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8화. 광기
대략 한 달 정도.
작화팀 개설 후 흐른 시간이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지.’
걱정이 없었던 건 아니다.
회사를 운영해보긴커녕 제대로 된 회사생활도 해본 적 없는 나니까.
가장 어려운 일이다.
해보지 않은 것을 능숙하게 해내는 건.
직접 경험할 수는 없으니 타인의 경험을 습득할 필요가 있었다.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여러 곳에서 도움을 받았지만, 가장 큰 도움을 준 건 외삼촌인 김윤호였다.
그의 경험은 내게는 엄청난 자산이 됐다.
‘간접경험이 됐으니까.’
머릿속으로 수없이 그리며 어떤 식으로 작화팀을 이끌어야 할지 감을 잡으려 노력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구체화됐다.
규격화된 작화팀의 모습과 내가 바라던 이상이.
중요한 건 현재다.
한 달이 지난 지금, ‘스튜디오 초록’은 어떠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할 수 있다.
툭.
펜을 내려놓으며 나는 중얼거렸다.
“.. 완벽해.”
마지막 배경 작업이 끝났다.
전에 말했듯, 주연이 자작곡인 ‘봄꽃’을 제외하면 나는 다른 앨범 아트에 손을 대지 않았다.
내 역할은 어디까지나 보조였다.
첫 프로젝트만큼은 팀원들이 주인공이 됐으면 했으니까.
‘나도 논 건 아니지만.’
보조역할도 쉬운 건 아니다.
작화량만 비교하면 팀원들에 비해 오히려 더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고?
내 지분도 있다는 걸 어필하고 싶은 유치한 마음이니 이해해주길 바란다.
어쨌거나 이로써 완성됐다.
한 달에 걸친 프로젝트, 프로미스의 데뷔앨범 앨범 아트가.
“여러분.”
빙긋 웃으며 입을 뗐다.
고개를 드는 팀원들.
나와 마찬가지로 마무리 작업을 하던 상황이었겠지.
“잠깐 미팅룸으로 와 주세요. 할 얘기가 있거든요.”
마침 팀 멤버 전원이 스튜디오에 있는 상황이었다.
최적의 타이밍이다.
첫 프로젝트의 끝을 선언하기는.
***
미팅룸 내부.
팀원들과 모여앉은 나는 완성된 앨범 아트를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첫 장을 펼치니 나오는 문구.
‘Rush.’
앨범의 타이틀곡이다.
칼군무가 결합된 댄스곡답게 역동적인 이미지와 색채가 눈에 띄는 앨범 아트였다.
가장 큰 공헌을 한 건 우영이다.
최표식이 어시스턴트 역할을 맡긴 했지만.
‘우영이 스스로 나서기도 했고.’
나와 팀원들 역시 성향상 우영이가 가장 잘 표현할 수 있을 거 같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완벽히 들어맞았다.
솔직히 많이 놀랐다.
내가 그렸다면 이 정도의 느낌을 낼 수 있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퀄리티 높은 앨범 아트가 탄생했으니까.
“햐, 이건 언제 봐도 감탄 나오네요.”
한 마디씩 던지는 팀원들.
옆에서 도연도 고개를 끄덕인다.
“이거 그릴 때 그분이 오셨나 본데요, 우영님?”
능청스러운 한경우의 말.
따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분’이 누군지는 모두 알 수 있었다.
실체가 아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안다.
‘한 번씩 찾아오지.’
그림을 그리다 보면 어느 순간 예고 없이 찾아오는 감각이 있다.
영혼이 동하는 기분.
누구나 한 번쯤은 그런 감각을 경험한다.
“.. 뭐, 항상 똑같죠.”
언제나 그렇듯 우영이는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긴 했지만.
뒤늦게 나도 입을 뗐다.
“저도 마음에 드네요.”
스치듯 눈에 들어온다.
작게 꿈틀거리는 우영이의 입꼬리가.
그와 별개로 신경 쓰이는 점이 하나 있었다.
‘유하나.’
아무래도 작화가가 아니다 보니 소외되는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래서는 곤란하다.
내 생각에 그녀는 이 자리에서 누구보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으니 말이다.
천천히 입을 뗐다.
“하나씨.”
