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딸 바보가 되었습니다-444화 (445/850)

444화. 일곱 살

“아빠의 아빠, 그러니까.. 할아버지를 보러 갈 거야.”

“.. 할아버지요?”

“응.”

생각도 못했다는 듯 벌어지는 연두의 입.

나는 덧붙였다.

오늘은 11월 8일, 아빠의 기일이었다.

전에 연두에게 아빠에 대해 얘기해주며 한 약속이 있었다.

꼭 함께 보러 가자고.

‘보여드려야지.’

그리고 아빠한테도 한 번쯤은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예쁜 손녀의 얼굴을.

“.. 가요.”

“응?”

“할아버지 보러.. 빨리 가여!”

“하하, 그래.”

따뜻하게 옷을 차려입고 바로 집을 나섰다.

오늘 연두의 코디는 롱코트였다.

기장이 발등까지 내려와서 옷에 둘러싸인 듯 걸어가는 모습이 귀엽다.

부릉.

곧바로 차를 타고 출발했다.

목적지는 그리 멀지 않은 부근에 위치한 납골당.

액셀을 밟으며 말했다.

“연두야. 창밖 한 번 봐 봐.”

생각해 보니 이것도 아빠가 나한테 귀에 딱지가 붙을 정도로 했던 말이네.

시큰둥했던 나와 달리 연두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입이 벌어지며 나오는 한 마디.

“.. 바다다!”

“푸흣.”

생각지도 못한 단어에 웃음이 터졌다.

바다라니.

하기야 연두가 볼 때는 그럴 수도 있겠네.

나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연두야.”

“으응..?”

“저건 바다가 아니라 강이거든.”

“강이여?”

“응. 바다랑 다르게 파도도 안 치잖아.”

깨달음을 얻은 듯 고개를 끄덕이는 연두.

창 밖을 보며 중얼거린다.

“강도 진짜진짜 크다..”

“그치. 어, 저기 봐, 연두야!”

“어디여..?”

“저기 강 위에.”

눈이 동그래진 연두가 외친다.

“새다!”

이번에는 틀린 말은 아니네.

오리도 엄연히 조류 중에 하나긴 하니까.

나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저건 오리야.”

“오, 오리여?”

“응.”

“깩깩 우는 오리..?”

“흐흐, 맞아. 꽥꽥 우는 오리.”

창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연두.

강 위의 오리가 생각 이상으로 신기한 모양이다.

넌지시 나는 말했다.

“연두야.”

“네에.”

“이따가 할아버지 보고 나서, 저기 강가 같이 좀 걸을까?”

“.. 그래도 대요?”

“그럼. 애초에 강 주변이 전부 산책로거든.”

사실 서울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고층 건물도 없고, 굳이 따지면 서울과 시골의 중간쯤에 걸쳐 있는 느낌이라 해야 할까.

이유는 간단했다.

여기는 비개발지역으로 정해져 있거든.

‘자주 걸었지.’

아빠랑 자주 이 근방을 걸었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한 번쯤은 연두도 데려오고 싶었는데 잘 됐네.

오늘 아빠도 보고 산책도 하면 되니까.

“조아요!”

“그래?”

“네. 오리도 더 가까이 보고 시퍼요..”

오리에 완전히 꽂혔구나.

연두를 매혹시키다니, 오리 인생 최대 업적이다.

“그래. 이따가 오리도 더 가까이서 보자.”

“헤헤..”

얼마간 더 달려서 도착한 납골당.

이 곳을 아빠의 묘소로 정한 이유는 간단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거리이기도 하고, 이 곳에 엄마가 있기도 하니까.

스윽.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봉안자 성함 말씀해주세요.”

“이윤수입니다.”

오랜만에 입에 담아보는 아빠의 이름이다.

봉안번호를 말한 뒤에 직원의 안내에 따라 봉안실로 입장할 수 있었다.

처음 와 보는 거라 그런지 연두의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아빠 손 잡아, 연두야.”

