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9화. 첫번째 형아
“아, 하핫! 잠깐만, 유리…… 푸흣.”
“...”
당황한 나머지 맺혀있던 눈물이 쏙 들어간 유리.
그럴 만도 하다.
서러움을 가득 토로한 와중에 웃음소리, 그것도 웃겨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한 폭소가 들려왔으니까.
차라리 ‘무슨 그런 걸로 삐지고 그래?’하고 화를 냈다면 모른다.
“아빠...”
“미안, 유리…… 흣. 아하하!”
결국 유리는 폭발했다.
“그, 그만 웃어요!”
실망이었다.
평소에 아저씨가 웃는 모습을 보는 건 좋았지만.. 아니, 뭐라는 거야.
좋기는 개뿔.
그냥 못 봐줄 정도는 아니었던 거지.
“흐흣, 흡.”
지금은 아니었다.
상황을 고려할 때 이건 웃음이 아니라 명백한 비웃음이었으니까.
복합적인 마음이었다.
부끄러움, 아저씨에 대한 실망, 그리고... 서러운 마음.
‘.. 짜증 나.’
문득 떠올랐다.
솔직함은 늘 후회와 상대에 대한 실망으로 되돌아온다는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유리가 알고 있는 대응 방식은 짜증을 내는 것뿐이었다.
“뭐가.. 뭐가 그렇게 웃긴데요?”
그런데 이상했다.
평소라면 매섭게 쏘아붙였을 말인데도 마음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알 수 없었다.
왜 전처럼 말할 수 없게 된 건지.
“후우..”
호흡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려온다.
또 웃음을 참는 걸까.
“유리야.”
다행히 주원은 더는 웃지 않았다.
“웃어서 미안해.”
“.. 그렇게 웃어놓고 이제 와서요?”
“고의는 아니었어.”
“고의가 아니면 뭐에요! 실수로 그렇게 웃을 수도 있어요?”
“유리 너도 저번에 실수로 전화했잖아.”
“그, 그건 진짜 실수였거든요!”
진심으로 억울했다.
매사 솔직하지 못한 건 사실이어도, 처음 전화를 건 것만큼은 명백한 실수였으니까.
그 실수를 하길 잘했다고 여러 번 생각했다는 건 비밀이지만.
“절대 비웃은 건 아니야.”
“.. 거짓말.”
“정말인데.”
“아저씨, 지금도 웃음 참고 있잖아요.”
“그럴 리……”
이거 봐.
말하다 멈춘 걸 보면 또 입을 틀어막고 있는 게 틀림없다.
잠시 후 들려오는 목소리.
“그러니까.. 유리는 다음주 수요일에 친구들이 유리만 빼놓고 다른 학교에 놀러 가는 게 서운했던 거잖아? 같은 팀인데.”
“서운까지는 아니고요.”
더는 속마음을 들키기 싫어 유리는 덧붙였다.
“이제는 상관없어요. 같은 팀 아니니까.”
“유, 유리야...”
자그맣게 들려오는 연두의 목소리.
이상했다.
이렇게 마음에 없는 얘기를 할 때마다 설명 못 할 감정이 들곤 한다.
그 속에서 이어지는 아저씨의 말.
“수요일에 유리도 스케줄 없는데 같이 가자고 말 안 한 것도 아주 조금은 서운했던 거고?”
“.. 뭐, 그렇죠.”
마지못해 유리는 대답했다.
그것도 주원이 신경 써서 ‘아주 조금은’이라는 수식어를 붙였기 때문이다.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그런데 유리가 조금 오해하고 있는 게 있는 거 같아서.”
“.. 오해요?”
“응.”
유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한 치의 의심없이 지금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여겼으니까.
자신을 빼고 다른 학교에 놀러 가는 것.
“일단 첫 번째로는 유리만 빼놓고 가는 게 아니야.”
“네?”
“시은이랑 레나도 안 가거든.”
첫 번째로 쿵 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건 예상 밖이었다.
당연히 그 둘은 함께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애써 침착함을 가장하고 물었다.
“그럼요?”
“아저씨랑 연두만 가는 거야.”
1차 위기였다.
혼자만 빼놓고 간다고 그렇게 짜증을 냈는데 둘만 가는 거였다니.
그런데 아직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유리야.”
“.. 네.”
“형아학교가 어딘지 알아?”
선택지가 없었다.
이상한 이름이라 생각했을 뿐, 그런 학교에 대해서는 들은 적 없으니.
사실대로 답하는 수밖에.
“잘 몰라요..”
“형아학교는 유리가 아는 그런 학교가 아니야.”
“그럼요?”
“혹시 들어봤어? 아는 형아라고.”
아는 형아?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전이라면 몰랐을 테지만, 유투브에 입문하며 시야가 꽤나 넓어진 유리였으니까.
