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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바보가 되었습니다-381화 (382/850)

381화. 므야호

“설마.. 선동이요?”

“그래.”

선동이를 데리고 있으라는 할머니의 말.

데리고 있어 달라는 부탁보다는 데리고 있으라는 통보에 가까웠다.

이거야 할머니다운 화법이니 그렇다 쳐도.

‘맥락이 없잖아.’

이렇다 할 맥락 없이 다짜고짜 데리고 있으라 하니 나로서는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기간도 정해져 있지 않았고.

생각을 정리한 끝에 나는 의문점을 입 밖에 꺼냈다.

우선은 이유였다.

“왜요?”

“뭐?”

“갑자기 왜 선동이를 데리고 있으라 하시는지 궁금해서요.”

“갑자기는. 기억 안 나?”

“어떤 기억.. 아!”

그러고 보니 저번에 통화할 때.

잠깐 선동이가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녀석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엄마가 이번 수학시험 잘 보면 서울 보내준다고 약속했어.”

확실히 그런 말을 하긴 했다.

상경을 암시하는 말.

이어지는 서울구경을 시켜달라는 말에 연두는 흔쾌히 대답했지.

“네! 연두가 서울구경 시켜줄께요..!”

나 역시 흔쾌히 답한 건 아니었지만 통화의 말미에 서울구경을 시켜주기로 약속했다.

이렇게 빨리 성사될 줄은 몰랐지만.

약속을 한 이상 빼도 박도 못할 일이었다.

‘다만.’

생각지 못한 점은 있었다.

서울구경이라길래 부모님과 같이 오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선동이 혼자 올려보낸다는 느낌이 강하니까.

“일단 알겠어요. 그런데..”

“예쓰!!”

깜짝이야.

이건 할머니가 낼 법한 소리가 아닌데.

역시나 역정 섞인 할머니의 목소리가 핸드폰을 통해 귀에 들어왔다.

“귀청 떨어지겠다, 이놈의 새끼야. 예쓰는 무슨 예쓰야!”

누군지 감이 왔다.

조용해서 몰랐는데 선동이가 옆에 있었던 모양이다.

나랑 연두는 지금 막 일어났는데, 역시 시골이라 하루의 시작이 빠른 건가.

방금은 내가 허락했다고 생각해서 지른 함성이겠지.

‘짜식.’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가 그려져서 피식 웃음이 번졌다.

그래도 이대로 끝내는 건 시시하지.

잠깐 선동이를 바꿔 달라고 부탁한 뒤에 나는 말했다.

“오선동.”

“네, 아저씨.”

“그렇게 좋냐? 우리 집 오는 게.”

정확히는 연두를 보러 서울에 온다는 사실이 좋은 거겠지만.

막상 물어보니 녀석은 답한다.

“그렇게는 아니고요..”

“아, 그래? 그럼 알겠다는 말은 없던 걸로..”

“좋아요! 진짜 좋아요!”

“크크.”

진작에 이러지.

꼭 한 번 애매하게 말해서는 나를 자극시킨다, 이 꼬맹이는.

나는 웃으며 재차 입을 열었다.

“근데 선동이 너.”

“네.”

“수학시험 잘 본 거 맞아?”

“맞아요.”

“흐음.. 내 눈으로 본 게 아니니 믿을 수가 있어야지.”

“아니, 진짜 잘 봤다고요! 백 점이라고요, 백 점!”

“백 점? 그러니까 더 수상한데...”

“와나.. 와...”

계속해서 장난스레 속을 긁었다.

억울해서 말도 잘 못 하는 걸 보니 잘 본 게 맞긴 한 모양.

더 하면 울 거 같으니 이쯤에서 그만두려는데,

“맞아요, 백 점.”

“...?”

할머니도 선동이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웬 여성의 목소리에 당황한 나는 흠칫하며 입을 열었다.

“저기.. 누구세요?”

“안녕하세요. 저 선동이 엄마 되는 사람이에요.”

“아! 안녕하세요!”

바로 깍듯이 인사했다. 설마 어머님도 함께 계실 줄이야.