“네에.”

아빠가 있는 장소는 잘 알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잠들어있는 봉안함을 지나쳐 아빠에게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멈춘 발.

툭.

자연히 연두의 발걸음도 멈췄다.

“여기야, 연두야.”

“.. 네?”

“할아버지가 있는 곳.”

내 말에 살며시 고개를 드는 연두.

아빠가 손녀를 처음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

[故 이윤수]

아빠의 이름이 적힌 하얀 봉안함.

주위는 화관과 각종 장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높이가 꽤 있는지라 연두는 아빠를 보는 데에 꽤나 애를 먹는 거 같았다.

그럼 안 되지.

“아빠가 안아줄 테니까 가까이서 볼래? 할아버지.”

“네.”

“그래. 읏차!”

가볍게 연두를 안아서 들어올렸다.

이제야 맞는 눈높이.

아빠의 이름이 적힌 유골함을 바라보며 연두가 중얼거렸다.

“이.. 윤수...”

“맞아, 이윤수.”

“할아버지 이르미에요..?”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했다.

무언가 발견한 듯 연두가 외마디 소리와 함께 봉안함을 가리킨다.

“.. 아, 아빠다!”

“바로 아빠인 걸 알아보네? 어렸을 때인데.”

당연하다는 듯 연두는 덧붙였다.

“아빠는 아빠에요!”

“하하, 그래?”

“네.”

연두 말대로 봉안함 옆 액자에는 나와 아빠가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다.

커다란 나무 밑에 앉아서 나를 안고 있는 모습.

참고로 이 사진도 여기 근방에서 찍은 사진이다.

‘가 볼까.’

사진도 봤겠다.

연두랑 같은 장소에 가 보는 것도 괜찮을 거 같았다.

그걸 알아챌지도 궁금하고.

가만히 사진을 바라보던 연두는 왜인지 배시시 웃음짓더니 중얼거렸다.

“달마따..”

“.. 응?”

“달마써요. 아빠랑 할아버지랑...”

아빠한테 너무 과분한 칭찬인데.

그런 우스운 생각을 하며 나는 장난스레 물었다.

“그럼.. 누가 더 잘생겼어?”

“으응?”

“아빠랑 할아버지 중에.”

그 말에 연두는 힐끗 봉안함을 바라보더니 내 귓가에 속삭인다.

“아, 빠.”

“풋.”

대답과 별개로 웃음이 나왔다.

봉안함 속 아빠 눈치를 볼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빙긋 웃으며 말했다.

“할아버지 깜짝 놀랐겠다.”

“.. 왜여?”

“아들이 이렇게 예쁜 손녀를 데려와서.”

그 말에 연두가 묻는다.

“손녀가 연두에요..?”

“그렇지.”

빨개지는 볼.

그 상태로 연두는 다시 봉안함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뻐.. 할까요?”

“응?”

“할아버지가.. 연두 예뻐할까여?”

말할 것도 없었다.

만약 아빠가 살아서 연두를 봤다면 얼마나 좋아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으니까.

어쩌면 딸바보 아빠로서의 주도권을 빼앗겼을지도 모른다.

손녀바보의 면모에.

“당연하지. 너무 예뻐해서 연두가 귀찮을지도 몰라.”

“왜 귀차나여?”

“시도 때도 없이 껴안고 뽀뽀하고 장난 아닐걸? 틈만 나면 할아버지랑 놀러 가자고 그러고. 아빠보다도 더 그럴 거야.”

그 말에 들려오는 대답.

“연두는 조은데……”

문득 아쉬웠다.

손녀의 이 말을 들었을 때의 아빠의 표정을 볼 수 없다는 게.

아마 입이 귀에 걸리지 않았을까.

한참동안 아빠 앞에 서서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은 뒤에 나는 봉안함을 보며 말했다.

“손녀 봐서 좋았지, 아빠?”

닿을 거라 생각해서 하는 말은 아니다.

