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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바보가 되었습니다-412화 (413/850)

412화. 부탁

“할머니는 죽을 거예요.”

우영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한 마디.

묻어둔 기억이 떠올랐다.

아빠의 투병생활을 지켜보며 나는 늘 생각했다.

완치될 수 있을 거라고.

의사가 말하는 실낱같은 가능성이, 10%도 되지 않는 그 수치가 이상하게 더 커 보였다.

거의 마지막까지도 나는 그렇게 생각, 아니 확신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아니었다.

확신한 게 아닌 나 자신을 속인 거 뿐이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거라는 걸 무의식적으로 알았던 거다.

‘언제였더라.’

정확한 시점은 기억이 안 난다.

확실한 건 아빠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쯤이었다.

병실에 들어갔을 때 나를 보며 미소짓는 아빠를 보고 문득 생각이 들었다.

‘아빠는 죽겠구나.’

소름이 끼쳤다.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구역질이 나서 그대로 병실을 나와 화장실로 달려갔다.

구토를 하지는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무너진다는 기분이 뭔지 느꼈다.

‘같겠지.’

생각이 바뀌는 건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수없이 자신을 속이고 현실을 부정한 끝에 자기도 모르게 알게 되는 거니까.

그렇기에 흔한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지는 않았다.

비슷한 상황을 겪었다고 해서 내가 우영이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나는 알지 못했다.

우영이와 할머니가 보냈을 시간을.

그 누구도 나와 아빠의 시간을 알 수 없듯이 말이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하나였다.

아빠가 내게 그랬듯, 할머니는 우영이에게 있어 그 누구보다도 소중한 존재라는 것.

“하하, 웃기죠. 맨날 안 죽을 거라 해놓고 갑자기 이러는 게.”

“우영아.”

확실한 건, 우영이 역시 내게 소중한 동생이었다.

비슷한 상황이 있었던 만큼 나랑 같은 길을 걷지 않길 원했다.

과거의 나는 뿌리쳤다.

아빠를 잃은 내게 건네는 수많은 손길들을.

친구들의 손, 선생님의 손, 할머니의 손.

잡고 싶지 않았다.

끝없이 추락하고 싶었고 실제로 그랬다.

반지하에서의 몇 년간 숨을 쉬고 뱉을 때마다 땅 속으로 끝없이 무너져내리는 기분을 느꼈다.

평생 빛을 볼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추락했다.

나올 생각도 못하고 있던 암흑 속에서 나를 비춰준 건 다름아닌 연두였다.

‘어쩌면.’

내가 내미는 손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

잡고 싶지 않을 수도 있고, 뿌리칠 수도 있다.

괜찮았다.

‘몇 번이고 내밀면 돼.’

그걸로 부족하다면 몇십번, 또 그걸로 부족하다면 몇백번을 내밀면 된다.

무너져내리지 않도록.

툭.

이건 첫 번째다.

우영이의 어깨에 손을 올린 뒤 나는 위로 대신 건넸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한 마디를.

“억지로 웃지 않아도 돼.”

***

둘만 남은 병실.

천재경이 가늘게 웃으며 연두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다 입을 열었다.

“연두야.”

“네.”

“심심하지는 않니? 아빠랑 오빠 가고 할머니랑 둘이 남으니까.”

“안 심시매요..!”

대답한 뒤 연두는 천재경의 팔을 보고선 말했다.

“할머니..”

“응.”

“주사 안 아파여..? 연두는 주사 엄청 아야했는데……”

“호호, 주사 맞은 적 있니?”

“네. 마니 아파서 엉덩이에 주사 마자써요.”

“어머. 엉덩이에?”

“.. 네.”

“많이 아팠겠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연두는 조심스레 그녀의 팔에 손을 대고서 말했다.

“할머니도 마니 아파요..?”

이제 여섯살인 연두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병원이 아플 때 가는 장소라는 것과 주사가 아플 때 맞는 것 정도라는 건 알고 있었다.

천재경은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글쎄.. 연두가 보기에는 많이 아파 보이니?”

조금 고민하다가 연두는 대답했다.

“.. 네에.”

“그렇구나. 할머니가 많이 말라서?”

“네. 연두도 말랐을 때 아파써요.”

속상한 표정으로 연두는 말을 이었다.

“할머니 아픈 거 시러요..”

“걱정 마렴. 지금은 괜찮단다.”

“.. 진짜요?”

“그럼.”

순간 연두는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말했다.

“할머니!”

“응?”

“아픈 거 다 나으면.. 연두랑 가치 놀러 가요!”

반짝거리는 눈.

천재경이 따뜻하게 말을 받았다.

“그럴까? 어디로 갈까?”

“산도 조코.. 바다도 조코.. 동무런도 조아요. 병원 빼고!”