원래는 이름 뒤에 ‘님’ 자를 붙이지만 유하나는 예외로 두기로 했다.
왜냐고?
그렇게 하면 부를 때마다 마음이 경건해질 거 같거든.
“.. 네?”
갑자기 불러서인지 조금은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하나씨가 보기에는 어때요?”
괜히 묻는 게 아니다.
그녀는 작화팀의 일원이지만, 작화에 있어서는 제삼자라고 볼 수 있었다.
보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다는 뜻이다.
“엄청.. 예쁜 거 같아요.”
“네?”
“저는 그림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그냥 보기에 너무 예뻐요. 톡톡 튀는 색감이 계속 보고 싶게 만든다고 해야 하나?”
정확히 원하던 반응이다.
기술적인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감상을 들려주길 바랐으니까.
예쁘다.
그 이상의 극찬은 없었다.
촤락.
한 장 한 장 앨범을 넘겼다.
손수 그린 앨범 커버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에 따라 경리인 유하나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표출했다.
‘.. 좋아.’
마침내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했을 때.
나는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한 달간 그린 앨범 아트인데요.”
“네.”
“네, 초록님.”
다들 상기된 표정이다.
그럴 만도 했다.
자그마치 한 달이라는 시간을 달려왔고, 그 결과물이 눈앞에 놓여있는 상황이니까.
“지금 보고 나서, 보완해야 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 분 있나요?”
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 말인즉슨, 더 이상 건드릴 게 없는 상태라고 받아들이면 될 듯했다.
…… 그렇단 말이지.
이렇게 나온다면 나도 할 말이 있었다.
“저도……”
씩 웃으며 입을 뗐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렇다.
나 역시 팀원들과 생각이 일치했다.
앨범 아트의 완성도는 현재로서 100%였고, 더 이상의 가감은 필요하지 않았다.
긴장이 풀린 듯 숨을 내뱉는 팀원들.
“.. 하.”
이윽고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그러니까.. 끝난 거죠?”
“와..”
“표현이 좀 경박하긴 한데.. 기분 째지는데요?”
잠깐 팀원들을 그대로 내버려 뒀다.
현재 기분을 만끽하도록.
어느 정도 분위기가 가라앉은 뒤,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다들 정말 고생 많았어요.”
이제 남은 건, 포장지를 뜯어보는 것뿐이었다.
***
팀원들이 있는 자리에서 완성한 앨범 아트를 회사에 전달했다.
이제 더 필요한 절차는 없었다.
기다림 외에는.
“그럼 오늘은 좀 일찍 퇴근하죠.”
그야말로 칼퇴근이었다.
한 달간 열심히 달려왔으니 이 정도는 보상 축에도 못 낀다.
마지막으로 남은 우영이에게 말했다.
“오늘 일정 있어?”
“없죠. 원래는 여기서 계속 그림 그릴 생각이었으니까.”
“혼자 그려도 되는데.”
“지금은 싫어요.”
순간 나는 엄청난 사실을 깨닫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최근 들어 이 정도로 놀란 적이 있었나?
‘.. 싫다고 했어.’
우영이가 그림을 그리기 싫다고 했다.
심지어 일정도 없는데.
한참을 얼빠진 표정으로 보고 있으니, 우영이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한다.
“왜 그렇게 봐요?”
“아니.. 신기해서.”
“뭐가요?”
“너 입에서 처음 들으니까. 그림 그리기 싫다고 하는 거.”
녀석이 황당하다는 듯 말한다.
“무슨 제가 그림밖에 모르는 놈인 줄 아세요?”
“.. 아니었어?”
장난이라 생각한 걸까.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우영이가 짐을 챙기며 말한다.
“저 갑니다.”
“잠깐만!”
뒤돌아선 우영이를 멈춰 세운 뒤 말했다.
“일정 없으면 나랑 같이 갈래?”
“어딜요?”
“땅콩 데리러.”
꿈틀.
어깨가 꿈틀하더니 말한다.
“.. 뭐, 일정 없으니까.”
역시 우영이에게 미술과 땅콩, 아니 연두는 치트키였다.
***
워낙 빨리 퇴근해서인지, 아직 연두를 데리러 가기에는 시간이 좀 있었다.
