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7화. 영입
“연두야.”
“네에.”
“제대로 알려줄게. 밴드가 뭔지.”
밴드를 하려면 그 정의부터 확실히 알아야 하는 법.
멋지고 폼 나는 밴드가 뭔지 연두에게 알려줄 차례였다.
툭.
먼저 카메라를 적당한 곳에 세팅한 뒤에 불을 껐다.
깜깜해진 방 내부.
당연한 얘기지만 이대로 책을 읽을 수는 없었다.
달칵.
내가 누른 버튼은 다름아닌 침대 옆 스탠드 조명이었다.
은은하게 퍼지는 주황색 빛.
이것만으로 나름 느낌있는 분위기를 낼 수 있었다.
“어때, 연두야?”
“예뻐요..”
그보다 훨씬 더 예쁜 연두를 안아서 무릎에 앉혔다.
동화책을 읽을 때는 항상 이 자세였다.
처음에 ‘호랑이와 곶감’을 읽어줄 때도 마찬가지였지.
‘그때와 달리.’
얼굴을 공개했기에 카메라 각도를 신경쓸 필요는 없었다.
그리 의식이 되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처음에는 꽤나 어색함이 있었는데.
이것도 나름 발전이라면 발전이라 볼 수 있겠지.
별 거 아닌 사실에 뿌듯함을 느끼며 말했다.
“그럼 연두가 제목만 다시 한 번 읽어줄래?”
“네!”
힘차게 대답하고선 연두가 제목을 읽었다.
“브래맨.. 음악대!”
“잘했어.”
앞으로 따봉을 내밀었다.
한 번 읽어준 덕인지 아까보다 한층 정확해진 발음이었다.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해 줄 얘기가 있었다.
“연두야.”
“네..”
“레나가 어느 나라에서 왔다고 했지?”
모르면서 묻는 게 아니었다.
육아 서적에 따르면 아이와 대화할 때는 최대한 의문형으로 대답을 유도하는 게 좋다고 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새 입에 붙은 화법이었다.
연두가 대답했다.
“도길이요!”
도길이라 하니까 꼭 사람 이름 같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치. 독일에서 왔다고 했지?”
“네.”
“그럼 레나도 이 동화책을 잘 알고 있을 거야.”
“왜여..?”
“왜냐하면 이건 독일 사람이 그린 동화책이거든. 그러니까 독일을 대표하는 동화책인 거지.”
이것까지 의도해서 구매한 건 아니지만, 공교롭게도 레나의 출신과 동화책의 국적이 겹쳤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긴 했다.
브레멘이라는 지명 자체가 독일 느낌을 물씬 풍겼으니까.
‘개뿔도 모르긴 하지만.’
독일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는 사실은 하나뿐이었다.
소시지와 맥주가 유명하다는 것.
어, 잠깐! 생각해 보니 맥주는 몰라도 소시지는 연두와 관련이 있잖아.
바로 덧붙여 얘기해줬다.
“그리고 연두야.”
“네, 아빠.”
“독일에서는 연두가 좋아하는 소시지가 엄청 유명해.”
“쏘시지가요?”
“응, 소시지.”
“.. 흐릅.”
바로 입맛을 다시는 모습에서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나저나 내 상식이 빛을 발할 때가 있다니.
또 한 번 뿌듯함을 느끼며 나는 말했다.
“아무튼, 연두는 레나한테 밴드를 같이 하자고 말해야 하잖아.”
“네.”
“그럼 이 동화책이 큰 도움이 될 거야.”
사전 설명에 더 호가심이 동한 연두의 표정.
눈을 반짝이며 말한다.
“연두 빨리 보고 시퍼요..”
“하하, 그래.”
그렇게 브레멘 음악대 속으로 탐험이 시작됐다.
***
동화를 읽기 시작한지 얼마나 지났을까.
‘.. 잠깐만.’
이야기의 초반부터 당혹스러운 상황이 발생했다.
연두의 눈물샘이 터지기 직전이었다.
“우으...”