방금 했던 짓궂은 장난들이 생각나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사이 어머님은 말했다.

“제가 처음부터 직접 말씀드렸어야 하는데, 할머니가 됐다고 하셔서……”

“아, 그러셨군요.”

“이미 아시는 거 같지만 제가 선동이랑 약속을 하나 했거든요. 수학시험에서 90점 이상을 받으면 서울에 보내주기로.”

커트라인은 몰랐지만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그런데 요 녀석이 백점을 맞아버렸지 뭐예요? 절대 안 될 거라 생각하고 한 약속이었는데..”

“하하..”

슬쩍 아들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는 어머님.

이건 불변의 법칙인 모양이다.

나도 틈만 나면 우리 연두를 자랑하고 싶으니까.

“그래서 약속을 지켜야 하는데.. 같이 서울에 올라갈 여건이 안 돼서요...”

“그러셨군요.”

“서울에 사는 부탁할 사람이 할머니 손주인 주원씨밖에 없더라구요. 염치없지만 조금만 맡아주실 수 있을까요?”

크게 고민은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어머님뿐 아니라 나 역시 선동이와 약속한 바였다.

시험을 잘 보면 서울구경을 시켜주겠다는 건.

‘게다가.’

선동이의 어머니에게는 빚이 있었다.

할머니 댁에 김장하러 갔을 때 도와준 것에 더해 여러모로 챙겨주며 시골의 정을 알게 해 준 분이셨으니까.

괜히 김진아라는 이름까지 기억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정말 고마워요! 혹시……”

이어지는 말을 들으니 정확한 기간은 다음 주였다.

마침 서울에 볼일이 있는 분이 계셔서 그분이 태워다 주실 거라는 모양.

기간은 미정인데 길어도 일주일 정도가 될 거 같았다.

‘뭐, 그 정도야.’

충분히 감당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장난꾸러기 감자소년의 버릇을 고쳐주기에 충분한 시간이기도 하고.

빙긋 웃으며 고개를 돌려 말했다.

“연두도 괜찮지?”

“.. 네?”

“선동이오빠 우리 집에 오는 거. 며칠 같이 살게 될 거 같은데.”

연두는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네! 갠차나요..!”

초록연두구역에서 초록과 연두의 허가를 둘 다 얻었으니 더 이상의 절차는 불필요했다.

이렇게 확정됐다.

감자소년 선동이의 상경이.

***

단비어린이집에 등원한 연두.

친구들과 옹기종기 모여 앉은 채로 수다를 떨고 있었다.

“그래서.. 연두 집에 놀러오기로 해써!”

“선동이오빠가?”

“으응.”

시은이와 레나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얘기를 들었다.

처음 선동이에 대해 듣는 건 아니었다.

이전에도 연두는 몇 번이고 친구들에게 선동이오빠에 관해 말한 적이 있었으니까.

선동이의 상경이 확정되고 또 얘기를 꺼낸 거고.

자그맣게 시은이가 입을 열었다.

“같이 놀면 재밌겠다.”

시은이와 레나에게 있어서 선동이는 뉴페이스였다.

언제나 뉴페이스는 호기심이 생기는 법.

더군다나 그동안 연두가 말한 정보로 둘은 막연히 선동이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다.

“선동이오빠 착해?”

“응, 차캐! 연두 김장도 도아주고, 마싰는 감자도 줘써.”

이런 식이었다. 와전된 정보가 형성되는 건.

물론 선동이가 안 착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연두의 말만 들으면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

너무 미화된 느낌이라 해야 하나.

신이 난 연두는 선동이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리고.. 시골에는 선동이 오빠 비밀장소 있는데...”

“비밀장소?”

“응. 산 위에 이써. 이렇게 손으로 슉슉 하고 들어가면 비밀장소가 나와.”

손으로 슉슉.

대충 수풀을 헤치고 쏙 들어가면 나온다는 뜻이다.

동화 같은 묘사에 듣는 입장에서는 자연히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레나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그래서..?”

“응?”

