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6화. 입소문
“소녀와 환상으 숲!”
힘찬 연두의 말을 시작으로 단비어린이집 아이들의 동화책 읽기가 시작됐다.
촤락.
넘어가는 첫 페이지.
기본적으로 동화책을 읽는 건 교사인 유미경의 몫이었다.
그녀는 차분한 음성으로 지문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율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어요. 엄마의 목소리도, 아빠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었죠.”
때로는 직관적인 첫 문장이 이야기에 빠져드는 장치 역할을 하는 법이었다.
지금의 경우가 그랬다.
태어났을 때부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정보 하나로 아이들이 소녀에게 몰입할 수 있도록 만들었으니까.
동시에 상상해 보게 만든 거다.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세상은 어떨지.
엄마 아빠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없을 때의 기분은 어떨지.
“저 애.. 소리를 못 듣는대.”
“불쌍해라. 생긴 건 멀쩡하게 예쁘게 생겨서는.. 쯧.”
긴 어린이집 교사 경력을 지닌 유미경이었다.
동화책을 읽어주는 능력도 만렙에 달한 상태.
생동감 넘치는 그녀의 읽기에 상황에 맞는 그림이 어우러지며 아이들의 몰입을 도왔다.
“어른들 나빠..”
“너무해...”
“어떠케. 율이 우러...”
파노라마 형식으로 드러나는 율이의 상처.
그에 따라 아이들은 한 마디씩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또르르.
감수성이 풍부한 몇몇 아이들은 벌써부터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도 했다.
심지어 민우는 씩씩거리고 있다.
말을 함부로 하는 어른들을 향해 분노한 게 틀림없어 보인다.
“흣.”
그 모습을 본 유미경은 살며시 웃음 지었다.
몰입을 깨지 않도록 아주 작게.
그나저나 아이들뿐 아니라 그녀 역시 보면서 느끼는 바가 있었다.
동화책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스토리와 작화.
아직 스토리를 논하기에는 너무 일렀다.
흡입력 있는 도입부긴 하지만 채 몇 장도 넘기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허나 작화는 다르다. 몇 장만 보고도 알 수 있었다.
‘.. 예뻐.’
그림 하나하나가 너무 예뻤다.
동화에 알맞은 그림체인데도 그 퀄리티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다.
확실한 건, 여타 동화와는 결을 달리하는 작화였다.
‘한두 개가 아니니까.’
유미경은 어린이집 교사이기도 했지만 아이가 있는 부모이기도 했다.
지금껏 읽은 동화책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래서 더 확연히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다른 동화책 작화와의 차이를.
‘생각 이상이네.’
잘 그린다는 건 알고 있었다.
연두부로서 초록님의 그림 실력에 대해서는 연두튜브를 통해 몇 번이고 봐 왔으니까.
초창기 연두튜브 썸네일, 팬미팅 티셔츠 그림, 연두티콘 등등.
‘하지만.’
영상을 통해 단편적으로 접한 게 대다수였다.
작업물을 제대로 보니 이제야 비로소 가늠이 되는 느낌이었다.
작화가로서의 초록님의 역량을.
촤락.
이후 펼쳐지는 환상의 숲 속 이야기.
본격적으로 등장인물의 대사가 나옴에 따라 유미경은 아이들에게 말했다.
“여기 율이가 하는 말은 연두가 한 번 읽어줄까?”
“나비의 말은 시은이가...”
“고양이는 레나가...”
각각 어울리는 역할을 배정했다.
등장인물이 무척 많은 터라 소외되는 아이들 없이 동화책 읽기에 참여할 수 있었다.
계속해서 넘어가는 페이지.
촤락. 촤락.
어느새 유미경은 자기도 모르게 아이들과 함께 이야기에 빠져든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작화뿐만 아니라 이야기도 너무 예뻤으니까.
‘반칙이잖아.’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라는 건 알겠는데 어른이 보기에도 손색이 없는 스토리였다.
전혀 유치하지 않았다.
많은 게 담겨있었고, 어릴 적 가지고 있던 순수함이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새 맞이한 이야기의 후반부.
“자, 민우야?”
기다렸다는 듯 민우는 벌떡 일어나며 대답한다.
“네, 선생님!”
“여기. 주드의 말 읽어줄래?”
호랑이에 대적하는 주드.
어찌 보면 가장 멋진 파트를 민우에게 선사했다고도 볼 수 있었다.
그림을 향하는 민우의 시선.
척!
일어선 채로 포즈를 취한다.