입을 다문 채로 꾹꾹 울음을 참아내는 소리.
감수성이 풍부하고 이야기에 몰입을 잘 하는 만큼, 슬픈 내용을 보면 눈물을 보이는 경우가 있긴 했다.
그렇긴 한데 지금의 경우는 예상 못했다.
‘몰랐으니까.’
정확히는 너무 오래된 터라 기억을 못했다.
브레멘 음악대에 이런 내용이 있었는지.
혹시나 각색이 첨가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내가 봐도 슬픈 내용이었다.
“늙은 당나귀는 젊은 시절 가족들을 위해 열심히 일했어요. 아무리 무거운 짐이라도 마다하지 않았죠.”
가장의 무게를 보여주는 처음 파트.
여기까지는 나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연두는 바로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림을 보며 담담히 다음 내용을 읽어내려갔다.
“그러다 허리도 다치고 무릎도 다쳐 늙은 아빠 당나귀는 아프지 않은 곳이 없게 되었어요.”
늙고 병든 당나귀가 집을 나가며 시작되는 스토리인 만큼 이 내용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기억에 없는 배경 스토리가 존재했다.
연두의 눈물샘이 차오른 부분도 바로 이 파트였다.
아들.
나쁜 캐릭터는 늙은 당나귀에게 밥을 주지 않는 주인뿐이라 생각했는데.
내 기억에는 없는 아들 당나귀가 등장했다.
이 녀석이 복병이었다. 주인보다 더한 놈이었으니까.
“어서어서 많이 먹고 예쁘게 크렴. 내 새끼들.”
“당신도 좀 먹어요. 너무 말라서 마음 아프니까..”
아내와 아이들 앞에서는 이런 스윗가이가 따로 없다.
그런데 이 자식이 늙은 아빠 당나귀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밥을 나누어드리기는 커녕 구박까지 한다.
앓는 티 아픈 티 좀 그만 내라고. 아빠만 힘든 줄 아냐고.
그러면서 은근히 사라졌으면 하고 눈치를 주는 게, 직접 쫓아내지만 않았지 당나귀판 고려장이나 다름없었다.
“나빠!!”
연두의 분노가 폭발하게 만든 파트였다.
“나빠요! 으으.. 아들 당나기 너무 나빠! 진짜 마니마니 나빠요!”
동화책을 보며 이렇게 화가 난 연두는 처음이었다.
얼굴까지 뻘겋게 달아올랐다.
수줍거나 기분이 좋아서 붉어질 때와는 차이가 있었다.
연두티콘 속 ‘화 난 연두’ 수준이 아닌 진또배기 화 난 표정이었다.
비유가 이상하긴 하지만 마치 단시간에 열을 잔뜩 받은 스팀다리미 같다고 해야 할까.
콩! 콩!
심지어 자그마한 두 주먹을 꼭 쥐고 동화책 속 아들 당나귀를 때리기까지 한다.
내 눈에는 놀랍다 못해 신기한 장면이었다.
연두가 주먹을 쓰다니.
“지, 진정해, 연두야.”
처음 보는 모습에 조금 쫀(?) 나는 조심스레 연두를 진정시켰다.
진정시키는 데 꽤나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이로써 알게 된 사실은 하나였다.
‘못 참는구나.’
다른 건 몰라도 연두가 불효에는 절대로 못 참는다는 사실을.
그렇게 화 나게 한 장면이 넘어가고 바로 이어졌다.
연두를 슬프게 만든 장면이.
“미안하다..”
집을 떠나기로 결심한 아빠 당나귀.
세상 아련한 표정으로 문을 나서며 중얼거린다.
“미안하다, 아들아. 이제 늙어서 너에게 짐만 되는구나..”
정확히 이 부분이었다. 연두를 흐느끼게 만든 부분.
솔직히 내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대사였다.
떠난 건 그렇다 쳐도 사과를 왜 해?
내가 저 상황이었다면 아들이고 뭐고 바로 목숨을 건 혈투를 벌였을 거다.
‘지긴 했겠지만.’
