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1화. 시골 소년인 내가 쇼핑몰모델!?
“한국에, 가보고 싶어요.”
뭐든지 들어주겠다고 한 말.
그건 빈말이 아니었다.
다른 곳은 몰라도 한국에는 노엘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장소가 있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처음이었다.
노엘로부터 부탁다운 부탁을 듣는 건.
“그래.”
노엘은 피아노가 전부인 아이였다.
그건 피아니스트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는 재능일지 모른다.
허나 지금은 아니었다.
역설적이게도 피아니스트로서 노엘이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피아노와 떨어져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소피아는 생각했다.
어쩌면 한국이 그 여정의 첫걸음을 떼는 장소일지도 모른다고.
“.. 노엘.”
“네, 선생님.”
소피아는 제자와 눈을 맞췄다.
이 예쁘지만 공허한 두 눈동자 안에 생기가 돌기를 바랐다.
조금이나마 빛났으면 했다.
“왜 한국에 가고 싶은지 물어봐도 되니?”
짚이는 게 있긴 했다.
아이들이 놀러 왔을 때, 조금이나마 노엘을 웃게 만들었던 아이.
그 아이 때문이 아닐까 하고.
‘예쁜 아이였지.’
외모를 말하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빼어난 외모라도, 그보다 더 빛나는 게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연두는 그걸 가진 아이였다.
기다림 끝에 들려온 건 짤막한 한 마디였다.
“약속한 게 있어서요.”
그걸로 충분했다.
소피아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마침 한국 초등학교가 곧 여름방학이라는 거 같구나.”
아들인 하파엘에게 들은 정보였다.
“레나네 학교도 그렇고.”
“네.”
“네가 괜찮다면 이번에 다녀오는 게 어떤가 싶은데.”
“감사합니다.”
그렇게 노엘의 한국행이 결정됐다.
긴 여행이었다.
보호자는 독일에 출장 겸 노엘을 데리러 온 하파엘, 그리고 레나가 언니라 부르는 줄리였다.
줄리는 잠든 상태였지만.
“한국에 대해 궁금한 거 없니, 노엘?”
짧지 않은 비행이 따분할까 봐 걱정이 된 걸까.
하파엘은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노엘이 심심한 반응을 보여도, 하파엘은 굴하지 않고 얘기를 이어갔다.
그쯤 되니 노엘도 질문을 던졌다.
“한국 음식은 맛있나요?”
그 말이 떠올라서였다.
세상 환하게 웃으며 한국에는 맛있는 음식이 엄청 많다고 얘기하던 게.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하파엘은 대답했다.
“물론이지!”
조금은 서글픈 표정으로 하파엘이 덧붙였다.
“사실 레나가 아저씨를 따라 독일에 오지 않게 된 것도 음식 때문이기도 하단다. 한국 음식에 푹 빠졌거든. 그런데 독일에 가면 독일 음식을 먹어야 되니까 잘 오지 않게 된 거지. 절대 아빠를 덜 좋아하게 됐다거나 귀찮아서는 아니고……”
묻지도 않은 해명을 굳이 덧붙이는 게 하파엘다웠다.
레나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아, 참! 레나는 아주 잘 지내고 있어!”
다름은 딸의 안부였다.
역시 물어본 건 아니었지만, 묻지 않은 걸 얘기하는 건 하파엘의 특기였다.
차례로 이어졌다.
독일 멤버였던 시은이, 유리, 그리고 주원의 얘기까지.
남은 건 연두뿐이었다.
슥.
어느 순간 멈춘 얘기에 노엘이 고개를 돌렸다.
마주친 시선.
하파엘이 씩 웃음 지었다.
“궁금하니?”
“네?”
“연두는 어떻게 지내는지.”
살짝 벌어진 노엘의 입이 닫혔다가 다시 떨어졌다.
“네, 궁금해요.”
노엘은 솔직한 아이였다.
감정에 무딜 뿐 속마음을 숨기지는 않았다.
아직 노엘의 머릿속에는 그날의 새벽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연두와의 합주.
‘다르다고 생각했어.’
모든 게 자신과는 다른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합주를 통해 가장 커다랗게 느낀 건 동질감이었으니까.
“자, 여기.”
쿨한 노엘의 인정에 하파엘은 핸드폰을 내밀었다.
여러 장의 사진들.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기던 노엘의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 틈에 섞인 연두의 모습이.
“그대로네요.”
“연두가?”
“네.”
“그렇지! 연두는 더 예뻐졌지! 우리 레나도 그렇고, 하하!”
하파엘의 생각과 달리 노엘이 그대로라 한 건 외모가 아니었다.
눈이었다.
사진 속 연두는 전과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슥.
“여기요.”
사진을 다 본 노엘은 미련없이 핸드폰을 하파엘에게 돌려줬다.
그러나 노엘은 몰랐다.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간 순간이 있었다는 걸.
***
퇴근 후 돌아온 집.
저녁을 먹은 나는 연두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수다를 떨었다.
“아빠.”
“응, 연두야.”
