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딸 바보가 되었습니다-608화 (609/850)

608화. 고장난 벽시계

손에 들린 지폐.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까지 하며 얻어낸 마지막 기회였다.

“진짜 마지막인 거 알죠? 저도 이제 지폐 없어요.”

사실 있었다.

그러나 이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선의의 거짓말이 필요했다.

다행히 우영이도 다음은 없었다.

“알아.”

마지막이었다.

그림이 아닌 다른 것에 이토록 온 정신을 몰두해 본 건 처음이다.

곰돌이를 향하는 시선.

‘.. 뽑는다.’

그 열망 하나로 우영의 눈이 번뜩였다.

이쯤 되니 내내 한숨을 내쉬던 서린의 입가에도 웃음이 던졌다.

…… 저게 뭐라고.

승부욕이 얼마나 강하길래 저렇게까지 뽑고 싶어하는 걸까.

그와 별개로 미래는 그려졌다.

‘못 뽑을 거야...’

무려 서른번가량을 시도했지만 제대로 들어올린 것도 몇 번 되지 않는다.

실패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마지막 기회가 주어진다고 거짓말처럼 뽑아낼 확률이 얼마나 될까.

‘.. 0%에 가깝겠지.’

잔인하지만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서린은 생각했다.

한 번도 뽑아본 적은 없지만, 그나마 자신이 시도하는 게 확률이 높지 않을까 하고.

물론 그럴 생각은 없었다.

“후우..”

저 눈빛을 보고 어떻게 그러겠는가.

마치 스케치 전에 흰 종이를 바라보듯 우영의 눈이 기계 안을 향했다.

인형들 사이에 불쑥 고개를 내밀고 있는 곰돌이인형.

스르륵.

마음을 정한 우영이 마침내 지폐를 투입했다.

왼손을 움직인다.

‘여긴가? 아냐. 좀 더……’

이번에는 한 치의 오차도 용납되지 않는다.

미세한 컨트롤.

그에 따라 움직이는 갈고리는 목표물인 곰돌이인형을 정조준했다.

이제 남은 시간은 3초가량.

틱.

버튼을 누르자 갈고리가 내려간다.

여기가 1차 관문이었다.

촤락.

잡아내느냐 허탕을 치느냐.

지금까지의 시도를 생각하면 후자의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런데 웬걸?

“.. 어?”

서린의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의문사.

그럴 만도 했다.

갈고리는 곰돌이인형을 안정감 있게 들어올렸으니까.

‘설마……’

아직 기대하기는 일렀다.

들어올린 적은 있다.

그 직후나 이동하는 도중에 맥없이 떨어졌을 뿐이지.

끼리릭.

이동하기 시작한 갈고리.

숨도 쉬지 않고 우영은 점점 목표지점에 가까워지는 갈고리를 바라봤다.

뽑았다, 라고 생각한 순간.

이동하며 점점 헐거워지는 갈고리가 눈에 들어왔다.

‘.. 안 돼.’

조금만 더.

아주 조금만 더 가면 목적지다.

피 말리는 상황 속에서 끝내 갈고리의 그랩이 풀리고 인형이 떨어진다.

톡.

그에 따라 우영도 풀썩 손을 떨군다.

어떻게 된 거지?

한 발치 떨어져서 바라보던 서린은 아직 상황파악이 되지 않았다.

발을 앞으로 뻗으며 입을 뗐다.

“저기, 어떻게 된……”

“.. 하.”

터지듯 내뱉는 숨소리.

표정이 안 보이니 더더욱 알 수가 없다.

마침내 뽑아냈다는 기쁨인지, 아니면 실패에서 비롯된 허탈함인지.

슥.

그 속에서 우영이 고개를 돌려 걸어온다.

들려오는 목소리.

“.. 됐어.”

“네?”

“뽑았어.. 뽑았다고!”

그제야 알았다.

감격에 겨운 표정이라는 걸.

앞서 반복되는 실패를 봐서인지, 그 순간 서린의 전신에도 신기할 정도로 고양감이 차올랐다.

“.. 저, 정말요? 뽑았어요?”

“응!”

“우와..!”

스륵.

실제로 기계 밑을 보니 곰돌이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다.

