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 마음껏 도망치고 숨어 봐.
(101/130)
101. 마음껏 도망치고 숨어 봐.
(101/130)
101. 마음껏 도망치고 숨어 봐.
2022.08.19.
일요일이지만 그동안 밀린 업무 때문에 출근한 이든은 잠을 못 잔 듯 붉게 충혈된 눈동자로 텅 빈 이슬의 자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나, 기다리지 마. 너한테 안 갈 거야.’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잘 살아.’
새벽녘 그녀의 음성을 들을 때만 해도 꿈이 아니길 바랐으나, 그 예쁜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이 하나같이 제 심장을 짓이기는 말뿐이라 차라리 이 모든 것이 꿈이길 바랐었다.
채 3분도 되지 않았던 그 통화기록은 부정하고 싶은 모든 것이 현실이라고 잔인하게 일깨워주고 있었다.
똑똑-.
노크와 함께 거침없이 집무실로 들어온 사람은 예나였다.
예나는 하루하루 다르게 무너져 내리는 이든을 두고 볼 수 없다는 듯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내가 먼저 검토해 보라는 서류는 검토했어?”
“…….”
“정이든, 도로시 이대로 침몰하게 둘래?”
“알아서 볼 테니까, 나가.”
“정이든!”
이든은 지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이 창백한 안색으로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예나를 지그시 응시하더니 감정을 꾹 누르기라도 하듯 음절마다 꾹꾹 힘주어 이야기했다.
“나도 뭐든 해 보겠다고 여기에 나왔잖아. 그러니까 지금은 좀 내버려 둬.”
예나는 입을 꾹 닫은 채 거칠게 이마를 긁적이더니 이윽고 조용히 집무실을 나섰다.
그녀가 집무실을 떠난 후, 한동안 멍한 표정을 짓던 그는 마음을 다잡고 두꺼운 서류 뭉치를 제 앞으로 끌어왔다.
시선은 서류에 고정되어 있지만, 활자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Drrrrr-.
책상 위에 있던 휴대폰이 요란스러운 진동을 울리자, 그는 만사가 귀찮다는 듯 무심한 시선으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H 호텔 레스토랑 ‘가든 테라스’.]
주어가 생략된 메시지였지만 이곳에 틀림없이 그녀가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미약하게 일그러졌던 눈매가 순식간에 검게 짙어지는 것과 동시에 그는 자리를 박차고 회사를 나섰다.
.
.
.
끼이익-.
H 호텔 앞에 귀를 찌르는 강렬한 타이어 마찰음과 함께 차에서 내린 이든은 거침없이 호텔로 들어섰다.
찰나의 차이로 그녀와 엇갈리지는 않을까 조급한 발걸음으로 그녀가 있을 레스토랑으로 걸음을 옮겼다.
쉴 틈 없이 걷고 또 걸어 다다른 프라이빗룸 앞에서도 그는 망설임 없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쾅-.
문이 벽에 부딪히며 큰 소음이 일어도, 모두의 시선이 제게 향해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슬을 향해 한 걸음씩 걸음을 옮겼다.
섣부르게 다가가면 꽃잎에 앉아 있던 나비처럼 잡지 못할 만큼 높이 높이 날아 홀연히 사라지지는 않을까.
차오르는 감정을 꾹꾹 누르며 비로소 그녀에게 닿은 후엔 그 어디로도 도망가지 못하게 힘껏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의 따스한 온기가 손끝에 스며들고, 그녀의 짙은 눈동자에 자신을 비추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이든은 숨을 쉴 수 있었다.
“가자.”
그녀를 이끌고 레스토랑을 빠져나와 호텔 로비로 향하기까지 이든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지금 그의 머릿속엔 1초라도 더 빨리 그녀와 이곳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홀린 듯 이든을 따라나서던 이슬은 이성을 찾은 듯 차갑게 굳은 얼굴로 걸음을 우뚝 멈춰 섰다.
