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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해방. (120/130)


120. 해방.
2022.10.24.



 
월요일 아침, 주간 회의를 마치자마자 윤과 예나는 이든을 따라 그의 집무실로 들어섰다.

이든은 두 사람을 탐탁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더니 이윽고 결재 파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안 돼.”

“야, 넌 뭐 듣지도 않고 안 된다는 말부터 해?”

예나가 목소리를 높이자, 이든은 의자에 기대어 앉아 두 사람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너희 둘이 나한테 머뭇거리면서 할 말이 뭐가 있겠어. 분명 내가 안 된다고 할 게 뻔한 일 아니겠어? 이를테면 둘이 휴가를 길게 가고 싶다거나, 아니면 둘 다 회사를 나간다거나.”

이든이 다시 서류로 시선을 옮기자, 예나는 픽 웃으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려.”

이든이 윤과 예나를 번갈아 바라보자, 윤은 예나 옆에 딱 달라붙어 앉아 이야기했다.


“나, 예나랑 결혼하려고.”

예상과 달리 이든은 시큰둥한 얼굴로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해, 내가 두 사람 결혼 못 하게 훼방이라도 놔?”

“그런 의미가 아니잖아, 이제 본격적으로 결혼 준비하려면 평일에 연차도 낼 테고 무엇보다 신혼여행도 가야 하니까, 휴가 기간 조정하려고 그러지.”

이든은 손가락 사이로 현란하게 돌리던 만년필을 탁- 책상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언제쯤 결혼하게?”

“아무래도 날 풀리고 3월쯤이…….”

“안 돼.”

윤이 미처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단번에 말을 자른 이든의 얼굴은 단호함을 넘어서서 비장하기까지 했다.

예나는 이든과 담판을 지을 생각인지, 옷소매를 걷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이든, 왜 내가 3월에 결혼하면 안 되는지 논리적인 이유를 말해야 할 거야, 별 이유도 없이 괜히 훼방 놓는 거라면 오늘 너 죽고 나 살자.”

“내가 자리 비우는데, 너희 둘마저 회사를 비우면 되겠어?”

“그건 또 무슨 소리야? 3월에 어디 길게 출장이라도 가?”

예나가 사납게 미간을 찌푸린 채 묻자, 이든은 생각만으로 행복한 듯 입꼬리를 꿈틀거렸다.


“3월에 식 올리기로 했어, 이번 주 내로 양가 부모님께 인사드리고 식장 예약할 생각이고.”

예나랑 윤은 두 눈을 끔벅이더니 이윽고 동시에 픽- 웃음을 터트렸다.


“하- 이 자식 이렇게 선수 칠 줄이야.”

윤이 헛웃음을 터트리자, 이든은 이마를 긁적이며 말했다.


“너희가 먼저 식을 올리든 늦게 올리든 크게 상관은 없는데 서로 1~2주 간격만 두기로 하자. 신혼여행 중에 메시지 폭탄에 시달리고 싶지 않다면 말이지.”

예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텅 빈 이슬의 작업실로 시선을 옮겼다.


“우리 예비 신부님께서는 오늘 출근이 늦으시네? 오후에 다음 시즌 콘셉트 회의하기로 했는데.”

“일이 있어서, 점심 지나서나 올 거야.”

 

* * *

점심시간이 다가올 무렵, 회의를 마치고 나온 지한은 휴대폰 전원을 켜자마자 눈매를 좁혔다.

다급한 발걸음으로 로비에 닿은 그는 거친 숨결을 가다듬을 새 없이 누군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와 시선이 맞물린 이슬은 해맑게 웃으며 지한의 앞에 섰다.


“오빠!”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무슨 일 있어?”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기세인 지한의 모습에 이슬은 웃음을 터트렸다.


“일은 무슨, 같이 점심이나 먹자고 하려고 왔지.”

지한은 별일이 없다는 이슬의 말에 그제야 안도하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이젠 내가 네 연락만 받으면 심장이 철렁거린다니까. 무슨 일 생긴 건 아닌가 싶어서.”

“쳇- 밥 먹자고 해도 난리야.”

“방에서 기다리지 왜 로비에 있어? 회의가 언제 끝날 줄 알고.”

“실은, 회장님이랑 함께 식사하고 싶은데. 혹시라도 회장님 외부 일정 때문에 나가시면 인사라도 드리려고 로비에서 기다렸어.”

지한은 걸음을 우뚝 멈춰서서 이슬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아버지랑 같이?”

“응.”

“너 솔직히 말해봐, 무슨 일 있지? 그렇지 않고서야 단이슬이 이렇게 갑자기 철들 리가 없는데.”

