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0화. 촬영일이 언제니?
“…… 형아다!”
세상 반가운 목소리.
형아학교의 학생은 총 여섯 명이다.
대빵인 호등이형아, 장신의 장원이형아, 분위기메이커 하철이형아, 개그 담당 수군이형아, 춤짱 영훈이형아.
나머지 한 명이 지금 마주친 영철이형아였다.
개그맨 출신 박영철.
수식어를 붙이자면 꿀노잼 정도가 적당할 듯하다.
이유는 간단하다.
형아학교 내 노잼을 담당하고 있지만, 실은 그건 컨셉일 뿐이니까.
‘꿀잼이란 말이지.’
그는 재밌는 사람이다.
형아들 사이에서 탱커 역할을 하고 있긴 하지만, 그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찰지게 맞는 것도 어려운 일이니까.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결코 내가 비슷한 역할이라 공감이 돼서 하는 말이 아니다.
“영철이형아! 아빠, 영철이형아에요..!”
그 증거로 연두도 영철이형아를 무척 좋아한다.
웃음이 터질 때도 많았고.
지금 반가워하는 것만 봐도 그 점을 알 수 있다.
“오 마이 갓!”
물론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눈이 휘둥그레진 박영철이 우리를 향해 달려온다.
“연두우!!”
신기하다.
TV로 보던 사람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
연두를 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방송할 때의 텐션과 크게 다르지 않다.
“웰컴~ 형아학교에 온 걸 환영해!”
“히히.”
보던 그대로의 모습에 웃음짓던 연두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환영에 대한 감사인사인 거 같았다.
그걸 본 영철이 말했다.
“오! 노우 노우!”
박영철의 특징 중 하나는 원어민 수준의 영어 구사 능력이었다.
다소 투머치한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게 그의 매력이다.
“안 되지, 안 돼.”
“으응..?”
“연두 우리 형아학교에 전학 온 거잖아? 그럼 우리는 전부 나이가 똑같은 친구라구. 그러니까 서로 반말하는 거야. 두 유 언더스탠드?”
맞아, 그랬지.
나이에 상관없이 반말하는 건 형아학교의 교칙 중 하나였다.
참고로 영철의 나이는 마흔여덟.
‘연두랑은 정확히 마흔살 차이지.’
아무리 동안이라고는 해도 도무지 친구로는 보이지 않는 비주얼이다.
허나 교칙은 교칙.
조심스럽게 연두는 대답했다.
“.. 예쓰.”
하마터면 웃음이 터질 뻔했다.
마지막에 영어로 물었다고 영어로 대답하다니.
이 센스 뭔데.
그런 연두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박영철은 대화를 이어갔다.
“그럼 친구니까 내 이름 한 번 불러줄래?”
조금 더 고난도였다.
영어는 존대가 따로 없지만 지금은 완벽하게 말을 놔야 하는 거니까.
우물쭈물하던 연두가 주먹을 꾹 쥐고는 얘기한다.
“여, 영철아..”
만족했다는 듯이 영철이가 웃으며 말한다.
“연두처럼 귀여운 친구가 우리 학교에 전학을 와서 나 영철이는 기분이 너무 좋아.”
“연두도..”
“응?”
“영철이 만나서 연두도 기분 너무 좋아.”
“정말? 오호호!”
유쾌한 첫 만남.
그 속에는 촬영할 때 수월하게 말을 놓을 수 있도록 해주려는 영철의 배려도 엿보인다.
이후 그의 시선은 나를 향했다.
“아차차. 초록이한테 인사가 늦었네? 만나서 반가워, 나는 영철이야.”
우스꽝스러운 상황이다.
촬영이 시작하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컨셉에 충실한 이 모습.
그렇다고 뺄 수는 없지.
“응. 반가워, 영철아.”
“좋아. 그럼 이따가 교실에서 보자. 다른 형아들한테는 우리 만난 거 비밀로 할 테니까.”
