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7화. 첫 콩쿨곡
“코피랑 피로회복에 직빵인 약 있나요?”
우연이었다.
무더운 여름에, 산책하러 시원한 스튜디오에서 나와서, 굳이 근처에 하나뿐인 약국 쪽을 향해 걸어온 건.
우연이 틀림없었다.
땀으로 젖은 눈앞의 남자를 보며 약사가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럴 만한 비주얼이긴 했다.
“그러니까 코피를 흘리셨다는 거죠?”
“네, 그런데 저는 아니고요. 저는 강해서 코피같은 건 안 흘리거든요.”
“아하. 그럼 어떤 분이..?”
“직장 동료중에 약골이 하나 있는데, 무식하게 밤에 잠도 안 자고 일하다가 코피를 쏟아서요.”
“아이고, 일이 힘든 회사인가 보네요.”
가만히 있는 주원 1패였다.
“그러니까 동료분이 코피를 흘리셔서 피로회복에 도움이 되는 약이 필요하다는 말씀이시죠?”
“네. 그거 때문에 나온 건 아닌데 산책하다 보니까 약국이 보였거든요.”
“하하, 알겠습니다.”
약사가 껄껄 웃어보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 동료라는 사람을 향한 애틋함이 느껴졌으니까.
묻지 않기로 했다.
그게 동료애인지, 아니면 다른 종류의 애틋함인지는.
“여기 있습니다. 편하게 마실 수 있어서 가장 많이 찾으시는 피로회복제인데, 수험생이랑 직장인이 특히 많이 찾으십니다. 한 번에 쭉 들이켜라고 동료분한테 말씀해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계산하고 돌아서는 한경우.
그 뒷모습을 향해 약사가 주먹을 꾹 쥐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파이팅입니다.”
“네?”
“일이요.”
씩 웃으며 한경우도 말을 받았다.
“선생님도 파이팅입니다.”
훈훈한 인사였다.
***
봉투를 들고 돌아온 한경우.
“그건 뭐예요, 경우님?”
“아이스크림이요. 산책 간 김에 샀거든요.”
“오!”
팀원들이 몰려들었다.
“자, 자. 줄 서세요, 줄!”
차례로 한경우는 아이스크림을 나눠줬다.
팀원들의 취향은 알고 있었다.
“자, 우리 우영님은 상어바!”
“감사합니다.”
찌직.
바로 봉투를 뜯은 우영이는 상어바를 입에 물었다.
최애 아이스크림이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
“악!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경우님!”
“짜잔!”
아이스크림을 본 유하나의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센스 뭐예요..”
“우리 팀원들 취향은 다 꿰고 있죠. 자, 여기 하나씨 나이에 맞지 않은 비비빕입니다!”
“치.. 비비빕 무시하지 말아주실래요?”
주원의 아이스크림은 수박바였다.
“잘 먹을게요.”
“넵!”
자연히 마지막 순번은 서도연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봉투 안에 손을 넣은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텅 비어있었다.
몇 번을 휘적여도 집히는 게 없었다.
“뭐야, 왜 내 건 없어? 아니.. 없어요?”
그 물음에 한경우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도연님 건 안 샀는데요.”
“왜요?”
“아프잖아요. 아픈 사람이 무슨 아이스크림을 먹으려 그래요.”
“아니…… 와……”
무더운 여름이었다.
스튜디오 내부는 에어컨을 빵빵 틀어놓긴 했지만, 그래도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던 참이었다.
팀원들이 전부 입에 물고 있는 지금은 더더욱 그랬고.
뼛속까지 느껴지는 배신감.
“생각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어지간해서는 삐지지 않는 서도연이었다.
우스운 일이었다.
그런 그녀를 삐지게 한 게 고작 아이스크림 하나라는 게.
툭.
홱 돌아서는 그녀의 어깨를 한경우의 손이 붙잡았다.
“.. 왜요?”
“도연님 거 안 받으세요?”
“지금.. 나 놀리세요?”
한경우의 반존대에 버금가는 설레는 반존대였다.
다른 의미의 설렘이긴 했지만.
말없이 한경우는 다른 봉투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여기, 한 번에 쭉 들이켜요.”
“이게 뭔데……”
얼떨결에 건네받은 서도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 이게 뭐예요?”
“산책하는데 우연히 약국이 눈에 들어왔거든요. 직장동료가 코피 흘리는 걸 봤는데 그냥 지나치기는 뭐해서요. 도연님은 아이스크림 말고 그거나 드세요.”
