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눈싸움
“엎어라 뒤집어라 데덴~ 찌!”
척!
바로 앞면과 뒷면이 2 vs 2로 맞아떨어진 데덴찌.
내가 선택한 건 손바닥의 뒷면이었다.
‘신세연은 아니야.’
손을 본 것만으로 그녀와 같은 팀이 아니라는 건 확신할 수 있었다.
사실 팀이 어느 정도는 예상이 갔다.
연두의 손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 손도 되게 작긴 하지만.’
매일같이 보던 연두의 손과는 느낌이 달랐다.
나는 반쯤 확신하며 고개를 들어 팀원의 얼굴을 확인했다.
“하하.”
역시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뒷면을 내민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시은이.
이렇게 되면 자연스레 팀은 정해진다.
‘나랑 시은이, 신세연과 연두.’
사실 팀이 될 경우의 수 자체가 무척 작았지.
생각해 보니 여러모로 꽤 괜찮은 팀 조합인 거 같았다.
‘연두랑 팀이 아니더라도.’
그것도 그거대로 나름 그림이 재미있을 거 같고 말이다.
연두와 시은이도 자신이 누구와 팀이 된지 파악한 거 같았다.
그렇겠지. 데덴찌의 룰을 알고 있었으니까.
시은이와 마주 보던 나는 먼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잘해 보자, 시은아.”
왜인지 내 말 이후에 흐르는 잠깐의 침묵.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시은이의 대답이 들려왔다.
“네, 아저씨.”
“팀 됐으니까 우리 하이파이브 한 번 할까?”
나는 손을 내밀어 하이파이브를 신청했다.
시은이가 살며시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손을 뻗었다.
짝!
살짝 부딪힌 거치고는 꽤 경쾌한 소리가 났다.
나는 씩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우리 합이 좀 잘 맞는 거 같은데, 시은아?”
“왜요?”
“원래 그런 거거든. 하이파이브할 때 소리가 크게 나면 잘 맞는 거야.”
시은이가 호기심이 동하는 표정으로 반응했다.
“진짜요? 방금 소리 완전 크게 났는데..”
내 말이 꽤 그럴듯했던 모양이다.
사실 공신력 있는 정보는 아니었다. 어디서 한 번 주워들은 이야기니까.
뭐, 어때. 팀워크만 다질 수 있다면 충분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치. 그러니까 우리가 좋은 팀이 될 수 있다는 거지. 연두랑 시은이 엄마 팀보다.”
“.. 좋은 팀?”
“응, 좋은 팀.”
뾰로통.
그러던 와중 눈에 들어오는 연두의 표정.
살짝 입술을 내민 채 뾰로통한 표정을 짓고 있다.
저 표정은 뭐라 표현해야 할까.
토라진 표정 같기도 하고, 서운한 표정 같기도 하다.
세연 씨와 팀이 된 방금까지만 하더라도 해맑게 웃던 연두인데.
‘방금 내 말 때문인가.’
연두랑 시은이 엄마 팀보다 좋은 팀이 될 수 있다는 말.
그 말이 저런 표정을 짓게 만든 걸까.
왜인지 그런 연두를 보고 있자니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내가 느끼기에.’
나도 가끔 저런 표정을 지을 때가 있었다.
가끔 너무 나 이외의 다른 사람과 연두의 케미가 좋게 느껴질 때면.
물론 당시에는 눈치 못 채고 나중에야 깨닫게 되는 일이었다.
내가 그랬구나 하고.
이제 보니 나만 그런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바로 연두를 향해 말했다.
되게 우쭈쭈하는 말투로.
“우리 연두 삐졌어?”
“...!”
말 그대로 느낌표를 머금은 연두의 표정이었다.
이렇게 돌직구를 꽂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모양이다.
연두는 볼이 새빨개져서 대답했다.
“아, 안 삐저써요..!”
“그래? 아빠가 보기에는 삐진 거 같은데?”
“아니에요! 삐지지 아나써요..!”
극구 부인하는 모습에 다시 한번 웃음이 나왔다.
이후 뭐라 작게 중얼거리는데 들리지는 않았다.
뭐라고 하는 건지 물어보려는데,
“심리전에 말리면 안 돼, 연두야!”
가만히 지켜보던 신세연이 불쑥 끼어들었다.
중얼거리던 연두는 아리송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심리전..?”
“응. 아빠가 연두 일부러 놀리는 거야. 연두 삐지게 해서 눈싸움 이기려고. 그러니까 당하면 안 돼.”
엥. 딱히 그런 의도가 있는 건 아니었는데.
웃음을 머금고 있는 거 보니 확실히 진지하게 하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가만히 지켜보기로 했다.
“갠차나요! 연두 안 삐저써요..!”
“그치? 그럼 우리도 하이파이브 한 번 할까?”
“네! 하이파이브해요..!”
신세연이 내민 손에 연두가 힘차게 손바닥을 부딪쳤다.
짝!
