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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바보가 되었습니다-418화 (419/850)

418화. 색깔

낯익은 얼굴.

보는 순간 나는 앞으로 뛰쳐나가 연두의 앞을 막아섰다.

한쪽 슬리퍼가 벗겨지는 것도 모르고.

타닥.

깊게 생각하고 움직인 건 아니었다.

주저앉은 채로 떨고 있는 연두의 뒷모습을 봤고, 그 앞에 서 있는 친척 중 하나의 얼굴을 봤다.

동시에 그려졌다. 지금 연두가 짓고 있을 표정이.

그것만으로도 내 행동에 망설임을 없애기에는 넘치도록 충분했다.

‘중요치 않아.’

다른 건 중요치 않았다.

최악의 경우가 있을지는 몰라도 김윤호를 제외한 친척들은 모두 같았으니까.

그 날의 기억에 따르면 그들은 전부 같은 색을 띠고 있었다.

짙은 검은색이었다.

다시 보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눈앞에서 그 검은색이 말을 건다.

“.. 주, 주원아.”

이름은 알고 있었다.

김다영.

우리 엄마의 언니이자 내게는 이모가 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그녀의 남편에 대한 기억이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있었다.

‘최성조.’

외삼촌 김동석의 장례식 때.

내게 연두를 데리고 살아보라는 말로 시작해서 연두가 온 뒤에도 일말의 배려도 없는 언행을 마구 쏟아내던 사람이었다.

끝내 언성을 높이고 말다툼을 했던 대상도 그였다.

어떻게 보면 내가 연두의 손을 잡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게 된 가장 큰 계기라고 할 수 있었다.

달리 말하면 그만큼 나, 그리고 연두에게는 좋지 않은 기억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게다가 전해들은 얘기에서도 그는 존재감을 드러냈다.

연두의 존재를 알게 되고 친척들이 같은 마음으로 할머니 집에 모였을 때.

가장 먼저 화제를 꺼내고 분위기를 주도하며 흑심을 드러냈다고 했지.

‘.. 대단하네.’

외삼촌의 장례식 때는 나를, 할머니 댁에서는 김윤호를 나서게 만들었다.

어찌 보면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뻔뻔하게 사람을 자극하고 기분 더럽게 만들 수 있다는 게.

‘물론.’

부부라고 해서 같을 거란 보장은 없다.

내 기억상 김다영은 남편 최성조처럼 나서거나 분위기를 주도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굳이 따지면 한 마디씩 숟가락을 얹으며 동조하는 타입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확실한 건, 그녀 역시 절대 좋은 기억은 아니라는 거다.

이름을 불렸지만 대답은 하지 않았다.

뒤를 돌아 연두를 바라봤다.

“.. 연두야.”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차라리 펑펑 울었다면 모르겠는데 지금의 표정은 뭐라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래. 그 표정이다.

트라우마.

만약에 트라우마 스위치라는 게 존재한다면 그 버튼을 꾹 누른 거 같았다.

눈앞에 서 있는 여자가.

그나마 다행인 건 접촉하기 전에 발견한 거 같다는 거지만.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연두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톡.

손이 맞닿는 순간. 놀랐는지 강하게 어깨를 들썩인다.

나인 걸 확인하고서 손을 잡고 일어나려다 그대로 다시 주저앉는 연두.

다리가 풀린 거 같았다.

그 사실에 또 놀랐는지 눈동자가 마구 흔들린다.

‘사실.’

단지 그녀 하나 때문에 연두가 이런 반응을 보인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남편인 최성조였다면 몰라도, 아까 말했듯 김다영은 그 정도로 분위기를 주도하거나 끌고 가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눌렀을 뿐이겠지.

연두로 하여금 그 날의 장면이 떠오르게 하는 트라우마 스위치를.

내가 모든 친척들과의 접촉을 피하려 하고 김윤호를 만나는 걸 조심스러워한 것도 그걸 염려해서였다.

결국 이렇게 예상치 못하게 그런 상황이 발생해버리긴 했지만.

다리를 굽혀 앉아 시선을 맞춘 나는 말했다.

“연두야.”

“.. 아빠.”

“괜찮아. 겁내지 않아도 돼.”

미소를 머금고 덧붙였다.

“아빠가 옆에 있잖아.”

어떤 상황에서도 옆에 있어주기로, 연두의 편이 되어주기로 약속했다.

이런 상황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제야 연두는 내 손을 꼭 붙잡았다.

“아빠. 연두..”

“일어나려 안 해도 돼.”

그대로 안은 채로 김다영을 보고 섰다.

연두가 그녀를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천천히 입을 뗐다.

“.. 이모.”

“주원아. 연두가 놀란 거 같아서 미안한데...”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합리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먼저 적대감을 드러낼 이유는 없다.

아직 그녀가 여기 오게 된 정황도 모를뿐더러 서로 감정이 격해져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오히려.’

연두에게 또 하나의 안 좋은 기억을 심어줄 수 있다.

상대에게 좋지 않은 감정뿐이라 해도 최대한 이성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었다.