“...”
옆에 있던 최표식이 불쑥 끼어들었다.
“뭐야. 경우님 약 사러 간 거였어요?”
“예?”
“산책하러 간 건 줄 알았는데.”
흠칫 어깨를 들썩이더니 한경우가 말했다.
“하하, 표식님. 산책하는 중에 우연히 약국을 발견해서 겸사겸사 산 거죠. 아이스크림도 그렇고.”
꽤나 괜찮은 명분이었다.
이어지는 경리 유하나의 말이 없었다면.
“흐흥.. 보통 이런 ‘경우’는 아이스크림은 연막인 ‘경우’가 많지 않나요, ‘경우’님?”
경우 3연타.
매번 하나님이라 불러서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에 대한 복수의 일환으로도 볼 수 있었다.
눈썹을 꿈틀한 한경우가 말했다.
“아이스크림 반납해주세요, 하나님.”
“헉...”
한경우가 슬쩍 옆을 바라봤다.
다행히 도연은 팀원들의 장난을 별로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이윽고 벌어지는 입.
“고, 고마워요.”
다소 어색한 인사였다.
그도 그럴 게 대학생활을 통틀어 생각해도 몇 번 없었다.
한경우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적은.
꿀꺽.
한경우의 말대로 서도연은 한 번에 피로회복제를 들이켰다.
달달한 맛이었다.
그런 도연의 눈앞에 드리우는 손.
“.. 응?”
손을 내민 건 한경우였다.
“주세요.”
“네?”
“팔천 원이요.”
눈을 깜빡이자 이어지는 말.
“동료애의 측면에서 아이스크림 정도는 살 수 있지만 그 피로회복제는 다 해서 팔천 원이라구요. 빨리 팔천 원 주세요.”
처음이었다.
한경우의 행동에 감동을 느낀 건.
그 감동이 단번에 산산조각나는 순간이었다.
“아니, 누가 사 달래? 아니.. 사 달래요?”
“마셨잖아요!”
“주니까 마셨죠! 나는 이거보다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었다고요!”
“와.. 그게 신경써서 사 온 동료한테 할 말인가요? 정말 너무하시네요!”
“와, 진짜……”
“알겠어요, 알겠어.”
장난이라며 선회할 줄 알았던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한 마디가 이어졌다.
“그럼 사천 원만 받을게요...”
“푸핫!”
웃음바다가 된 스튜디오 내부였다.
***
선동이는 몰랐다.
머릿속의 선택지를 털어버리고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네는 게 최상의 시나리오로 인도했다는 걸.
실제로 그랬다.
이은경과 하파엘, 연시레, 그리고 민홍임마저도 공통된 감정을 느낀 상태였다.
선동이의 어른스러움을.
‘.. 잘 된 거겠지?’
사과를 받아줬다.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직접적으로 와닿았다.
방금 노엘이 뱉은 말은.
‘그리고, 나도 너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어.’
그 말이 끝이었다.
딱히 더 많은 말을 주고받지는 않았다.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흐흐.”
뒤늦게 곱씹어보니 최상의 결과라는 걸 깨달았다.
입가에 번지는 웃음.
그런 선동이의 귓가를 간질이는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동이오빠, 멋있었어여...”
고개를 돌리니 보이는 건 배시시 웃는 연두의 얼굴이었다.
여기는 천국인 걸까.
‘멋있다고 했어..’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귀엽다는 말과 멋있다는 말은.
뒤이어 시은이와 레나도 한 마디씩 건넸다.
“멋있었어, 오빠.”
“짱이었서!”
아이러니한 상황이었다.
사과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어른스럽다고 생각하는 연시레의 모습을 상상했지만, 그건 진정한 사과가 아니라는 생각에 떨쳐내고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넸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상상이 현실이 되어있었다.
“하, 하하!”
터져나오는 웃음.
거짓으로 사과했다면 결코 느끼지 못했을 뿌듯한 감정이었다.
***
레슨이 시작됐다.
평소와 달리 오늘 수업은 참관인을 여러 명 두고 진행됐다.
“연두야.”
“네에.”
“기억하지? 오늘 콩쿨곡을 정할 거라고 했던 거.”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공식적인 첫 콩쿠르 연주곡을 정하는 날을 잊어버리는 건 말이 안 되니까.
“힝...”
앓는 소리를 낸 건 레나였다.
“왜 그러니, 레나?”
“다음 콩쿠르는 연두랑 같이 나가고 싶었는데……”
그럴 만도 했다.
