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8화. 지원군
첫 번째 질문.
“연두랑 누렁이가 정면충돌한 적이 있어. 그게 언제일까?”
당연히 여기서 정면충돌이 물리적 충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아니, 조금은 물리적인가?
막상 문제의 당사자인 연두도 감이 안 오는지 고개를 갸웃거린다.
입을 뗀 건 수군이였다.
“정면충돌?”
“응.”
“그 정면충돌이 설마 막 치고받고 싸우는 걸 말하는 거야? 이야.. 진짜 누가 이길지 모르겠는데.”
그 말에는 연두가 대신 반박한다.
“아니야. 연두는 누렁이 아프게 안 해..!”
“정말?”
“응.”
짤막하게 덧붙인다.
“.. 가족이니까.”
사실이다.
지금껏 연두가 누렁이를 아프게 한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장원이가 아빠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아유, 착하다..”
평소에는 시니컬하기 그지없는 표정과 말투인데 180도 다르다.
연두가 옆에 앉으니.
한편 답답해진 형아들은 질문해왔다.
“그럼 뭐야? 정면충돌이라는 게.”
“음.. 생각이 안 맞았다고 해야 할까?”
“생각이 안 맞아?”
“응. 그래서 그게 아주 조금은 물리적인 충돌로 번지기도 했지.”
이 정도면 훌륭한 힌트다.
간식 얘기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오답과 드립이 튀어나온다.
이런 느낌이구나.
뿅!
형아들의 머리에 뿅망치를 선사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그런 와중 장원이의 말.
“내 생각엔.. 누렁이가 뭔가를 했어. 근데 연두가 그걸 용납할 수 없었던 거지.”
역시 날카롭다.
그런 만큼 장원이의 말은 주위 형아들에게는 힌트가 되곤 했다.
영훈이가 손을 번쩍 들고 말한다.
“누렁이가 초록이를 막 물었어! 할퀴고! 그래서 연두가 이놈! 했어.”
“그런 적도 있고 비슷한데 아니야.”
“비슷하다고?”
“거기서 무언가를 바꿔봐.”
그 말에 형아들은 바로 키워드를 집어냈다.
“초록이가 아니네!”
미소로 긍정을 표현했다.
그러자 또 수많은 대답이 튀어나오고 마침내,
“벌레!”
흠칫 놀란 나를 보고 설명을 덧붙인다.
“벌레가 나타났는데 누렁이가 잡으려 해서 연두가 그걸 말렸어! 그래서 충돌이 일어났어.”
“.. 정답.”
“끼얏호!”
기쁨을 만끽하는 형아는 다름 아닌 영철이었다.
그러다 나를 응시한다.
“근데 초록아.”
“응?”
“너 왠지 내가 답 맞히니까 표정이 굳어 보인다?”
내가 그랬나?
아무 생각 없었는데 은연중에 무의식이 표정으로 나온 건가.
실소를 뱉으며 덧붙였다.
“하하.. 들켰나?”
“뭐?”
눈이 땡그래진 영철이는 말했다.
“너.. 이러면 박영철의 꿈꾸라 출연 안 시켜줄 거야?”
혀를 차는 형아들의 소리.
한결같은 모습이 호감인 영철이형아였다.
***
두 번째 질문을 넘어 세 번째 질문.
역시나 앞선 연두 차례에 비해 템포가 빠르다.
“자, 마지막 질문이야.”
연두 쪽을 바라보며 얘기했다.
“연두도 잘 맞혀봐.”
그도 그럴 게 이건 연두도 유추가 불가능한 질문이었다.
연두가 의지를 북돋운다.
“응!”
나는 대본을 그대로 읽어내려갔다.
“요즘 내가 연두를 학교에 데려다주고 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어. 그게 뭘까?”
“그림 그리기!”
“마술 연습!”
뿅! 뿅!
나란히 오답을 외친 하철이와 윤결이.
그렇게 쉽지는 않지.
그렇다고 해서 특출나게 어려운 문제도 아니었다.
하철이 벌떡 일어난다.
“연두 비밀상자 있다고 했지?”
연두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초록이도 비밀상자가 있는 거야.”
벌써 오답의 향기가 물씬 풍기지만 일단 들어나 보자.
그런 심정으로 말을 받았다.
“그런데?”
“학교를 데려다주면 그 비밀상자 속에 손을 쏙 집어넣어. 그리고 꺼내.”
“뭘?”
“있잖아, 그거.”
아니, 저 손동작은!
설마 여기서 이 드립이 나올 줄은 몰랐다.
알쏭달쏭한 표정의 연두와 낄낄 웃는 형아들.
드립이 더 이어지기 전에 성큼성큼 걸어가 하철이의 머리를 뿅망치로 강타했다.
“.. 억!”
하철이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말한다.
“왜 때려! 정답도 아직 다 안 말했는데!”
“나 비밀상자에 그런 거 없거든? 그리고 오래전에 끊었어.”
정확히는 3년 전이다.
맹세코 그 후에 담배를 손에 댄 적은 한 번도 없다.
연두가 없는 곳에서도.
