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사랑해, 연두야!
“이주원 작가의 ‘그 날의 감정’입니다!”
가까스로 떨림을 가라앉히며 앞을 바라봤다.
대형 스크린은 내가 그린 ‘그 날의 감정’ 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회자의 말이 이어졌다.
“본 작품은……”
나도 모르게 주먹을 꾹 쥔 채 사회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정확히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개인적으로 무척 기다리던 시간이었으니까.
‘심사평.’
궁금했다.
내 그림의 어떤 부분이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인 걸지.
어떤 이유로 대상을 받게 된 걸지.
“본 작품은 다양한 색채를 활용해 화자의 ‘그 날의 감정’을 드러냈다. ‘그 날’에 대해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돋보이는 여러 요소들이 있다.”
사회자는 천천히, 또박또박 심사평을 이어갔다.
“언뜻 보기에는 정리되지 않은 색의 혼합처럼 보이지만 본 그림은 여러 층을 갖는 구조이다. 어떤 층에는 인간의 불안감과 분노, 혼란과 공포 등의 감정을 드러낸 것으로 보이고, 반대편에는 그와 대비되는 텃세와 권력, 또는 부조리함이 느껴진다.”
나로서는 놀랄 수밖에 없는 심사평이었다.
어떤 관점에서는 나보다도 더 내 그림을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앞선 작품들에 비해 확연히 긴 심사평이 이어졌다.
“단순히 부조리함과 텃세에 저항하는 개인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 경계가 모호해지는 층 또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 공간을 나타내고 있지만 아예 이질적으로 표현된 부분 또한 존재한다.
화자가 지키고 싶어하는 것. 이상과 현실 간의 충돌.
“...”
담담한 어조로 읽는 심사평 한 줄 한 줄은 내게 큰 충격을 가져다줬다.
솔직히 대상인 걸 알고 나서도 생각지 못했다.
심사위원들이 내 그림을 이 정도의 깊이로 감상했을 거라고는.
‘그냥 하는 게 아니구나. 심사위원.’
그런 놀라움과 동시에 든 감정은 기쁨이었다.
전해졌다는 사실에서 오는 기쁨.
어쩌면 조금도 전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 날의 감정’은 나 혼자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일지도 모른다고.
‘.. 아니었어.’
심사평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사건은 전할 수 없어도 감정은 훌륭히 전달했다는 사실을.
다른 무엇도 아닌 그림을 통해서 말이다.
스윽.
자연스레 입가에 번지는 미소.
뒤늦게 옆에 앉아있는 최표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인지 아직도 스크린에 시선이 고정된 상태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이윽고 사회자의 마무리 멘트와 함께 들려왔다.
“그럼 이주원 작가님. 앞으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그제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연스럽게 쥐고 있는 주먹을 폈다.
땀이 많은 편이 아닌데도 손에 흥건히 맺혀있는 땀.
‘나 엄청 긴장했구나.’
괜찮다. 이제 더이상은 긴장할 필요 없으니.
심호흡과 함께 앞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망설임 없이 당당하게.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연두를 위해서.
***
뒷좌석에 앉은 선우영.
미술 공모전 시상식인 만큼 처음부터 시선을 떼지 않았다.
시종일관 턱을 괸 삐딱한 자세이긴 했지만.
결국 한 소리 들었지.
“인마. 자세가 그게 뭐야.”
괜히 선우영은 반대쪽으로 바람을 후 불며 중얼거렸다.
“어휴, 학교도 아니고……”
“뭐? 궁시렁대지 말고 크게 말해, 이 녀석아.”
“아니에요.”
선우영은 고개를 휙휙 저으며 팔짱을 끼고 앉았다.
하여간 학교든 어디서든 잔소리가 떠날 틈이 없는 선생님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옆을 바라보는데.
‘.. 어?’
주원이형의 딸, 땅콩이 턱을 괴고 앉아있었다.
키가 작아서 제대로 괴지도 못하면서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자세로.
벙찐 표정으로 얼마간 선우영은 연두를 바라봤다.
‘설마 내 자세를 따라 앉은 건가?’
그렇게 생각할 만한 게,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땅콩이 이런 자세로 앉는 건.