우영이 인형을 집어들었다.

“.. 흣.”

서린은 못 참고 웃음을 터트렸다.

저렇게 좋은 걸까.

환한 미소를 보니 어쩌면 인형뽑기를 한 게 마냥 나쁜 선택은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였다.

“자.”

우영이 손에 든 인형을 내민 건.

놀란 서린은 물었다.

“.. 네?”

“받아.”

“왜요? 그쪽이 뽑은 거잖아요.”

“인형이 가지고 싶었던 건 아니니까. 그리고……”

무심하게 우영은 덧붙였다.

“너 돈으로 뽑은 거고.”

서린은 쿡쿡 웃으며 말했다.

“그게 뭐예요. 자기 돈 그렇게 많이 써 놓고.”

“.. 받기나 해.”

“진짜 받아도 돼요?”

“응.”

서린이 인형을 받아들었다.

동시에 생각했다.

인형뽑기를 한 건 역시 잘한 선택 같다고.

거금(?)을 들인 거 치고 겉보기에는 오천원은 될까 말까 한 인형이지만 괜찮았다.

“.. 헤.”

가격보다 더 중요한 게 담겨있었으니까.

“.. 더 하고 싶은 건 아니죠?”

“응.”

“그럼 이제 가요! 그리고... 선물 고마워요!”

그렇게 발길을 돌리려는 순간이었다.

귀에 들어오는 목소리.

“아빠!”

연두 또래로 보이는 남자아이 하나가 아빠를 부르며 뛰어왔다.

멈춰선 곳은 인형뽑기 기계 앞.

“나 이거 할래!”

뒤따라온 아빠가 웃으며 말한다.

“허허, 그럴래?”

“응, 응!”

“오케이. 대신 한 번만 하기다?”

고개를 격하게 끄덕인다.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천원을 받아드는 아이를 보며 우영은 피식 웃어보였다.

거침없이 투입구에 지폐를 넣는 걸 보며 또 한 번 웃었고.

‘.. 게임이 아니라고.’

서른번의 시도 끝에 느꼈다.

이건 게임이 아니다.

애들 장난으로 뽑을 수 있는 건 더더욱 아니고.

“가자.”

결과는 보나마나였다.

미련없이 등을 돌리고 걸어가는데,

“.. 뽑았다!!”

귀를 의심했다.

발걸음을 멈춘 우영이 고개를 돌렸다.

“...”

아이의 손에 들려있는 귀여운 분홍색 토끼인형.

아빠가 번쩍 들어올리며 말한다.

“캬! 역시 대단한데, 우리 아들?”

“히히.”

우영은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걸어갔다.

여러모로 상처가 가득한 우영의 첫 인형뽑기였다.

***

도착한 노래방.

우영이도 온다고 했으니 가장 넓은 방으로 들어갔다.

“다들 괜찮은 거지?”

“네.”

주연이가 흥미로운 얼굴로 말했다.

“궁금하거든요. 우영이랑 데이트한다는 사람이 누군지. 저희랑 동갑이라면서요.”

“하하, 완전 데이트라 하기 뭐하긴 한데……”

올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으니 먼저 노래를 부르기로 했다.

두 개의 마이크.

“누가 먼저 부르실?”

범재의 물음에 답한 건 동건이였다.

“당연히 너지.”

“엥? 왜 나인데?”

“듀엣 한 곡 해야 할 거 아냐. 커플 됐는데.”

주연이가 옆에서 호응했다.

“인정, 인정!”

리모콘을 쥔 동건이가 말한다.

“오케이, 그럼 커플송 선곡은 내가 한다? 괜찮으시죠, 행님?”

“어? 어.”

“괜찮지, 연두야?”

“.. 네에!”

얼떨결에 나와 연두가 차례로 대답했다.

그 사이 빛의 속도로 선곡하는 동건이.

“아니, 부르는 건 우리인데 왜 선곡을 너가 하냐?”

범재의 이의제기는 가볍게 무시당했다.

화면에 떠오르는 제목.

[All for you]

“히야.”

절로 입밖으로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올 포 유.

서윤국과 조은지가 함께 부른 듀엣곡으로 커플송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센스 뭐야~”

“갓포유 국룰이죠? 빨리 마이크 쥐어라.”