지한은 미소를 머금으며 신나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아버지, 오늘 외부 일정 없으실 거야. 너 왔다고 하면 엄청나게 좋아하시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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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준은 제 앞에 앉은 이슬을 흐뭇하게 바라보더니 자신의 앞에 놓인 전복을 이슬의 앞접시에 놓아주었다.


“이렇게 이슬이랑 함께 점심 먹을 줄 알았으면 미리 더 좋은 곳을 예약하고 왔을 텐데.”

일준이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말하자, 이슬은 활짝 미소를 머금었다.


“여기도 훌륭한데요? 음식이 다 맛있어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다음엔 해물 요리 전문점이 있는데 그곳에서 식사하는 게 어떠니?”

“네, 좋아요.”

일준은 이슬이 맛있게 먹는 모습만으로 배가 부르고 행복한지, 이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연신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이슬이 체하겠어요. 그만 보시고 아버지도 식사하세요.”

“어? 어, 내가 불편하게 했구나.”

일준이 허둥거리며 멋쩍게 웃자, 이슬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저, 사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그래, 편히 이야기 해봐. 무슨 일이니.”

이슬은 손가락을 매만지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레 입을 뗐다.


“지난번에 인사드렸던 친구하고 결혼을 하려고 해요.”

일준은 생각지도 못한 말에 깜짝 놀라더니 소리 내 껄껄 웃었다.


“그래, 결혼하는구나. 잘 됐구나. 축하해, 그리고 나한테 직접 소식 전해줘서 고맙다.”

마치 자기 일처럼 좋아하는 일준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슬은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래, 결혼하면 이것저것 많이 필요하지. 뭐가 필요하니. 내가 다 해줄게.”

“아버지, 혹시 괜찮으시면 저랑 버진로드 같이 걸어주실래요?”

일준은 혹시 자신의 귀가 잘못되었나 싶어 멍한 얼굴로 이슬을 응시했다.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은데 지금 뭐라고 했니?”

“아버지 괜찮으시다면 저랑 버진로드 같이 걸어주실 수 있으세요?”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아버지라고 한 거 맞지?”

이슬은 고개를 끄덕이며 죄송한 마음에 고개를 비스듬히 떨구었다.


“죄송해요, 너무 늦었죠?”

일준은 감격에 찬 얼굴로 연신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지금도 충분해. 고맙다, 고마워 이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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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일준을 배웅한 이슬은 자신을 삐딱한 시선으로 보는 지한을 보며 픽- 웃음을 터트렸다.


“왜, 삐딱하게 볼까? 내가 오빠보다 먼저 결혼하는 게 못마땅해?”

“결혼하는 게 그렇게 좋아? 아주 입이 귀에 걸렸네, 걸렸어.”

“부러우면 부럽다고 인정하시지?”

“부럽기는. 하나도 안 부럽거든? 그런데 어차피 결혼 해봤자, 지금과 별반 다를 것 없지 않아? 정 대표랑 너 혼인신고만 안 했지, 이미 부부 아니야?”

지한의 말을 가만히 듣던 이슬은 두 눈을 끔벅이더니 픽- 웃음을 터트렸다.


“듣고 보니까 그렇네.”

말없이 이슬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지한은 가라앉은 음성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우리, 차 한잔할까?”

그의 음성이 먹먹하게 가라앉은 것으로 보아, 그리 좋은 이야기가 아닌 것을 깨달은 이슬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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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은 꽤나 긴 침묵을 지켰다.

무겁게 내려앉은 이 분위기를 떨쳐내고 싶었던 이슬은 애써 입매를 말아 올리며 말했다.


“무슨 무서운 말을 하려고 이렇게 무게를 잡으실까?”

“우선 그나마 가벼운 이야기부터 하자면, MK 그룹 오늘 자로 최종 부도처리 될 거야. 세제 보존제 사건도 사건이고, 민재이가 저지른 일 때문에 여파도 컸지만, 또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았던 모양이야.”

이슬은 고개를 주억이다가 한쪽 입매를 늘어트렸다.


“그럼, 이제 무거운 이야기를 들어볼까?”

지한은 입술을 꾹 다문 채 기나긴 고민 끝에 입을 뗐다.

* * *

이슬은 사방이 삭막한 회색 콘크리트로 둘러 쌓여있는 좁은 공간에 앉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건 네가 무시해도 되는 이야기인데. 어머니 변호사 측에서 연락이 왔어, 네 납치 감금 교사 건으로 합의를 원해. 그래서 어머니가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과하겠다면서 널 보고 싶다고 하시고.’