내 물음에 그녀가 대답하려는 순간.

“.. 누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고개를 돌려 보니 삼촌 김윤호가 상기된 표정으로 서 있었다.

***

“.. 누나?”

상기된 목소리.

뒤이어 할머니도 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적으로 말이 나갔다.

“할머니, 설마..”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 탓에 생각했다.

삼촌과 할머니 중 한 명이 이모를 부른 게 아닐까 하고.

가능성은 할머니 쪽이 더 높아보였다.

삼촌은 그럴 이유가 조금도 없고, 그런 일을 벌일 만한 사람도 아니니까.

그럼 할머니는 그럴 만한 사람이냐고?

‘.. 아니지만.’

우리가 올 거라는 사실을 삼촌에게 얘기하지 않았기에 비슷한 경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만약 그렇다면 아무리 할머니라도 진심으로 화가 날 거 같았다.

“다영이 네가 왜..”

허나 알 수 있었다.

딸이 올 거라고는 조금도 생각 못한 듯 당황한 표정을 보고.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짓궂은 면이 있을지는 몰라도, 할머니는 선을 넘으실 분은 아니었으니까.

‘.. 우연인 건가.’

우연의 일치라 보는 편이 합리적일 거 같았다.

가만히 나는 김다영이 짓고 있는 표정을 바라봤다.

불편해하면서도 머뭇거리는 표정이었다.

“.. 혼자 왔냐?”

뒤에서 할머니가 물었다.

김다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왜 왔는데?”

조금은 서운한 듯 그녀는 대답한다.

“엄마 얼굴 보러.”

흠칫하는 연두.

할머니를 부르는 김다영의 호칭에 놀란 거 같았다.

그럴 만도 했다.

‘모를 테니까.’

친척들과 할머니의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을 테니 말이다.

따로 얘기해준 적도 없고.

할머니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 연락도 없이?”

양손에 무언가를 든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대답했다.

“그냥 갑자기 엄마가 보고 싶었어. 윤호가 있을지는 몰랐어. 주원이랑.. 연두가 있을지는 더 몰랐고. 근데 엄마.”

“...”

“나는 연락 없이는 엄마 얼굴 보러도 못 올 사람이야?”

미간을 찡그리는 김윤호.

김다영은 혼자 고개를 휙휙 젓더니 말했다.

“아, 아냐. 미안해. 내가 엄마한테 어떤 딸인지 아는데 염치없었다. 그치?”

“다영이 너..”

“어설프게 좋은 딸 흉내 내려니까 이런 거지, 하, 하하.. 내가 하연이도 아닌데.”

양손에 들고 있는 봉투.

어떤 상황인지 알 거 같았다.

깜짝 놀래켜 주기 위해 연락도 없이 선물을 가득 들고 할머니를 찾아뵌 거겠지.

‘서운해할 만도 해.’

반겨주는 엄마의 모습을 기대했을 텐데 정반대의 반응이 돌아왔으니 서운해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 아, 미안해. 괜히 하연이 얘기를 꺼내서.”

재차 그녀는 사과했다.

할머니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나는 이모를 향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냥 할머니를 뵈러 오신 거라는 거죠?”

“응, 맞아.”

“그럼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 뭘?”

“저희는 오늘 돌아갈 생각이었거든요. 짐 챙겨서 바로 나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리시면...”

“아냐.”

그녀는 손을 휙휙 저으며 말했다.

“내가 갈게.”

그럴 순 없었다.

딸로서 어머니를 찾아온 건데 곧바로 돌아가게 만들 권리는 없으니까.

실제로 오늘 돌아갈 예정이기도 했고.

‘조금 앞당기는 거야.’

그게 가장 맞는 선택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어제 도착해서 저희는 충분히 있었거든요.”

그 말과 함께 돌아서서 한 발을 내딛는 순간.

뒤에서 들려왔다.

“자, 잠깐만.”

멈춰선 나를 향해 그녀는 말했다.

“괜찮으면.. 연두한테 한 마디만 해도 될까?”

“아니..”

거절하려 했으나 품에 안긴 연두가 내 어깨를 쥐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싶다는 거 같았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연두를 조심스레 내려줬다.

꼬옥.

손을 꼭 잡고서 이모를 바라보는 연두.

김다영은 말했다.

“.. 연두야.”

“네에.”

무겁게 입을 뗀 그녀는 말을 이었다.

“이런 말도 상처가 될지 모르지만.. 상처를 줘서 미안해. 정말.. 정말 미안해.”

진심으로 보였다.

그렇지만 웃으며 받을 수는 없었다.

어떤 경우에 사과는 듣는 이가 더 괴로울 때도 존재하니까.

스윽.

걱정스레 연두를 응시했다.

맞잡은 손의 떨림이 느껴지고 아주 천천히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알 수 있었다. 힘겹게 짓는 미소라는 걸.

그런 채로 연두는 답했다.

“갠차나요...”

처음으로 연두가 친척에게 사과를 받는 순간이었다.

***

알고 있었다.