비록 병들고 무릎과 허리를 다쳐 이길 수 없겠지만.
그래야 억울하지라도 않을 거 아닌가.
아니, 내가 잘못 생각하는 건가? 모든 걸 바쳐 일하고 끝내 버려져도 사랑하는 마음.
그게 진정한 부모의 사랑인 건가?
‘확실히.’
생각하기도 싫고 그럴 일도 없을 테지만.
설사 연두가 나를 엄청 미워한다고 해도 결코 없을 거 같았다.
반대로 내가 연두를 미워하게 되는 일 따위는.
그만큼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끊어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건 아니었다.
‘미친놈이야.’
이 아들 당나귀는 미친 자식이었다.
그리고 확실히 명작은 명작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떻든간에 초반 스토리만으로 이렇게 나와 연두의 감정을 끌어내는 걸 보니.
“괜찮아, 연두야.”
“아빠.. 아빠 당나기... 흐윽, 아빠...”
“...”
잠깐. 아빠랑 아빠 당나귀를 교차해서 말하니 뭔가 굉장히 미묘한데.
내가 아빠 당나귀가 된 거 같은 기분이라 해야 하나.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걱정하지 마, 연두야.”
“아빠.. 아빠 당나기 마음 마니 아파여...”
아빠에 아파까지 추가되어 라임을 이룬다.
연두를 토닥이며 말했다.
“좋은 사람.. 아니, 좋은 당나귀잖아. 그러니까 아빠 당나귀는 분명히 행복해질 거야.”
“진짜요? 진짜.. 행보캐져요..?”
“응.”
그제야 조금 떨림이 잦아드는 연두.
쌕쌕 숨을 쉬더니 말한다.
“…… 꺼에요!”
“응?”
“연두는 사랑할 꺼에요! 아빠 마니 아파도..!”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
아무래도 노후 걱정은 안 해도 될 듯하다.
쭉 사랑해주는 딸이 있을 테니.
“아빠도 마찬가지야. 연두야.”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아까도 말했듯 내가 연두를 미워하게 될 경우의 수는 없었다.
희박한 수준이 아니고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세상이 멸망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아니지.’
멸망한다고 해도 연두를 아끼는 이 마음이 변하지 않은 채로 죽을 테니.
애초에 성립조차 되지 않는 가정이었다.
다시 이야기가 시작됐다.
“당나귀 프레드는 브레멘으로 향하던 길에 사냥개 버스터를 만났어요.”
브레멘으로 향하는 길에 당나귀가 만나는 동물 친구들.
차례로 사냥개 버스터, 고양이 그웬돌린, 수탉 토르텔리니를 만난다.
모두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있다.
“나는 늙어서 몸이 약해졌어.. 더는 사냥터를 누비지 못하니까 주인이 나를 때려 죽이려 하지 뭐야? 그래서 도망쳤어.”
“늙고 이빨이 약해져서 쥐를 잡을 수 없게 됐어..”
“우리 주인님 손님들이 오는데 나를 넣어서 국을 끓여먹고 싶다고 하지 뭐니?”
다소 잔인한 수탉의 사연까지.
연두는 말 그대로 컬쳐쇼크를 받은 표정이었다.
원래 고전 명화를 읽다 보면 이런 잔혹한 부분이 가끔 있었다.
“그럼 나랑 같이 브레멘으로 음악을 하러 가지 않을래?”
당나귀는 친구들을 하나하나 영입한다.
뛰어난 내 연기력 덕분에 연두는 이야기에 잔뜩 몰입한 모습이었다.
각자 특기인 악기를 가지고 있는 동물친구들.
브레멘 음악대를 결성한 넷은 나쁜 도둑들과 맞닥뜨린다.
“히힝! 멍멍! 야옹! 꼬끼오~!”
큰 울음소리를 내서 도둑들을 쫓아내는 동물 친구들.
도둑들이 다시 집을 탈환하려 돌아오지만 힘을 합쳐 무찌르는 데 성공한다.
곶감이 무서운 호랑이를 쫓아낼 때와 비슷한 맥락.
