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딸 바보가 되었습니다-683화 (684/850)

683화. 딱지소년 김지호

“이, 이제부터 안 봐준다...”

성립이 불가능한 말이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한순간도 선동이는 진심이 아니었던 적이 없으니까.

오히려 그 반대였지.

타악!

“.. 윽!”

결국 다음으로 친 딱지는 완전히 표적을 빗나갔다.

“시, 실수...”

쿨하게 넘어가 보려 했지만 표정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체력 고갈.

그에 더해 반복되는 패배로 인해 정신까지 피폐해진 상태였으니까.

그런 선동이에게 남은 거라고는 오직 하나.

자존심뿐이었다.

“.. 네 차례야.”

빠악!

소리부터 달랐다.

딱지는 무려 세 번을 회전해서 바닥에 안착했다.

“...”

격차를 실감한 선동이.

그럼에도 승복하지 못한 채로 딱지치기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같은 장면의 연속이었다.

패배, 패배, 패배, 운 좋은 승리, 패배, 그리고 또 패배.

‘.. 어떡하지?’

선동이의 생각이 아니었다.

난감한 표정의 월이.

그럴 만도 했다. 아까부터 선동이오빠의 표정을 쭉 봐 왔으니까.

체구에 비해 압도적인 피지컬을 보유한 월이지만 의외로 승부욕이 높은 편은 아니었다.

운동회 때도 그랬다.

‘와아아!!’

‘남궁월! 남궁월!’

마지막 주자로 엄청난 격차를 벌리며 승리의 주역이 됐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그 뒤에 펼쳐진 장면.

상대팀 마지막 주자의 울적한 표정을 봤으니까.

‘이기는 게 꼭 좋은 건 아니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됐다.

물론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최선을 다할 거고 승리할 거라는 사실은 변함없지만.

왜냐고?

응원해주는 친구들이 있었고, 승리를 위해 함께 달린 친구들이 있었으니까.

연두네 아저씨로부터 들은 말도 있었다.

‘기뻐해도 돼, 월아.’

‘.. 네?’

‘서로 반칙 없이 최선을 다했고 월이가 좀 더 빨랐던 것뿐이니까. 그걸로 월이가 미안해한다면 오히려 그 친구도 더 불편해할 거야.’

그 말대로였다.

자연스레 월이는 승부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는 걸 알게 됐다.

꼭 이겨야 하는 승부와, 져도 되는 승부.

‘이겨야 했어.’

그에 따르면 운동회는 꼭 이겨야 하는 승부였다.

허나 지금은 아니었다.

월이의 기준에 선동이오빠와의 딱지치기는 꼭 이겨야 하는 승부가 아니었다.

자연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의문.

‘.. 우짜노.’

승부에서 일부러 져본 적은 없었다.

갑자기 딱지를 이상하게 쳐서 진다면 의심을 받을 테고.

그럼 역효과가 날지도 모른다.

빠악! 빠악!

세상 심각하게 고민하는 와중에도 승리는 계속됐다.

그때였다.

‘아!’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전에 연시레가 싸웠을 때, 셋만의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연기를 했던 기억.

그렇다.

지금 상황을 타개할 키포인트는 연기였다.

슥.

힐끗 선동이의 표정을 바라본 월이는 침을 꼴깍 삼키고 행동을 개시했다.

“.. 아야! 아야야!”

인위적인 비명.

그럼에도 혼이 빠져있던 선동이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로 고개를 들었다.

두 눈에 비치는 건 표정을 찡그린 월이였다.

“응?”

“오, 오빠야. 나 이제 더 못 치겠다.”

“그게 무슨 소리야?”

눈이 휘둥그레진 선동이.

그도 그럴 게, 이제 더는 안 되겠다 싶어서 패배 선언을 하려던 참이었으니까.

그런 와중에 펼쳐지는 돌발상황이었다.

“팔 힘이 다 빠졌다 안 하나! 더 쳤다가 손 다치면 우짜노. 내는 병원 가기 싫타!”

지우 뺨치는 발연기였지만 연기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가 있었다.

바로 사투리 때문이었다.

연기로 인한 어색함도 사투리의 일환으로 보였으니까.

꿀꺽.

선동이가 침을 삼켰다.

머릿속에 드는 의문이 없지는 않았다.

방금까지 판자가 울릴 정도로 딱지를 내리치던 것치고는 다소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으니까.

힘이 넘쳐나는 것처럼 보였는데.

‘하긴, 말이 안 돼.’

생각해보면 그랬다.

그 정도로 힘을 쓰는데 힘이 빠지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자기도 녹초가 됐는데.

그러고도 멀쩡하다면 사람이 아닌 초사이언이었다.

“.. 허.”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아빠한테 들은 말이 떠오르며.

‘아들아.’

‘응?’