동화책 속의 주드처럼 한쪽 발로 꼿꼿이 서서 정면을 응시하는 민우.
이윽고 흘러나오는 대사.
“연두는.. 해치지 모태!”
응? 뭔가 이상한데?
고개를 갸웃하던 아이들과 유미경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를 알아챘다.
이름이 바뀌었잖아!
“민우야. 연두가 아니라 율이지.”
“.. 아!”
긁적. 긁적.
머리를 긁적이는 민우와 쑥스러운 듯 옅게 웃음 짓는 연두.
이후는 이미 알고 있는 스토리였다.
주드와 함께 온 원숭이 친구들이 합심해서 호랑이를 쫓아내고 연두, 아니 율이를 지켜낸다.
“우와!!”
“원숭이 짱 머시따..”
“선생님! 저 원숭이 댈래요!”
주드가 너무 멋있었던 탓인지 원숭이를 꿈꾸게 된 아이도 있을 정도였다.
그동안 꽤 여러 번 있었다.
아이들을 모아두고 다 함께 동화책을 읽었던 적은.
‘없었어.’
허나 한 번도 없었다.
이렇게 장면 하나하나에 표정이 바뀌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건.
아무래도 그런 예감이 들었다.
오늘부로 단비어린이집 아이들의 최애 동화책이 바뀔 거 같았다.
여러 개가 아니라 하나의 동화책.
‘소녀와 환상의 숲’으로.
***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늘은 우리 민우가 말썽 안 부렸나요?”
“안 부려따, 원숭!”
“...?”
슉!
선생님의 대답 대신 튀어나온 아들 녀석에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나저나 저 포즈는 뭐람.
한쪽 발로 선 채로 손을 뻗어 자신을 향해 내밀고 있다.
‘방금 뭐라고 했지? 원숭?’
영문을 알 수 없는 끝말도 의아한 요소 중 하나였다.
뭐, 평소에 워낙 돌발행동을 많이 하는 아들 녀석이니 이상할 것도 없긴 하지만.
그래도 이유는 알아야겠지.
“왜 이러는 건가요, 얘가?”
이제는 입에 익은 물음이었다.
그 말에 유미경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오늘 아이들이랑 다 같이 동화책을 읽었거든요.”
“동화책이요?”
“네. 거기 나온 주드라는 원숭이 캐릭터가 있는데 끝말에 ‘원숭’이라는 추임새를 붙이는 게 특징이라서요. 그걸 따라 하는 거 같네요. 맞지, 민우야?”
민우는 시니컬한 표정으로 답했다.
“따라 하는 거 아니다, 원숭!”
“응? 그럼 뭔데?”
“나는 진짜 미누원숭이다, 원숭!”
“...”
“악!”
결국 민우원숭이는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레 날아든 엄마의 딱콩에 의해.
“요 녀석이!”
“왜.. 왜 때리냐, 원숭!”
“따라 하는 건 좋은데 선생님한테 예의 있게 말해야지.”
“.. 아, 아랐다, 원숭!”
“엄마한테도!”
그제야 정체성을 되찾은 민우였다.
꽁한 표정의 아들을 옆에 두고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교사를 향해 말했다.
“그런데 그 동화책이 엄청 재미있었나 보네요. 징글징글한 파워포스 레드 말고는 민우가 따라 하는 거 못 본 거 같은데……”
파워포스 레드.
아주 귀에 딱지가 붙을 지경이었다.
뭐만 하면 변신한다 물리친다 뭐 한다, 고향에서 쓰던 말로는 정말 징했다.
곧이어 돌아오는 대답.
“아, 네. 아이들이 정말 재밌어했어요. 사실 이건 비밀이긴 한데……”
유미경은 장난스레 웃으며 이야기했다.
비밀 아닌 비밀을.
“그 동화책 작화, 그러니까 그림을 우리 어린이집 학부모 중 한 분이 그리셨거든요.”
“학부모 중 한 분이요?”
“네.”
“어떤 분이……”
묻는 도중에 떠올랐다.
그녀가 아는 학부모 중에 그림을 그릴 만한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혹시.. 연두 아버님이..?”
연두튜브에 대해 몰랐던 터라 처음 참관수업 때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학부모 사이에서는 보기 드문 젊고 수려한 외모였으니까.
아이를 보고 바로 납득하긴 했지만.
이후에는 자연히 연두튜브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오다가다 인사도 많이 나눴다.
‘얼마 전엔 함께 놀기도 했고.’
사실 처음 마주했을 때는 자기도 모르게 든 생각이 있었다.
