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6화. 별 보러 가자
처음에는 그랬다.
하기 싫은 숙제를 억지로 하는 느낌이었다.
원래라면 쳐다도 안 볼 게임이었지만, 일러스트를 그리게 될지도 모르는 게임을 몰라서는 안 되니까.
어찌 보면 이건 그림에 관련된 거나 다름없었다.
‘일의 연장선상이라는 거지.’
그런 생각으로 우영이는 모니터를 켜고 게임에 임했다.
기대감은 없었다.
단지 그려야 할 캐릭터에 대해 이미지를 구체화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
그런데,
“...”
어느 순간부터 머릿속에서 그런 생각이 사라졌다.
우영이는 발견할 수 있었다.
오로지 게임의 스토리에 몰입하고 있는 자기 자신을.
[나는 꼭 아이돌이 될 거야!]
게임의 시작부터 줄곧 일관되게 꿈을 이야기하는 예리라는 캐릭터가 있었다.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굳이 재능도 없는 분야에 집착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수많은 비웃음이 쏟아졌다.
예리와 달리 천재라는 평가를 받는 하예도 그런 무리 중 하나였다.
[이제 그만 포기해. 너는 내가 본 그 누구보다 재능이 없다고. 내가 하는 걸 보면 느껴지는 게 없니?]
바로 그때였다.
어떤 말에도 반응하지 않던 예리가 입을 뗀 건.
[.. 맞아.]
[뭐?]
[나는 재능이 없을지도 몰라.]
구구절절 말을 늘어놓지는 않았다.
조금 흠칫한 하예를 바라보며 예리는 묻는다.
[그런데 만약 하예 너한테 재능이 없었다면... 아이돌을 포기했을 거야?]
꿈을 포기했을 거야?
그렇게 덧붙인 뒤에 예리는 터덜터덜 복도를 걸어간다.
한동안 마우스를 쥔 우영이의 손은 멈춰있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우영은 미술에 재능이 출중한 편이었다.
게임 내에서는 하예와 비슷했다.
실제로 하예가 하듯이 재능에 대해 일침을 꽂듯이 이야기한 적도 많았다.
그래서일까.
[만약 너한테 재능이 없었다면... 미술을 포기했을 거야?]
예리의 물음은 그렇게 바뀌어 들렸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할머니가 가르쳐 준 미술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을 거다.
아무리 재능이 없어도.
재능을 뛰어넘을 정도로 노력해서 그 격차를 어떻게든 메웠을 거다.
그제야 비로소 우영은 예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타이밍에 두 가지의 선택지가 나온다.
예리와 함께 팀을 꾸릴 것인지.
달칵.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러겠다는 선택지를 고른다.
그다음이 4장이었다.
***
잘못 본 걸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아무리 봐도 평상시 아들의 표정은 아니었다.
대놓고 우는 건 아니지만 감정이 올라온 건 확실해 보였다.
“.. 허.”
자기도 모르게 유은숙은 숨을 내뱉었다.
그래서일까.
인기척을 느낀 우영이 몸을 꿈틀하더니 고개를 돌렸다.
정면으로 마주친 시선.
“.. 와악!”
아무리 우영이라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엄마가 왜 여기 있어?”
“하도 오래 안 나오길래 살아는 있나 걱정돼서 들어왔지.”
“아니, 그럼 노크를 해야지!”
“얘도 참. 일하는 데 방해될까 봐 그랬지.”
“지금 완전 방해됐거든?”
유은숙은 쩝 입맛을 다셨다.
뭐라 반박하기에는 제대로 방해한 게 맞으니까.
“미안해, 아들. 그렇게 울 정도면 중요한 타이밍이었던 거 같은데.”
우영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안 울었거든!”
“그렇다기에는 눈이 너무 빨간데. 눈물도 그렁그렁하고.”
“.. 하품해서 그래, 하품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덧붙였다.
“게임이 너무 따분해서 하품이 나오더라.”
“훌쩍이던 소리는?”
“감기 때문이야.”
“흐응.. 몇 시간 전만 해도 멀쩡했는데 코감기가 갑자기 걸렸다라...”
이쯤 되면 놀리는 수준이었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난 우영이는 엄마 어깨를 잡고 문밖으로 밀었다.
“멀쩡한 거 확인했으니까 이제 나가.”
“어머어머! 엄마한테 힘쓰는 거니, 지금?”
“아, 좀……”
간신히 엄마를 문밖으로 밀어낸 뒤에야 우영이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문을 잠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진작에 잠갔어야 하는데.
“후우...”