‘느려도 좋으니 끝까지 달려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승리하는 거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였다.

선동이는 넌지시 입을 뗐다.

“.. 진짜?”

“응?”

“진짜 그만할 거야?”

“응, 그만할 거다! 오늘 딱지는 다 칬다!”

“먼저 포기하는 사람이 지는 건데? 그럼 월이 너, 나한테 지는 건데?”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멘트.

오늘도 최악의 멘트를 연신 갱신하는 선동이였다.

촬영하지 않고 있는 게 다행일 정도로.

아마 연두부가 이 모습을 봤다면, 선동이에 대한 호감도가 크게 하락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월이는 너무 착했다.

“응, 내가 짔다. 오빠가 이겼다. 내 딱지 다 가지가라.”

“흐허.”

그나마 양심은 있었다.

“딱지는 괜찮아. 너 가져도 돼.”

그 말과 함께 세상 쿨한 표정을 짓는 게 새삼 킹받는 포인트였지만.

타이밍 한번 절묘했다.

마침 딱지치기를 끝낸 연두와 예은이가 다가왔다.

“월아! 선동이오빠!”

연두와 예은이는 다른 의미로 자강두천이었다.

승부를 내지 못하고 다음을 기약한 상태.

예은이가 입을 뗐다.

“누가 이겼어?”

그 말에 대답한 건 월이였다.

“내가 짔다.”

화들짝 놀란 표정.

내심 월이가 이겼을 거라 확신하고 있던 게 묻어나는 표정이었다.

연두도, 그리고 예은이도.

“우아...”

어깨를 으쓱하는 선동이.

그렇게 월이의 희생으로 아무도 상처받지 않는 세계가 완성됐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한 아이가 나타난 건.

“안녕!”

우렁찬 인사.

모두가 돌아보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러자 서 있는 건 파란색 캡모자를 쓴 남자아이였다.

손에는 딱지가 들려있었다.

“딱지치기하고 있는 거지?”

“응.”

왜인지 대표로 나서야 할 거 같은 책임감에 선동이가 대답했다.

그러자 들려오는 말.

한쪽 입꼬리를 올린 표정과 함께 귀에 들어왔다.

“대장이 너야?”

도장깨기를 하러 온 딱지소년이었다.

***

작화팀 쉬는 시간.

복도 끝으로 걸어가면 바람을 쐬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장소가 있었다.

옥상 같은 장소라고 해야 하나.

잠깐 숨 좀 돌릴 겸, 우영이와 함께 이동했다.

터벅. 터벅.

걷다 보니 눈에 들어온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우영이의 표정이.

“우영아.”

그늘에 도착해서 차를 홀짝이며 말했다.

“무슨 생각해?”

“아.”

그제야 우영이는 입을 뗐다.

“아까 미팅 얘기요.”

“왜? 뭔가 신경 쓰이는 게 있어?”

“아뇨. 그것보다……”

아까 얘기의 연장선상이었다.

“표식이형이 그랬잖아요. 첫 번째 회사는 대박 아니면 쪽박이고, 두 번째 회사는 무난하게 갈 수 있다고.”

“응, 그랬지.”

“당연히 첫 번째가 끌렸거든요. 무난한 건 재미없으니까.”

나 역시 동감이었다.

재미를 떠나서 결과가 정해져 있는 것보다는 과정을 통해서 얻어내는 데서 오는 희열이 있으니까.

단지 그것만으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긴 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그런데?”

“아직도 이해가 안 가요.”

“뭐가?”

“첫 번째 거, 대박이 가능하긴 한 거예요?”

그러고 보니 아까 미팅할 때도 비슷한 말을 했었지.

우영이는 말했다.

“포로로는 애기들이 환장하니까 그렇다 쳐요. 실제로 그런 펭귄이 있지도 않고요.”

표현이 재미있었다.

환장한다는 것도 그렇고, 그런 펭귄이 실존하는지의 문제까지.

그 뒤에 이어지는 말.

“근데 아이돌은 실제로 있다 못해 넘쳐나잖아요. 그런데 굳이 실제 아이돌을 내버려 두고 게임 속 아이돌을 좋아할 이유가 있어요? 어차피 실존하지도 않는 캐릭터에 불과한데.”

게임을 하더라도 그게 추가적인 소비로 연결될 거 같지는 않다.

그게 우영이의 생각이었다.

한 마디로 대박 아니면 쪽박이 아닌, 쪽박 아니면 쪽박일 거 같다는 거다.

“저는 그냥 무작정 대박인 것도, 쪽박인 것도 싫거든요. 대박 아니면 쪽박인 걸 우리가 손을 대서 대박으로 만들고 싶은 거지.”

다시금 느낀다.

어린 마음일지 몰라도 우영이와 나는 성향적으로 무척 비슷하다는 걸.

돌이켜봐도 그랬다.