언젠가 친척 중 누군가에게 사과를 받게 된다고 해도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닐 거라는 건.

역시 그랬다.

“괜찮아, 연두야?”

“.. 네!”

애써 힘차게 대답하는 게 보여 마음이 아팠다.

집에 돌아가기 전.

아주 잠깐 나는 이모와 집 밖에서 단둘이 대화를 나눴다.

삼촌에게 연두를 맡겨두고.

“미안, 주원아. 잠깐이면 돼.”

“네.”

내게도 할 얘기가 있다는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피하려 했으나 얘기하고 오라는 연두의 말에 잠깐 나온 상태였다.

김다영은 천천히 말을 꺼냈다.

“있잖아, 주원아.”

“네.”

“나는 하연이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어.”

또다시 나온 이름.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김다영은 실소를 머금고 말을 이었다.

“하연이처럼 착한 딸, 하연이처럼 좋은 누나, 하연이처럼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사람. 만약에 지금 살아 있었으면 하연이처럼 좋은 엄마도 그중 하나였겠지. 그리고 너도 알겠지만.. 얼굴은 또 얼마나 예쁘니.”

“.. 네.”

“그런데 어느 순간 보니까.. 나는 완전히 하연이랑 정반대의 사람이 되어있더라고.”

어떤 말인지 알 거 같았다.

되고 싶은 모습과 실제 모습 사이의 괴리감에서 오는 감정은 잘 알고 있으니까.

엄마가 이모에게는 그런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마침내 그녀는 본론을 꺼냈다.

“절대로 너랑 연두를 건드리지 않을게.”

“.. 네?”

“물론 당연한 거지만 혹시 기회가 생긴다면 얘기하고 싶었어. 오늘 이후로 너희 앞에 우연히라도 나타나는 일도 없을 거야. 이건 믿어도 돼.”

그녀를 향해 나는 입을 뗐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하시는 이유가 있어요?”

“그냥.. 그렇게 해야 조금이라도 더 하연이를 볼 낯이 있을 거 같아서.”

순간 실소가 흘러나왔다.

엄마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던 걸까.

어떤 사람이었기에 죽어서도 이렇게 나한테 영향을 끼치는 걸까.

“.. 감사해요.”

김다영은 손사래를 치며 답했다.

“아냐. 당연한 일인데. 나, 아니 우리가 비정상이었을 뿐이지...”

그렇게 마무리된 대화.

마지막으로 김다영은 나를 보며 말했다.

“주원이 너한테도.. 정말 미안해.”

나는 답했다.

아까 연두가 대답한 것처럼 아주 옅은 미소를 머금고.

“괜찮아요.”

지금 이 순간.

아주 조금은 달라진 거 같았다.

김다영의 색깔도.

***

집에 돌아왔다.

시골에서의 1박 2일은 나와 연두에게 생각보다 많은 걸 남겼다.

김윤호에 대해 좀 더 알게 되고, 몰랐던 선동이의 가정사를 알게 되고, 이모를 만났다.

집에 돌아가는 길.

차 안에서 나는 연두를 향해 물었다.

‘힘들지 않았어?’

‘.. 네?’

‘사과받는 거. 괜찮다고 하는 거. 힘들지 않았어?’

그런 내 물음에 연두는 대답했다.

‘힘드러써요..’

역시 그렇겠지.

평소에 띠던 미소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으니까.

허나 끝이 아니었다.

‘힘드렀는데..’

‘그런데?’

‘조아써요. 사과해 줘서...’

그렇다.

웃어넘길 수 없는 사과라 해서 받지 않는 게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특히나 그게 진심 어린 사과라면.

‘적어도.’

김다영의 사과에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그것만으로 이모의 사과가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오고 나서 다시 시작된 일상.

틱.

오늘도 어김없이 연두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준 뒤 데스크톱을 켰다.

동화책 반응을 보기 위해서였다.

내가 반응을 보는 창구는 크게 세 가지였다.

‘초록창 도서란, 원스타그램, 육아 카페.’

의외로 초록창과 카페뿐 아니라 원스타그램에도 관련 게시글이 많이 올라왔다.

방법은 간단했다.

해시태그를 누르고 ‘소녀와 환상의 숲’을 검색하면 게시글이 떠올랐다.

‘어디 볼까.’

말 나온 김에 원스타그램부터 보기로 하자.

곧바로 검색창에 검색했다.

[# 소녀와 환상의 숲]

떠오르는 게시물.

최신 게시물을 클릭하려다가 눈에 들어온 무언가를 보고 나는 마우스를 움직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바뀌어 있어.’

인기 게시글 1위가 바뀌어 있었다.

계속 한 후기글이 부동이라 굳이 볼 필요가 없었는데 이럼 얘기가 다르지.

어떤 게시글이길래 1위 자리를 차지한 걸까.

“흐흐.”

기대감 어린 표정으로 게시글을 클릭했다.

‘.. 어?’

그런데 이상했다.

오류가 난 걸까.

이전 1위 게시글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비현실적인 댓글 수가 찍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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