“좀 걸을까?”
“그러죠.”
시간이나 때울 겸 회사 주위를 산책하듯 걸었다.
의외로 재미있었다.
“여기 이런 게 있었구나?”
“그러게요.”
“나중에 회식 때 여기 와 보자, 팀원들이랑.”
몰랐던 회사 주위 지형지물을 알게 되기도 했고.
그때였다.
별안간 우영이의 발걸음이 멈췄다.
“왜 그래?”
같이 멈춰선 나는 물었다.
“저기.”
어딘가를 가리키는 우영이.
그곳에는 웬 직사각형 통 모양의 기구가 있었다.
인형 뽑기 기계였다.
“저게 왜?”
“.. 형.”
나를 바라보더니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우영이가 묻는다.
“지폐 있어요?”
지갑을 열어봤다.
언제 넣어놓은 건지는 모르겠는데 의외로 현금이 많이 들어있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있는데.”
“조금만 빌려줄 수 있어요? 바로 갚을게요.”
“뭐, 그래. 얼마?”
“천 원이요.”
천 원을 쥐여주자 곧바로 기계 앞으로 향한다.
그제야 깨달았다.
‘이거 하려는 거구나.’
이런 인형 뽑기 같은 거에 관심이 있을 줄 몰랐는데.
오늘 새로운 면을 많이 본다.
덩달아 호기심이 동한 나는 옆으로 가서 물었다.
“이거 해 봤어, 우영아?”
“네.”
“뽑았어?”
“네.”
“뽑을 수 있어?”
“당연하죠. 못 뽑을 거면 시작도 안 해요.”
자신감이 넘친다.
그렇게 내가 말을 거는 사이에 갈고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르륵.
“목표가 뭐야?”
“이 토끼 인형이요. 저번에 뽑았던 건데……”
“왜 말을 하다가 말아?”
“아니에요.”
내려가는 갈고리.
주둥이를 오므리는가 싶더니 제대로 인형을 쥐지도 못하고 되돌아온다.
아니, 뭐야?
실패한 거야? 이렇게 허무하게?
“아니, 형.”
“어?”
“집중이 끊겼어요. 형이랑 얘기하다가.”
“...?”
말문이 막힌 나는 금붕어처럼 눈을 끔뻑였다.
“와.. 지금 내 탓 하는 거야?”
“탓이 아니고요.”
“우영이 너, 원래 이런 애였니?”
내 말에 녀석은 이마에 손을 올리더니 말한다.
“천 원만 더 빌려주세요.”
결국 빌려준 천 원.
이번에는 다른 얘기 못 하도록 입도 뻥긋하지 않았다.
결과는 실패였다.
“아깝다.”
“아깝다고? 바로 떨어졌는데?”
“집어 올렸잖아요. 원래 그러면 거의 된 거예요. 한 번 더 하면 진짜 뽑을 수 있어요.”
이번에는 말은 안 하지만 눈빛으로 얘기하고 있었다.
천 원만 더 달라고.
거짓말처럼 내 손은 천 원을 내민다.
슥.
얼마 후,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 뭐지?’
눈 깜빡할 새에 오천 원이 사라졌다.
오천 원.
연두가 좋아하는 천하대장 소시지를 네 개는 살 수 있는 돈이다.
“형, 진짜……”
“안 돼. 돌아가.”
“네?”
“우영이 너를 위해서도 안 돼. 지금 3분 만에 오천 원을 태웠다고. 오천 원이면 그냥 인형을 하나 사겠다.”
“...”
불만스러운 표정이지만 반박은 못 한다.
왜냐? 내 말이 맞으니까.
참고로 빌려 간 오천 원은 꼭 받을 생각이다.
“하...”
한숨을 내쉬는 우영이.
그보다 답답한 게 하나 더 있었다.
“근데 진짜 궁금한 건데……”
“네.”
“이걸 왜 못 뽑아?”
보면서 답답함에 화병이 날 뻔했다.
이 쉬운 걸 왜 못 뽑지 하고.
해본 적은 없긴 하지만, 갈고리와 인형 위치만 제대로 파악한다면 못 뽑는 게 이상한 게임이다.
특히나 나는 공간 감각이 뛰어난 편이었다.