“비밀장소는 무슨 장소야? 소근소근 비밀 말하는 장소?”

일차원적인 건 비단 연두뿐만이 아니었다.

레나 역시 비밀장소에 대해 곧이곧대로 생각해서 유추하고 있었다.

연두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답했다.

“아니야. 비밀장소에 드러가면..”

“들어가면?”

“별이 진짜진짜 마니 보여.”

사실 시은이는 이미 들은 적 있는 얘기였다.

무려 레나가 어린이집에 합류하기도 전에 연두에게 들은 이야기였으니까.

처음 듣는 레나는 설렘 가득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별?”

“으응.”

“하늘에 반짝반짝 별?”

“응! 반짝반짝 별..”

“우오아..”

시은이도 내색은 안 했지만 마음속에 그 장소를 그리고 있었다.

아까 선동이의 성격에 관한 건 다소 와전되긴 했지만, 비밀장소에 관해서는 아니었다.

실제로 봐도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운 공간이니까.

“연두는 거기서 봐써. 토끼 모양 별..”

“토끼 모양?”

“응. 선동이오빠는 물고기 모양도 본 적 있대. 진짜진짜 예쁜 물고기.”

갈 때마다 별 모양이 바뀐다는 말을 덧붙이자 레나의 표정에 설렘이 일었다.

자연히 선동이는 무언가 특별한 오빠처럼 여겨졌다.

뭐든지 잘 도와주는 착한 오빠인 데다가, 신비스러운 비밀장소까지 갖고 있는 특별한 오빠.

직접 만나면 바로 생각이 바뀌겠지만 말이다.

한편 연시레의 대화를 뚱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아이가 하나 있었다.

“...”

다름 아닌 민우였다.

아까 말했듯 연두는 선동이 얘기를 처음 꺼내는 게 아니었다.

민우도 몇 번이고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에 왠지 모를 경쟁심이 불타오르곤 했다.

‘오선동...’

이제는 이름만 들어도 그랬다.

어느새 얼굴도 모르는 형아가 민우에게는 견제 대상 1호가 되어있었다.

그때였다.

민우의 귀에 청천벽력같은 연두의 한 마디가 들려왔다.

“몇 밤 자고 가기로 해써.”

끼어들고 싶은 걸 꾹 참고 있었는데 지금은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민우가 콧김을 뿜으며 난입했다.

“그 형아가?”

“응? 으응, 선동이오빠..”

“너네 집에서?”

끄덕. 끄덕.

치사 빤스 형아가 한 명 더 생겼다.

민우 따름에는 이런 생각이었다.

어린이집에서 제일 친한 친구인 나도 한 번 가 본 적 없는 연두네 집에 가는 것도 모자라 몇 밤을 자기까지 한다고?

씩. 씩.

어젯밤 TV에서 본 파워포스 레드의 힘이 자기도 모르게 올라오려 하고 있었다.

늦게까지 보다가 엄마한테 혼나긴 했지만.

‘안 돼.’

가까스로 민우는 힘을 가라앉혔다.

어린이집 안에서 파워포스의 힘이 폭발하는 건 친구들이 다칠 수 있으니 위험하다.

힘은 악당 앞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파워포스는 평소에는 민간인의 신분을 유지해야 하니까.

변신하는 대신 민우는 말했다.

“연두야.”

“응, 미누야.”

“선동이가 괴로피면 말해. 내가 혼내줄게. 파워포스으 힘으로.”

연두를 괴롭히는 사람은 악당이다.

그럼 마음 놓고 파워포스의 힘을 쓸 수 있었다.

막상 연두는 어쩔 줄 몰라 했지만.

“선동이오빠 연두 안 괴로피는데.. 그리고 선동이오빠 반말하면 화 나는데...”

“흥.”

시은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옆에서 레나도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Babo..”

독일어로는 우두머리, 한국어로는 바보라는 뜻.

평소와 달리 통역은 하지 않았다.

왜냐고? 애초에 한국어 뜻으로 쓴 거라 통역이 필요가 없었거든.

