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화. 팬
짝!
앙증맞은 손뼉 소리와 함께 드디어 시작됐다.
최고의 한 끼 촬영이.
‘.. 근데 어딜 봐야 되지?’
처음이다 보니 어느 하나 익숙한 게 없었다.
어색한 시선처리를 하는 와중 눈을 마주친 ‘워너비’의 멤버들.
왜인지 이쪽을 바라보며 쿡쿡 웃음 짓고 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온통 풀세팅을 하고 나오자마자 여기로 온 건데.
혹시 뭐가 묻었다고 해도 누군가가 촬영 시작 전에 알려줬겠지.
스윽.
혹시 몰라 옆을 바라봤지만 연두의 얼굴에도 묻은 건 없다.
방금까지 본 그대로의 꽃미모를 뽐내고 있으니까.
그사이 들려왔다. 두 MC의 목소리가.
“대한민국 최고의 셰프들이 당신의 냉장고를 탈탈 털어드리겠습니다! 국내 최고 요리 토크쇼!”
탕. 탕.
“최고의 한 끼!!”
매번 TV에서 보던 인트로였다.
그제야 비로소 감이 왔다. 진짜 촬영이 시작됐다는 게.
그렇다면 다음 차례 역시 정해져 있었다.
‘게스트 소개.’
기본적으로 ‘최고의 한 끼’는 단순 요리 프로그램이 아닌 토크쇼였다.
요리만큼이나 토크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뜻.
당연히 바로 요리를 시작하지는 않았다.
“자, 오늘의 게스트를 소개합니다! 특별히 오늘은 네 분을 모셨는데요!”
역시 예상대로의 첫 순서.
안경을 낀 아나운서 출신 MC 이성주가 말을 이었다.
“먼저,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한 분들이죠? 수많은 팬들의 워너비!”
그룹명을 활용한 센스 있는 소개말이었다.
미리 들은 소식에 의하면 이번 방송은 2회로 방영되게 되어 있었다.
함께 촬영하긴 하지만 각 회차의 메인 게스트는 달랐다.
‘첫 회가 워너비고, 그다음이 나랑 연두지.’
방송도 메인 게스트에 초점을 맞춰 진행하게 된다.
간단히 말해 ‘워너비’가 메인인 회차에서 나와 연두는 패널 역할이란 뜻이었다.
이어지는 회차에서는 역할이 바뀌게 되겠지만.
‘소개도 그 순서대로인 모양이네.’
자연스레 두 멤버는 미소를 띠며 카메라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선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Falling for us! 안녕하세요, 워너비입니다!”
난데없이 튀어나온 영어.
비루한 실력으로 해석해 보자면 ‘우리를 향해 빠지는~’. 대충 그런 의미인 거 같았다.
잠깐 그런 생각에 빠져있는 사이에 들려오는 말.
“자, 이분들은 말이죠. 마찬가지로 지금 가장 핫한 유투브 크리에이터입니다! 국내를 넘어 세계까지 뿌셔뿌셔! 한 번 보면 헤어나올 수 없는 사랑스러운 부녀!”
그렇게 말하며 나를 향해 손짓하는 이성주.
손짓이 뭘 의미하는지는 굳이 생각할 것도 없었다.
PD로부터 미리 전해 들은 바가 있었으니까.
‘간단한 인사말을 준비해 달라했지.’
그 덕에 크게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다.
방금 먼저 인사하는 ‘워너비’ 멤버들을 본 것도 도움이 됐고.
연두의 손을 꼭 잡은 나는 카메라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안녕하세요. 현재 연두튜브라는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연두 아빠. 초록..이라고 합니다.”
좋아. 이 정도면 선방이다.
수십 번을 혼자 중얼거리면서 연습한 보람이 있구나.
자연스레 나는 연두에게 바통을 넘겼다.
“자, 연두도 인사할까?”
“네, 아빠..”
대답과 함께 카메라를 바라보는 연두.
꾸벅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저는 여섯 쌀이고 초록 님의 예쁜... 딸 연두라고 해요..!”
나와 마찬가지로 미리 준비한 인사말이었다.
귀여운 인사에 나를 포함해서 웃음이 번지는 셰프들과 게스트, 그리고 MC.
그때였다.
이성주가 웃으며 주위를 향해 입을 열었다.
“잠깐. 이거 저만 눈치챘나요?”