더군다나 어디선가 들은 적도 있었다.
‘애들은 어른을 따라하는 걸 좋아한다고 했지.’
선우영이 생각할 때 자신은 명백히 어른이었다.
특히나 이 조그마한 꼬맹이한테는 더더욱.
머릿속에 고민이 스쳤다.
‘바로잡아줘야 하나?’
만약 그런다면 조금은 우스운 일이었다.
선생님한테 자세 지적을 받고 툴툴거린 게 불과 얼마 전인데.
모순되는 일 아닌가.
그래. 괜한 참견 말고 놔두자. 내가 그런 성격도 아닌데.
마음먹은 선우영은 다시 스크린을 바라봤다.
“......”
허나 그 생각은 얼마 가지 못했다.
보지 않고 있는데 보였다. 옆에 턱을 괴고 어정쩡하게 앉아있을 땅콩의 모습이.
이런 답답한 기분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왜지.’
왜 이렇게 이 꼬맹이가 신경이 쓰이는 걸까.
그때 머릿속에 아까 주원이형이 건넨 말이 떠올랐다.
연두를 잘 챙겨 달라는.
그래. 이건 그 말 때문이다.
친한 형의 말을 무시한 채 가만히 둘 수는 없으니.
철저히 그 말에서 비롯된 참견인 거다.
“.. 땅콩.”
결국 선우영은 고개를 돌려 연두를 불렀다.
들려오는 이름에 그대로 턱을 괸 채로 고개를 돌리는 연두.
“네, 우영이오빠..!”
“...”
그렇게 마주친 둘의 시선.
무언가를 깨달은 선우영이 휙 고개를 돌렸다.
‘.. 뭐냐.’
우영은 벙찐 기분이 들었다.
착각이 아니라면 방금 입꼬리가 올라갔던 거 같다.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의 입꼬리가. 자기도 모르게.
‘왜 웃은 거지?’
생각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한편 그런 우영을 바라보는 연두는 의아할 따름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름을 부르더니 아무 말도 안 하고 휙 고개를 돌리는데.
“.. 오빠?”
그제야 선우영은 정신을 차리고 본론을 꺼냈다.
평소대로 너무 본론만 꺼내는 화법이었다는 게 문제지만.
당황한 감정까지 섞여 더더욱 그랬고.
“바, 바르게 앉아. 땅콩.”
뱉고 나서 스스로 생각해도 웃겼다. 이건 뭐 교감선생님 훈화말씀도 아니고.
이미 뱉은 이상 주워담을 수도 없는 노릇.
최근 들어 처음이었다. 말하고 나서 후회하는 건.
“바르게여..?”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최소한 당당하게 밀고 나가는 수밖에.
“그래. 바르게. 너 그렇게 앉으면 허리 다친다.”
다친다는 말에 연두는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어떠케요? 어떠케 바르게 안자요..?”
“우선. 턱에 괸 손 빼.”
“.. 네!”
일단 말은 잘 듣고 보는 연두였다.
구부린 자세에서 손만 빼니 더욱 어색해진 자세.
그 모습에 다시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고 우영은 말했다.
“고개 들고, 허리 펴고, 팔은 나처럼.”
“네, 네..!”
꼿꼿하게 편 바른 자세.
그 자세로 고쳐 앉은 후에야 연두는 말했다.
“연두 잘 안자써요..?”
“그래.”
홍수찬은 소리없이 낄낄거리며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고개를 돌리는 우영.
하지만 여기서 끝낼 연두의 호기심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영이오빠.”
“왜.”
“오빠는 왜 바른 자세로 안 안자요..? 허리 아야하면 안 대는데……”
“...”
역시나. 따라한 거 맞구나.
따지려는 게 아닌 걸 아니 짜증을 낼 수도 없었다.
표정만 봐도 순수 호기심이었으니까.
‘심지어..’
심지어 걱정의 시선까지 묻어나 있다.
어차피 말은 잘 들을 텐데 괜히 말했네. 허리 다친다고.
생각 끝에 우영은 어색하게 대답했다.
“나, 나는 어른이니까!”
“푸흣.”
결국 반대편에서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린 홍수찬.