“그래.”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몇 마디 주고받고 나니 비로소 실감이 갔다.
형아학교에 전학 왔다는 게.
***
PD님을 따라 이동한 대기실.
촬영 준비는 곧바로 이루어졌다.
스륵.
준비과정은 비슷했다.
피팅룸 내부 거울에 교복을 입은 내 모습이 비친다.
진짜 적응 안 되네.
하기야 거의 십 년 만에 입는 교복이니까.
“와.. 진짜 너무 잘 어울리시는데요, 초록님?”
“하하, 감사합니다.”
칭찬이 낯간지럽긴 했지만 기분은 묘하게 좋았다.
학창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라 해야 할까.
마침 반대편 피팅룸으로 들어간 연두도 스타일리스트 언니의 손을 잡고 걸어 나온다.
동시에 흘러나오는 실소.
“하하..”
큰일이다.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다.
문득 최근에 본 연두부의 댓글이 떠오른다.
-과연 교복은 한복을 이길 수 있을 것인가.
둘 다 본 입장이라 코멘트가 가능하다.
그때도 엄청 예뻤지.
시간이 흐른 뒤에도 한복 입은 연두를 다시 보고 싶어서 몇 번이고 꺼내서 입혀보기도 했을 정도니까.
따라서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게 있다.
‘밀리지 않아.’
두 모습 다 선명한데도 차마 우열을 가릴 수가 없다.
너무 예뻐서.
사실 특별한 디자인은 아니다.
흰 셔츠에 베이지색 조끼, 줄무늬가 있는 나비넥타이와 일반적인 디자인의 교복 치마.
그러나 그 조화는 완벽에 가까웠다.
‘어떡하냐.’
벌써부터 걱정이다.
나중에 교복 입을 나이가 되면 매일같이 이 모습을 보게 된다는 건데.
그런 내 주접은 스타일리스트가 대신했다.
“어떡해.. 입혀주다가 너무 예뻐서 몇 번을 감탄한지 모르겠어요. 초록님이 보기엔 어떠세요?”
수줍은 듯 말갛게 물든 연두의 볼.
보기에 어떠냐고?
말 그대로 답은 정해져 있으니 대답만 하면 되는 떠먹여 주는 질문이다.
“너무 예쁘네요.”
“그쵸! 연두도 거울 한 번 봐 봐.”
“.. 네에.”
내 쪽으로 총총 달려와서 거울을 바라본다.
살짝 벌어지는 입.
곧이어 번지는 미소에서 잔뜩 마음에 들었다는 게 느껴졌다.
“이제 이쪽에 앉아주시겠어요?”
피할 수 없는 메이크업 시간이다.
눈을 꼭 감았다.
어차피 온전히 내려놓고 나를 맡기는 것 외에 방법은 없다는 건 오래전에 깨달았으니까.
톡. 톡.
얼굴 위에 느껴지는 감촉.
변신의 시간이다.
이번에는 어떤 모습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과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따로 부탁을 드리기도 했으니 괜찮겠지.
그때였다.
똑. 똑.
문 두드리는 소리.
연이어 문 열리는 소리까지 귀에 들어온다.
누구지?
메이크업이 끝날 때까지는 안 뜨려 했는데, 누군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
살며시 눈을 떴다.
“.. 어?”
그러자 눈에 들어온 건 PD님도, 영철이가 아닌 또 다른 형아도 아니었다.
페도라를 쓴 의문의 남자.
“이 학교에 저를 애타게 찾는 공주님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요.”
마술사 이윤결이었다.
***
마술사 이윤결.
그가 형아학교에 오게 된 계기는 간단하다.
얼마 전, 친구인 PD로부터 연락이 왔다.
‘어, 왜.’
전화가 오는 경우는 둘 중 하나다.
술 먹자고 연락하거나 섭외 요청을 하거나.
‘윤결아.’
‘응.’
‘단판승부 끝나고 나 촬영팀 옮긴 거 알지?’
‘알지.’
그때 직감했다.