“노엘.. 언제 온대요..?”
물어볼 만도 했다.
내가 전한 건 노엘이 한국에 온다는 소식뿐이었으니까.
예정대로라면 오는 건 내일이다.
‘오고 있겠지.’
아마 지금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는 중일 터였다.
허나 얘기해주지 않았다.
왜 그렇지 않은가. 예정된 만남보다는 갑작스러운 만남이 더 즐거운 법이니까.
내일은 연두의 레슨날이었다.
‘장소는 레나 집이고.’
자연히 그림이 그려졌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게 생긴 나는 연두를 향해 말했다.
“근데 연두야.”
“네.”
“연두는 노엘을 왜 그렇게 보고 싶어 해?”
말해두지만 이건 질투에 의한 물음이 아니다.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그야, 내가 알기로 독일에서 연두와 노엘의 접점이 아주 많았던 건 아니니까.
‘단둘이 얘기를 하긴 했지.’
꽤 즐겁게 대화를 나눴던 거로 기억한다.
그래서인가?
생각해보니 보고 싶을 만도 하네.
꼬꼬마 시절의 나였다고 해도, 외국에서 예쁜 친구를 만났다면 그럴 거 같다.
굳이 비유하자면 레나일까.
‘.. 좋아했을지도 몰라.’
아니, 분명 좋아했을 거 같다.
어렸을 적 나를 돌아보면 꽤나 금사빠였던 거 같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노엘은 내가 본 남자아이 중에 가장 잘생겼고 말이다.
“...”
이건 무슨 습관성 위기감도 아니고.
다행히 심장이 조마조마해지기 전에 연두가 입을 뗐다.
“노엘은…… 피아노를 진짜진짜 잘 쳐요..”
생각과는 다른 이유.
비교적 평범한 이유에 안도하면서도 한 가지 의문이 동시에 들었다.
그게 뭐냐고?
다름 아닌 노엘의 피아노 실력에 관해서였다.
‘잘 치는 건 알아.’
노엘은 무려 쇼팽 콩쿠르 우승자인 소피아의 제자였다.
그러나 제대로 들은 적은 없었다.
내가 노엘의 연주를 들은 건, 첫 만남 때 피아노를 치고 있던 찰나의 순간뿐이었으니까.
그마저도 몇 음에 불과했지.
‘심상치 않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피아노 실력을 알 수는 없었다.
그래서였다.
피아노를 잘 친다고 한다는 건, 그렇게 얘기할 만한 연주를 들었다는 소리인데.
언제일까. 연습실을 같이 쓸 때일까.
“헤헤..”
어느새 연두는 배시시 웃고 있었다.
발그레해진 얼굴까지.
지금까지의 경험상, 연두가 이런 표정을 지을 때면 무언가를 떠올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행복했던 순간을.
이제는 그냥 궁금해졌다.
“노엘이 연주하는 걸 본 적이 있어?”
역시나 연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있어요!”
그 뒤에 이어지는 말.
“같이 연주했어요..!”
“노엘이랑?”
“네.”
몰랐던 이야기였다.
심지어 더 얘기를 들으니 그 시점은 버스킹 전날 새벽이었다.
잠이 안 와서 연습실에 갔는데 노엘이 있었다는 모양.
그래서 같이 합주를 했고.
“.. 그랬구나.”
내가 몰랐던 이유도 우스웠다.
습관처럼 뱉었던 비밀이라는 말에 연두도 뿔이 나서 비밀이라고 해 버린 거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확실히 그런 적이 있었다.
내 업보였다.
‘그런 음악적 교류가 있었다니.’
이제 납득이 갔다.
생각하는 것만큼 연두와 노엘의 정서적 거리가 가까워 보인 이유를.
자연히 궁금해졌다.
과연 그날 둘의 합주는 어땠을지.
“노엘은 곧 올 거야, 연두야.”
“네에.”
역시 내일이라는 건 얘기하지 않는 게 좋을 거 같다.
그 편이 여러모로 즐겁지 않을까.
이든 모델 얘기는 한국에 온 뒤에 차차 꺼내면 될 테고.
‘환영이 먼저겠지.’
그러나 알다시피 이든 모델 후보는 노엘 하나가 아니었다.
한 명이 더 있었다.
우리의 감자소년, 선동이.
선동이에게는 미룰 거 없이 내일 바로 의사를 물어볼 계획이다.
“그럼 잘까, 연두야?”
“네.”
달칵.
꺼지는 조명.
동시에 자그마한 한 마디가 귀에 들어왔다.
“안녕히 주무세여, 아빠...”
“연두도.”
그렇게 우리는 잠에 빠져들었다.
***
다음날 오후.
방학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한 아이가 있었다.
탁!
귀갓길의 따분함을 달래주는 건 길에 가득한 돌멩이였다.
눈에 보이는 대로 걷어차면서 걸어가다 보면 어느새 집에 도착해있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흐흐.”
새어 나오는 웃음.
이 따분한 귀갓길도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이제 방학이니까.
