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네.”
지한은 영혼 없이 고개를 주억이면서도 연희를 향한 시선을 쉽사리 거두지 못했다.
여전히 연희가 이슬을 데리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
어머니와 서 실장에게 각각 사람을 붙였지만, 두 사람에게 특별한 움직임이 관찰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확인할 방법은 이 방법뿐이었다.
제게 문자를 보낸 사람이 연희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
이슬의 휴대폰을 연희가 갖고 있다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있을 테다.
지한은 이슬에게 전화를 걸며 연희와 거리를 좁혔다.
“이슬이 녀석한테 전화 좀 해봐야겠어요, 녀석 서운하게 나한테는 어떻게 연락이 없어.”
통화 연결음이 흐르는 것과 동시에 연희의 핸드백에서 휴대폰 벨 소리가 들렸다.
연희는 가방 안에서 울리는 벨 소리에 흠칫 놀라며 핸드백을 움켜쥐었다.
‘역시나, 당신이었구나.’
어느새 두 뺨이 단단해진 지한은 지독하리만큼 냉기를 품은 눈동자로 말했다.
“전화 오는 것 같은데, 전화 받으세요. 어머니.”
“어?”
목덜미를 문지르며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연희에게 다시 한 걸음 다가섰을 때였다.
-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로 이슬의 메마른 음성이 들려오자, 지한의 눈매가 사납게 일그러졌다.
아주 찰나, 지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가 펴진 모습을 포착한 연희는 그제야 핸드백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아, 파리에 있는 송 화백님 전화네. 그럼 쉬렴.”
연희가 떠나고 홀로 남은 지한은 이마를 짚으며 묵직한 숨을 쉬었다.
“너, 지금 어디야.”
- 어차피 이따가 만날 거잖아, 그때 이야기하자.
* * *
지한의 전화를 끊고 이슬은 고개를 돌려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서울의 야경은 늘 그렇듯 아름다웠다.
‘이번 달 안으로 식 올리고 한국 떠나, 그러면 정이든 그놈 회사는 지켜줄 테니까.’
연희의 제안을 무시할 수 없었다. 만에 하나 이번은 어떻게 위기를 모면한다고 해도 언제고 자신의 존재가 이든의 발목을 잡을 것을 알기에.
울컥 치솟는 울음을 삼키며 끝까지 하고 싶지 않던 그 말을 해야만 했다.
* * *
낮은 조도의 조명만이 어둠을 밝히는 거실 한편엔 이든이 팔로 눈을 가린 채 소파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그녀와 연락이 닿지 않은 지 어느덧 닷새가 흘렀다.
사랑하는 이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건만 덧없게 흐르는 시간은 그를 고통 속에 살게 했다.
매일 밤 술을 마셔도 가슴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는 이 통증은 희미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Drrrr-.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휴대폰 진동 소리에 그는 잠결에 팔을 뻗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숙취에 엉망으로 갈라진 음성으로 전화를 받았지만,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것은 기나긴 침묵이었다.
그 순간, 번쩍 눈을 뜨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단이슬?”
- …….
이든은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집어 들고 현관으로 다가갔다.
“너, 지금 어디야. 내가 갈게.”
- 나, 기다리지 마.
그토록 듣고 싶었던 그녀의 음성이었건만, 그녀는 그토록 듣고 싶지 않은 말만 내뱉었다.
- 나, 너한테 안 갈 거야.
흐릿한 눈동자로 허공을 응시하던 그의 목울대가 거칠게 오르내렸다.
- 그러니까,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잘 살아.
“네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잘 살아, 네가 더 잘 알잖아.
- …….
“난, 괜찮아.”
- …….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이 네 탓이라 여겨져서 이런 거라면, 난 괜찮으니까 이제 그만 내 속 좀 태워. 이슬아, 난 정말 다 괜찮아. 너만 있으면 괜찮으니까 이러지 마.”
울음을 꾹 참으며 나른한 음성으로 진심을 전했지만, 돌아오는 그녀의 대답은 아프기만 했다.
- 미안해.
그 한마디만 남기고 끊긴 전화에 이든은 결국 모든 것을 잃은 사람처럼 두 눈동자가 공허하게 물들었다.
그녀를 잃은 지금, 어디로 가야 하는지 나아갈 길을 잃은 것만 같았다.
몇 번이고 다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끝끝내 그녀의 음성을 다시 들을 수 없었다.
* * *
도하는 까칠해진 얼굴로 레스토랑 직원이 안내하는 프라이빗룸으로 향했다.
그가 참석하고 싶지도 않은 식사 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였다.
아버지인 류 회장이 함께 식사하면 한국을 나가는 것을 두고 일절 간섭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을 건 이유에서였다.
룸 안으로 들어서자 미리 도착해 있던 류 회장은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일찍 왔구나, 이리 와 앉아라.”
테이블에 준비된 식기와 커틀러리가 두 사람 것 외에 더 있는 것도 모자라 류 회장이 자신의 옆자리에 앉을 것을 권하자, 자연스레 두 뺨이 단단하게 굳었다.
“저 말고 또 다른 손님이 있는 것 같네요.”
“잔말 말고 앉거라, 네가 인사드릴 분이 있어서 만든 자리니까.”
선뜻 안으로 들어서지 못하고 있을 무렵 들려오는 말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이슬이는 여기로 바로 오기로 했는데, 아직 도착을 안 한 모양이구나.”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연희를 발견한 도하는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연희의 뒤를 따르던 지한은 자신 쪽을 빤히 바라보는 도하를 발견하고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지금 이 자리는 그저, 가볍게 가족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가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다.