추천 영상에 클립이 떠오른 걸 본 적이 있다.
“본 적은 있는데……”
쿵.
내려앉는 심장.
생각해 보면 그 클립 속 장면은 학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형아학교라는 건……
“형아학교는 TV 프로그램 아는 형아 속 학교야.”
유리는 똑똑한 아이였다.
그 한 마디만으로도 모든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화끈거리는 얼굴.
‘.. 미쳤어.’
상황을 정리해봤다.
그러니까 연두랑 아저씨가 TV에 출연하는데, 자기는 안 데려간다고 서운해한 상황이었다.
형아학교를 다른 학교라 오해한 건 덤이고.
“유리야..”
“...”
“연두가 물어볼게! 유리도 같이 가도 되냐고.”
뒤이어 들려온다.
“아빠.. 호등이형아 전화번호 알아요..?”
“...”
입이 벌어지지 않았다.
이미 어떤 말을 해도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까.
선택지는 하나였다.
“.. 저, 전화하지 마! 호등이형아한테!”
툭.
그렇게 홱 소리치고서 유리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고, 핸드폰을 쥔 손을 가만히 떨군 채로.
“응? 전화 끝났니?”
마침 돌아온 은주아가 돌처럼 굳은 딸의 모습을 보고 물었다.
“뭐야. 왜 그래?”
“...”
가까이 다가간 은주아가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통화는 종료되어있다.
고개를 기울여 딸의 표정을 보려는 순간이었다.
“악!”
“까, 깜짝야!”
난데없이 고함을 지른 유리는 방으로 달려갔다.
벙찐 표정의 은주아.
퍽! 퍽!
잠시 후 유리의 방에서는 이불 차는 소리가 울려 퍼질 뿐이었다.
***
“푸하하!”
전화가 끊기자마자 시원하게 웃음을 터트린 나는 말했다.
“이렇게 웃어보는 것도 오랜만이네.”
곤욕이었다.
유리랑 대화할 때도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느라.
설마 형아학교를 보통의 학교라 생각하다니.
‘팀이라고 했으면서.. 나만 빼고 다른 학교 놀러가고.. 수요일에 나도 스케줄 없다고 말했는데……’
떠오를 때마다 자꾸만 웃음이 나온다.
안타깝게 됐네.
촬영을 안 한 걸 후회한 적은 많아도, 통화녹음을 안 해 둬서 후회한 적은 처음이다.
기분이 처질 때마다 들었으면 딱인데.
“...”
한편 연두의 표정은 심각 그 자체다.
정신 차려야지.
휙. 휙.
아마 연두는 이 상황을 나와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을 터였다.
굉장히 심각한 상황으로.
이러다 촬영하는 것까지 영향이 가면 큰일이다.
“연두야.”
연두가 살며시 고개를 돌린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
“유리.. 화나서 전화 끊었어요...”
“아니야.”
재차 강조했다.
“화나서 끊은 게 아니야.”
“그럼요..?”
“쑥스러워서 그래. 혼자만 빼놓고 간다고 오해한 게 쑥스러워서.”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니까 유리는, 그만큼 연두랑 친구들이랑 같이 놀고 싶었다는 거지.”
“유리가요..?”
“응.”
“그런데 유리는.. 이제 팀 아니라고 했는데……”
“진심이 아니야.”
위로하려 하는 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랬다.
내가 보기에 단비음악대에 대한 유리의 소속감은 어느 멤버한테도 밀리지 않았으니까.
솔직하지 못할 뿐이지.
“연두도 봤잖아.”
“뭘요?”
“독일에서 버스킹할 때, 유리가 얼마나 즐거워했는지.”
그 말에 연두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 맞아요!”
허나 이유는 달랐다.
내가 주목한 건 표정이었지만, 연두가 귀 기울인 건 소리였다.
“엄청.. 엄청 행복한 소리였어요...”
행복한 소리.
그만큼 지금 상황에서 와닿는 표현은 없을 거 같았다.
나는 미소를 띠며 말을 받았다.
“맞아. 되게 행복한 소리였지. 그만큼 유리는 친구들이랑 같이 연주하는 걸 좋아한다는 거야. 당연히 그중에는 연두도 포함되어 있고.”
“연두도 좋아해요..”
옅게 웃으며 덧붙인다.
“유리랑 같이 연주하는 거..”
“맞아. 그러니까 연두는 믿으면 돼. 그때 유리가 들려줬던 행복한 소리를.”
“.. 네!”
조금은 납득이 된 모양이다.
다행이네.
계속 풀 죽어 있었으면 꽤나 곤란한 상황이 연출됐을 거 같은데.
핸드폰을 손에 들고서 얘기했다.
“내일쯤 다시 전화해보자.”
“내일이요?”
“응. 아마 그때쯤이면 유리도 쑥스러운 마음이 어느 정도는 가실 거야.”