그런 내 귀에 들려오는 목소리.
“인형!”
“응?”
“인형놀이 말하려고 했다! 초록이의 숨겨진 취미로!”
“그, 그래?”
내가 잘못 본 건가?
분명히 그 손모양은 전문용어로 담타를 가질 때의 손모양이었는데.
우선 아니라고 하니 사과했다.
“쏘리.”
그러자 들려오는 말.
“푸흣! 그걸 속냐.”
“...”
아니, 이 양반이.
그럼 그렇지.
공식적으로는 무려 흡연 경력 4년차인 내가 그 손동작을 잘못 볼 리 없잖아.
어쨌든 화제를 전환할 필요가 있었다.
연두가 알아채기 전에.
“자, 아무튼 땡.”
연두가 번쩍 손을 든다.
“그래, 연두!”
“누렁이한테 간식을 준다!”
“하하, 땡.”
누렁이에게는 미안하지만 따로 간식을 챙겨주지는 않는다.
간식 담당은 연두거든.
나까지 줬다가는 돼냥이가 되어버릴지도 몰라.
“연두야. 아빠가 좋아하는 게 뭐야?”
형아들은 연두에게 도움을 청했다.
좋은 전략이다.
내가 연두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듯이, 나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도 연두니까.
“아빠가 좋아하는 거?”
“응.”
“.. 연두.”
뻘하게 웃음이 나왔다.
확실히 연두는 내가 좋아하는 것(?)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거긴 하지.
형아들도 미소를 띠며 재차 물었다.
“또? 생각나는 거 있으면 다 말해봐.”
“그림도 좋아하고, 사진도 좋아하고, 시은이랑 레나랑 유리도 좋아하고, 누렁이도 좋아하고, 햇빛에 누워있는 것도 좋아하고……”
끝도 없이 나열하는 연두.
듣고 있으니 새삼 연두가 나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지 실감이 든다.
그 와중에 영철이는 그대로 주워 먹으려다 실패했다.
“창문 앞에서 햇빛에 누워 있는다!”
“땡.”
바로 들어가는 핀잔.
“날로 먹으려는 습관 좀 고치세요, 형.”
“뭐? 남이사……”
또 길어지는 말.
그때였다.
쭉 나열하던 연두의 입에서 그 키워드가 나온 건.
“게임도 좋아해요..”
“게임?”
“응.”
순간의 내 표정을 포착한 걸까.
“컴퓨터 앞에 앉아서 부팅을 한다!”
“정답!”
마지막 문제 정답자는 영훈이였다.
최근에 나는 건축콘테스트 2탄 주최를 위해 마이크래프트를 하고 있었다.
생각 이상으로 게임 속 세상이 재밌기도 했고.
연예계 대표 게이머로 유명한 하철이도 신나서 얘기한다.
“국룰 아니야? 부팅 시간에 물 뜨러 가는 거.”
“오, 너도 그래?”
공감이 갔다.
이상하게 그 짧은 시간 안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바빠지는 느낌이니까.
영훈이도 박수를 치며 얘기한다.
“맞아. 양치도 하고.”
“너 ssd 안 쓰는구나? 그럼 양치할 시간까지는 없는데.”
“좀 사주든가.”
게임 얘기에 신난 두 형아.
공감대가 있는 젊은 층(?)은 신난 반면에 반대쪽은 눈만 끔뻑이고 있다.
그걸 포착한 영훈이가 불쑥 묻는다.
“호등이 넌 부팅이 뭔지 알아, 부팅?”
괜히 찔린 호등이 받아친다.
“니가 선생님이가?”
“우씨..”
“흥! 가르치려 하지 마라!”
저렇게 공격적으로 나온다는 건 모른다는 거다.
장원이가 끼어든다.
부자관계인 만큼 장원이는 영훈이 편이었다.
“부킹밖에 몰라, 호등이 얘는.”
반대로 아는 게 나오면 절대 가만히 못 있는 호등이다.
“그래, 부킹! 만나는 거 아이가!”
“부킹 말고 부팅!”
“...”
다시 드리우는 침묵.
그걸 본 영훈이가 무언가 떠오른 듯 호등이를 가리키며 입을 뗀다.
“으이구, 팅팅 붓기나 했지.”
“.. 켁!”
사레가 들린 호등이.
역시 명실상부 호등이 천적인 영훈이였다.
***
그 시각.
대기실에서는 준비를 마친 세 아이 사이에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대화를 끌어가는 건 레나였다.
“너희는 제일 보고 싶었던 형아 있서?”
원래라면 구석에 앉아있었을 유리도 새침하게 대화에 참여하고 있다.
먼저 대답한 건 시은이였다.
“아저씨도 형아야?”
예상치 못한 되묻는 말에 레나는 조금 생각하더니 말했다.
쿡쿡 웃으며.
“아저시구나?”
“.. 어?”
“아저시니까 물어보는 거 아니야? 제일 보고 싶었던 형아.”
정곡을 찔린 나머지 시은이는 당황해서 답했다.
“.. 아니야!”
“흐응, 그럼?”