***
즉석 질문에 안정훈이 멘트를 받았다.
“어떤 거요?”
“역시 부녀 아니랄까 봐. 초록 님과 연두, 둘 다 인사에서 더듬는 부분이 한 군데씩 있었거든요.”
“아, 그런가요? 어디죠?”
“초록 님은 초록이라고 소개하는 부분에서, 그리고 연두는 자기를 예쁘다고 하는 부분에서. 어때요, 정확하죠?”
셰프 중 한 명이 손뼉을 치며 호응했다.
“역시 전직 아나운서답게 단어에 민감하시네요.”
“흐하하, 당연하죠.”
셰프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 부분을 캐치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니까.
예상치 못한 정곡을 찔린 느낌이라 해야 하나.
“초록님이란 호칭이 조금 어색하신가 봐요, 초록 님?”
먼저 내게 들어온 질문.
메인 게스트가 우리가 아닌 회차임에도 먼저 질문을 던진다는 건, 처음인 만큼 긴장을 풀어주려는 의도가 담겨있을지도 모른다.
자연히 나는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그러게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보네요.”
이어지는 안정훈의 질문.
“저는 연두튜브를 최근 들어서야 알게 됐거든요. 그래서 궁금한 게 있는데 어쩌다 초록 님이 되신 거예요?”
있는 그대로 얘기하면 되는 질문이었다.
“사실 처음에는 딱히 구독자분들이 저를 부르는 명칭이 없었어요. 근데 점점 생겨나더라고요.”
“오호, 초록만 있었던 게 아니었나요?”
“네.”
“어떤 게 있었죠?”
“딸 이름이 연두다 보니 관련된 게 많았어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몇 가지 단어.
그걸 되새기며 나는 말했다.
“간단하게는 연두아빠라 부르는 분들도 있었고, 그중에서도 초록이랑 가장 많이 나오던 호칭은.. 연두부였어요.”
“연두부요?”
“네. 아마 연두에다가 한자 ‘부’를 붙여서 만든 합성어 같은데……”
얘기하던 나는 말을 멈췄다.
꾹꾹 웃음을 참고 있는 주위 표정들을 보고.
의아함 속에 들려오는 이성주의 말.
“흐흐, 아니, 초록 님.”
“네?”
“그런 썰을 왜 그렇게 진지하게 풀어요. 보니까 약간 이수호 셰프 과네.”
옆에서 맞장구치는 MC 안정훈.
“맞네, 맞아. 캐릭터 안 뺏기게 조심해야겠는데요, 이수호 셰프?”
로봇 캐릭터답게 눈만 커다랗게 떠서 위기감을 드러내는 이수호.
그 모습에 괜히 뻘하게 웃음이 터질 뻔했다.
전에도 느낀 거지만 이 셰프. 세상 재밌는 사람이 노잼을 연기하고 있는 느낌이다.
“근데 이수호 셰프랑 다른 게 있어요.”
“뭔데요?”
“초록님은 웃겨. 합성어에서 나 배꼽 빠질 뻔했잖아.”
막상 당사자인 나는 정신이 혼미했다.
웃음을 의도하고 한 말도 아닐뿐더러 그냥 질문에 충실히 답한 거뿐이니까.
‘이게 예능의 맛인가?’
말 한마디에 수십 개의 반응이 이어진다.
방송 전에 이성주가 했던 얘기의 의미가 비로소 와 닿는 기분이었다.
짓궂은 이야기가 오갈 수 있으니 이해해 달라는 말.
‘사실.’
별것도 아닌 말에 이렇게 웃어준다면 나로서는 좋은 일이었다.
게스트로 나와서 꿀 먹은 벙어리처럼 앉아 있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렇다면 한 발 더 치고 나가자.
“의도치 않게 웃겼다니 다행이네요. 저 진짜 핵노잼으로 유명해서 한 명 빼고는 거의 안 웃어주거든요.”
이번에는 의도가 다분했다. 일부러 로봇 말투를 구사했으니까.
최근 배운 신조어 사용에 다시 한번 터지는 웃음.
안정훈이 웃으며 묻는다.
“그 한 명이 누구죠?”
“연두요.”
“푸흣.”
좋아. 성공했다.
평생 해 보지 못한 트리플 연타를 예능에 나와 터트리다니.
짜릿한 기분과 함께 다시 한번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이게 예능의 맛인가?’