민우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선동이와 민우.

만남이 이루어질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성사된다면 그림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역대급 스파크가 튈 거 같았다.

***

며칠 뒤 한 시골집의 풍경.

가득 찬 가방을 멘 남자아이가 집 앞마당에서 토끼처럼 깡총깡총 뛰고 있었다.

단순 비유가 아니라 진짜 토끼 같은 모습이었다.

양손으로 가방 줄을 잡은 채로, 두 다리를 오므렸다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다.

들뜬 기분을 한껏 드러내는 기합을 내지르며.

“므야~ 호!”

전날 밤에 짐을 챙기고 잠에 든 뒤.

날이 밝기도 전에 일어나 혹여나 빠트린 짐은 없는지 확인하고.

그럼에도 시간이 남아, 토끼처럼 집 앞을 뛰어다니고 있는 선동이였다.

“후흣.”

그런 선동이를 문을 살짝 열고 바라보고 있는 김진아.

저렇게 기뻐서 흥을 주체하지 못하는 아들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또 언제 있었더라.

‘아.’

저번에 연두가 김장하러 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때도 마찬가지긴 했지.

공교롭게도 모두 연두를 만나러 갈 때였다.

결국 김진아는 문을 활짝 연 뒤에 아들을 향해 소리쳐 물었다.

“그렇게 좋니? 연두 보러 서울 가는 게?”

“응!”

힘차게 대답한 뒤 이상함을 깨달은 선동이는 재빨리 정정했다.

“아니! 연두 때문이 아니라 서울 가는 게 좋은 거야!”

“후훗, 그러시겠지.”

“진짜라고!”

“그래, 그래. 근데 엄마는 좀 서운하네?”

“왜?”

“엄마는 선동이랑 떨어지게 돼서 막 슬프고 그런데 아들은 그렇게 기뻐 보여서.”

“아, 아니야! 나도 슬퍼!”

거짓말이 아니었다.

난생처음 엄마랑 긴 시간 떨어지는 거라 걱정도 되고 슬프기도 했다.

슬픈 감정보다 기쁜 감정이 더 큰 게 함정이지만.

“엄마. 아저씨 언제 와?”

“이제 곧 오실 거야. 그러니까 들어와서 아빠한테도 인사하렴.”

그 말에 선동이가 후다닥 집 안으로 달려갔다.

누워있는 아빠.

“아빠. 나 갔다 올게.”

“오냐.”

세상 쿨한 단답이었다.

눈을 지그시 뜬 선동이 아버지는 툭 입을 열었다.

“아들아.”

“응.”

“여자는 말이다. 다정하고 따뜻한 남자를 좋아한다. 이 아빠처럼 말이다.”

김진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휴. 어떻게 그렇게 눈빛 한 번 안 바뀌고 거짓말을 해?”

“거짓말이라니. 일로 와. 뽀뽀해줄 테니까.”

“됐거든?”

이 순간, 한 가지는 확실히 느낀 선동이였다.

아빠 같은 남자는 여자가 확실히 싫어하겠구나 하고.

그런 와중 들려오는 소리.

끼익.

김진아 말대로 정말 곧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낡은 차 한 대가 마당 앞에 도착했다.

“왔다!”

“그러네.”

김진아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들, 가기 전에 한 번 안아보자.”

“응..”

포옥.

모자가 찐한 포옹을 나눴다.

“사랑해, 우리 아들.”

“나도.”

이윽고 떨어진 둘.

그 사이 차에서 유동길이 내렸다.

김진아가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선동이 잘 부탁드릴게요.”

“네.”

“그럼 갔다 와, 선동아. 도착하면 연락하고.”

“응! 잘 있어, 엄마. 아빠도!”

부모님과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고 선동이는 유동길을 따라 차에 탑승했다.

운전석에 탄 유동길이 말했다.

“안 챙긴 거 없지?”

“없어요.”

“그럼 출발한다.”

선동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 예.”

부르릉.

동시에 액셀을 밟는 유동길.

드디어 서울을 향해 출발하는 감자소년 선동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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