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딸 바보가 되었습니다-109화 (109/850)

109화. 망가질 각오

마지막으로 신청한 곡의 반주가 멎었다.

그와 동시에 나는 노래방 의자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장난이 아니고 당장은 서 있을 기운도 없었다.

기계 화면이 반짝이며 음성이 흘러나왔다.

[연습 많이 하세요^^;]

SCORE : 21

기계지만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문구였다.

뒤이어 점수까지 확인한 나는 앉은 채로 실소를 내뱉었다.

처음에 100점을 받고선 계속 하락하더니, 기어코 21점이라는 경이로운 점수를 기록해버렸다.

근데 사실 이게 정확한 점수였다. 100점이 말도 안 됐던 거지.

털썩.

뒤이어 연두가 내 옆에 주저앉았다.

나와 마찬가지로 얼굴이 핼쑥해진 모습이다.

보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신나게 놀았는지가 느껴졌다.

“아빠아..”

너무 목을 혹사시킨 건지 목소리도 쉰 연두였다.

되게 안쓰럽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덜 부르는 건데.

노래방 기계에 천 원짜리 몇 장을 넣었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났다.

그 정도로 많은 노래를 불렀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엄청 격하게 부르면서 논 탓에 피로감은 더했고.

‘장난 아니게 즐겁긴 했지만.’

끝나고 나니 조금 오버해서 논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런 나를 보며 연두가 말을 이었다.

“아빠, 이랑 일이 가치 이쓰면 이십일이죠..?”

벌써 두 자릿수까지 발음할 수 있게 된 연두였다.

나는 흐뭇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응, 그렇지.”

“구럼.. 이십일은 노픈 점수에여..?”

연두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눈앞에 떠오른 방금 부른 노래의 스코어가 21이었으니까.

사실 0을 최저점으로, 100을 최고점으로 놓으면 21은 높은 점수로 볼 수 없었다.

아니, 까놓고 말해서 엄청 낮은 점수라 봐야지.

‘그러니까 기계도 연습하라 그러는 거고.’

하지만 사실대로 ‘완전 낮은 점수야.’라고 얘기할 수는 없었다.

그야, 마이크를 꼬옥 쥐고 노래를 부르던 연두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했으니까.

마지막 곡이라 더 열심히 불렀을 테고.

결국 나는 어느 정도 타협해서 대답하기로 했다.

“처음에 받은 100점만큼은 아니지만, 괜찮은 점수야.”

“히히.”

내심 아쉬워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다행히 연두는 내 대답에 만족하는 거 같았다.

사실대로 얘기했다면 나오지 않았을 반응이긴 했지만.

“힘들지, 연두야.”

“네에.. 아빠눈요..?”

“아빠도. 앉아서 잠깐만 쉬었다 가자.”

연두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한테 몸을 기댔다.

그리고는 자그맣게 입을 열었다.

“또 와도 대여, 아빠..?”

“응?”

“노래방. 또 와도 대여..?”

동물원을 떠날 때도 이렇게 똑같이 물어봤었는데.

아무래도 연두가 좋아하는 장소가 하나 늘어난 거 같다.

나는 연두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당연하지. 또 오자, 아빠랑.”

그렇게 연두의 첫 노래방이 마무리됐다.

***

뚝. 뚝.

이건 다름 아닌 신발장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나와 연두는 홀딱 젖은 채로 서 있는 상태고.

‘.. 운도 지지리도 없지.’

하필이면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난데없이 비가 쏟아졌다.

집에 거의 도착했을 때 내리기 시작한 비인데도, 워낙 거세서 옷과 머리카락이 다 젖어버렸다.

최대한 연두는 안 맞도록 감싸면서 달려왔는데 전혀 소용없었다.

‘우박은 개뿔.’

아까 노래방에서 ‘우산’을 부를 때 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무리 거센 비가 오든, 우박이 내리든 대신 맞아주는 우산이 되기로 다짐했는데.

바로 이렇게 내 나약함을 깨닫게 될 줄이야.

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연두를 바라보며 물었다.

“괜찮아, 연두야?”

“네!”

왜인지 연두는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비를 잔뜩 맞았는데도 오히려 기분이 좋아 보인다.

하긴, 나도 어렸을 때는 좋아했던 거 같기도 하다. 비 맞는 거.

“비 맞았으니까 씻어야 해, 연두야.”

“왜여..?”

“응?”

“연두 비 마자서 다 씨섰는데...”

와우. 비로 씻었으니까 안 씻어도 된다니.

언제나 연두의 말은 의외로 말이 돼서 말문이 막힐 때가 많았다.

아무래도 설득하려면 충격요법이 필요할 듯했다.

“연두야.”

“네에.”

