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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바보가 되었습니다-690화 (690/850)

690화. 박치기공룡

“적당히 무시하라고. 내가 입은 옷이 너보다 훨씬 잘 팔린 건 알고 그러는 거냐?”

삽시간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단순히 말 자체가 아닌 어투만 봐도 적의를 드러내는 게 느껴졌으니까.

한국말을 모르는 노엘이지만 알 수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선동의 표정과 말투는, 지금껏 크게크게 액션을 취하던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걸.

“선동이 뭐라고 하는 거야?”

노엘은 고개를 돌려 물었다.

대상은 한국말을 독일어로 통역해줄 수 있는 줄리와 레나였다.

그러나 둘은 말이 없었다.

당연한 얘기지만 말을 알아듣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 어떻게 말해.’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으로 레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시한폭탄이 터진 느낌.

평소에는 묻지 않은 말도 전부 통역해주는 레나지만, 이번에는 도무지 전해줄 마음이 들지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노엘에게 말해줄 걸 그랬다.

그렇게 웃지 말라고.

면전에 대고 웃음을 지적하기 어려웠다는 게 가장 큰 이유는 아니었다.

사실 그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해맑게 팩폭을 날리는 건 레나의 특기였으니까.

‘친해 보였서……’

그게 가장 큰 이유였다.

선동이오빠와 노엘은 다투듯 대화를 주고받아도 싸우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노엘이 웃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발끈하는 선동이오빠와 고개를 갸웃하는 노엘의 표정을 보는 게 재미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 친구.’

둘은 친구처럼 보였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장면이 있었다.

여름촬영을 했던 날에 어깨동무를 한 채로 차 안에서 걸어나오던 선동이오빠와 노엘의 모습.

처음이었다.

누군가에게 그렇게 의지하는 노엘의 모습을 본 건.

‘.. 웃은 것도.’

연두에 이어서 두 번째였다.

누군가를 향해서 제대로 된 웃음을 짓는 노엘의 표정을 보는 것도.

레나는 몰랐다.

그게 오해의 불씨를 지필 수 있을 거라고는.

“너.. 제대로 웃을 줄 알잖아. 근데 왜 나를 보면서는 그렇게 열받게 웃는 건데. 어?”

“...”

“대답해 보라고, 좀!”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100% 맞는 얘기도 아니었다.

왜냐고?

노엘의 웃음은 모두를 향한 게 아니었으니까.

심지어 레나를 향해서도 한 번도 지은 적 없던 웃음이 선동이를 향했던 거다.

선동이오빠는 그걸 모르고 있었다.

끝이 아니었다.

‘선동은 좋은 애였어.’

‘나한테 말했어. 그러게 나를 보면서 웃어주면, 자기도 아무 말 안 할 수 없다고.’

‘내 손을 무척 꽉 잡았어. 아플 정도로.’

‘선동은 나보다 한 살이 더 많지만 말해줬어. 친구로 지내자고.’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긴 하지만, 처음 본 날에 노엘이 돌아와서 했던 말들이었다.

레나는 기뻤다.

노엘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누군가가 생겼다는 사실이.

그리고 그게 선동이오빠라는 게.

마침표를 찍은 건 얼마 전에 함께 이든 사이트에 올라온 사진들을 볼 때였다.

‘이거 봐, 노엘! 선동이오빠 표정 완전 웃겨! 흐흣...’

우스꽝스러운 선동이오빠의 표정에 웃음이 터진 레나를 향해 노엘이 뱉은 말.

그건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 레나.’

‘응?’

‘나도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을까? 선동처럼.’

영문을 알 수 없는 말.

그러나 확실한 건, 노엘은 선동이오빠를 진짜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우스꽝스러운 표정마저 닮고 싶은 부분으로 생각할 정도로.

하지만,

“귀 아파.”

지금은 아니었다.

노엘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비록 독일어긴 했지만.

“화가 났으면 흥분하지 말고 얘기해. 시끄러우니까.”

선동이를 향한 표정.

늘 짓던 썩소와 달리 이번에는 착각이 아니었다.

노엘은 자신을 향해 적의를 드러내는 걸 보고도 가만히 있을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독일에서 유리와 한 판 붙었던 것처럼.

“뭐라는 거야?”

“@%#$.”

“야, 니가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거든? 어쨌든 중요한 건 내가 널 이겼다는 거야, 멍청아. 그러니까……”

분위기가 세상 심각한 것 치고 다소 우스운 상황이 연출됐다.

통역해주는 사람은 없는데 서로 할 말만 하니.

하필이면 주원도 옷을 가지러 가서 자리에 없는 상태였다.

“너희들……”

결국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줄리가 나서려는 순간,

“그만해.”

둘을 가로막은 건 다름아닌 시은이였다.

시선은 선동이를 향했다.

“말이 심하잖아, 선동이오빠.”

“뭐?”

“유치해.”

벙찐 표정의 선동이를 향해 시은이는 재차 이야기했다.

“누가 더 잘 팔았는지, 그런 거 따지는 거 유치하다고.”

돌려 말하지 않는 시은이였다.

그 돌직구는 선동이로 하여금 올라온 감정이 더 증폭되게 만들었다.