이든은 입안이 바싹 타는 듯 마른 침을 삼키며 이슬을 바라보았다.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자신을 멀거니 바라보는 이슬을 두고 이든은 불안한 마음을 숨기려 애써 억지로 입매를 길게 늘어트렸다.
“가자, 우선 여기에서 나가서 이야기하자.”
가만히 그를 담던 그녀의 눈동자가 작게 일렁이더니 이슬은 이든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녀의 온기가 순식간에 사라진 제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이든의 눈자위가 순식간에 뜨겁게 부풀러 올랐다.
“우리 헤어진 거 잊었어?”
잔뜩 날카로운 말이 심장 깊숙한 곳에 날아와 박혀도 이든은 여전히 공허한 눈동자로 텅 빈 손에 시선을 두었다.
이든은 묵직한 숨을 토하며 말했다.
“누가 헤어져, 난 너랑 헤어진 적 없어.”
“…….”
“그래, 마음껏 도망치고 숨어 봐.”
지독하리만큼 낮게 가라앉은 음성에 이슬은 입안 여린 속살을 힘껏 깨물며 눈물을 삼키려 했다.
“네가 어딨든 다 찾아낼 테니까.”
“…….”
“너, 나한테서 못 벗어나.”
감정을 꾹꾹 눌러 말하는 이든의 음성에 이슬은 심장이 찌르르 울렸다.
마음 같아선 그와 함께 아무도 없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지만, 결코 그것이 옳은 선택이 아니란 것을 잘 알기에.
이슬은 매몰차게 그를 끊어내려 했다.
그것이 지금 자신이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하고 최선의 선택이었으니까.
“정이든, 너 이러는 거…….”
이슬은 하려던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두 눈동자가 한껏 커졌다.
그녀의 입을 막을 생각이었던 것일까, 이대로 그녀가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까 두려웠던 마음에서였을까.
이든은 빈틈없이 이슬을 끌어안았다.
“어느 순간에도 너 포기하지 말라며, 포기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너도 나 버리지 마.”
“…….”
“우리가 왜 헤어져,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
“겨우 이까짓 것으로 헤어진다는 게 말이 돼?”
겨우, 이까짓 것.
우리에게 불어닥친 현실을 이까짓 것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 일일까.
‘나는 그렇다고 쳐도 네 인생이 달린 문제인데. 그런데 어떻게 겨우 이까짓 것일 수 있어.’
이슬은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듯 쓸쓸한 얼굴로 말했다.
“이든아, 난 자신이 없어.”
“…….”
“네가 나 때문에 시드는 것도, 네 눈동자에 잠시라도 원망이 스치는 것도, 난 감당할 자신이 없어.”
“단이슬, 이제 보니까 순 헛똑똑이였네.”
“…….”
목이 메는 듯 이든의 음성은 엉망진창으로 갈라졌지만, 그는 서슴없이 연이어 목소리를 냈다.
“네가 내 옆에 있는데 내가 시들 리가 없잖아.”
“…….”
“네가 이렇게 내 손을 잡고 있는데 내가 널 원망할 리가 없잖아.”
간절한 그의 음성이, 우리에게 처한 이 현실이 너무나 버거워서.
이슬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 큰 목소리로 이든을 밀쳐내며 말했다.
“정이든, 정말 미련하게 왜 그래. 지금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어?”
“…….”
“내가! 네 회사도 모자라 네 인생마저 갉아먹을 수 있다고.”
로비에 있는 많은 사람의 시선이 제게 쏟아져도 이슬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바닥으로 가슴을 힘껏 내리치며 울음을 터트렸다.
이든은 입술을 꽉 깨물며 가까스로 눈물을 삭이더니 흘러내린 이슬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주었다.
“네가 없는데 회사가 무슨 소용이고, 살아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이슬이 손등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원망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자, 이든은 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싸 쥐고 눈물을 훔쳐주었다.