그냥 얘기하고 싶었다.

들리지 않더라도 일방통행이더라도 아빠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자책하지 않아도 돼. 뭐, 바라던 미대는 못 갔지만 결국 나는 행복해졌거든.”

말해주고 싶었다.

정말 나락까지 떨어졌을 때도 한 번도 아빠를 원망한 적은 없다는 걸.

그냥.. 늘 그리워했다는 걸.

미소를 띠며 말을 이었다.

“.. 봐, 이렇게 예쁜 딸도 데리고 왔잖아. 아빠는 인정 안 할 거 같긴 하지만, 솔직히 나는 엄마보다도 연두가 좀 더 예쁜 거 같아.”

아니, 인정할지도 모르겠다.

엄마보다 예쁜 사람은 세상에 없다며 입이 닳도록 얘기했던 아빠지만 손녀가 생긴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그것도 이렇게 예쁜 손녀라면.

꾸욱.

잡은 손에서 힘이 느껴진다.

굳이 보지 않아도 지금 연두가 짓고 있을 표정을 알 거 같았다.

이런. 슬프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조금 급 마무리긴 하지만, 오늘 아빠와의 대화는 여기서 끝맺는 게 좋을 거 같네.

“연두랑 같이 또 보러 올게. 잘 있어, 아빠.”

그렇게 작별인사를 마치고 입을 뗐다.

“이제 갈까, 연두야?”

도리. 도리.

왜인지 고개를 좌우로 젓더니 연두는 말한다.

“연두도..”

“응?”

“연두도 얘기하고 시퍼요. 할아버지한테.”

“아, 그래.”

다시 한번 연두를 들어올려 눈높이를 맞춰줬다.

살며시 입을 떼는 연두.

“할아버지.. 고마어요.”

뜻밖의 감사인사였다.

미소를 머금은 채로 연두는 덧붙였다.

“연두랑 아빠 만나게 해 줘서……”

“...”

심장을 툭 건드리는 한 마디였다.

***

엄마까지 보고 나서 납골당을 나섰다.

이런 게 좋았다.

엄마를 보러 오든 아빠를 보러 오든 둘 다 보고 갈 수 있다는 게.

살아계셨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

“어땠어, 연두야?”

“으응?”

“할아버지랑 할머니 보니까.”

생긋 웃으며 연두는 대답했다.

“조아써요. 하고 시픈 말도 마니 했고……”

그래. 정말 많이 하긴 했다.

아빠한테는 고맙다는 말로 짧게 끝내더니 엄마 앞에 선 연두는 그야말로 수다쟁이로 변했으니까.

누렁이 얘기부터 시작해서 온갖 얘기를 다 했지.

여자끼리 통하는 게 있는 걸까.

‘모르겠어.’

그래도 보기 좋았다.

거리낌 없이 연두가 얘기하는 모습을 보는 건.

솔직히 걱정했으니까.

장례식과 비슷하게 생각해서 연두가 너무 슬퍼하는 건 아닐까 하고.

생각보다 밝은 모습이라 다행이었다.

“그럼.. 연두야.”

“네, 아빠.”

“이제 오리 보러 갈까?”

오리라는 단어 하나에 눈이 반짝인다.

“.. 네!”

그렇게 나는 차를 타고 강가 산책로로 향했다.

적당한 곳에 주차한 뒤.

나와 연두는 강을 둘러싼 산책로를 따라 쭉 걷기 시작했다.

갖가지 요소가 산책의 재미를 더했다.

예쁘고 아기자기한 집, 갈대, 우람한 나무, 사진을 찍으라고 마련해 둔 빨간색 공중전화 부스.

‘장난 아니겠는데.’

날이 추워서 그렇지 봄여름에 오면 장난이 아닐 거 같았다.

사진 포인트도 한 두 군데가 아니다.

다음 이든 촬영은 여기서 해 볼까.

찰칵. 찰칵.

결국 못 참고 몇 장 찍었다.

