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결코, 용서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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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결코, 용서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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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결코, 용서할 수 없는.
2022.11.07.

다른 직원들에게는 오늘도 어제와 별다를 것 없는 하루겠지만, 이슬이 미술관으로 출근하는 날이면 이든의 하루는 언제나 더디게만 흘렀다.
기나긴 회의를 마치고 집무실로 향하던 이든은 휴대폰에서 시선을 고정한 채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가까워졌건만, 이슬이 연락 한 통 없자, 이든은 입술을 꾹 다문 채 연신 휴대폰만 노려보았다.

“분명 보나 마나 신났겠지.”
내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그림 앞에 서서 몇 시간도 거뜬히 서 있을 만큼.
이든은 휴대폰을 슈트 재킷 안 주머니에 밀어 넣으며 기나긴 한숨을 토했다.

“정이든, 한심하다. 이젠 하다 하다 일에 밀리냐.”
어떻게 하면 이슬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을까 생각할 무렵 외근을 다녀온 준희와 정현을 맞닥뜨렸다.

“어, 대표님! 식사 안 가세요? 오늘도 단 팀장님이랑 오붓하게 맛있는 거 드시려는 거죠?”

“오늘, 단 팀장 미술관으로 출근했어. 그나저나 손에 든 건 뭐야?”

“아, 거래처 미팅 갔다가 SNS에서 유명한 케이크 전문점이 근처에 있어서 사 왔어요. 한 조각 드셔보실래요?”
투명한 케이스 안에 망고가 듬뿍 올라간 생크림 케이크를 보니, 자연스레 이슬이 떠올랐다.
이든은 검지로 콧잔등을 훔치며 괜한 관심을 보였다.

“그거, 정말 맛있어?”

“네! 매장에서 조각 케이크로 먹고 왔는데. 이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니까요?”

“그 매장, 어디에 가면 있어?”

“저희는 송파 쪽에서 샀는데요, 강남 백화점에도 매장 있어요!”
이든은 적어도 오늘 저녁만큼은 이슬의 사랑을 독차지할 방법을 알아낸 듯 두 눈을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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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이 좋아할 망고 케이크와 딸기라고 하면 좋아서 난리가 나는 로이를 위한 딸기 케이크를 양손에 하나씩 들고 주차장으로 향하는 이든의 발걸음은 묵직하지만 가벼웠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그 두 사람을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는 두 여자가 이 케이크를 맛있게 먹고 행복해할 생각만으로 이든은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불렀다.
그 순간.

“아저씨, 이 차 트렁크에 실으면 돼요.”

“네, 사모님. 알겠습니다.”
두 손 가득 무겁게 쇼핑백을 들고 주차된 차에 쇼핑백을 실은 남자는 손등으로 땀을 닦으며 허리 숙여 인사했다.

“사모님, 그럼 살펴 가세요.”
오전 내내 VIP 고객들의 짐을 운반하던 중년의 남성은 이제야 숨을 돌리며 한 걸음 나아가다 말고 누군가와 툭- 부딪히고 말았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괜찮으세요?”
남자가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를 하자, 이든은 괜찮다는 말을 하려다 말고 미약하게 눈매를 좁혔다.
이든이 말이 없자, 고개를 든 중년의 남성은 이든을 알아보고 놀란 듯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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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중년의 남성과 이든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 상황이 어색한 듯 남자는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몸을 달싹이며 산만했다.
이든이 물끄러미 응시하는 한 남자는 바로 MK 그룹 민 회장의 비서실장이었던 도 비서였다.
그는 재이와 민 회장의 지시를 받아 ‘세제 보존제 사건’에 증거를 조작하고 사문서를 위조한 혐의로 복역을 마치고 몇 개월 전 만기출소를 해 얼마 전부터는 백화점에서 일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든은 오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기나긴 침묵을 깨트렸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꼭 묻고 싶었어요. 5년 전에 제게 그 문서를 보낸 이유가 무엇입니까?”
5년 전, 이슬이 태식의 딸이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을 때.
퀵서비스로 회사에 배달되었던 서류봉투 하나, 그 안에 있던 서류는 이슬의 친부의 결백을 주장할 수 있는 명백한 증거이자, MK 그룹을 무너뜨릴 계기가 되었던 결정적인 한 방이었다.
도 비서가 입을 꾹 다물고 있자, 이든은 연이어 목소리를 냈다.