“크흠...”

멋쩍은 표정으로 마이크를 쥐며 범재가 말한다.

“낫배드긴 하네...”

귀여운 녀석.

동건이의 선곡이 마음에 들긴 한 모양이다.

뒤이어 예림이도 손에 마이크를 쥐었다.

‘보기 좋네.’

나란히 앉은 범재와 예림이.

표정에 맴도는 조금의 어색함이 되려 풋풋하게 느껴진다.

빙긋 웃으며 말했다.

“연두도 아는 노래지?”

“네에.”

실제로 연두가 좋아하는 노래였다.

듀엣곡답게 이 노래는 총 세 파트로 나뉘어 있다.

남자 파트, 여자 파트, 그리고 함께 부르는 파트.

“All for you~ ♪”

노래가 시작됐다.

첫 파트는 여자 파트로 시작했다.

“벌써 며칠째 연락도 없는 너~ 조금 뒤면 나의 생일이란 걸 아는지~ ♪”

노래할 때도 똑같구나.

예림이 특유의 가늘고 공기 섞인 목소리다.

“으이구, 범재야! 연락 안 하고 뭐했냐!”

중간에 섞이는 동건이의 멘트에 당황한 건지 음이탈이 난다.

어찌어찌 잘 마친 파트.

노랫말에 응답하듯 남자 파트가 이어진다.

“사실은 나, 많이 고민했어~ 네게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걸~ ♪”

“꺄아!!”

이번에는 주연이가 난리다.

역시 이 멤버로 함께 오니 텐션이 장난이 아니네.

연두도 세상 신나서 탬버린을 흔든다.

“헤헤..”

“재밌어, 연두야?”

“네!”

엄밀히 말하면 둘 다 노래실력이 출중한 편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더 좋았다.

미숙함 속에서 느껴지는 떨림이 전해졌으니까.

‘달달하구만..’

특히나 함께 부르는 파트에서는 이가 썩을 뻔 했다.

“너를 위해서~ 너만을 위해서~ ♪”

살며시 눈을 맞추는 예림이와 화들짝 놀라 시선을 피하는 범재의 모습이 교차한다.

다행이었다.

잊지 않고 촬영버튼을 눌러둬서.

끝까지 노래를 마친 범재와 예림이가 수줍게 마이크를 내려놨다.

“... 다음은 누구 할래?”

동건이가 묻는다.

“한 곡 하시겠습니까, 행님?”

“그럴까?”

다들 흠칫한다.

반응 한 번 보려 한 건데 너무하네, 이거.

퉁퉁이라도 된 기분이잖아.

“나는 이따가 할게.”

“휴우..”

착각인가?

어디선가 안도의 한숨소리가 들린 거 같은데.

고개를 돌렸을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크흠...”

불편한 헛기침.

다시금 동건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연두야. 한 곡 부를래?”

웬일로 연두도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다.

“연두도 이따가 할래여..!”

“그래?”

“네.”

자연히 마이크는 그대로 동건이의 손에 위치했다.

왜인지 휘파람을 부는 녀석.

“뭐, 그럼 내가 해야 하나...”

뭔가 꿍꿍이가 있어보이는데.

“딱히 안 떠오르네. 오랜만에 그거나 부를까나.”

틱. 틱.

곧이어 화면에 떠오른 노래 제목.

하마터면 터질 뻔 했다.

그야, 이 노래 역시 내가 무척 잘 아는 노래였으니까.

[잔소리]

유이아의 대표곡 중 하나다.

특징을 하나 꼽자면 이 노래도 커플송의 대명사로 꼽힌다는 것.

의도는 뻔했다.

“근데 생각해보니까 이거 혼자 부르기는 좀 빡세긴 한데……”

슥.

옆에 놓여있는 마이크를 든 나는 주연이에게 내밀었다.

뭐, 이 정도는 괜찮겠지.

“자, 주연아. 예림이는 방금 불렀으니까.”

“아, 네!”

다행히 주연이는 흔쾌히 마이크를 받아들었다.

그렇게 시작됐다.

동건이와 주연이의 듀엣곡이.