나쁘게 생각한 건 아니었다.
그저 아이를 키우기엔 너무 어린 거 아닌지, 미성숙하지 않을지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거 같다.
돌이켜 보면 부끄러워지는 편견 어린 시선이었다.
‘반대였으니까.’
학부모 참관수업 때는 물론이고 그 뒤로도 마주칠 때마다 연두를 대하는 모습을 보며 느끼곤 했다.
그 누구보다 아이를 진심으로 대한다는 걸.
특히나 얼마 전,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함께 놀면서 확신했다.
‘놀랐어.’
진심으로 놀랐다.
아이들 틈에 섞여서 아이처럼 열정적으로 뛰어노는 모습을 보고.
놀이터에 민우를 데려가 의자에 앉아서 지켜보기만 하던 자신과는 완전히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뿐 아니라 그 어떤 부모와도 함부로 비교할 수 없는 좋은 아빠라는 걸.
‘하긴.’
그렇지 않다면 나올 수 없었다.
웃음 짓게 만드는 연두튜브 속 사랑스러운 부녀의 모습은.
연출이 불가능한 장면이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선생님의 입에서는 예상대로의 말이 나왔다.
“네, 맞아요. 연두 아버님이 작화를 담당하셨다고 하더라구요.”
“정말.. 보면 볼수록 대단하네요.”
“네?”
“연두 아버님이요. 그렇게 연두랑 잘 놀아주고 같이 시간을 보내면서도, 어쩜 그렇게 다재다능한지...”
“호호, 그렇죠.”
지금 이 순간.
어딘가에 있을 이주원의 귀가 가려울 법한 대화를 나누는 둘이었다.
그렇게 둘의 대화가 끝나고,
터벅. 터벅.
복도를 걷자마자 시작됐다.
한 번 시작되면 물리적인 힘이 아니고서는 쉽게 말릴 수 없는 민우의 조르기가.
“사조!!”
“뭐?”
“가지고 싶딴 마리야! 소녀와 환상으 숲!!”
원래라면 딱콩이 날아갔어야 할 타이밍이지만 그러지 않았다.
조금 자제할 필요가 있었다.
연두 아빠가 연두한테 딱콩을 날리는 건 한 번도 본 적 없으니까.
“그 동화책 이름이 소녀와 환상의 숲이니?”
“.. 응? 어, 마자!”
평소와 다른 패턴에 사뭇 당황한 민우가 대답했다.
이어지는 엄마의 말.
“어떻게 살 수 있는데? 서점에 가야 하나?”
사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궁금해졌다.
연두 아빠가 그린 동화책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지.
“사 주는 거야, 엄마?”
“그래.”
“우왁! 고맙따, 원숭!!”
“...”
결국 딱콩이 나갔다.
손을 꼭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모자.
사실 이런 상황은 다른 여러 장소에서도 펼쳐지고 있었다.
“엄마.. 나 소녀와 환상의 숲 가지고 싶어..”
“그게 뭔데?”
“연두가 가져온 동화책! 그런데.. 이건 비미린데.. 연두 아빠가 그림 그렸다?”
“어머, 정말?”
유람이네 집에서도,
“아빠!”
“응, 현우야. 오늘은 뭐 하고 놀았을까, 우리 아들?”
“오늘 연두가..”
“허허, 또 연두 얘기야?”
“응! 연두가 동화책 가져왔어! 진짜진짜 재밌는 동화책!”
“오호라.”
“그런데 동화책을 연두 아빠가 그렸대! 악!”
왜인지 현우는 얘기하고선 혼자 소리 질렀다.
“깜짝야! 왜 그래?”
“비밀인데..”
“엥?”
“연두가 그랬어. 비밀이긴 한데 아빠가 그렸다고.”
“흐흡.”
상황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입을 뗐다.
“걱정하지 마. 비밀 지켜줄 테니까.”
“정말?”
“그럼. 그나저나 초록님이 그렸다고? 안 읽어보고는 못 배기겠는데?”
“응! 같이 읽자! 나 또 읽고 싶어!”
“오케이, 접수!”
현우네 집에서도,
그리고 다른 장소에서도 동시다발적으로 유사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대로면 시간문제였다.
단비어린이집 아이들이 ‘소녀와 환상의 숲’을 하나씩 가지게 되는 건.
집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동화책을 내일 단비어린이집 친구들에게 하나씩 선물하려 했던 이주원은 꿈에도 모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행동력이 빠를 거라고는 예상 못 했으니까.
그렇다. 완전히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 ‘소녀와 환상의 숲’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