“비를 맞고 깨끗이 안 씻으면 무시무시한 일이 일어날지도 몰라.”

내 말에 연두는 몸을 흠칫 떨었다.

그리고는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 무시무시한 일이여...?”

홀딱 젖은 채로 나를 바라보는 모습이 귀여워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는 가까스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무시무시한 일.”

“.. 어떤 일인데여?”

“어떤 일이냐면……”

뜸을 들이는 내 말에 연두가 침을 꼴깍 삼켰다.

슬슬 이야기할 차례였다.

나는 의도적으로 으스스한 음성으로 말했다.

“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릴지도 몰라.”

내 말에 연두는 멍하니 나를 바라봤다.

뭐지? 혹시 나이가 어려서 머리카락이 빠지는 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일인지 모르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연두의 손이 스르륵 올라갔다.

손이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자신의 머리카락이었다.

“아, 안 대여!”

“...?”

“연두 머리카락 안 빠질 꺼에요..!”

연두는 그렇게 말하고선 곧장 화장실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툭.

잠시 후, 하늘색 블라우스가 화장실 문 앞에 떨어졌다.

그리고선 연두가 고개를 쏙 내밀었다.

“연두 씨슬 준비 다 해써요...”

“크크.”

정말이지 함께 있으면 안 웃을 수가 없는 아이였다.

***

우우웅.

“자, 다 됐다.”

“이제 연두 머리 안 빠저도 대여..?”

“그럼. 깨끗이 씻고 아빠가 말려주기까지 했는데.”

“휴우...”

연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돌돌 말았다.

그 모습을 보며 웃다가, 문득 드는 생각에 입꼬리가 내려갔다.

‘.. 머리숱.’

슬프게도 머리숱은 최근 들어 내 걱정거리였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요즘 머리카락이 심상치가 않았으니까.

전보다 쉽게 빠지고 힘이 없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설마.. 아니겠지.’

행여나 부정 탈까 봐 발음하기도 무서운 두 글자의 단어.

아닐 것이다. 반드시 아니어야 한다.

솔직히 내가 탈모에 걸릴 이유가 없었다.

적다고는 못해도 아직 스물다섯밖에 안 되는 나이인데.

‘매일같이 스트레스를 받던 예전이라면 모를까.’

연두가 온 이후로는 매일을 즐겁게 보내고 있는데, 탈모일 리가 없잖은가.

더군다나 내가 기억하는 우리 아빠는 매우 풍성했다.

그럼 그 유전자를 이어받은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암, 그렇고말고.

‘좋게 생각하자.’

지레 겁먹고 불안해하는 건 오히려 독이었다.

그로 인한 스트레스가 탈모를 유발할지도 모를 일이니까.

나는 휙휙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낸 후, 침대에 몸을 뉘었다.

머리숱은 그렇다 치고, 결정해야 할 다른 일이 있었다.

다름 아닌 다음에 연두튜브에 올릴 영상에 관한 문제였다.

사실 오늘 노래방에서 노는 연두의 모습을 다음 영상으로 올릴 예정이었다.

그래서 노래를 하기 전에, 적당한 위치에 카메라를 놓아둔 거고.

‘그런데..’

상황이 생각했던 대로 흐르지 않았다. 연두도 연두지만 내가 엄청나게 신나 버렸으니까.

심지어 포로로 주제곡을 연두와 함께 열창하기까지 했지.

양심고백을 하자면 카메라를 둔 것도 까먹고 놀았다.

평소의 내 성격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었다.

‘문제는 그런 내 모습이 찍혔을 거란 거고.’

아직 영상을 보지는 않았지만 그 정도는 예상할 수 있었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나는 카메라를 향해 손을 뻗었다.

영상을 봐야 정확히 판단할 수 있을 거 같았다.

포옥.

어느새 연두도 내 옆으로 다가와 누웠다.

자연스레 나는 연두의 목 뒤쪽으로 팔을 뻗었다.

“헤헤..”

웃는 걸 보니 내 의도를 알아챈 모양이다.

이윽고 연두가 내 팔을 베고 나란히 누웠다.

“연두야.”

“네에.”

“아빠랑 이거 같이 볼까?”

“이게 먼데요..?”

“오늘 아빠랑 연두 노래방에서 노래 부르는 거.”

내 말에 연두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미룰 이유는 없었다. 나는 곧바로 영상을 재생시켰다.

“어느새 빗무리 내 마음에 고이고~ ♪”

처음에는 쭈뼛쭈뼛하며 노래를 시작하는 연두의 모습이 흘러나왔다.

여기쯤이었나. 나랑 눈이 마주치는 부분이.

그렇게 생각하기 무섭게 화면 속의 연두가 살짝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는 어딘가를 바라보며 수줍은 미소를 띤다.

‘나를 보는 거지.’