“우아..!”
무척 짜릿한 하이라이트 파트였다.
이후 브레멘 음악대, 즉 밴드를 결성한 넷은 멋진 음악을 연주한다.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는 스토리.
“어때, 연두야? 재밌었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연두가 벅차오르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빨리...”
“응?”
“빨리 만들고 시퍼요! 브레멘 음악대처럼 머찐 밴드!”
“하하, 그래.”
훌륭히 목적을 달성한 동화책 읽기였다.
***
다음날 단비어린이집.
낮잠시간이지만 천장을 바라보는 연두의 눈은 말똥말똥했다.
옆에서 시은이가 소곤소곤 물었다.
“연두야, 안 자?”
“으응.”
평소와 달리 잠이 오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아직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마지막에 세상 즐겁게 웃으며 악기를 연주하는 브레멘 음악대의 모습이.
낮잠시간이 지나면 바로 음악시간이었다.
“헤헤..”
그때 시은이와 레나에게 밴드를 만들자고 말할 생각이었다.
동물 친구들에게 함께 음악을 하자고 하던 당나귀처럼.
그럴 생각에 벌써부터 설렘이 가득 일었다.
“당나기..”
“응? 뭐라고?”
“시으나. 연두는 당나기야..!”
시은이 입장에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다짜고짜 당나귀라니.
비주얼적으로 연두와 당나귀는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데 말이다.
한편 연두는 옆에 잠든 레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레나는..”
바로 떠오르는 캐릭터가 있었다.
브레멘 음악대에서 바이올린을 켜는 동물은 고양이 그웬돌린이었다.
연두는 생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레나는 고양이..”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고양이와 레나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시은이가 물었다.
“연두야. 그럼 나는?”
“응?”
“나는 뭐야?”
“시으니는...”
남은 동물은 닭과 사냥개였다.
문제는 둘 다 시은이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고양이가 제일 어울리는데 레나가 고양이고.
끙.
자신이 당나귀인 건 상관없어도 시은이는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연두였다.
한참 고민하다가 연두가 입을 여는데.
“얘들아?”
“.. !”
들려오는 선생님의 목소리.
낮잠을 안 자고 수다떠는 걸 들켜버린 연두와 시은이였다.
약속이라도 한 듯 눈을 꼭 감는 두 아이를 유미경은 못 말린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바라봤다.
얼마 후 끝난 낮잠 시간.
“우으으...”
단잠에서 깬 레나가 기지개를 켰다.
그와 동시에 보이는 두 언니.. 가 아니라 친구 연두와 시은이.
낮잠에서 깬 거 치고는 눈이 너무 말똥말똥했다.
“음악시간이에요! 다들 모여 볼까?”
선생님의 말에 따라 이동하는 아이들.
모여앉은 와중 연두가 말했다.
“레나야.”
“응, 연두야.”
“있자나..”
한차례 뜸을 들이더니 연두는 말을 이었다.
“레나는 아라?”
“뭐를?”
“브래맨 음악대..”
뜻밖의 이야기에 레나는 놀란 표정으로 대답했다.
“응, 알아!”
모를 수가 없었다.
엄청 유명한 데다가 좋아하는 동화책이기도 했으니까.
레나는 바이올린을 켜는 고양이 캐릭터를 가장 좋아했다.
그 얘기를 하자 왜인지 연두는 입을 헤 벌렸다.
시은이도 마찬가지고.
척!
이후 연두가 레나의 손을 꼭 잡았다.
“레나야!”
“으, 으응?”
갑작스런 접촉에 당황한 레나가 얼떨결에 대답했다.
전혀 싫은 기분은 아니었지만.
연두는 손을 놓지 않은 채로 본론을 꺼냈다.
“연두도 만들고 시퍼..”
“뭐를?”
“브래맨 음악대처럼 머찐 밴드!”
놀랄 새도 없이 한 마디가 더 귀에 들어왔다.
“레나가 그엔돌리니 되어조...”
최애캐가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은 레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