오. 나와 시은이에게 밀리지 않는 소리였다.
신세연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어때요?”
“제법인데요? 그럼 전초전은 비긴 걸로 하고……”
나는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눈싸움으로 결정하죠. 어디가 더 좋은 팀인지.”
“훗, 좋아요.”
이렇게 전초전이 무승부로 끝나고 시작됐다.
즐거운 눈싸움이.
***
본격적인 눈싸움이 시작됐다.
그런데 신경전을 벌인 거치고는 너무 조용했다.
‘망설이고 있어.’
시작했는데도 서로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정말이지 다들 너무 착해서 문제라니까.
이럴 때는 나같이 조금 나쁜 녀석이 필요했다.
스윽.
빛보다 빠른 속도로 눈을 집어 들어,
휘리릭!
제대로 뭉치지도 않고 상대편에게 흩뿌렸다.
상대편이라 함은 바로 연두와 신세연이었다.
동시에 두 명의 비명이 귀에 들어왔다.
“꺄아..!”
“꺅! 차가!!”
그러고 보니 연두랑 약속했는데. 언제나 같은 편에 서주겠다고.
안타깝게도 이런 예외상황은 있는 법이었다.
먼저 선전포고를 했으니 남은 건 하나였다.
“도망가, 시은아!”
팀인 시은이의 손을 잡고 냅다 도망쳤다.
전술의 이름은 일시적 후퇴.
뒤에서는 연두와 신세연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으으.. 아빠!!”
같이 달려오는 신세연의 손에는 눈이 가득 들려있었다.
역시 망설이다가도 눈을 맞으면 발끈하게 되어있다.
아빠랑 놀 때의 나도 그랬으니까.
‘눈을 맞고 발끈해서 덤볐다가.’
거의 일방적으로 눈으로 폭행을 당했다.
아빠는 아들이라고 봐주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수박만 한 눈덩이를 옷 속에 넣은 것만 생각해도 그랬다.
‘.. 역시 복수했어야 했는데.’
그러던 와중 시은이의 다급한 목소리에 생각이 끊겼다.
“아저씨! 더 빨리 달려요!”
“응? 왜?”
“뒤에! 엄마랑 연두!!”
뒤를 돌아보자마자 입이 벌어졌다.
“뭐, 뭐야!”
아니, 왜 이렇게 빠른 건데.
연두와 신세연이 등 뒤까지 추격한 상태였다.
그리고 신세연의 손이 움직였다.
휘리릭.
퍼억!
이 제구력은 뭐지.
그녀가 던진 눈덩이는 내 뒤통수에 명중했다.
맞기 직전에 고개를 돌려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입에 들어갈 뻔했다.
‘단단하게 뭉친 게 아니라 아프지는 않은데.’
뒤통수가 시린 동시에 묘하게 열이 올랐다.
나는 머리의 눈을 털어내며 뒤를 돌아봤다.
신세연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미, 미안해요! 얼굴에 던진 거 아닌데. 아파요?”
“에이, 뭘요. 하나도 안 아파요.”
“휴.. 다행이다...”
나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른바 ‘방심 유도’ 작전이었다.
그렇게 눈덩이를 들어서 뭉치려는데,
“.. 이얏!”
퍽.
앙증맞은 소리와 함께 또 한 번 눈덩이가 날아왔다.
돌아보니 연두가 바로 옆에 서 있었다.
설마 여기서 던진 건가?
“푸흣.”
순간적으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바로 옆에서 던졌는데 맞은 부위는 종아리 부근이다.
이건 뭐 사랑의 맴매도 아니고.
“헤헤..”
막상 눈을 던진 연두는 뿌듯한 표정으로 웃고 있다.
나는 일부러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도와줘, 시은아! 엄마랑 연두가 아저씨 공격한다!”
그러자 곧바로 시은이가 눈을 들고 도착했다.
휘릭.
시은이의 첫 번째 공격.
그 대상은 다름 아닌 연두였다.
“흐앗..!”
그러는 사이 나는 방금 뭉친 눈덩이를 신세연에게 던졌다.
눈덩이는 그대로 곡선을 그려 그녀의 팔에 명중했다.
눈을 맞은 그녀는 소리쳤다.
“와, 치사해! 애들 보고 있는데..”
“크크, 그러니까 방심하면 안 되죠. 명심하세요.”
약 오른 표정으로 눈을 집어 드는 신세연.
타닷.
나는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그때 눈에 들어오는 연두와 시은이의 모습.
나는 다시 한번 웃음이 터져버렸다.
“얏!”
“이야!”
서로 마주 보고 계속 눈을 던진다.
도망갈 생각도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그런 와중에 철저히 몸만 맞추고 있어.’
눈덩이는 얼굴 근처에 가지도 않는다.
옷 위를 맞추고 부스스 떨어지는 눈덩이들.
어떤 심리인지 알 거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아프게 하기는 싫고, 눈싸움은 이기고 싶은 거지.’