“도 비서님은 꽤 오랜 시간 동안 MK 그룹과 민 회장을 위해 일하셨는데, 왜 제게 MK 그룹에 독이 될 그 서류를 보내셨는지 늘 의문이었습니다.”
이든이 빠져나갈 틈 없이 자신을 조여오자, 도 비서는 체념한 듯 허탈한 미소를 공기 중에 흩트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떻게든 내 정체를 모르게 하려고 노력했는데, 이렇게 다 알아버렸구먼. 언제부터, 아니. 어떻게 알았나?”

“보통 중요한 서류를 퀵서비스로 보낼 땐 일요일은 피하길 마련이죠. 대체로 일요일엔 회사에 사람이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땐 회사가 비상인 상황이라 저는 물론이고 몇 명의 직원이 출근했었습니다. 그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제 가까이에서 절 주시하고 있는 사람이겠죠.”
도 비서는 이든의 추론을 반박할 수 없는지,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서류를 잘 받았는지 확인 전화를 했던 번호를 추적했습니다. 그 결과 아주 의외의 인물이 나타났죠. 이제는 말씀 해주시겠습니까? 왜 무슨 목적으로 그 서류를 제게 보내신 거죠?”
도 비서는 말없이 쓸쓸한 표정을 짓더니 긴 침묵을 거두었다.

“꼴에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지.”

“…….”

“회장님이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 했네, 그게 설령 내 손을 더럽히는 일일지라도 말이야. 정권이 바뀔 때마다 우리 그룹만큼은 무탈하게 넘길 수 있게 봐달라고 로비도 하고, 그룹에서 하는 신사업에 문제를 제기할만한 국회의원이 있으면 그 자제들을 그룹 계열사에 부정취업을 시켜주면서 입을 막아버리기도 했어.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될 거란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었지. 어느 기업이든 쉬쉬할 뿐 덮어놓고 다 하는 일이었으니 그리 죄책감마저 들지 않았어.”
덤덤하게 옛일을 회상하던 그는 이윽고 다시금 떠올려도 끔찍하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그런데 그날, 적어도 인간이라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 것을 보았지.”
이든이 검게 짙어진 눈동자로 도 비서를 응시하자, 그는 이든이 생각하는 대로라는 듯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예상하는 그대로야. 바로 단태식 사장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웠던 그 날이었네. 광기로 얼룩진 재이를 본 순간. 모든 게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설 수가 없었어. 여차하면 나도 단 사장처럼 잘못될 것 같았거든. 비겁하다고 할지라도 두려웠어. 그 아이의 눈 밖에 날까 봐.”

“…….”

“그렇게 보고도 못 본 척, 듣고도 못 들은 척, 알아도 모른 척 두 눈을 감고 귀를 막았지. 이번 한 번만 눈 감으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몇 년 후에 또 광기로 휩싸인 그 눈을 보았네. 실은 그 눈빛을 다시 본 순간, 도망치고 싶었어. 단 사장 때와 달리 아주 깊은 증오와 경멸이 서려 있었으니까, 이러다 무슨 큰일이라도 저지를 듯싶었거든. 그런데 재이가 눈엣가시처럼 여기던 사람이 단 사장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이 명료해지더군. 그제야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은 찾은 거지.”
제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렀다고 한들 재이가 모든 것을 앗아가려던 그 순간순간이 선명하게 떠올라 가슴에서 뜨거운 분노가 치솟았다.

“재이, 지난달에 출소한 건 알고 있나?”
이미 몇 주 전, 지한은 재이의 출소 소식을 이든에게만 전하며 재이가 앙심을 품고 이슬과 아이들에게 해코지라도 하진 않을까 염려해 은밀하게 사람을 붙여 이슬과 아이를 경호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든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도 비서는 코를 찡긋거리며 깊은숨을 토했다.