“알아, 지금 네 마음이 어떨지.”
“…….”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아니까 아무 말 하지 마.”
“…….”
“네가 얼마나 힘든지 다 아는데 미안하게도 난 너 못 놔줘. 그러니까 네가 이번 한 번만 봐줘라.”
힘껏 안으면 그녀가 부서져 가루가 되어버릴까, 이든은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를 품에 안았다.
그녀를 품에 안고 가까스로 버티고 있을 무렵,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과 이슬을 바라보는 도하를 발견했다.
도하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다가오자, 이든은 이슬을 품에서 떨어트렸다.
“시간 딱 맞춰서 왔네, 조금이라도 늦게 오면 내게도 기회가 찾아왔다. 생각하고 이슬이랑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꼭꼭 숨어버리려 했는데.”
도하는 두 눈가가 눈물로 얼룩진 이슬을 보며 가슴이 아렸지만, 아쉬움이 가득한 음성과 과한 몸짓으로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풀려고 노력했다.
“조금 있으면 아마 사람들 들이닥칠 것 같은데, 발렛 맡긴 차부터 빼 오는 건 어때?”
이든은 여전히 불안한 듯 이슬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자, 도하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단이슬 어디 도망가지 못하게 꼭 잡고 있을 테니까.”
이든이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어내며 호텔을 벗어나자, 도하는 슈트 팬츠 주머니에 찔러넣었던 손을 빼 그녀의 뺨에 묻은 눈물을 훔쳐주며 입술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내 앞에서 딴 놈 때문에 울지 말래도 또 우네.”
이슬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자, 도하는 아련한 눈빛으로 그녀를 눈에 담았다.
오늘이 지나면 언제 또다시 그녀를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서글프게 만들었다.
“왜, 나한테 뭐 미안한 일이라도 있나? 왜 내 눈을 못 보지?”
“…….”
“설마,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건 아니지?”
이슬이 입술을 잘근 깨물며 도하를 바라보자, 도하는 검지로 코끝을 훔치며 눈살을 찌푸렸다.
“에이, 또 쓸데없이 사람이 투명하단 말이야.”
“도하 씨.”
“분명, 도 관장이 결혼을 빌미로 정 대표 회사를 두고 거래했을 거잖아.”
그렇지 않고야 그녀가 자신과 결혼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리 없었다.
이슬은 비스듬히 고개를 숙이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 금지라 해도 그러네.”
도하는 그녀가 고개를 숙인 탓에 고개를 비스듬히 내려 그녀와 시선을 맞추려 했다.
“도하 씨한텐 언제나 미안해.”
아주 잠깐, 그녀에게 자신이 동정의 대상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했다.
그것이 부질없는 상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게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마도 다음 생에서도 난 네 마음을 가질 수 없겠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결혼을 생각할 정도라면, 아마 다음 생에도 제게는 기회가 없을 것이 분명했다.
이번 생이 아닌 다음 생에도 그녀가 자신을 사랑할 수 없을 거란 생각에 혀끝에 쓰디쓴 것이 진하게 맴돌았지만, 언제나 그랬듯 도하는 미소를 머금었다.
“미안할 게 있나? 말했잖아, 너라면 얼마든지 이용당해주겠다고.”
“…….”
“처음부터 내가 자처한 거니까, 미안해할 것 없어.”
언제 찾아왔는지도 모르게 불현듯 찾아온 봄처럼, 불현듯 스며든 그녀를 이제는 완전히 떠나보내야 할 때가 왔다.
떠나기 전 이렇게 그녀를 눈에 담을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언제나 무채색이던 나의 삶에 봄과 여름 그리고 가을까지 화려한 색을 채워 넣어주었던 그녀가 있었기에.
사는 것이 무료하고 덧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어 고마웠다고 말하려 입을 떼려던 찰나.