섭외 요청이겠구나 하고.
단판승부 게스트 때의 파급력과 몇 차례의 방송 출연으로 주가가 상승한 상태이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이번에 촬영 들어가는데 네가 필요해서.’
역시 예상대로였다.
절친한 사이인 만큼 어지간하면 들어주고 싶었다.
형아학교에 가 보고 싶기도 했고.
문제는 당분간은 스케줄이 너무 꽉 차 있다는 점이었다.
‘혼자는 아니고 게스트가 두 분 더 있긴 한데.’
‘...?’
게다가 게스트가 또 있다니.
최근 대세임을 고려해 단독 게스트 섭외라고 확신하고 있던 이윤결이었다.
그런 속마음을 숨기는 사이는 아니었다.
‘이보게, 황 PD.’
‘응?’
‘나 이윤결이야.’
‘뭐?’
‘나 마술사 이윤결이라고.’
‘그래, 너 이윤결 맞지. 근데 뭐.’
빠직.
그때 한차례 꼭지가 돌았다.
‘아니, 이걸 안 받아준다고? 너 피디 맞아? 이렇게 대놓고 갑질 대사 날렸으면 티키타카 해 줘야지. 이걸 안 받아주면 내가 뭐가 돼? 진짜 피디한테 갑질한 마술사가 되잖아. 잠깐 바짝 떴다고 바로 인기 프로그램 퇴짜 놓고 갑질 부린 갑질 마술사 이윤결! 어? 너 같은 놈이 바로 마술사의 적이야, 적!’
자기객관화가 무척 잘 되어있는 윤결의 말.
농담 반 진심 반이었다.
그 말에 황진모는 폭소를 터트리더니 답했다.
‘알겠어, 알겠어. 쏘리.’
사실 그라고 눈치를 못 채서 안 받아준 게 아니었다.
의도한 반응이었다.
숨겨둔 비장의 패가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그래서 나올 거야, 말 거야.’
‘나가겠냐?’
‘진짜?’
‘됐어, 나 기분 상했어. 그리고 장난이 아니라 요즘 너무 바빠. 아는 형아도 진짜 나가고 싶긴 한데 당분간은 좀 힘들 거 같다.’
‘그래서 거절한다고? 나머지 게스트 두 명이 누군지는 들어보지도 않고?’
그쯤 되니 윤결도 코웃음이 나왔다.
대체 누구길래.
얼마나 초특급 게스트이기에 친구 녀석이 이렇게 나오는 건지.
‘나도 뚝심이 있는 놈이야.’
가벼운 컨셉이긴 해도 뚝심 있게 마술을 고집해 이 자리까지 온 이윤결이었다.
물러설 수 없었다.
윤결은 핸드폰에 입을 대고 똑똑히 얘기했다.
‘누군지 들어보지도 않고, 라고 했지, 지금?’
‘그래.’
‘황진모.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그 두 명이 누구든 간에, 저스틴 베버랑 비용세가 내한해서 나란히 출연한다고 해도 안 나가. 알지? 미술사는 한 입으로 두말 안 하는 거.’
그렇다.
마술사는 한 입으로 두말하는 직업이 아니었다.
두말만 하면 하수다.
적어도 세 말 네 말을 넘어 다섯 말 정도는 해 줘야 훌륭한 마술사라고 할 수 있는 거다.
그런 윤결의 귀에 들려왔다.
‘연두랑 초록님.’
‘.. 뭐라고?’
‘나머지 게스트 두 분, 연두랑 초록님이라고. 특히 연두는 너의 엄청난 팬이라더라. 근데 네가 정 안 된다면 뭐, 어쩔 수 없지.’
침묵이 일었다.
짧지 않은 정적을 깬 건 이윤결의 한 마디였다.
‘언제니?’
‘응?’
‘촬영날이 언제니?’
그렇게 섭외된 이윤결이었다.
***
대기실 앞에 선 이윤결.