사실 잘 모르겠다.
지금껏 한 말은 모두 진심이었지만 이 말만큼은 보장할 수 없었다.
나름 흑역사 제조기로서 알고 있으니까.
‘어떤 기억은 상당히 오래간다는 거.’
특히 오늘은 이불 좀 차겠군.
왜인지 그 익숙한 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거 같았다.
또 번지는 웃음.
원래 나와 달리 누군가의 흑역사를 관람하는 건 즐거운 법이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어느새 수요일.
대망의 아는 형아 촬영날이었다.
‘복장은 딱히 신경 쓸 필요 없고.’
이유는 간단하다.
뭘 입고 가도 어차피 갈아입게 되어있으니.
최고의 한 끼 때는 스타일리스트가 주는 옷을 입었는데, 이번 경우에는 지정복이 있다.
다름 아닌 교복이다.
아는 형아 게스트는 나이와 관계없이 교복을 입게 되어있었다.
나이가 지긋하신 노배우도, 아직 꼬꼬마인 어린이도.
‘나랑 연두도 입는다는 거지.’
실제로 무척 많았다.
교복을 입은 연두의 모습을 보고 싶어 하는 연두부들이.
나 역시 그렇고.
집에서 최대한 디자인이 비슷한 옷을 입혀보니 기대가 더욱 증폭됐다.
“방송 진행이 제대로 될지 모르겠네.”
“왜요..?”
“너무 예뻐서.”
그 말에 연두는 배시시 웃더니 말을 돌려줬다.
“아빠도요..”
“응?”
“아빠도.. 너무 멋져서 방송 진행이 제대로 될지 모르겠어요..!”
“하하, 글쎄……”
기분이 좋긴 하지만 동의할 수는 없는 말이다.
왜냐고?
형아들의 특징을 잘 알고 있으니까.
수많은 게스트가 존재했지만 남자 게스트가 환영받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뭐, 좋아.’
오히려 좋았다.
최고의 한 끼 때도 그랬지만 찰지게 맞는 거 하나만큼은 자신 있으니까.
예능 마인드를 단단히 장착하고 갈 생각이다.
아침에는 유투브도 확인했다.
오늘이 촬영날인 건 비공개인데도, 공개된 명단 때문인지 아는 형아 관련 댓글이 장난이 아니었다.
-못 견디겠어...
┖방송국 잠입해서 촬영 직관하고 싶다 ㅠㅠ 한순간도 놓치기 싫다고.
┖ㅇㅈ 방송 나오는 건 일부자나.
┖그게 어디임. 연두랑 초록님 방송 나오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럽다. 그것도 아는 형님에, 흑흑.
┖존버는 성공한다...
┖근데 알고 나니까 더 견디기 힘듦. 미칠 거 같아!!!
-본방 휴지 양쪽 코에 끼우고 봅니다.
┖엥 왜요?
┖연두랑 초록님 교복 입잖아요. 왼쪽 코는 연두 담당이고, 오른쪽 코는 초록님 담당임.
┖아 ㅋㅋ 쌍코피 대비는 킹정이지.
-과연 교복은 한복을 이길 수 있을 것인가.
┖그때 초록님 첫 얼공 ㅋㅋ 비주얼 보고 충격과 공포에 빠졌는데. 너무 잘생겨서.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양반일 수밖에 없는 얼굴 ㅋㅋㅋ
┖지금 천민 비하하시는 건가요?
┖왜 시비임?
┖아으.. 또 쓸데없는 걸로 싸우네. 열 식히고 초록님 연두 교복이나 존버해라.
조금은 낯간지러웠지.
의외로 연두뿐 아니라 교복입은 내 모습도 기대하는 연두부가 많았으니까.
이제 출발할 시간이었다.
“자, 연두야.”
“네.”
“편하게 입고 가자. 어차피 갈아입어야 하니까.”
가벼운 트레이닝복.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에 나란히 서서 거울을 바라본다.
역시 연두는 이래도 예쁘구나.
“좋아. 그럼 출발할까?”
“네!”
바로 방송국으로 출발했다.
꽤 시간이 흐르긴 했지만 경험이 있는 터라 처음에 비해서는 익숙했다.
순조롭게 방송국 입성까지 성공했다.
“따라오시면 됩니다.”
인사를 주고받은 뒤에 PD를 따라 대기실로 이동했다.
길게 늘어선 복도.
걷는 도중에도 PD는 이런저런 설명을 건넸다.
“대기실에 도착하면 먼저……”
특별한 건 아니었다.
옷을 갈아입고, 메이크업을 하고, 간단한 프리뷰 영상을 찍게 될 거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들으며 걷고 있는데,
터벅. 터벅.
들려오는 발소리에 바라본 정면.
동시에 입이 벌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두의 입에서도 세상 반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형아다!”
형아학교에 와서 만난 첫 번째 형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