***

어쩌다 보니 이어진 커플송.

생각 이상으로 달달했다.

‘아마 유일한 방법이겠지.’

동건이로서는 속마음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거다.

노랫말을 빌리는 게.

그렇게 생각하니 더더욱 애틋한 기분이다.

‘아니, 난 왜 이렇게 과몰입하고 있는 건데.’

주책이다 싶어서 조금 진정시켰다.

커플곡답게 가사가 너무 달콤한 탓이었다.

“주머니 속에 쏙 넣고 다니면, 정말 행복할 텐데~ ♪”

“눈에 힘을 주고 겁을 줘 봐도~ 내 눈엔 그저 귀여운 얼굴~ ♪”

“너의 잔소리마저 난 달콤한데~ ♪”

미묘한 분위기 속에서 둘의 듀엣까지 끝이 났다.

큰일이네.

이대로라면 나랑 연두도 듀엣곡을 해야 할 거 같은 분위기인데.

그때였다.

끼익.

노래방 문이 열렸다.

“여기가……”

우리를 훑어보고서 말한다.

“…… 맞네.”

그렇다.

들어온 사람은 우영이였다.

뒤를 향해 손짓하자 따라들어오는 여자.

‘이름이 은서린이었지.’

팀플 과제를 도와준 적이 있기에 기억하고 있다.

어색한 미소를 띠며 그녀가 인사한다.

“아, 안녕하세요.”

다들 반갑게 맞아줬다.

“우와, 안녕하세요!”

“모야모야, 선우영!”

벌떡 일어난 동건이가 말한다.

“처음 뵙겠습니다. 우영이의 가장 친한 친구 조동건이라고 합니다.”

“아..”

왜인지 말끝을 늘이더니 은서린이 대답했다.

“얘기 들었어요.”

“제 얘기를요? 우영이가 제 얘기를 했다구요?”

“네.”

“뭐라고 했는데요?”

그 물음에 살짝 주연이쪽을 바라보더니 서린이 대답한다.

“그건 말하면 안 될 거 같은데……”

계속해서 묻는 동건이를 향해 우영이가 말했다.

“뭐야. 너도 물음표 살인마야?”

“...!”

세상 놀란 표정으로 동건이가 말한다.

“너 선우영 아니지!”

“뭔 소리야.”

“우리 우영이가 그런 신조어를 쓸 리가 없다고!”

신발을 벗고 들어오며 우영이가 얘기했다.

“.. 별 거 없어.”

“뭐?”

“친한 친구라고만 얘기했다고. 그러니까 앉아.”

내 직감에 의하면 그게 전부는 아닌 거 같은데.

뭐, 괜찮았다.

동건이는 충분히 만족한 표정이었다.

“오케이. 그럼 늦게 왔으니까 한 곡 해야지, 우영쓰.”

“.. 뭐?”

“국룰 몰라? 늦게 오면 한 곡 해야 하는 거.”

옆에서 맞장구치는 녀석들.

역시 이럴 때면 호흡이 장난이 아니다.

한사코 거절하던 우영이도 결국 체념한 듯 말했다.

“알겠어. 하면 되잖아.”

“오오!”

“선우영의 노래? 이건 귀하군요...”

의외였다.

끝까지 뺄 줄 알았는데.

옆에 앉은 서린도 호기심 어린 표정이다.

“우아..”

연두도 잔뜩 기대한 거 같고.

“이걸로 검색하면 되는 거지?”

“어. 검색 버튼 누르고 제목 입력한 다음 확인 누르면 돼.”

동건이의 설명에 따라 우영이가 버튼을 눌렀다.

검색, 제목 입력, 확인.

이것도 잘 모르는 걸 보면 정말 노래방과는 인연이 없나 보다.

‘우영이답긴 하네.’

그래도 습득력이 빨라서인지 헤매지는 않는다.

관심사는 하나였다.

과연 우영이는 어떤 노래를 부를 것인가.

모두의 관심 속에서 우영이는 진지한 표정으로 노래 제목을 입력했다.

틱. 틱.

이윽고 화면에 노래 제목이 떠올랐을 때.

모두의 입이 벌어졌다.

[고장난 벽시계]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에서 온 우영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