레스토랑을 나와 이슬에게 전화를 걸 무렵, 지한의 시야에 서 실장과 함께 레스토랑 쪽으로 걸어오는 이슬을 발견했다.
지한은 단번에 이슬에게 다다라, 그녀의 손목을 잡고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평소라면 손목이 아프다며 신경질을 내고 제 손을 뿌리쳐도 몇 번은 뿌리쳤어야 할 그녀가 무기력하게 자신을 따라나서는 것조차 신경을 긁어댔다.
“단이슬.”
무겁게 내려앉은 지한의 음성에도 이슬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너 지금까지 어디 있었어? 아니, 이 자리 무슨 자리인 줄이나 알고 나온 거야?”
크게 숨을 들이마시던 이슬은 이윽고 지한의 눈을 똑바로 응시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고 나온 거야.”
“너 여기 나오는 거, 정 대표는 알고 있어?”
“……이든이랑 상관없는 일이야.”
“어떻게 상관이 없어. 너, 지금 정 대표 말고 다른 남자랑 결혼하겠다고 여기 나온 거 아니야?”
“헤어졌어.”
시선을 회피하며 비스듬히 고개를 돌린 이슬을 두고, 그는 묵직한 숨을 토했다.
“사람 꼴이 말이 아니더라, 정 대표 너랑 연락 안 된다면서 날 찾아왔었어. 너 좀 찾아 달라고, 한 번만 살려달라고 하더라.”
그렇게 간절히 이슬을 찾아 헤매던 그가 이별을 납득했을 리가 없다.
분명, 이슬의 일방적인 이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슬은 더는 듣기 힘든 듯, 마른 주먹을 쥐며 돌아서서 프라이빗룸으로 향했다.
그를 위해서라도 독하게 마음을 먹어야 했다.
이게 그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했다.
.
.
.
류 회장과 연희를 주축으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이 자리가 상견례를 위한 자리라는 것을 안 윤 회장은 심기가 불편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도하는 굳은 얼굴로 얼굴이 반쪽이 된 이슬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연락이 닿지 않아 걱정했었다고, 정 대표도 당신이 어딨는지 모르는 것 같던데 그동안 어디에 있었냐고.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은 태산처럼 쌓여 있었지만, 지금은 무사한 그녀의 얼굴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듣기로는 도하 군이 한국을 떠날 예정이라고 하던데, 결혼식을 이번 달 안으로 올리기로 하죠.”
본격적으로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 윤 회장은 안경을 올리며 억지웃음을 지은 채 연희를 바라보았다.
“여보.”
“이슬이도 한국 생활 힘겨워하는데, 이참에 남편한테 의지하면서 외국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요.”
막무가내인 연희의 모습에 윤 회장의 얼굴은 조금씩 굳어만 갔다.
“허허허, 전 좋습니다. 사부인 당장 다음 주라도 식 올리죠.”
“역시 류 회장님 듣던 대로 성격이 시원하시네요.”
이슬은 그들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관심이 없는 듯 메마른 얼굴로 물잔을 쥐었다.
목이 타들어 가는 갈증에 앞에 놓인 물잔을 들어 단번에 잔을 비워냈다.
말끔히 잔을 비워도 갈증이 가시질 않아 물잔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을 때, 누군가 물잔을 제 앞에 놓아주었다.
제게 자신의 물잔을 내어 준 사람이 도하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따뜻했던 그녀의 눈동자가 참혹할 정도로 빛을 잃은 채 자신에게 닿자, 도하는 쓰디쓴 미소와 함께 비스듬히 고개를 떨구었다.
한때는 무엇으로나마 그녀와 엮이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그녀로 인해 다시 붓을 잡을 수 있게 되고, 자신이 그녀의 뮤즈였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와 운명을 운운하고 싶었고.
비록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정략결혼으로 그녀를 제 곁에 붙잡아 놓고 싶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다는 전제조건에서였다.
그전에도 잘 알고 있었지만, 오늘에서야 더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난, 무슨 짓을 해도 당신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겠구나.’
그렇다면, 내가 무엇을 해줘야 당신이 행복해질 수 있을까.
천천히 고개를 들어 물끄러미 이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결심한 듯 크게 숨을 들이마시더니 이슬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조금만 기다려줘,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내가, 곧 당신 다시 웃을 수 있게 해줄게.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도하의 한마디에 모든 사람의 이목이 그에게 쏠렸다.
“죄송하지만, 이 결혼 못 할 것 같습니다.”
“그…… 그게 무슨 말이냐.”
류 회장은 힐긋 연희의 눈치를 살피더니 난처한 얼굴로 물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그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일은 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 결혼, 못하겠습니다.”
그의 충격적인 발언에 모두가 놀란 듯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슬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이 결혼이 깨진다면 이든의 회사를 구할 방법 또한 사라지는 것이 될 테다.
이슬은 잘게 고개를 저으며 어떻게든 도하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
그 순간.
쾅-.
벌컥 열린 문이 벽에 부딪히는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지만, 이슬은 여전히 도하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슬은 거친 숨소리와 함께 저벅저벅 다가온 누군가가 제 손을 잡아챈 후에야 도하를 향하던 시선을 거둘 수 있었다.
뒤늦게 그가 이든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이슬은 믿기지 않는 듯 두 눈동자가 파도처럼 크게 일렁였다.
“가자.”
한없이 가라앉은 그의 음성과 손 끝에 전해지는 따뜻한 온기만으로 이 순간이 꿈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행여 잡은 손을 놓치지는 않을까, 이든은 더욱 힘을 주어 이슬의 손을 꼭 잡고 그녀와 함께 프라이빗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