지한의 말을 듣고 이슬은 연희가 있는 구치소로 향했다.

끼이익-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흐릿했던 눈동자는 원래 제빛을 찾았다.

몇 주 사이에 연희는 평소와 매우 다른 모습이었다. 눈에 확연히 띌 만큼 거칠어진 피부와 푹 꺼진 볼살, 퀭한 눈가와 정돈되지 않은 머릿결까지.

연희는 이슬을 발견하자마자 두 손이 발이 되게 빌고 또 빌었다.


“이슬아, 내가 잘못했어. 내가 진심으로 이렇게 빌게. 나 좀 한 번만 용서 해주면 안 되겠니.”

감정적 동요 없이 굳은 얼굴로 연희를 지그시 응시하던 이슬은 입매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래요, 사과는 받죠.”

“그래, 그럼 지금 바로 내 변호사한테 전화해서 합의하겠다고 말해.”

연희는 아크릴 벽면에 바짝 얼굴을 들이대며 두 눈을 반짝였다.


“내가 합의를 한다고 해도, 돈세탁이나 횡령에 대한 처벌까지 피하긴 어려울 텐데.”

“그건, 네가 윤 회장한테 잘 좀 부탁 좀 해봐. 지금 이 변호사 말고 박앤장 거기 대표 변호사한테 변호 좀 맡겨달라고.”

실낱같은 희망을 맛본 듯 두 눈동자가 광기로 얼룩지는 그 찰나를 목격한 이슬은 픽-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슬이 연신 웃음을 터트리자, 연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웃니?”

“아직도 그렇게 나를 몰라서 어떻게 해? 내가 당신을 위해서 뭔가를 할 사람으로 보여?”

“천륜…… 우린 천륜으로 이뤄진 사이잖아. 네가 날 끊어 내려 해도 천륜이란 건 쉽게 끊어내지 못하는 거야. 하늘이 이어준 인연인데 그걸 끊으려 하다니, 하늘이 무섭지도 않아?”

“그걸 아는 사람이 제 배 아파 낳은 딸을 버렸어? 천륜을 져버린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이야. 그래서 지금 당신이 이렇게 천벌 받는 거고.”

연희는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리더니 이내 사태파악을 마친 듯 거친 숨을 토해냈다.


“사과했잖아! 내가 무릎 꿇고 빌기까지 했잖아! 여기서 더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건데. 어떻게, 네 눈앞에서 혀 깨물고 죽어줄까? 그럼 네 속이 시원하겠어?”

“그래, 사과란 건 잘못한 사람이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거지만, 그 사과를 받아들이고 용서를 하는 건 상처받은 사람의 자유야. 당신의 사과는 받겠지만, 난 절대로 당신 용서 못 해.”

“합의도 탄원서도 아니면, 대체 여긴 왜 온 건데!”

이슬은 섬뜩할 만큼 냉기를 품은 눈빛으로 연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싶어서, 당신이 얼마나 비참하고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는지.”

“뭐?”

“분명히 말했잖아, 나한테 엄마라는 존재는 당신이 날 버리고 가던 순간 죽었다고. 마음 같아서는 내 몸속에 흐르는 당신 피를 모조리 뽑아버리고 싶어. 당신의 피가 내 몸에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 끔찍해. 합의? 탄원서? 그딴 소리 할 때마다 당신을 엄벌에 처해달라는 탄원서를 보낼 거야. 그러니까 다시는 그 더러운 입에 내 이름 올릴 생각 마.”

이슬은 일말의 미련도 남아 있지 않은 듯 가차 없이 면회실을 빠져나왔다.

이젠 정말로 마지막. 그녀를 대면하는 일은 이것으로 끝을 낼 생각이었다.

설령, 먼 훗날 그녀의 부고를 전해 받는 일이 생기더라도 다시는 그녀 앞에 서지 않을 생각이었다.

아버지 태식이 세상을 떠나고, 연희를 따라 평창동에 발을 디딘 것은 어디까지나 오랜 시간이 지나도 채워지지 않았던 엄마의 부재로부터 생긴 공허함 때문이었다.

날 버리고 떠났던 사람이란 사실은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되어 언제고 내 심장을 아프게 찌를 테지만 엄마가 있는 삶이 궁금했었다.

피를 나눈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매번 실망해도 한편으로는 또 기대하고 상처받기를 반복해도 쉽게 놓을 수 없었지만.

온전히 인연의 끈을 놓은 지금에서야 이슬은 자신의 발목을 단단히 옭아맨 채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게 만들었던 상처부터 온전히 해방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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