누군가를 웃게 만드는 게 가장 좋다는 예능인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 거 같았다.
앞에서는 워너비의 재은과 유진이 서로를 쿡쿡 찌르며 말을 주고받았다.
“봐. 은근히 유잼캐라고, 초록 님.”
“나도 알아!”
착각인가?
뭔가 나에 대해 알고 있는 거 같은 느낌인데.
깊게 생각할 틈도 없이 이어지는 진행.
“아무튼 최종적으로 초록이 승리한 거군요. 초록과 연두부의 치열한 싸움에서.”
“그렇다고 볼 수 있죠.”
다시 로봇 말투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조금은 이 컨셉을 유지해야 할 거 같았다.
이번에는 연두를 향한 MC의 질문.
“그럼 우리 연두. 예쁜 연두라고 하는 부분에서 말을 더듬었어요. 다른 부분은 또박또박 잘 얘기했는데. 맞나요?”
아빠미소를 지으며 이성주가 질문했다.
나와 마찬가지로 정곡을 찔려서인지 연두가 자그맣게 입을 열었다.
“.. 마자요.”
“왜죠?”
“쑥쓰러어서요...”
그럴 만도 했다. 애초에 연두가 정한 멘트가 아니었으니까.
평소에도 자화자찬하는 연두의 모습을 보는 경우는 정말 드물었고.
수줍어하는 연두의 반응에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 이성주.
“그럼 아저씨가 쑥스러운 연두한테 쑥스러운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쑥스럽게 대답해 주세요.”
“아, 네에..”
“연두는 연두가, 그러니까 자기가 예쁜 거 알고 있어요?”
이건 예전에 내가 했던 질문인데.
분명히 당시에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던 연두였다.
따라서 나도 궁금했다. 이번에는 어떤 대답이 나올까.
“조, 조그미요..”
오, 의외의 대답이었다.
내심 여전히 모른다고 대답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어지는 안정훈의 물음.
“조금 알아요? 연두가 예쁜 거.”
“네에..”
“왜 많이 안 알고 조금 알아요?”
진짜 여섯 살 연두 맞춤 질문이네.
셰프를 포함한 모든 출연진이 연두를 바라봤다.
조심스레 연두가 입을 열었다.
“원래는요.. 연두가 예쁘지 안았는데요..”
“예쁘지 않았다구요?”
“네에.”
“네에. 그런데요?”
“그런데.. 아빠가 연두 마니 예쁘다고 하고, 구독자분들도 연두 예쁘다고 말해서요...”
“말해서요?”
끝말잇기 대화법에 능숙한 축구선수 출신 안정훈 MC.
역시 아이가 있다 보니 답을 끌어내는 게 뛰어나다.
수줍게 연두는 대답했다.
“그래서 연두가 조금 예뻐져써요..”
“아, 그럼 주위에서 예쁘다고 해 줘서 알게 된 거네요? 연두가 조금 예쁘다는 사실을.”
“네. 그리고……”
“그리고?”
나도 자주 사용하는 화법이긴 한데.
이렇게 제삼자의 눈으로 보니 정말 만능인 느낌이다.
“오늘은 조금보다 조금 더 예뻐써요..”
“조금보다 조금 더 예뻤다구요?”
“네에.”
“뭐가요?”
“거울에 연두...”
자연스레 내 입가에 번지는 웃음.
아무래도 오늘은 연두의 눈에도 꽤나 예쁘게 보인 모양이다.
거울 속에 비친 스스로의 모습이.
‘손에 꼽을 정도지.’
여태껏 그런 경우는 한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 사람들의 눈에 얼마나 예쁘게 보일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
옆에서 들려오는 박동 셰프의 말.
“와.. 저 이런 적 처음이에요.”
“뭐죠, 박동 셰프?”
“거울 속 자신이 예뻤다는 말 듣는데 이렇게 헤벌레 웃은 적요.”
옆에 앉은 워너비 멤버들도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하기야 일반적으로는 공주병 느낌을 강하게 풍길 수 있는 멘트긴 하지.
그러나 모두들 느낄 터였다. 연두의 말에 전혀 그런 의도는 없다는 거.
“왜 연두연두하는지 알겠네요.”
“진짜.. 너무 귀엽다...”
“이호연셰프. 이게 그렇게 말하던 연두성분이에요?”