“회장님이 그렇게 떠나시고, 재이도 많이 힘들어했네. 자신에게 처한 상황이 너무 급변한 나머지 그 모든 것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모양이야.”
최대한 감정적 동요를 하지 않으려 감정을 꾹꾹 누르던 이든이었다.
하지만, 도 비서의 말에 결코 공감할 수 없다는 듯 그는 사납게 얼굴을 구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재이가 모든 것을 잃고 힘들어한다고 해서, 저지른 악행이 없는 일이 될 수 있답니까? 지금도 앞으로도 민재이가 어떤 삶을 살고 어떻게 망가지는지 궁금하지도 않지만, 설령 더 무너져 내린다고 해도 연민을 느끼진 못할 겁니다. 다, 뿌린 대로 거두는 거니까요.”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단호하게 말하는 그의 눈동자는 지독하리만큼 차갑고 싸늘했다.
* * *
삭막한 냉기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회색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병실 안, 텅 빈 눈동자로 창밖을 응시하던 재이는 순식간에 눈빛이 바뀌었다.


“네가 감히 내 것을 건드려? 죽고 싶어?”
그녀는 격분하여 소리 질렀지만, 병실엔 그녀 말고 다른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다 내 거야. 이 세상에 내가 갖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흥분한 나머지 손에 잡히는 것이라면 모두 던지고 때려 부쉈다.
재이의 난동에 병실로 들이닥친 의료진이 그녀를 제압했지만, 전혀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 두 손과 두 발이 결박된 채 소리를 지르며 몸부림치다 진정제가 투여되자, 잔뜩 버티며 반항하던 손과 발에 턱- 힘이 풀렸다.
정신이 희미해져 가는 순간, 그녀는 잠시 환각으로 이슬의 친부인 태식을 본 듯 두려움에 잠식된 얼굴로 몸부림쳤다.

“저리 가! 저리 가란 말이야!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당신이 죽어버린 거잖아! 오지 마! 나한테 오지 말란 말이야!”
환시에 의해 목이 졸리는 듯 격렬히 발버둥 치다가 서서히 약 기운에 의해 의식을 잃고 말았다.
재이를 병실 문 작은 창으로 지켜보던 재이 모친 은경은 고통스럽지만 애써 의연한 모습을 보였다.

“익히 아시고 계시겠지만, 첫 증상이 발현된 것은 5년 전 회장님께서 작고하셨단 소식을 접한 후였습니다.”
민 회장은 5년 전, 재이의 악행이 낱낱이 밝혀지며 세상을 떠들썩하던 그 시기에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눈앞에서 MK 그룹이 하루가 다르게 무너져 내리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회사가 최종 부도가 나던 날. 그는 뇌출혈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민 회장이 세상을 떠나자, 많은 이들은 태식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일로 아무것도 손 쓸 수 없이 한평생 일군 모든 것을 순식간에 잃은 것도 모자라, 뇌출혈로 세상을 떠난 것까지 태식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민 회장과 재이가 태식의 인생을 짓밟을 때만 해도 자신들에게 이리 똑같이 돌아올 줄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거라며 순식간에 나락을 찍은 두 사람을 보며 어쩌면 정말로 신이 존재하는 것일지 모른다고 이야기했다.

“우리 애가 이렇게 괴물이 된 데에는 내 탓도 있는 거겠죠, 애초에 인간은 가지고 싶다고 모든 것을 손에 쥘 수 없다는 것을, 사람을 한낱 도구처럼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고 단단히 이르렀다면 달랐을까요?”
사람이라면 마땅히 알고, 넘지 말아야 할 그 선이. 어찌 내 자식은 알지 못했을까.
어쩌다 내 딸이 내가 가장 경멸하던 그 사람과 이토록 똑같아졌을까.
은경은 마음을 독하게 먹은 듯 검게 짙어진 눈동자로 의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간 본인이 저질렀던 그 모든 일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알 때까지 사회에 내보낼 생각도 없지만, 아주 오래 걸리더라도 스스로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걸 아는 날이 오게 치료 잘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