진한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렇게 몰입한 게 실제가 아닌 2D 캐릭터라는 사실이 뒤늦게 실감이 갔으니까.
미쳤구나, 미쳤어.
그렇게 머리를 구기던 우영이가 힐끗 모니터를 바라봤다.
중요한 순간이었다.
“...”
한동안 멈춰 서 있던 우영이가 자석처럼 모니터 앞으로 이동했다.
다시 시작됐다.
몇 시간에 걸친 대장정이.
***
[연두의 독일어 배우기!(feat. 일일 강사 노엘)]
화면에 떠오른 제목.
요즘 들어 연두튜브에 올릴 콘텐츠가 부쩍 많아진 느낌이다.
원래도 부족한 적은 없었지만.
‘뭐, 그럴 만도 하지.’
방학을 맞이해 노엘과 선동이가 와서 한층 더 풍요로워진 느낌이라 해야 하나.
독일어 강습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인지 나도 더 즐겁게 편집에 임할 수 있었다.
연두부 반응은 어떻냐고?
-이쯤 되면 노엘 한국으로 귀화해야 할 듯.
┖ㅇㅈ
┖이러다 연두튜브 안 나오면 허전할 거 같다.
┖어이, 노엘.. 다 좋은데 허용할 수 있는 건 연두의 남사친, 딱 거기까지다...
┖이분 남사친이 제일 위험한 걸 모르시네.
┖ㅋㅋㅋㅋㅋㅋㅋ
┖근데 왜 선동이 상경하라는 말은 안 함?
┖우리 선동이 안 챙겨?
┖선동아, 나는 네 편이다.. 근데 노엘이 너무 강력하긴 하다...
잘 모르겠다.
어쩌다 둘의 라이벌 구도가 만들어진 건지.
결국은 둘 다 안 된다는 게 연두부의 공통 의견이긴 했지만.
-연두 독일어 하는 거 진짜 미쳤다...
┖독일어로 사랑한다는 말 왜 이렇게 설레냐. 이치 리베 디시, 댇.
┖초록님 행복사.
┖나도 듣고 싶어! 연두가 하는 독일어, 나도 듣고 싶다고!!
┖꿈 깨세요.
┖독일어 배우러 갑니다...
-가을 촬영 개기대된다...
┖뭔가 노엘 가을옷 입으면 느낌 미쳤을 거 같음.
┖그니까 ㅋㅋㅋ 특히 트렌치코트 이런 거 입으면 분위기 지릴 거 같은데.
┖트렌치코트 입은 연두랑 투샷은?
┖사진 보는 것만으로도 극락일 듯.
┖그리고 선동이는 오열할 듯.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 선동이 지켜!!
내 생각과 비슷했다.
이든 사진작가의 관점에서도 노엘은 가을옷 촬영에서 더욱더 빛을 발할 거 같았으니까.
근거는 하나였다.
사람을 보면 떠오르는 계절이 있었다.
이를테면 연두를 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계절은 봄이었다.
‘선동이는 여름이고.’
이번 여름 촬영에서 상상 이상의 퍼포먼스를 선보인 것도 그래서겠지.
판매량도 그랬고.
그런 것처럼 노엘도 가장 잘 어울리는 계절이 있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가을이었다.
‘기대하고 있어.’
개인적으로도 무척 기대하고 있었다.
가을이 되기 전에 촬영해야 하는 게 아쉽긴 하지만 괜찮았다.
가을 풍경을 구현할 수 있는 장소가 있으니까.
‘얼마 남지 않았어.’
그 촬영이 끝나면 선동이와 노엘은 돌아가게 될 거다.
선동이는 시골로, 노엘은 독일로.
마지막을 장식할 촬영인 만큼 내 모든 역량을 쏟아부을 생각이다.
달칵.
그런 생각으로 연두튜브 창을 닫는데, 동시에 드르륵 진동이 울렸다.
핸드폰 진동이었다.
화면에 떠오른 건 단톡방에 올라온 우영이의 한 마디였다.
선우영 : 재밌네요.
입꼬리가 씩 올라가게 만드는 우영이였다.
***
“으어어...”
방 안에 울려 퍼지는 신음 소리.
다 죽어가는 소리를 내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선동이였다.
이유는 간단했다.
밀린 방학 숙제를 몰아서 하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미리 좀 해 놓을걸...’
서울에 와서 신나서 놀기만 하다 보니 방학 숙제가 잔뜩 밀려버렸다.
가장 골칫거리는 일기였다.