이 정도는 괜찮잖아. 휴가 중에도 사진은 찍으니까.

걷다 보니 등장한 여덟개의 나무기둥.

‘이건 아직도 있네.’

[당신의 건강은 안녕하십니까?]

서로 다른 간격으로 일렬로 선 나무기둥이 일곱개의 공간을 형성하고 있었다.

(난 홀쭉)

(난 날씬)

……

……

(이러시면 안 됩니다!)

(당신은 외계인!)

잠깐.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외계인이라니.

호기심 어린 연두의 표정에 나는 말했다.

“한 번 들어가 볼래, 연두야? 연두는 첫 번째 칸도 통과할 수 있을 거 같은데?”

“첫 번째요..?”

“응.”

내 말에 연두가 ‘난 홀쭉’ 칸으로 조심스레 발을 옮긴다.

“우으..”

쏙.

조금 끼이긴 했지만 내 예상대로 연두는 첫 번째 칸 통과에 성공했다.

신이 난 표정으로 달려온다.

“아빠! 연두 들어가써요! 첫 번째..!

“하하, 그래.”

“아빠도 해 바여!”

“그럴까?”

어릴 때는 괜히 날씬하고 싶어서 홀쭉 칸에 도전하다가 납작해질 뻔 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별로 날씬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지.

슈욱.

어렵지 않게 세 번째 칸을 통과했다.

“아빠는 평범하네. 연두는 홀쭉하고.”

“히히.”

그렇게 간이 테스트를 마치고 좀 더 걸으니 다리가 등장했다.

강 사이를 가로지르는 기다란 다리였다.

“이 다리로 반대쪽으로 건너가 볼까, 연두야?”

떨리는 목소리로 연두가 되묻는다.

“강 위로요..?”

“응. 걱정 안 해도 돼. 튼튼해서 절대 안 무너지거든.”

“네에.”

눈을 질끈 감고 다리 위로 발을 올리는 연두.

“아빠.. 손 노으면 안 대요...”

이런 말 들으면 놓고 싶어지는데.

가까스로 제어하며 나는 말했다.

“알겠어. 절대 안 놓을게.”

“약속..!”

“그래, 약속.”

그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연두는 다리 위를 완전히 적응했다.

내 손을 놓고 뛰어다닐 정도로.

괜히 삐진 척 말했다.

“너무한 거 아니야, 연두야?”

“.. 여, 연두 너무해여?”

신박한 되물음이다.

세상 순수한 표정에 또 웃음이 터질 뻔했다.

애써 참으며 말했다.

“아빠 보고는 절대 손 놓지 말라면서 연두가 먼저 놓네..”

“아!”

바로 달려와서는 내 손을 잡는다.

“이제 안 노을께요! 연두 안 너무해요..!”

“푸흣.”

결국 웃음이 터졌다.

“어! 연두야, 저기 봐!”

“우아..!”

감탄사와 함께 연두가 소리쳤다.

“오리다!”

“진짜 가깝다. 그치.”

“네. 만져보고 싶다...”

“그건 안 돼, 연두야. 물 수도 있거든.”

생각한 오리의 모습과 다른지 다소 충격을 받은 표정이다.

슬슬 끝이 보이는 다리.

강가를 가로지르는 대장정을 마치고 나니 눈에 들어왔다.

‘여기구나.’

우뚝 선 거대한 나무.

이 곳은 아빠가 나를 안고 있던 봉안함 사진 속 배경이었다.

그 장소에, 이제는 연두와 내가 있었다.

***

그로부터 1년가량이 흘렀다.

커다란 나무 밑.

돗자리 위에 앉아있는 내 다리를 연두가 베고 누워있다.

불어오는 산뜻한 바람.

연두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입을 열었다.

“연두야.”

“네에.”

“기분이 어때? 이제 몇달만 지나면 학교에 갈 텐데.”

8월의 여름.

지금 연두의 나이는 일곱 살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