작화팀을 만들기 이전에도, 나는 성공이 보장된 게 아닌 끌리는 일을 택했다.

‘동화책 삽화도 그랬고.’

비주류 중에서도 비주류인 동화책 삽화를 그리기로 결정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재밌어 보여서.

어쩌면 나도 아직 어린 걸지도 모른다.

안전한 게 싫었다.

리스크가 있는 상황 속에서, 우리 힘으로 무언가를 쟁취하고 싶었다.

“하하하!”

그때였다.

난데없이 웃음소리가 들려온 건.

“어쩌다 보니 엿들어 버렸네요. 안녕하세요, 초록님! 우영님!”

“하하, 어서 와요.”

고개를 돌리니 보이는 건 한경우였다.

빙긋 웃으며 말한다.

“우영님, 게임 안 해 봤죠.”

“게임이요?”

“네.”

고개를 끄덕이는 우영이.

확실히 우영이가 게임을 많이 해 봤을 거 같지는 않았다.

아이돌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은 말할 것도 없고.

“제가 한동안 게임에 빠져 산 적이 있어서, 게임에 나름 일가견이 있거든요.”

“그런데요?”

“방금 우영님이 그랬잖아요. 포로로는 애기들이 환장하니까 수요가 있다고, 실제로 그런 펭귄이 있지도 않고.”

“네.”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걸까.

이어지는 말에서 바로 알 수 있었다.

“마찬가지예요.”

“네?”

“게임 속 아이돌도 마찬가지예요. 실제로 그런 아이돌은 없거든요. 만약에 그 비현실적인 요소를 잘 구현할 수 있다면……”

한경우는 씩 웃으며 덧붙였다.

“대박인 거죠.”

왠지 모르게 설득력이 있었다.

적어도 지금 여기 있는 셋 중에서는 게임에 대한 이해도가 가장 높아 보인다고 해야 하나.

여전히 우영이는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한 표정이긴 했지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요.”

그 말에 한경우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도 그래요. 그러니까 해 봐야겠죠.”

“뭘요?”

“게임이요.”

대박이 될 가능성이 있는지.

그 말을 덧붙인 뒤에 한경우는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렇죠, 초록님?”

“네.”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 프로젝트의 참여 여부는 오로지 게임 퀄리티에 달려있었으니까.

***

“대장이 너야?”

그 말에 선동이는 복합적인 감정을 느꼈다.

우선 거슬린 건 호칭이었다.

‘너라고?’

나이도 묻지 않고 다짜고짜 너라고 하다니.

예의를 밥 말아 먹은 녀석이었다.

또 하나의 거슬리는 점은 바로 한쪽 입꼬리를 올린 웃음이었다.

안 그래도 노엘의 썩소로 인해, 비슷한 웃음만 보면 PTSD가 발동하는 선동이였으니까.

“너인 거 같네. 다른 애들은……”

주위를 훑어본 딱지소년은 말했다.

“…… 전부 약해 보이고.”

그 말에 연두가 흠칫 몸을 떨었다.

약한 걸 들켜서였다.

“.. 뭐라고!”

옆에서 잔뜩 열을 올리는 예은이와 달리, 월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앉아있었다.

본디 강자는 말이 없는 법이었다.

한편 선동이는 단단히 뿔이 난 상태였다.

‘부하들까지 모욕해?”

이미 월이와의 수치스러운 승부는 머릿속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남은 건 대장으로서의 책임감뿐.

모욕당한 게 자기 혼자라면 눈 한 번 꾹 감고 넘어가겠지만 이 녀석은 선을 넘어도 제대로 넘었다.

참을 수 없었다.

“그래, 내가 대장이다.”

“훗.”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딱지소년은 판자 위로 올라왔다.

맞닿은 시선.

선동이와 마주 보고 앉은 딱지소년은 가소로운 표정을 지으며 얘기했다.

“나는 김지호다.”

“.. 오선동.”

“한 판 붙자.”

“연습게임으로, 아니면……”

선동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딱지소년 지호는 말했다.

“당연히 딱지 걸고지.”

“.. 오냐.”

대답과 동시에 판자 위에 올라가는 딱지.

지호의 딱지였다.

딱지의 외견을 본 선동이의 입이 자연스레 벌어졌다.

‘.. 뭐지, 이건?’

뭘로 접은 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심상치 않은 외견의 딱지였다.

지금껏 보지 못한 크기와 두께.

자신이 자랑하는 필살 딱지와 비교해도 밀리기는커녕 압도할 거 같은 외관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물러서기는 늦었다.

그럴 생각도 없었고.

‘반드시 이긴다.’

툭.

선동이도 판자 위에 딱지를 내려놨다.

그렇게 성사됐다.

시골의 자부심 감자소년 선동이와, 딱지소년 김지호의 물러설 수 없는 승부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