‘이미 날린 오천 원은 어쩔 수 없지만.’
천 원을 써서 토끼 인형을 뽑는다면 내 입장에서는 이득이다.
오천 원은 받을 거니까.
결국 나는 천 원만 쓰고 토끼인형을 얻을 수 있다는 소리다.
그걸 연두한테 선물로 주면 그야말로 극한의 효율이다.
“잘 봐, 우영아.”
냉정하게 말해 우영이는 인형 뽑기에 재능이 없다.
강습을 해 줘야겠어.
그런 생각으로 나는 천 원을 기계에 집어넣었다.
스르륵.
내 인생 최대의 실수를 범하는 순간이었다.
***
잠시 후, 내 손에는 토끼 인형이 들려 있었다.
계획대로였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오만 원을 태웠다는 거지만.
“하, 하하..”
결론만 말하자면 토끼 인형 하나에 오만 원을 태웠다.
‘아니, 이게 왜 떨어져?’
‘그렇게 하는 게 아니죠, 형. 한 번만 줘 보세요.’
‘오, 오오!’
‘와, 진짜 거의 다 뽑았는데……’
돌이켜보면 광기 그 자체였다.
내가 태운 돈은 3만 원, 우영이가 태운 돈은 2만 원이었다.
심지어 인형은 우영이가 뽑았다.
“...”
한동안 말없이 나란히 서 있다가 나는 입을 뗐다.
“우영아.”
“네.”
“우리가 가장 조심해야 할 게 생겼어. 뭔지 알겠지?”
“뭔데요?”
“도박. 때려죽여도 도박은 안 하기로 이 자리에서 약속하자.”
그렇게 우리는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했다.
사실 나는 괜찮았다.
방금은 일련의 사고였고, 내가 도박 같은 걸 할 가능성은 전무하니까.
‘.. 우영이는 불안해.’
방금으로 깨달았다.
승부욕이 생각 이상으로 엄청나다.
그로 인해 지극히 정상인 나조차 잠깐이지만 광기에 휘말리게 만들 정도로.
형으로서 바로잡아 줄 필요가 있었다.
‘.. 왜 환청이 들리는 거 같지?’
정말이다.
어디선가 너나 잘하라는 환청이 들린 거 같았다.
뭐, 착각이겠지.
어쨌거나,
“인형 뽑기도 웬만하면 하지 말자.”
“.. 네.”
“왜 대답을 망설이는 거지?”
“아니에요.”
기계 속 수북이 쌓인 지폐를 보며 웃고 있는 인형 뽑기 사장님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인형을 우영이에게 내밀었다.
“여기.”
“네?”
“네가 뽑은 거잖아.”
“됐어요. 형 가져요.”
“그런다고 빌린 이만 원 안 받을 거 아니니까 받아.”
“네.”
바로 받는 모습에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렇게 상처뿐인 인형 뽑기를 끝내고 우리는 차를 타고 선화초등학교로 향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토끼 인형도 못 뽑았으면 어땠을까.’
잘 모르겠다.
생각만으로 머리가 어질어질한 기분이다.
토끼 인형을 품에 안고 조수석에 탄 우영이를 보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저거라도 뽑아서.
끼익.
얼마 지나지 않아 도착한 학교.
“.. 아빠!”
딱 시간에 맞춰 와서인지 거의 바로 연두를 만날 수 있었다.
달려오던 연두의 눈이 동그래진다.
“.. 우영이오빠다!”
“땅콩.”
인사 대신 우영이는 다짜고짜 토끼 인형을 연두에게 내밀었다.
“.. 으응?”
“받아. 선물이니까.”
“선물이여?”
“그래.”
얼떨결에 건네받은 연두가 인형을 빤히 바라본다.
배시시 올라가는 입꼬리.
“우아.. 토끼 진짜 예쁘다...”
품에 꼭 안고서 우영이를 향해 말한다.
“고마워여, 우영이오빠..!”
“.. 그래.”
연두는 모르겠지.
저 인형을 뽑기 위한 나와 우영이의 고군분투를.
그래도 다행이었다.
‘받아줄 사람이 있어서.’
인형을 안고 기뻐하는 연두를 보니, 오만 원이 그리 아깝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