그럼에도 연두의 질문은 그치지 않았다.
“어, 어른 대면 허리 안 다처요? 바르게 안 안자도..?”
“하아..”
깊은 한숨과 함께 우영은 검지를 입에 가져다댔다.
그 제스처를 아는 연두가 중얼거렸다.
“쉬..?”
“그래. 조용히 해.”
“왜여..?”
조용히 하라니까 소리를 죽여 또 묻는다.
“그건 나중에 대답해 줄게. 그러니까 이제 조용히. 알겠어?”
“네에..”
어떻게 상황을 마무리하긴 했는데 눈을 마주친 또 다른 사람.
그는 바로 홍수찬선생님이었다.
‘아오, 진짜..’
웃겨 죽으려는 표정이 얄미워 죽을 거 같다.
우영은 휙 고개를 돌렸다.
***
“네, 다음은……”
다시금 스크린에 고정한 선우영의 시선.
기다리는 건 주원이형의 그림이 호명될 대상 발표 시간뿐이었다.
그러나 미술 공모전인 만큼 다른 그림이 나올 때도 유심히 감상했다.
‘생각보다 재밌네.’
수준 이하의 작품이 많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의외로 톡톡 튀지는 않지만 기본기는 전부 나쁘지 않았다.
확실히 규모가 큰 공모전 티가 나는 퀄리티였다.
특히나 한 번 놀랐던 타이밍이 있었다.
우수상 수상자 두 명 중 한 명인 최표식이라는 작가가 그린 공존.
별로 흥미가 가는 주제는 아니었지만, 그림 자체는 시선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다.
방금 그림과 같은 우수상이라도 선우영의 감상 기준에서는 수준 차이가 극명했다.
‘우수상 수상자가 한 명이었다면.’
분명히 이 작품이 단독으로 우수상을 차지했을 터였다.
대상이라고 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정도로 뛰어난 그림이었으니까.
그 증거로 옆에 있는 홍수찬선생님도 뚫어져라 작품을 바라보고 있다.
두근. 두근.
동시에 설렘은 증폭됐다.
이 그림을 제치고 대상을 차지한 주원이형의 그림에 대한 기대감에.
전에 일부러 보지 않은 건 탁월한 선택이었네.
마침내 호명되는 이름.
“이번 청년작가 미술 공모전의 대상 수상작은.. 이주원 작가의 ‘그 날의 감정’입니다!”
동시에 스크린에 떠오른 그림.
선우영은 시선을 스크린에 고정한 채로 그대로 얼어붙었다.
“본 작품은……[email protected]&[email protected]“
사회자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은 순수한 감상의 시간이었으니까.
‘대체……’
일차적으로는 그림이 떠오르는 순간 빨려들었다.
다음에는 눈에 들어왔다.
정해지지 않은 틀 속에서 날뛰는 색채들과 요동치는 감정들이.
‘.. 달라.’
기존의 전통 서양화, 동양화 방식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래. 탈피했다는 표현이 어울리겠다.
잘 그렸을 거라고는 생각했다. 그야, 대상이니까.
‘착각이었어.’
얼마나 잘 그렸을까 생각할 게 아니었다.
이 작품은 그저 놀라웠다.
“그럼 이주원 작가님. 앞으로……”
결국 이름이 호명될 때까지 어떤 심사평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미술은 그런 장르니까.
터벅. 터벅.
앞으로 걸어나가는 이주원의 모습.
선우영은 씩 웃으며 그 모습을 바라봤다.
‘저 사람.. 아까 홍원대 미대 교수라고 소개했지.’
유호걸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교수.
최정상 미술대학의 교수답게 풍채가 남달랐다.
하얀 수염에 짧지 않은 백발, 그리고 다소 길게 떨어지는 정장.
우영은 최정상 미대를 꿈꿨다.
어쩌면 미래 스승이 될 사람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온화한 미소를 띠며 짧은 인사와 함께 이주원에게 상패를 건넸다.
“축하해요.”
“네, 감사합니다.”
이어지는 사회자의 멘트.
“네, 축하드립니다. 대상 수상자에게는 상금 3000만원과 상패, 그리고 개인전 및 그룹전이 주어집니다.”