“.. 허.”

기가 찬다는 듯 숨을 내뱉고 선동이는 말했다.

“너 못 봤어?”

“뭘.”

“쟤가 나 비웃는 거 못 봤냐고. 이게 벌써 몇 번째인지 아냐?”

“노엘은 이유없이 사람을 비웃는 애 아니야.”

“아하, 그럼 나는 비웃을 이유가 있다는 거고? 비웃음당해도 싼 녀석이다 이거지?”

“그게 아니라……”

이쯤 되니 돌이킬 수 없었다.

이미 선동이는 감정적으로 극에 치달은 상태였으니까.

“…… 잘생겨서 그래?”

“.. 뭐?”

“노엘이 잘생겨서 편드는 거잖아. 아니면 나한테만 이럴 이유가 없는데.”

입꼬리를 올리며 선동이는 말했다.

“연시은, 너 노엘 좋아하냐?”

“무슨……”

물감처럼 번지는 싸움.

연두도 차마 끼어들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격해지는 분위기였다.

그때였다.

이걸 다행이라 해야 할까.

끼익.

문이 열리고 스튜디오에 들어온 건, 양손에 옷을 가득 든 주원이었다.

***

끼익.

‘.. 뭐지?’

옷을 가지고 스튜디오에 들어왔을 때.

장내에 맴도는 정적에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제대로 느낀 건 촬영을 시작한 후였다.

찰칵. 찰칵.

“.. 흠.”

흔치 않은 일이었다.

촬영한 사진을 보며 이런 표정을 짓는 건.

아이들이 도무지 촬영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연두야. 조금 웃어볼까?”

이런 사소한 멘트조차 평소와 달랐다.

평소라면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입가에 웃음이 떠올라있는 연두였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어떻냐고?

어디선가 들어본 노랫말 하나가 떠오른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연두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그 덕에 뜻하지 않게 억지로 웃는 연두의 표정이 어떤지도 알 수 있었다.

시은이와 레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선동이랑 노엘, 같이 서 볼래?”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순서를 바꿔봤는데 이게 웬걸.

둘은 더 심했다.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는 건 둘째치고,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가까이 붙을 생각을 안 한다.

그제야 감이 왔다.

‘다퉜나 본데.’

내가 없는 사이에 둘이 다툰 게 틀림없어보였다.

잠깐 촬영을 멈췄다.

따로 줄리를 불러 얘기하니 정황을 어느 정도 전해들을 수 있었다.

발단은 노엘의 웃음이었다는 모양이다.

‘.. 그거 때문에 싸웠다고?’

하기야 집에서부터 선동이 상태가 별로 안 좋아보이긴 했지.

아픈 건 아닌 거 같은데.

이대로 지속하는 건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촬영을 접는 것도 곤란했다.

‘아직 시간은 많아.’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화해할 수 있도록 돕는 게 우선이었다.

억지로 화해하게 만드는 건 악수이다.

화해할 마음이 생기도록 아이들의 기분을 풀어주는 게 먼저였다.

‘음식만한 게 없지.’

단순하지만 확실한 수단이다.

맛있는 음식, 그중에서도 단 것만큼 기분전환에 효과적인 건 없었다.

바로 떠올랐다.

여름 하면 떠오르는 달달한 음식.

‘아이스크림.’

마침 올라오면서 스튜디오 바로 앞에 베스킨로빈스가 있는 걸 확인했다.

후딱 가서 사 와야지.

그럼 다투게 된 경위에 대해서도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을 거 같고.

“줄리.”

“네.”

“잠깐 나갔다 올 테니까 아이들 좀 부탁할게요.”

고개를 끄덕인다.

혼자 나가려는데 자그마한 손이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아빠..”

다름아닌 연두였다.

“같이 가여...”

뒤에는 시은이와 레나도 있었다.

순간 감이 왔다.

아이들이 나를 따라오려는 이유가 뭘지.

‘똑같아.’

저번과 같았다.

화해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주려는 거다.

월이와 지우, 그리고 하연이가 연시레를 위해 자리를 만들어준 것처럼.

‘.. 괜찮으려나.’

둘만 놔두는 게 괜찮을지 걱정이 들긴 했지만 고개를 끄덕이는 줄리를 보고 마음을 정했다.

줄리도 어른이니까.

만약의 경우에는 둘 사이를 적절히 조율해 줄 터였다.

서투르지만 한국말이 되기도 하고.

“그럼 빨리 갔다올게요.”

스튜디오를 나섰다.

아이스크림을 사서 돌아왔을 때, 선동이와 노엘이 화해해 있기를 바라며.

***

주원이 나간 뒤에도 스튜디오 내부는 여전히 냉전상태였다.

유리 때와 달리 노엘도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자신의 웃음이 어떤지 몰랐기에.

“...”

선동이도 마찬가지였다.

노엘로부터 등을 돌려 앉은 채로 소리없이 중얼거렸다.

“나는 잘못한 거 없다구.. 많이 참았다고...”

실은 알고 있었다.

웃음과 별개로 노엘이 나쁜 애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허나 선동이는 아직 어렸다.

“누구라도 그랬을 거라고..”