“그냥 물어본 거야. 오늘은 아저시랑 연두도 형아학교에 전학 온 거니까. 그런데 연두는 여자니까 형아가 아니고……”
길어지는 말.
당황했을 때 횡설수설하는 건 시은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시은이답게 논리적이긴 했지만.
“알겠서! 그러면 아저시 빼고!”
“나는.. 영훈이형아.”
레나는 또 싱긋 웃더니 물었다.
“왜? 영훈이형아가 아저시 닮아서?”
“...!”
동그래지는 시은이의 눈.
독일 여행 이후로 어색함이 사라져서인지 레나는 서슴없이 시은이에게 장난을 건네곤 했다.
바로 지금처럼.
“...”
그런 둘의 대화에서 유리는 한 가지는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연시은이 아저씨를 무척 좋아한다는 거.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시은이는 정신을 차리고 역으로 물었다.
“레나는?”
“응?”
“어떤 형아가 제일 보고 싶었어?”
앞서 ‘아저씨 빼고’를 붙여놨기에 레나는 어렵지 않게 답했다.
“나는 수군이형아!”
정석적인 대답.
그러나 시은이도 이대로 넘어가지는 않았다.
“아저씨 빼고?”
“.. 응?”
“아저씨 넣고 수군이형아야? 빼고 수군이형아야?”
이렇게 물으면 사실상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저씨와 수군이형아 중에.
그런데도 피할 수 없도록 설계된 똑똑한 질문이다.
“.. 빼고.”
결국 레나는 대답했다.
원하는 답을 얻어서인지 시은이의 입가에 옅게 번지는 미소.
속마음을 들켰다는 생각 때문인지 레나의 얼굴은 발그레 달아올랐다.
“그, 그럼 미뉴리!”
재빨리 화제를 전환한다.
“너는 어떤 형아가 제일 보고 싶었서?”
이상했다.
평소라면 유치하게 대답을 안 하거나, 아무 형아나 꼽았을 텐데.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는 앞선 두 대답을 듣고 나니 알 수 없는 승부욕이 발동한 탓이었다.
“.. 아저씨.”
시은이와 레나가 동시에 흠칫했다.
설마 예상 못 했으니까.
그 솔직하지 못한 민유리가 대답한 것도 모자라 바로 아저씨라 말할 거라고는.
뒤늦게 유리는 어색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나, 나는 모른단 말야!”
“응?”
“나는 TV 안 봐! 그러니까 형아들이 누군지도 몰라! 모르는데 보고 싶어 할 수는 없잖아.”
진실 반 거짓 반이다.
잘 모르는 건 맞지만 형아들을 한 번도 보지 못한 건 아니니까.
그래도 지금의 유리에게는 이유가 필요했다.
“그러니까 아저씨밖에 고를 사람이 없는 거지.”
“...”
상반되는 반응.
레나는 쿡쿡 웃고 있고 시은이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다.
어쨌든 결론은 하나다.
셋 다 주원을 고른 거나 마찬가지였다.
“...”
괜히 어색해진 분위기.
셋은 꿈에도 몰랐다.
이곳은 방송국이고, 대기실 내에 고정된 카메라가 계속 돌아가고 있다는 건.
***
“우와아!”
“진짜 대박이다..”
“내가 연두부송을 직관할 줄이야.”
형아학교 내부에 울려 퍼지는 함성.
그럴 만도 했다.
윤결이의 ‘나를 맞혀봐’ 가 끝나고 연두가 피아노를 치는 시간으로 이어졌으니까.
연두의 선곡은 연두부송이었다.
“말랑말랑 호등 연두부~ 커다란 장원 연두부~”
즉석에서 형아들의 이름을 넣은 개사 버전도 선보였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전에 비해 완성도가 높아진 연두부송과 연두의 목소리는 상당히 잘 어우러졌으니까.
“연두! 연두! 연두!”
“다음곡!”
“버스킹할 때 연주했던 곡 쳐 줘, 연두야.”
이대로 끝낼 리가 없긴 하지.
그런데 형아들의 요청에 연두는 조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못 치는데..”
“응?”
“단비음악대 친구들 없으면.. 버스킹할 때 연주는 못 해...”
하긴 그랬다.
단체로 연습한 곡인 만큼 혼자 치기에는 다소 무리일 수 있었다.
친다고 해도 완성도가 떨어질 테고.
‘팀원의 부재인가.’
뭐, 괜찮았다.
그게 가장 좋은 그림이기는 하겠지만 혼자 칠 수 있는 곡도 잔뜩 있으니까.
갑자기 멤버들이 뿅 하고 나타날 일은 없고.
“연두야. 그럼 그 곡은……”
추천곡을 얘기하려는 참이었다.
쾅!
확실히 뿅은 아니었다.
귀에 익숙하다.
이 소리는 우리가 교실에 입장할 때 났던 소리니까.
잠깐만. 그렇다는 건……
“너, 너희들! 우리가 필요한 거 같은데……”
휘둥그레지는 눈.
건반에 손을 올린 연두의 입은 한껏 벌어져 있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 얘들아?”
상상도 못 한 지원군들이 문 앞에 서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