대상인지라 확연히 차이가 있는 시상내용이었다.
“그럼 대상 수상자의 수상 소감을 들어볼까요?”
사회자의 말에 따라 마이크 앞에 서는 이주원.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선우영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야, 땅콩. 너네 아빠…… 어?”
선우영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또르르.
옆에 앉은 땅콩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으니까.
잠깐만. 뭔데?
소리가 전혀 안 나서 모르고 있었다.
‘어떡하지?’
선생님은 전혀 눈치 못 챈 듯하다.
무의식중에 얼굴을 향해 손을 뻗다가 다시 돌아왔다.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땅콩이 우는 건 처음 보니까.
“자, 잠깐만. 땅콩.”
“훌쩍. 네에...”
그 와중에 대답은 또 한다.
눈물은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데.
우영은 당황해서 말했다.
“그만 울어. 왜 그래, 너네 아빠 상 받는데. 우는 게 아니라 웃어야지.”
“.. 모르게써요.”
“뭐?”
“이상해요..”
이제는 홍수찬선생님도 눈치를 챘다.
사제관계답게 대처 능력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왕방울만해진 눈으로 아무 말도 못한다.
“연두는.. 너무 행보카면 우러요... 아빠 진짜진짜 행보캐 보여서…… 연두도 행보캐져서……”
울음이 차서 말도 제대로 못 한다.
까슬까슬한 소매를 들어 닦으려는 연두의 손을 누군가 붙잡았다.
다름아닌 선우영이었다.
“.. 그걸로 닦으면 다친다.”
우영은 자신의 옷소매로 연두의 눈물을 닦아줬다.
그리고선 말했다.
“그만 울어. 행복해서 우는 거여도.”
“...”
“형이 이제 너 볼 거야. 근데 울고 있으면 어떻겠냐. 넌 아빠 울면 어떨 거 같아.”
“... 슬퍼요.”
“그래. 그러니까 그만 울어.”
그 말이 맞았다.
소중한 사람의 우는 모습을 보는 건 무척 슬픈 일이니까.
아빠가 보기 전에 빨리 눈물을 지워야 했다.
문질. 문질.
다급한 마음에 냅다 앞에 있는 면으로 눈물을 닦은 연두.
아직 치우지 않은 우영의 옷소매였다.
“야, 야!”
아차 하고 연두가 말했다.
“자, 잘모태써요!”
“.. 됐어. 아빠가 보면 웃기나 해.”
“네에..”
연두의 눈물로 흥건해진 옷소매를 우영은 도로 가져갔다.
스윽.
이후 오빠의 말대로 연두는 아빠를 바라봤다.
멋진 옷을 입고 마이크 앞에 선 모습을.
이윽고 들려오는 아빠의 목소리.
“우선 대상을 받게 되어 정말 기쁘고 영광입니다. 제게 큰 의미가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더더욱 그렇구요. 모순적이게도 가장 마주하고 싶었던 감정임과 동시에.. 가장 마주하기 두려웠던 감정이기도 하거든요.”
이주원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며 말했다.
“그림을 그리는 걸 두려워했던, 손에 무언가를 쥐는 것조차 거부감을 느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건……”
그의 시선이 움직였다.
눈동자는 무언가를 애타게 찾고 있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움직임이 멎었다.
“아빠...”
연두는 알 수 있었다.
먼 거리지만, 아빠와 시선이 마주쳤다는 걸.
그렇다면 해야 할 건 정해져 있었다.
“아빠.. 아빠아...”
원래도 웃고 있었지만, 부족했다.
연두는 지을 수 있는 가장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웃으며 아빠를 바라봤다.
“제 딸 연두 덕분입니다. 제게 있어서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죠.”
“...”
“이 영광을, 오롯이 연두에게 바칩니다.”
이후 연두의 눈에 들어왔다.
그 어느 때보다도 환한, 아니 환하다 못해 반짝반짝 빛나는 아빠의 웃음이.
수상 소감을 끝맺은 건 짧고 굵은 한 마디였다.
“.. 사랑해, 연두야!”
자연스레 한곳으로 쏠리는 시선.
지금만큼은 시상식의 주인공이 된 연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