그 모습이 귀여워 쳐다보는데 다시 한번 눈덩이가 날아왔다.
이번에는 보고 있어서 간단히 피할 수 있었다.
“궤도가 뻔히 보이는데요?”
“와.. 약 올라...”
“시은아. 맞추고 일로 달려와! 아저씨랑 기지 만들자!”
그제야 둘만의 치열한 눈싸움이 끝나고 시은이가 달려왔다.
이제 군대에서 배운 지식을 눈싸움에 활용해 볼 생각이었다.
***
멀찌감치 도망간 나와 시은이.
“자, 시은아. 여기 눈을 모아봐.”
“어떻게요?”
“이렇게.”
스윽. 스윽.
딱히 방법이랄 것도 없었다.
나는 손으로 주위의 눈을 잔뜩 끌어모았다.
시은이도 눈을 끌어서 모으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훌륭한 방호 기지가 완성됐다.
“근데 이게 뭐예요, 아저씨..?”
눈을 반짝이는 걸 보니 흥미가 동한 모양이다.
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기지. 여기 뒤에 숨어있으면 눈 안 맞을 수 있어.”
약속이라도 한 듯 신세연이 던진 눈이 날아왔다.
어느새 가까이 접근한 모양이다.
‘어림도 없지.’
군대에서 배운 지식으로 공격을 막기 가장 효율적인 구조로 건설한 건데.
저런 부실한 눈덩이가 뚫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봤지, 시은아?”
“우와.. 진짜 안 맞아요! 아저씨 짱이다..”
“...”
시은이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이야.
잠깐이지만 연두가 겹쳐 보였다.
신이 난 나는 방호를 이용하는 법도 설명해줬다.
“여기서 숨어서 던져도 되고, 밖에서 눈싸움하다가 힘들면 와서 쉬어도 돼. 어때, 짱이지?”
“네, 짱이에요!”
“좋아. 그럼 다시 가 볼까? 우리는 짱이니까.”
끄덕. 끄덕.
‘짱’으로 한마음으로 뭉친 우리는 방호 밖으로 나섰다.
다시 눈싸움이 재개됐다.
휘릭! 퍽!
이제 완전히 눈싸움을 즐기고 있는 넷이었다.
일부러 서로 눈을 강하게 뭉쳐서 던지지는 않았다.
부드러운 눈도 뭉치기에 따라 맞으면 아플 수 있으니까.
즐기자고 하는 건데 다쳐서는 곤란했다.
‘하지만 승부는 승부지.’
연두도 예외는 아니었다.
나는 뭉치지 않은 눈을 들고 연두의 뒤로 살그머니 접근했다.
그리고 연두의 양 볼에 비비고는,
“꺄아!”
잽싸게 도망쳤다.
볼의 눈을 털어낸 연두는 나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장갑을 낀 손에는 눈이 들려있었다.
‘사실.’
당연한 얘기지만 도망가려면 얼마든지 도망갈 수 있었다.
연두는 다섯 살 아이이고 나는 성인이니까.
하나 나는 아빠처럼 융통성 없는 아빠가 아니었다.
탓. 탓.
일부러 연두가 따라올 수 있도록 속도를 조절해서 달렸다.
자연히 거리가 가까워지고, 바로 뒤에서 연두가 눈을 던졌다.
눈은 정확히 내 다리 뒤쪽을 명중했다.
퍽.
파악.
작은 소리 뒤에 육중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바로 내가 눈밭에 엎어지는 소리였다.
쓰러진 나는 눈에 고개를 박고 아무런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아, 아빠..?”
떨리는 연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치챘겠지만 이건 연기였다.
눈을 맞은 건 아무런 타격도 없었으니까.
‘보고 있지 않았으면 맞은 것도 몰랐을 정도이고.’
연두를 끌어들이기 위해 혼자 자빠진 것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연두는 쪼그려 앉아서 나를 손으로 잡았다.
표정은 안 보이지만 아마 울상을 짓고 있지 않을까.
스윽.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으응..?”
내 표정을 본 연두가 외마디 의문사를 내뱉었다.
허나 이미 내 범위 내에 들어온 연두였다.
포옥.
그대로 연두의 손을 당겨서 끌어안았다.
이후 나는 눈밭을 마구 뒹굴기 시작했다.
“장난이지롱. 아빠 하나도 안 아파!”
그제야 내가 넘어진 게 장난인 걸 깨달은 연두.
분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연두 놔주세요..!”
“안 놔줄 거지롱~”
“으으..”
한참을 데굴데굴 구르다가 놓아줬다.
그리고선 나는 잽싸게 방호로 도망가 버렸다.
와다다다!
일어나서 내 뒤를 따라 달려오는 연두.
도망가는 와중에 문득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물다섯에 눈싸움을 하면서 이렇게 즐겁다는 생각을 할 줄이야.’
소중한 사람과 함께라서 그런 걸까.
모르겠다. 지금은 그저 이 즐거움을 만끽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