앵글에 보이지 않는 나를 보며 웃는 게 틀림없었다.

그때도 느낀 거지만, 다시 봐도 무척이나 귀여운 미소였다.

잠깐 일시정지한 나는 빙긋 웃으며 물었다.

“이때 쑥스러웠던 거야, 연두야?”

왜인지 연두는 배시시 웃으며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쑥스러웠던 장면을 굳이 콕 집어 물어보니 또 쑥스러워진 모양이다.

나는 우쭈쭈하는 어조로 달래듯이 말했다.

“알겠어, 연두야. 안 물어볼게.”

쏘옥.

그제야 연두는 파묻었던 고개를 다시 내밀었다.

어차피 이제 연두가 부끄러워할 부분은 딱히 없었다.

아마 내가 수치심을 느낄 부분만 잔뜩 있지 않을까.

역시나 생각했던 장면이 이어졌다.

“맘속에 스며드는 Memory! 그 속에 비틀거리며 난 아프니까!”

저절로 입이 벌어지게 만드는 랩핑이었다.

물론 안 좋은 쪽으로 말이다.

‘부를 때도 느꼈지만.’

영상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로 들으니 더 확연하게 느껴졌다.

내가 진짜 엄청난 박치라는 사실이.

자기비하를 하는 게 아니라, 진짜 더럽게 못 부른다.

어떻게 이런 실력으로 당당하게 부른 건지 놀라울 정도로.

그러나 나와 달리 연두는 엄청 웃으며 좋아했다.

“히히, 아빠다! 아빠 목소리 짱 커요..!”

그렇지. 아무리 연두라도 이걸 보고 잘한다는 말은 안 하는구나.

사실 이걸 듣고 잘한다고 했으면 연두의 진정성을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카메라 앵글 속으로 난입하는 장면은 거의 없다는 점이었다.

이제 나오는 장면은 연두와 함께 포로로를 열창하는 부분이었다.

“하나, 두울, 셋!”

“이야.. 포로로다!!”

누운 채로 화면을 응시하던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앞선 랩은 그렇다 치더라도 이건 맨정신으로 버티기 힘들었다.

아까는 무슨 정신으로 저렇게 부른 걸까.

‘그런데.’

계속 눈을 감고 있을 수도 없었다.

영상 속에서 방방 뛰며 노래하는 연두는 너무 귀여웠으니까.

이렇게 신난 연두의 모습은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 웃기긴 하네.’

그리고 인정하긴 싫지만 내 목소리가 나오는 부분도 재미있긴 했다.

왜 노래를 엄청 못 부르는 사람들이 나와 재미를 주는 예능도 있지 않은가.

이름이 ‘너의 목소리를 보여줘’였나. 그거랑 비슷한 재미 포인트라 볼 수 있었다.

물론 내가 거기에 나오는 수준의 음치라는 건 아니다. 아마도.

결국 나는 마음을 내려놓고 연두와 함께 영상을 끝까지 감상했다.

우려한 바와 달리, 앵글에 내가 잡히는 장면은 거의 없었다.

애초에 연두의 모습을 담으려고 설치한 카메라였으니까.

‘편집으로 충분히 없앨 수 있겠어.’

물론 가정이 있었다. 이 영상을 올리기로 결정한다는 가정.

내 모습을 없앨 순 있어도 목소리를 없앨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영상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그때 연두가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빠!”

“응, 연두야.”

“연두튜브에 올릴 꺼에요..?”

“왜? 연두는 올렸으면 좋겠어?”

연두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사람드리 조아할 꺼에요..!”

“하하, 그렇게 생각해?”

“네!”

전에 내가 초상화를 그리는 영상을 올릴 때와 같은 말이었다.

그때도 연두는 이렇게 말했었으니까.

결과적으로 영상 반응은 엄청나게 좋았고.

‘그래.’

사실 연두가 하는 말이 맞았다.

이것도 영상만 놓고 보면 분명히 구독자들이 좋아할 영상이었다.

개인적인 수치심 때문에 올릴까 말까 망설였던 것뿐이지.

‘어떻게 보면 기회일지도.’

솔직히 연두튜브 내에서 내 이미지는 너무 미화되어 있었다.

엄친아라던지, 먼치킨이라던지, 심지어 천재라는 말까지.

하나같이 나랑은 안 어울리는 단어들이었다.

개인적으로 그런 이미지로 고정되는 건 부담이 있었다.

‘완전히 깰 수 있어.’

이 영상이라면 유쾌하게 그런 이미지를 부수는 게 가능했다.

무엇보다도 연두가 업로드하길 원하는 영상이었다.

그렇다면 고민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 연두야.”

“으응..?”

“올리자.”

이렇게 연두튜브의 다음 영상이 결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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