그녀의 등 뒤로 이든이 시야 가득 들어찼다.
도하는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 그 말을 꾹 삼켜내며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다독였다.
“사람들 오기 전에 가 봐.”
이든은 이슬의 손가락 사이마다 제 손을 끼워 넣으며 도하에게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오늘 일은 어떻게든 꼭 갚겠습니다.”
도하는 고개를 주억이며 한쪽 입술만 길게 늘어트렸다.
“정 대표, 꼭꼭 숨어.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사람들이거든. 우리 영감도, 도 관장도.”
이든은 각오가 되었다는 듯 어느새 두 뺨이 단단히 굳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반드시 찾아서 잡아! 와”
검정색 정장 차림의 남자 무리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며 소리치자, 이든은 차갑게 굳은 얼굴로 이슬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도하는 이든의 곁에 딱 붙어 선 이슬을 보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빨리 가, 여긴 내가 어떻게든 막아 볼 테니까.”
힘껏 달려나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어느새 지독하리만큼 냉기를 품은 눈동자로 돌아서서 이슬을 쫓는 남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비키시죠.”
제 앞을 가로막는 도하가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듯 남자는 험상궂은 얼굴을 도하에게 바짝 들이밀었다.
“싫다면.”
“다치십니다.”
“과연 다치는 사람이 나일까?”
도하는 순식간에 미소를 거두더니 단번에 남자의 팔을 꺾어 바닥에 꽂아버렸다.
간만에 몸을 풀었다는 듯 어깨를 털던 도하는 선뜻 달려들지 못하는 무리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넋 놓고 서 있는 걸 보니까, 겁먹었구나? 걱정하지 마, 내가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니까. 뭐, 기분이다. 살려는 드릴게.”
제대로 자존심을 건드린 탓일까, 한 남자가 도하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섰다.
“멈춰.”
모든 것을 얼어버릴 것 같은 지독하리만큼 낮게 깔린 음성에 남자는 주춤했다.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다름 아닌 연희의 비서 실장인 서 실장이었다.
그의 등장에 도하는 두 손을 슈트 팬츠 주머니에 찔러 넣으며 턱을 쳐들었다.
“내가 이슬이랑 약속한 게 있어서 여기서 물러설 수가 없거든. 그러니까 이쯤에서 그만하지?”
“……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서 실장의 당돌한 질문에 도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이유라, 이유…….”
되뇌듯 연신 같은 말을 읊조리던 도하는 이윽고 베일 듯 날 선 눈빛으로 서 실장을 응시하며 말했다.
“이유라면, 당신과 같은 것 아니겠어?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기꺼이 무슨 일이든 해내고 싶은 그 마음.”
평온한 호수같이 감정적 동요 없던 서 실장의 두 눈동자에 작은 파동이 일었다.
도하는 목을 조이는 것 같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서 실장과 거리를 좁히더니 그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물론, 당신은 당신의 일을 하는 거겠지만. 당신이 하는 그 일이 묘하게 내 신경을 건드린단 말이지.”
“…….”
“경고하는데, 단이슬 털끝이라도 건드리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땅으로 꺼진 것일까, 하늘로 솟아버린 것일까.
그 누구도 이슬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던 그 시간 속.
도하는 자신의 아버지인 류 회장의 비서 실장에게 연락해 은밀하게 이슬의 행방을 찾아달라고 부탁했었다.
정보력 하나는 대단한 태성 그룹 비서실이건만. 이슬이 제 눈앞에 나타나기까지 그 행방을 알지 못했었다.
이슬과 이든이 룸을 나서고 그 뒤를 따라나서던 그때.
연희의 지시하에 서 실장이 이슬을 납치 감금했었다는 연락을 받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도하는 서 실장의 비뚤어진 넥타이를 고쳐주는 듯하다가 힘껏 조이며 말을 이었다.
“한 번만 더 이슬이를 위험에 빠트리면, 내가 당신들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