괜히 눈치를 본 선동이는 휙휙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오늘은 서울에 왔다. 서울에 온 건 나 오선동이 이든의 모델을……
-노엘이라는 녀석을 만났다.
-오늘은 이든 첫 촬영을……
-딱지치기를 했다. 심심해서 연두한테……
“흐흐.”
선동이는 밀린 일기를 해치우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었다.
매일 써야 하는 일기였지만, 밀려버린 이상 이렇게 쓸 수밖에 없었으니까.
서울에 와서 있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오늘의 일기.
‘뭘 쓰지?’
고민이 됐다.
밀린 숙제를 하기로 정한 날인 만큼, 특별히 한 일이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일기를 몰아서 썼다고 사실대로 적을 수도 없는 일이고.
한참 망설이던 선동이는 펜을 쥐었다.
-벌써 서울에 온 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 십오 일은 넘은 거 같다.
왜일까.
형식적으로 적어 내려간 앞선 일기들과 달리 몰입이 되는 느낌이었다.
진짜 일기를 적는 느낌이라 해야 하나.
펜을 쥔 손이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서울에서 사는 건 내 꿈이다. 포기하고 싶었던 적도 있다. 학교에서 1등을 했지만 서울에서 사는 건 안 됐으니까.
실제로 그랬다.
서울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은 공부뿐이라 생각해서 열심히 공부했지만 마음처럼 되는 게 아니었다.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미안하다는 엄마의 말, 선동이는 애써 서운한 마음을 감췄다.
-그런데 서울에 와서 다시 결심했다. 꼭 서울에서 살아야겠다고.
시골이 싫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선동이는 꿈이 있었다.
단순히 서울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 그걸 넘어서 이루고 싶은 꿈이.
-꼭 서울에서 제일로 유명한 의사가 될 거다. 그래서……
조금은 떨렸다.
이어지는 일기를 써 내려가는 선동이의 연필을 쥔 손은.
툭.
마지막 문장을 작성한 선동이는 세상 진지한 표정으로 연필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상경하자, 오선동.”
핵심은 이어지는 말이었다.
“모델로 돈을 왕창 벌어서.”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선동이였다.
***
“염병..”
창밖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말이었다.
손자 된 도리로서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러세요, 할머니?”
“여기는 어떻게 되어 처먹은 게 이렇게 맑은 날에도 별 하나 안 보여?”
“별이요?”
“그래, 별!”
아무래도 할머니가 별이 보고 싶으신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할머니 집이 있는 곳은 고개만 들어도 별이 잔뜩 보이는 동네였으니까.
와다다.
왜인지 연두는 그 말을 듣더니 방으로 달려갔다.
‘하긴, 하늘을 자주 보시긴 했지.’
시골에 갔을 때도 할머니는 자주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그게 별을 보는 거였구나.
역시나 손주 된 도리로서 가만히 있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바로 핸드폰을 꺼냈다.
“할머니, 어떤 별이 보고 싶으세요?”
“뭐?”
“별똥별, 별무리, 뭐든 말씀만 하세요. 유투브에는 없는 게 없거든요.”
“이놈의 새끼가!”
버럭 소리를 지른 할머니는 말했다.
“누가 그런 별을 보고 싶대!”
“...”
그렇게 내 어설픈 효심은 역효과를 냈다.
자연히 깨달았다.
할머니가 보고 싶었던 별은 유투브 속 화면이 아닌 진짜 별이라는 걸.
이럴 때는 가만히 있는 게 상책이었다.
잘못했다가는 머리를 쥐어박혀서 내가 별을 보게 될지도 모르니까.
할머니와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그런 별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때였다.
“.. 할머니!”
방에서 달려온 연두가 할머니를 향해 종이를 내밀었다.
배시시 웃으며.
“헤헤.. 여기여.”
“이게 뭔데?”
“별이에요! 연두가 그린 별..!”
“푸흣!”
터져버린 웃음.
역시 부녀라 그런지 나랑 연두랑 하는 생각이 비슷했다.
그려온 정성이 있으니 차마 화는 못 내는 할머니의 표정도 웃음을 자아냈고.
“됐으니까 너나 많이 봐.”
결국 할머니가 보인 건 그 정도의 반응이었다.
또르르.
서운함 가득한 연두의 표정.
안 되겠다.
이대로라면 할머니도 연두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 거 같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였다.
“준비하세요, 할머니.”
“뭐?”
“연두도.”
목청을 높여 방에 있는 선동이도 불렀다.
그 뒤에 입 밖에 뱉었다.
“별 보러 가죠.”
화면 속 별이 아닌, 진짜 별을 보러 갈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