아저씨와의 약속을 어기고 쇼핑몰 판매량에 관해 이야기했다.

시은이 표현이 정확했다.

유치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

지금 선동이의 중얼거림은, 그 사실을 인정하지 못해 나오는 방어기제의 일종이었다.

“저 녀석이 잘못한 거야.”

그런데 이상했다.

아무리 그렇게 중얼거려도, 기분이 좋아지기는커녕 점점 더 침체되는 기분이었다.

당연했다.

합리화를 한다고 기분이 좋아질 리 없었으니까.

‘.. 너무 심했나?’

의식의 흐름 속에서 별안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

선동이는 고개를 휙휙 저었다.

‘절대 먼저 사과 안 해.’

한편 줄리는 그런 둘을 바라보며 고민에 빠져있었다.

어떻게 화해를 도와주면 좋을지.

그때였다.

끼익.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 벌써?’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아무리 빨라도 이렇게 바로 오는 건 이상했으니까.

그럼 누구지?

이윽고 줄리의 눈에 들어온 건 처음 보는 여자였다.

“하아! 더워 죽겠네. 에어컨 좀 빵빵하게 틀어놓지..”

또각. 또각.

귀를 울리는 구두소리.

여자는 스튜디오 내부를 훑어보더니 줄리 일행을 향해 다가왔다.

입을 뗀 건 선동이였다.

“.. 누구세요?”

그 물음에 여자는 되물었다.

“얘, 시은이는 어디 있니?”

“시은이요?”

“그래, 시은이.”

여자는 선동이를 내려다보며 얘기했다.

“내가 시은이 할머니거든.”

순간 선동이는 멈칫했다.

시은이 할머니라는 말에 방금 시은이랑 말다툼을 한 게 떠올랐으니까.

괜히 찔리는 기분.

슬쩍 시선을 피하며 입 밖에 한 마디를 뱉었다.

“곧 올 거예요.”

그 말에 윤인주의 한쪽 눈썹이 꿈틀했다.

“그런데, 넌 누구니?”

“저요?”

“그래, 너.”

“시은이 할머니인데 저를 모르세요?”

“.. 허. 시은이 할머니면 네가 누군지 알아야 될 이유라도 있니?”

말투가 왠지 모르게 기분나쁜 할머니였다.

선동이는 대답했다.

“이든 모델, 오선동입니다.”

“아……”

기억이 났다는 듯이 윤인주는 말했다.

“네가 그 시골에서 왔다는 꼬맹이인가 보네.”

이번에는 선동이의 어깨가 꿈틀했다.

시골에서 온 꼬맹이.

설마 시은이가 자신을 그렇게 소개한 걸까.

그런 오해를 하는 사이에, 윤인주는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여기는.. 독일에서 왔다는 애겠네.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노엘.”

대신 대답한 선동이는 말했다.

“어차피 걔 한국어 못해서 못 알아들어요. 노엘이에요, 걔 이름.”

“아.”

팔짱을 낀 윤인주는 턱으로 슬쩍 줄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쪽은?”

“줄리누나도 독일에서 왔어요. 그리고……”

한국어를 할 줄 안다는 말을 덧붙이려는 참이었다.

“.. 쉽지 않겠네.”

그렇게 말하며 윤인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시선이 향하는 곳은 노엘이었다.

“한국어를 못하는 건 둘째치고……”

얼굴을 향하던 시선이 내려갔다.

다리 부근으로.

그 뒤에는 선동이의 귀를 의심하게 만드는 한 마디가 이어졌다.

“다리가 이래서 어떻게 모델을 한다는 건지...”

“...”

“뭐, 하고 싶은 거 하는 건 좋다고 해도, 장애로 인해 남한테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건 모르는 걸까? 같이 촬영하려면 우리 시은이도 힘들 텐데……”

경악한 표정의 줄리.

말이 빨라서 완전히 알아들은 건 아니지만, 대충 어떤 얘기를 하는 건지는 알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뭐라 반응할 생각도 못하고 줄리는 얼어붙었다.

윤인주가 고개를 돌렸다.

“안 그러니, 꼬마야? 너도 같이 촬영하려면 힘들지 않아?”

“...”

선동이는 감정적인 아이였다.

오늘 노엘에게 날을 세운 것도, 시은이와 말다툼을 한 것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합리화를 반복한 것도.

감정이 앞서는 성향 때문이었다.

부글. 부글.

그리고 지금, 선동이는 그 어느 때보다 감정적이었다.

“.. 왜 대답이 없니?”

붉어진 얼굴.

신기하게도 그 순간에 선동이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공룡의 이미지였다.

수많은 공룡 중에서도 하나의 공룡.

둥.

천천히 발돋움을 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공룡의 형상이 선동이의 모습과 겹쳐보였다.

그렇다.

그 공룡의 이름은 파키케팔로사우르스, 다른 명칭으로는 박치기공룡이었다.

망설임따위는 없었다.

“뭐, 뭐야!”

무쇠처럼 돌진했다.

선동이, 아니 박치기공룡이.

쾅!

이윽고 스튜디오 내부에는 귀가 찢어질 듯한 비명이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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