기분에 걸맞게 마침 딱 걷어차기 좋게 생긴 돌멩이가 보였다.
빠악!
“으어억!”
냅다 돌멩이를 걷어찬 아이는 한 발로 뛰며 발을 부여잡았다.
변수였다.
잘못 차서 새끼발가락에 정통으로 부딪혔으니까.
“흐어어...”
절로 나오는 신음소리.
고통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린 아이는 집을 향해 터덜터덜 걸어갔다.
그렇다.
보기만 해도 장난기가 가득한 이 아이는 다름 아닌 선동이였다.
‘.. 다행이다.’
더 이상 발은 아프지 않았다.
멍이 들 정도로 세게 부딪힌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금세 풀이 죽은 발걸음.
요즘 들어 선동이는 자주 기분이 오르락내리락하곤 했다.
‘방학 끝나면 또 학교에 가겠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서울이 있는 초등학교에 가겠다는 선동이의 꿈은 물거품이 됐다.
어쩔 수 없었다.
거주지를 옮기는 건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선동이는 펜을 놓지 않았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이유는, 단순히 서울에 가고 싶어서가 아니었으니까.
선동이의 눈이 번뜩였다.
“내가 못 갈 줄 알고!”
하늘을 보며 소리쳤다.
언젠가는 서울에 가겠다는 목표도 꼭 이룰 생각이었다.
그리고……
“흐헤헤.”
이렇게 생각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꼭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절로 번지는 빙구웃음.
그렇게 실실 웃으며 걸어가다 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엥?”
문을 열려던 선동이가 멈춰 섰다.
들려오는 엄마 목소리.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거 같았다.
이어지는 엄마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선동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우리 선동이가 쇼핑몰 모델을요!?”
띠용 커지는 눈.
갑자기 쇼핑몰 모델이라니.
선동이 입장에서도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을 수밖에 없는 이야기였다.
‘누구지?’
전화하는 상대가 누군지도 알 수 없었다.
어쩌다 보니 선동이는 문에 귀를 딱 붙인 채로 통화내용을 엿들었다.
들려오는 건 엄마의 목소리뿐이었지만.
“어떤 쇼핑몰인데요?”
“네?”
“연두랑 시은이랑 레나가 모델로 있는 쇼핑몰이라구요?”
닌자처럼 엎드려있는 선동이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끝이 아니었다.
“이든 사장님이 쇼핑몰 남자 모델로 우리 선동이를 원하신다구요?”
“어머어머..”
“이게 웬일이야...”
엄마 말대로였다.
이게 웬일이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선동이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시골에 사는 내가.. 쇼핑몰 모델?’
믿기지가 않았다.
한 번도 현실이 꿈처럼 느껴진 적 없었는데, 처음으로 꿈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볼을 꼬집어보니 꿈은 아니었다.
심지어 같은 쇼핑몰 모델은 연시레였다.
‘.. 그럼, 만나는 건가?’
사실 선동이 계획대로라면 진작에 만났어야 했다.
원래 계획은 연두와 같은 초등학교에 입학해, 보란 듯이 전교 1등을 차지할 생각이었으니까.
그리고 얘기하는 거다.
‘뭐, 이 정도는 기본이지. 모르는 거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
이제는 실현이 불가능해진 계획이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플랜을 수정하기에는 연두가 너무 보고 싶었다.
정확히 그런 시점이었다.
멍하니 엎어져 있는 선동이의 귀에 들려왔다.
“아유.. 부담이 된다기보다는…… 우리 선동이가 모델했다가 쇼핑몰 망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
또 한 번 선동이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콧구멍도 벌렁거렸다.
황당해서였다.
‘내가 뭐가 어때서!’
거울을 볼 때 생각하곤 했다.
이 정도면 웬만한 서울 남자애들보다 잘생긴 게 아닌가 하고.
연두튜브에서도 많이 봤다.
-감자소년 왜 이렇게 귀여운데 ㅠㅠㅠ
-나만 선동이 귀엽냐.
-선동아. 까까머리 평생 유지해줘 ㅠㅠ 진짜 누나가 애정한다... ♥
-머리도 감자같다구 ㅋㅋㅋㅋㅋ
까까머리를 평생 유지할 생각은 없지만, 그런 댓글들은 선동이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기 충분했다.
좋은 일이었다.
부작용이 하나 있다면 스스로의 외모에 대해 다소 과대평가하게 됐다는 점이지만.
선동이가 콧김을 내뿜었다.
‘실망이야...’
엄마한테 진심으로 실망해서였다.
충분히 할 수 있었다.
결국 선동이는 못 참고 벌떡 일어서서 문을 열었다.
동시에 소리쳤다.
“할 수 있어!”
깜짝 놀란 엄마를 향해 선동이는 빽 소리쳤다.
“할 수 있다고! 쇼핑몰 모델!”
“서, 선동이 너……”
그 외침은 핸드폰을 통해서 그대로 전해졌다.
허나 선동이는 몰랐다.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는 또 하나의 모델 후보가 있을 거라고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