공식 콩쿠르가 무산된 뒤로 함께 콩쿠르에 나간 적은 없었으니까.
“괜찮아!”
씩씩한 목소리로 레나는 말했다.
“연두가 콩쿠르 우승하고 나서, 같이 나가면 되니까!”
“우승...”
자그맣게 연두가 중얼거렸다.
두근거리는 심장.
콩. 콩.
묘한 떨림이었다.
그런 연두의 표정을 본 이은경은 옅게 미소 지었다.
‘피아니스트의 표정이네.’
표정만 봐도 보이는 게 있었다.
어느샌가 연두의 안에는 막연한 설렘과 긴장만이 아닌, 콩쿠르 우승에 대한 열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게 의미하는 바를 이은경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었다.
“총 다섯 곡을 들려줄 거야. 연두는 그 다섯 곡을 듣고 하나를 선택하면 돼.”
“.. 하나를요?”
“응, 그럼 그 곡이 이번 콩쿨곡이 될 거야.”
중앙음악콩쿠르.
이번에 연두가 참가하는 콩쿠르로, 꽤나 규모가 큰 축에 속하는 콩쿠르였다.
자유곡 부문.
이은경이 준비한 건 그 후보가 될 다섯 곡이었다.
‘전부 다른 느낌이지.’
일부러 느낌이 다른 다섯 곡을 준비했다.
첫 콩쿠르인 만큼 연두가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곡으로 참가하길 바랐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연두가 대답했다.
“네, 선생님.”
“그럼 들어보렴.”
이은경이 첫 번째 곡을 재생했다.
흘러나오는 음악.
-Mozart “Ah vous dirai-je , Maman”
곡명을 한국말로 번역하면 작은 별 변주곡이었다.
흔히들 ‘반짝반짝 작은 별’로 알고 있는 음악이기도 했다.
익숙한 가사에 선동이의 어깨가 들썩였다.
‘뭐야, 엄청 쉽잖아.’
따라부를 수 있을 정도로 템포가 느렸다.
초등학생 콩쿠르라 그런가?
그런 다소 이른 감상과 함께, 싱겁다는 생각이 들려는 찰나였다.
“...?”
한순간 급격하게 빨라지는 템포.
괜히 변주곡이 아니었다.
여전히 익숙한 음이지만, 더는 싱겁다고 할 수 없는 음의 향연이었다.
“이게 첫 번째 곡이란다.”
“.. 네.”
“듣기에는 쉽게 느껴질 수 있지만 그만큼 강약 조절이 중요하고 완벽한 박자 트릴을 유지하면서 악상을 잘 살려서 연주해야 하는 곡이지.”
전혀 모르겠다.
그런 선동이의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하나였다.
‘이게 쉽게 느껴진다고?’
슬쩍 고개를 돌렸다.
자신과 달리 노엘은 무미건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녀석은 놀라지 않은 건가?
“그럼 두 번째 곡을 들려줄게.”
-Beethoven Rondo op.51 no.1 c-Dur
연두는 눈을 감고 들었다.
빠른 템포임에도 음 하나하나가 느껴졌다.
뒤에 앉아서 바라보는 선동이는 연신 입을 벌리고 감탄할 뿐이었다.
“다음은 세 번째 곡……”
“다음은……”
줄곧 연두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렇게 음악을 들으면 꼭 피아노가 말을 거는 거 같았다.
그에 따라 연두는 생긋 웃기도 하고, 슬픈 표정을 짓기도 했다.
자연히 그 모습은 이은경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노엘의 눈에도.
‘뭘 보고 있는 거지.’
대체 눈앞에 뭐가 보이길래 저렇게 표정이 바뀌는 걸까.
그게 궁금했다.
어느새 마지막 곡이었다.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음에 귀를 기울이던 연두가 흠칫 어깨를 들썩였다.
들려왔다.
귓가를 울리는 피아노의 목소리가.
그건 꼭 나를 쳐 달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음악이 멎었다.
그와 동시에 연두는 살며시 눈을 떴다.
두 눈에는 아침이슬처럼 아주 작게 물기가 맺혀있었다.
“그래. 어떤 곡을 칠지 정했니?”
망설임은 없었다.
이미 연두의 마음속에는 곡이 내려앉은 상태였으니까.
나비처럼.
“.. 네.”
그렇게 정해졌다.
피아니스트로서 첫걸음을 뗄 연두의 첫 콩쿨곡이.