“병원은 왜 싫은데?”

“간호사언니랑 으사선생님은 조은데……”

“좋은데?”

“병원은 아프면 가는 거니까.. 연두는 아픈 거 시러요.”

“그렇구나.”

천재경은 연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할머니 다 나으면 같이 가자.”

“우영이오빠랑 아빠도 가치요!”

“물론이지.”

“히히.”

톡. 톡.

천재경은 침대 옆을 두드리며 말했다.

“여기 올라와서 할머니 옆에 앉을래?”

“안자도 대요..?”

“그럼.”

폴짝 뛰어서 연두는 할머니 옆에 앉았다.

천재경은 이불로 연두의 무릎을 덮어주고선 말했다.

“연두는 아빠가 자랑스럽겠구나.”

“.. 네?”

표현이 어려웠던 모양이네.

옆에 있던 동화책을 손에 쥐고서 천재경은 말했다.

“이렇게 멋진 그림을 그리니까. 주위에 자랑하고 싶지 않니?”

그 말에 연두는 생긋 웃으며 답했다.

“연두는 엄청 자랑해여!”

이후 곧바로 응용이 들어갔다.

“할머니도 우영이오빠가 자랑스... 으응?”

그 과정에서 혼동이 오긴 했지만.

다행히 천재경이 찰떡같이 알아듣고 말을 받았다.

“자랑스럽지.”

“마자요! 연두도 자랑스러어요! 아빠랑 우영이오빠..”

“정말?”

“네.”

천재경은 연두를 빤히 보더니 말했다.

“이렇게 보니 닮았구나.”

“누구랑요?”

“우영이랑.”

“여, 연두랑 우영이오빠랑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는 대답했다.

“우영이오빠가 어렸을 때는 연두처럼 작고 하얗고 엄청 밝았거든. 지금도 작고 하얗긴 하지만.”

그 말에 연두는 주위를 경계하며 말했다.

“우영이오빠 화나요.”

“응?”

“키 작다고 하면.. 우영이오빠 화나요.”

“호호, 그렇지. 그러니까 할머니가 한 말은 우영이오빠한테는 비밀이야.”

“네!”

이어서 천재경은 서랍을 가리키며 말했다.

“연두야. 저기 서랍 좀 한 번 열어볼래?”

“네에.”

스르륵.

“열어써요!”

“안에 노란 표지가 보이니? 책이랑 비슷한.”

“이거요?”

“응. 그거 좀 꺼내주렴.”

다시 할머니의 옆에 앉은 연두.

“이거 보여준 것도 비밀이다?”

그 말과 함께 천재경은 노란 표지를 펼쳤다.

눈에 들어오는 사진들.

기차놀이를 하고 있는 사진 속 꼬마를 가리키며 그녀가 물었다.

“이 애가 누군지 알겠니?”

연두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대답했다.

“모르게써요.”

“우영이오빠란다.”

“...?”

깜짝 놀라 다시 한번 사진을 바라보는 연두.

저절로 입이 벌어진다.

이렇게 환히 웃는 아가가 우영이오빠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때. 할머니 말이 맞지?”

“네에..”

과거 앨범을 한 번씩 들춰보는 건 무척 재밌는 일이었다.

둘은 한참동안 선우영의 사진을 구경했다.

마지막 사진까지 보고 난 뒤에야 앨범을 덮었다.

“우아...”

여운이 가시지 않는 듯 감탄사를 내뱉는 연두.

천재경이 물었다.

“어떠니? 우영이오빠 애기 때 사진 보니까.”

“귀여어요..”

“풋.”

살짝 터진 웃음.

그러다 천재경은 앨범을 옆에 두고 살며시 입을 뗐다.

“연두야.”

“네.”

“할머니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연두가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포옥.

천재경은 꽤나 힘겹게 양팔을 올려 연두를 감싸안았다.

무척 따뜻한 포옹이었다.

다소 갑작스러운 탓에 연두의 입에서 의문사가 흘러나오긴 했지만.

“으응..?”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나간 후에야 천재경은 팔을 뗐다.

그리고선 말했다.

“만약에 말이야, 연두야.”

“네에.”

“우영이오빠가 정말 슬퍼하는 걸 보게 된다면.. 방금 할머니가 안아준 것처럼 우영이오빠를 꼬옥 안아줄 수 있니?”

“.. 연두가요?”

“응, 연두가.”

아리송한 표정.

고개를 갸웃하며 연두가 말했다.

“할머니는요..?”

천재경은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때 할머니가 다른 곳에 있어서 옆에 없을 수도 있으니까.”

“아!”

“약속해줄 수 있니?”

그 말에 연두는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네! 연두가 꼭 안아줄께요! 우영이오빠..”

“고마워라.”

그렇게 두 새끼손가락이 겹쳤다.