“후우..”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건 본방에 앞서서 촬영하는 프리뷰 영상의 카메라맨이었다.
페도라를 푹 눌러썼다.
출연을 결정짓고 난 뒤에 진모가 한 말이 있었으니까.
‘너를 콕 집어서 같이 출연하고 싶다고 얘기하셨어. 연두는 네가 하는 게 마술이 아니라 마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거 같더라.’
감격하는 동시에 윤결은 능청스레 답했다.
‘마법 맞는데?’
‘.. 확실히 네가 미친놈이긴 해. 불알친구인 나한테도 한결같이 그러는 걸 보면.’
‘마술과 마법은 사실 다르지 않아. 나처럼 마술사로서 마술의 경지가 극에 달하면 그게 바로 마법이 되는……’
‘끊는다.’
이제 팬을 마주할 시간이다.
사실 팬심으로는 전혀 밀리지 않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었다.
마술사로서의 품위유지를 위해.
똑. 똑.
그렇다고 무게를 잡는 건 아니다.
마술은 현란한 말솜씨와 제스처가 어우러질 때 비로소 완성되는 법이니.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입장한 대기실.
스윽.
한 손으로는 카메라 셀프봉을 잡고 다른 손은 가슴 앞에 90도로 구부렸다.
멋들어진 자세.
그런 채로 그는 멘트를 뱉었다.
“이 학교에 저를 애타게 찾는 공주님이 있다고 해서 왔는데요.”
이후 고개를 든 이윤결.
왜인지 눈에 보이는 건 초록님뿐이었다.
메이크업 도중인 거 같은데, 아무래도 들어올 타이밍을 조금 잘못 잡은 모양이다.
‘괜찮아.’
마술사에게 있어서 돌발상황은 일상이다.
일류는 당황하지 않는다.
바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는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는 형아 시청자 여러분~ 마술사 이윤결입니다! 호구와트 마법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다가 형아학교에 전학 오게 돼서 굉장히 설레는데요. 저랑 함께 전학 온 두 친구를 차례로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프리뷰인 만큼 어차피 편집이 해결해줄 문제다.
이윤결은 카메라를 들고 주원이 앉아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잠깐 인터뷰 가능하실까요?”
“아, 네.”
메이크업 탓인지 거울을 의식하며 주원은 답했다.
“우선 아는 형아 시청자분들께 인사 한번 부탁드려도 될까요?”
주원은 카메라를 보며 얘기했다.
애청자이기에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는 알고 있는 상태였다.
“안녕하세요, 아는 형아 시청자 여러분. 초록입니다.”
멋쩍은 미소를 보며 윤결은 연이어 질문했다.
“형아학교에 전학 오게 된 소감이 어떠신가요?”
“굉장히 설레네요. TV로만 보던 형아들을 직접 본다고 생각하니까 신기하기도 하구요. 지금도 굉장히 신기합니다.”
“오, 지금은 왜죠?”
“윤결님을 봐서요. 아실지 모르겠지만 연두가 굉장히 팬이거든요. 저도 마찬가지구요.”
“하하하! 영광입니다!”
진행은 자유지만 해야 할 물음은 정해져 있었다.
이제 다음 질문이었다.
“그럼 여섯 명의 형아 중에 초록님이 가장 보고 싶었던 형아가 있을까요?”
“가장 보고 싶었던 형아요?”
“네. 저까지 포함하면 너무 답정너니까 저는 제외하도록 하겠습니다! 으하하!”
유쾌하게 끌어가는 이윤결.
역시 마술사답게 이런 식의 진행에도 일가견이 있는 그였다.
그때였다.
잠깐 생각하던 주원이 대답하려는 순간,
“.. 응?”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에 따라 윤결의 고개도 자연스레 돌아갔다.
그곳에는 서 있었다.
“...”
진행하는 것도 잊고 윤결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익숙한 비주얼이다.
그런데 실제로 본 연두의 모습은 화면으로 볼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다른 게 마법이 아니었다.
마법 같은 아이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