“그렇죠. 어때요?”
“어떡하지? 나 벌써 중독된 거 같아.”
의도치 않게 연두성분을 스튜디오 내부에 퍼트린 연두였다.
***
초점은 자연스레 워너비 멤버들에게로 돌아갔다.
“자, 재은 양.”
워너비의 리더 재은이 대답했다.
“네.”
“아시겠지만 우리 ‘최고의 한 끼’가 굉장히 유서 깊은 프로그램이잖아요? 벌써 300회를 향해 달려가고 있고.”
“...?”
물음표가 떠오른 재은의 표정.
그만큼 뜬금없는 이야기이긴 했다.
이성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저희 제작진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연습생 시절부터 ‘최고의 한 끼’를 그렇게 나오고 싶었다고 하던데요.”
“아!”
“팩트체크 들어갑니다. 진짭니까?”
이 얘기를 하려고 유서 어쩌고 하면서 깔아 둔 거였구나.
의도를 눈치챈 재은도 쿡쿡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맞아요. 연습생 때 잘 못 챙겨먹고 그럴 때 진짜 한 회도 빠짐없이 챙겨봤거든요.”
“오, 정말요? 한 회도 빠짐없이?”
“네. 멤버들이랑 같이 입맛 다시면서……”
옆에서 유진도 입을 열었다.
“그래서 신기해요. 뭔가 셰프님들도 다 연예인 같고.”
“네. 저희들의 연예인 같은 느낌……”
두 멤버의 칭찬에 어깨가 으쓱 올라가는 셰프들.
그런 와중 이풍이 씩 웃으며 입을 연다.
“아, 뭐 사인해 줄까?”
“푸흣.”
적절한 타이밍에 터져 나온 센스있는 멘트.
출연진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웃음을 터트린다.
웃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감탄이 일었다.
‘멀었구나.’
애정자로서 확신할 수 있었다.
방금 멘트는 100% 방송에 나올 거라는 거.
열띤 반응에 이풍은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
“사진은 어려워도 사인은 어렵지 않은데, 으하하하!”
“...”
이번에는 정반대의 원성이 쏟아진다.
“아유, 증말.”
“꼭 이 절을 한다니까.”
얼떨떨한 표정의 이풍 셰프.
거기서 나는 한 가지 교훈을 더 얻을 수 있었다.
‘치고 빠지는 게 엄청 중요하구나.’
그렇다 해도 사실 분위기 자체는 무척 즐거웠다.
애초에 서로 디스하는 것도 전부 예능적 재미를 살리기 위한 거고.
우습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디스 좀 해 줬으면.’
아까 정도가 아니라 강력한 디스 말이다. 전혀 없었던 욕심이 조금 생긴 느낌이다.
웃길 수 있다면 웬만한 디스는 전부 버텨낼 수 있을 거 같은 기분.
물론 지금은 그 타이밍이 아니었다.
‘지금 메인 게스트는 워너비니까.’
그런데 뜻밖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워너비?”
“네.”
“네.”
안정훈이 의도적으로 진지한 목소리를 연기하며 말했다.
“또 제작진이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진짜 워너비의 연예인은 우리 셰프들이 아닌 거 같던데요?”
“아...”
무슨 말인지 눈치챈 듯한 워너비의 멤버들.
그와 별개로 나는 조금도 감이 오지 않았다.
연두는 말할 것도 없고.
“워너비가 진짜 애정하고 덕질하는 분들이 바로 이 자리에 있다고 하던데. 이것도 팩트체크 들어갑니다. 맞나요?”
이게 무슨 소리지?
셰프가 아니라면 이 자리에 있는 건 MC와 나랑 연두뿐인데.
미안한 얘기지만 이성주님을 좋아했을 거 같지는 않고.
‘축구선수 안정훈?’
또 미안한 얘기지만 그러기에는 세대 차이가 조금, 아니 꽤나 있었다.
생각해 보면 뭔가 이상하긴 했다.
처음 인사할 때 표정도 그렇고, 이후에 둘이 속닥이던 대화까지.
‘설마..’
퍼즐이 하나둘 맞춰지는 기분.
마지막 빈칸은 워너비 멤버들의 말이 채웠다.
“사실 저희 워너비가.. 연두튜브의 엄청난 팬이거든요.”
전혀 생각지 못한 팬을 마주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