***

시간이 지나갔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아직까지 걸려오는 연락은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주말.

할머니 댁에 찾아뵙기로 한 주말이 다가왔다.

‘얘기해 달라 했는데.’

삼촌이 불편해한다면 얘기해달라 했는데 별 얘기가 없으신 걸 보니 삼촌이 괜찮다고 한 모양이었다.

따라서 예정대로 찾아뵙기로 했다.

그렇게 출발한 시골.

부릉!

그나마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머릿속도 시원해지고.

뒷자리에서는 웃음짓게 만드는 연두의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이! 이러케 초조한데~ ♪”

아직까지도 사랑받고 있는 숫자송이었다.

비교적 멀리 갈 때면 차 안은 이렇게 노래방으로 변하곤 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기분 좋아, 연두야?”

“네!”

“할머니 보러 가서?”

고개를 끄덕이며 연두는 대답했다.

“할머니 봐서도 조코.. 또...”

“또?”

연두는 들고 있는 동화책을 감싸안으며 얘기했다.

“유노아저씨 빨리 선물주고 시퍼요.”

“하하, 그래.”

또 하나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감자소년 오선동.

그 녀석도 엄청 좋아하겠네.

‘약속은 못 지켰겠지만.’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은 모르고 사 준 학습지와 그림 연습장이었다.

도저히 끝낼 수 없는 양이었다.

뭐, 그래도 사 준 입장에서 진도 체크 정도는 해 볼까.

백지이기만 해 봐. 부모님 눈을 피해서 서울에서 못한 서울구경을 시켜줄 테다.

‘장난이고.’

서울에 오기 위해 없는 시험까지 만들어서 공부할 만큼 의지력 있는 녀석이었다.

백지일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림 연습장은 몰라도 학습지는 꽤나 건드리지 않았을까.

‘기대되네.’

얼마나 풀었을지 꽤나 기대가 됐다.

뻥 뚫린 고속도로인 만큼 더욱 세게 액셀을 밟았다.

이제 운전 숙련도는 극에 달한 상태라 안정감은 굳이 말할 것도 없었다.

“우아! 아빠 진짜 빨라여..!”

“아직이야. 연두의 노래를 들으면 더 빠르게 달릴 수 있어.”

“네!”

목을 가다듬고서 뱉는 노래.

“붕붕붕~ 아주 작은 자동차~ ♪”

“푸흣.”

이게 교육의 무서움이다.

학습을 시켜놓으니 태어나기 전 노래도 곧잘 부르는 걸 보라.

연두성분에 힘입어 붕붕이는 더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물론 제한속도는 준수한 채로.

준수라는 친구도 있는 만큼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철두철미하다.

그렇게 달린 끝에 거의 도착한 목적지.

이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서 깊숙이 들어가기만 하면 됐다.

“후우..”

긴 여정이긴 했지만 연두 덕에 지루할 틈은 없었다.

“아빠. 다 와써요..?”

“거의.”

“몇 분 더 가면 도차기에요..?”

부모님 차를 타면 국룰인 질문이다.

나는 멋스럽게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쪽 손을 펼쳤다.

“5분.”

또 하나의 국룰.

부모님이 말하는 5분은 최소 10분을 의미했다.

그걸 알 리 없는 연두는 눈을 반짝거리며 대답했다.

“진짜 조금 남아따..”

그로부터 정확히 10분 후.

끼익.

목적지에 도착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할머니의 집.

‘어?’

마당에 있는 의자에 누군가가 앉아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얼굴을 보니 알 수 있었다.

외삼촌 김윤호가 틀림없었다.

‘그대로네.’

장례식장에서 본 얼굴 그대로였다.

근데 이상하네.

왜 저렇게 빤히 쳐다보지?

‘도착했으니 보는 거야 당연한데.’

그냥 보는 거라고 하기에는 눈가를 너무 찡그리고 있었다.

햇빛이 강한 것도 아닌데.

이상함을 느끼며 나는 말했다.

“내릴까, 연두야?”

“네, 아빠!”

덜컥.

손잡이를 열어 내린 뒤 곧바로 뒷좌석 문을 열어줬다.

내 손을 잡고 내리는 연두.

띠.

잠금 버튼을 누른 뒤, 곧장 김윤호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

그런데 반응이 이상했다.

차 안에서 느낀 게 착각이 아니었다.

뒤이어 귀에 들어오는 한 마디.

“갑자기 여긴 왜..”

뭐지?

우리가 올 거라는 걸 조금도 모르고 있었다는 듯한 이 반응은.

그 순간 깨달았다.

‘.. 얘기 안 했구나!’

완전히 당했다는 걸.

깨닫기가 무섭게 눈앞에서 열리는 집 문.

“.. 왔냐?”

“할머니!”

정말이지 못 말리는 할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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